퓨전사극? 시대극? 아니면 제3의 무엇?

‘쾌도 홍길동’을 사극으로 볼 수 있을까. 흔히 시대적 공간적 배경이 과거이기에 이를 사극으로 생각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극이라 말할 때 그 범주 안에 이 드라마도 포함될 수 있는 것일까. 요즘은 참 쉬운 말이 퓨전사극이란 말이다. 역사를 다루되 사료와는 달리 상상력이 개입된 사극을 지칭하는 이 말은, 대충 정통사극이 아닌 것을 모두 지칭하는 개념처럼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정통사극에서 한참 멀어져 있는 ‘쾌도 홍길동’도 퓨전사극으로 부르면 무방한 것일까.

‘쾌도 홍길동’에는 역사적 시점이 없다
그럴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사극이라고 지칭할 때 그것은 주로 TV드라마를 말하는 것이며, 거기에는 최소한의 역사적 실제 사건이 들어 있을 때 그렇게 불린다. 하지만 ‘쾌도 홍길동’에는 역사적 시점이라는 것이 없다. 다만 원전인 허균의 ‘홍길동전’이 임진왜란 이후의 달라진 사회분위기를 담고 있다는 데서 그 시점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드라마 상의 왕인 광희(조희봉) 또한 실제 조선의 왕을 지칭하지 않고 있으며 훗날 왕위에 오른다는 광희의 동생 창휘(장근석) 또한 그 실제인물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역사적 시점만이 아니다. 국내 최초의 코믹사극을 주창하고 있기는 하지만 자유로운 의상과 머리 스타일, 게다가 현대화된 사회의 풍경들은 이 드라마 속의 이야기를 역사적 공간의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밸리 댄스를 추는 기녀와 골프채를 든 양반, 새로 뺀 가마라며 자랑하는 인물들은 물론 그 자체로 충분한 웃음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사극으로 보기에는 좀 무리한 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경우, 일본에서 주로 사용하는 시대극이나, 코스튬 드라마(costume drama)라는 용어가 적합할 지도 모른다. 일본에서의 시대극이란 사극과는 달리 역사적 상황만 드라마 속으로 가져오고 나머지는 다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드라마를 말하며, 코스튬 드라마는 실재했던 사건을 다루지는 않고 말 그대로 당대의 의상, 관습 같은 것을 살려 현실감을 넣는데 더 무게를 둔다. 이 드라마는 또한 중국의 무협드라마와도 궤를 같이 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무협지 속의 인물들처럼 날아다니고 놀라운 내공을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보다는 그 드라마 자체가 전하려는 메시지나 스토리의 재미에 더 천착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네 토양에서 만들어진 ‘쾌도 홍길동’을 일본의 시대극이나 중국의 무협드라마의 연장선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만이 갖는 만화적 상상력과 풍자의 세계가 공존하면서 동시에 퓨전사극의 영향을 보이는 긴장감 넘치는 전개가 엿보인다. 최근 만화적 상상력을 앞세운 젊은 세대의 감성을 적극 반영하고 있는 현대극의 또 다른 버전으로 읽히기도 하는 이 드라마는 우리네 사극의 뉴웨이브가 아닐까.

기존 사극에 대한 형식적 도발
중요한 것은 용어가 아니라 왜 이런 형식을 도입했는가 하는 점이다. 어쩌면 그 속에 이 엉뚱하고 발칙한 상상력을 가진 드라마의 존재이유가 숨어있지 않을까. ‘홍길동전’이라는 원전이 가진 도발적이고 세태 풍자적인 시선은 실로 당대로서는 분명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바로 이 혁명적인 시선은 지금 시대에 다시 만들어진‘쾌도 홍길동’에게도 똑같이 변화를 요구했을 터. ‘쾌도 홍길동’은 그저 웃기기만을 위해서 사극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배꼽춤과 섹시춤을 연출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기존 사극에 대한 형식적인 도발이다.

이 드라마는 천편일률적인 사극 속의 멋진 척, 예쁜 척 하는 캐릭터들을 전복시킨다. 홍길동(강지환)은 주색잡기에 빠진 한량이며(물론 이것은 다 위장이지만), 허이녹(성유리)은 덜떨어진 듯한 말괄량이다. 스승은 전혀 스승처럼 보이지 않고 제자도 전혀 제자처럼 보이지 않는다. 왕이란 자는 색주가처럼 차려진 별궁에서 기생들과 놀아나고 도적들과 기생들은 웬일인지 사연 있는 착한 사람들처럼 그려진다. ‘권력의 핵심’이라 스스로 일컫는 서윤섭(안석환)은 오히려 도적처럼 보이며, 그 사대부가의 딸은 자신이 기생으로 오인되어도 홍길동을 만날 수 있다면 기꺼이 수긍하는 당대로서는 놀라운 인물이다.

이러한 캐릭터들의 행보를 더욱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 현대적인 영상 연출 때문이다. 분할화면으로 홍길동과 그의 사부인 해명스님(정은표)이 각각 허이녹과 허노인(정규수)에게 자신들의 사제지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장면은 그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러한 형식 실험이 주는 유쾌함과 통쾌함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 그것은 기존 사극들이 가진 엄숙주의를 한껏 풍자하는데서 비롯된다. 한없이 무겁고 비장하기까지 한 사극들에 대한 발칙한 상상력의 도전장을 내미는 이 드라마는 그래서 한참 보다보면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왜 좀 다르게 생각하고 상상하면 안 돼?” 물론 거기에 대한 대답은 “된다”는 것이다.

퓨전사극, ‘300’의 역사논쟁
영화 ‘300’에 대한 간략한 스포일러. 다가오는 페르시아의 100만 대군 앞에 맞서는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제라드 버틀러). 그들의 숫자는 불과 300명. 팬티 하나에 망토 하나씩 걸친 그들이 가진 것이라곤 창과 방패, 헬멧 그리고 칼이 전부다. 시간적으로는 단 3일이며 공간적으로도 영화는 테르모필레 협곡이라는 천혜의 요새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300’의 단순한 줄거리다.

그런데 이렇게 줄거리를 다 얘기해도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건, 이 영화가 스토리를 보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이런 역사적 사실을 각색한 스토리는 하나의 장을 마련해줄 뿐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역사보다는 재미이며, 멋진 대사보다는 그림 같은 액션이고 스토리보다는 근육이다. 그러니 아무리 스토리를 백 번 얘기하고, 역사를 들춰보는 것은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봐야 안다. 그것도 꼭 대형스크린으로.

재미가 된 역사, ‘300’
우리에게 ‘주몽’이 있다면, 저들에게는 ‘300’이 있다. 스케일에서도 이야기에서도 전혀 다른 이 두 작품을 한 문장 안에 쓸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둘 다 퓨전사극이라는 것. 퓨전사극, ‘300’에서 역사는 재미가 된다. 실로 수많은 해석을 낳았던 테르모필레 협곡 전투에 대한 장황한 이야기들을, 영화는 영화 속에서 마치 스파르타인들이 이성적이라는 아테네인들을 졸장부나 심지어는 남색가로 불러대는 것처럼 영화 밖으로 밀어낸다. 레오니다스 왕이 페르시아의 사신을 끝을 알 수 없는 우물 같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을 때부터 역사나 해석 따위 역시 그 속으로 밀어 넣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살과 살이 부딪치고 뼈와 피가 난무하는 하드코어 폭력의 세계다. 창이 날아갈 때마다 페르시아인들의 몸은 꿰어지고 칼이 날아갈 때마다 두 조각이 나버린다. 피는 비처럼 쏟아지고 때론 꽃처럼 흩날린다. 이것은 하나의 게임을 보는 것 같다. 뇌 속에 있는 자판과 마우스를 움직이면 거기 거대한 모니터 속에서 피칠갑을 한 시체들이 쌓여간다. 헤비메탈 기타 음이 울려대며 전사들의 아드레날린이 과부하되어 호흡이 가빠질 때, 그걸 보는 이들은 캐릭터와 접속되어 함께 숨을 할딱거리게 된다. 역사? 그런 건 불끈불끈 솟아나 있는 300개의 근육들과 왕자 복근들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영화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재미는 ‘300 : 100만’의 대결. 게임에서는 본래 아군은 적을수록 적군은 많을수록 좋다. 그래야 혼자서 해치울 수 있는 적이 많아지는 법이니까.

퓨전이 도를 넘을 때, 시작되는 논쟁
이 역사를 뒷전으로 한 채 스타일리스틱한 재미에 몰두하는 퓨전사극에서 갑자기 역사논쟁이 불거지는 지점은 상상력이 역사적, 혹은 현실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순간이다. 1차 전투에서 방패전술(여러 명이 방패를 덧대 하나의 방패처럼 싼 뒤 적을 밀쳐내고 창으로 공격하는 전술)이 스파르타식의 리얼한 전투장면을 끌어온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후에 이어지는 괴물 같은 임모탈의 등장은 피 튀기는 전장을 본 뒤 잔뜩 흥분된 관객의 감정적 기반 위에서는 그럴듯할지 몰라도 그 흥분 속에서도 바위처럼 냉철함을 잃지 않는 레오니다스 왕 같은 관객이라면 좀 생뚱맞게 느껴졌을 것이다. 심지어 이 부분에서 사극은 환타지와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 같은 아슬아슬함을 연출한다. 그런데 이런 장면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것들이다. 퓨전사극 ‘주몽’을 통해 보여졌던 환타지 같은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상상력이 도를 넘어서 불가능을 보여줄 때 논쟁은 불거질 수밖에 없다.

이란에서 이 영화에 대해 서명운동까지 펼쳐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들은 영화에서 보이듯이 괴물이 아니니까. 게다가 자신들이 괴물이 된 이유가 레오니다스라는 영웅을 만들기 위한 것이란 점에서는 분노마저 느꼈을 법하다.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이라고?
여기에 대한 제작사측의 답변은 ‘영화는 영화일 뿐 다큐멘터리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총괄한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을 영화화한 오락영화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프랭크 밀러의 전작, ‘신 시티’를 로드리게즈가 영화화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이 영화의 감독 잭 스나이더도 만화의 장면을 하나하나를 프레임으로 옮겨왔다. 영화적 문법을 무시하고 프랭크 밀러의 작품에 모든 걸 헌사하자 영화는 새로운 형태의 맛을 띄게 되었다. 만화 같은 영화. 하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인 영화.

프랭크 밀러는 자신의 작품에 정치적인 담론을 담아내는 작가로 유명하다. 이것은 “코믹스는 현실 밖의 세상을 더 현실화시킨 것”이라는 그의 말에도 나타난다. 그가 테르모필레 협곡 전투를 모티브로 삼았을 때부터 그것은 이미 역사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특히 이 전투가 갖는 상징성, 예를 들면 ‘동ㆍ서양의 충돌’에서 300명의 스파르타인의 영웅적 전사가 가져온 세계사적 의미 같은 것들에 잔뜩 호들갑을 떠는 서구인들임에야 오죽할 것인가.

그들은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역사적인 전투라는 배경이다. 이 배경은 주어진 것이고 사실 영화가 보여주려는 세계와는 하등 상관없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없다면 이 영화는 말 그대로 ‘폭력의 하드코어’로 불려질 수밖에 없게 된다. 만일 그게 목적이었다면 애초부터 역사적 배경 따위는 집어치웠어야 옳다.

퓨전사극이 갖는 환타지의 위험
이러한 퓨전사극에 대한 비판에서 우리는 자유로울까. ‘주몽’이란 퓨전사극이 보여주는 역사왜곡, 예를 들면 고구려를 부각하기 위해 부여를 왜곡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주몽’이나 ‘300’에서 드러나듯이 퓨전사극은 그 재미에 있어서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그것은 바로 환타지다. 하늘에게서 나라를 세우기 위해 계시 받은 인물이나, 괴물들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맞서 이기는 헤라클레스에 대한 환타지는 또한 그것 때문에 치명적인 위험성을 내포한다.

‘300’. 살점과 피의 향연은 아드레날린을 자극하고 그 미학적인 인물의 동선들은 예술적인 차원으로까지 폭력을 끌어올린다. 영화적으로 보면 분명 이 영화는 충분한 미적 가치를 갖고 있다. ‘주몽’의 환타지를 귀엽게까지 느껴지게 만드는 이 영화의 치밀함은 그래서 더욱 무섭다. 환타지를 현실화하기 위해 300인의 연기자들을 지옥훈련 시키고, 의상 하나를 찾기 위해 전 세계를 뒤지며, 하나 하나의 프레임에서 구현해낸 완벽한 CG는 물론이고 병사들의 동선을 리얼하게 찍기 위해 감독조차 병사들 사이에서 구르고 뛰어다니며 만든 이 영화가 그래서 두려워진다. ‘역사가 아닌 영화일 뿐’이라고 하지만 헐리우드가 영화를 통해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이다.

역사와 재미 사이에 선 퓨전사극

‘드디어 ‘주몽’이 막을 내렸다. 35주 연속 주간시청률 1위를 기록하고, 시청률 50% 넘겨 또 한 편의 국민드라마가 된 ‘주몽’. 그러나 ‘주몽’은 그런 성공 이면에 다양한 숙제들을 남겼다. 그 문제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바로 퓨전사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다.

‘주몽’만큼 퓨전사극이 가진 장점들을 잘 활용한 드라마가 있을까. 과거 ‘다모’, ‘상도’, ‘허준’, ‘해신’ 등에서 그 새로운 사극의 묘미를 맛보게 해주었던 퓨전사극은 ‘주몽’에 와서 그 정점을 이룬다. 이것은 퓨전사극의 중흥을 이룬 최완규(허준, 상도), 정형수(상도, 다모), 정진옥(해신)이란 작가들이 ‘주몽’이란 한 작품에 모두 모여있다는 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주몽’은 이들 작품들의 요소들, 예를 들면 ‘상도’의 상단 이야기, ‘해신’의 해적이야기 같은 유사한 소재들이 혼재되어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소재들은 마치 우리가 환타지 소설하면 알아야될 코드들(엘프나 골렘 같은 종족이나 그들의 특성 같은)처럼 이제 퓨전사극의 코드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최근에는 사극하면 당연히 퓨전사극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몽’ 마지막 회, 한나라군과 벌이는 요동벌 전투에서 하늘로 솟구쳐 날아올라 황자경에게 칼을 내리치는 장면은 과거라면 도저히 상상도 못할 장면이었다. 갑자기 환타지나 무협지가 된 듯한 그 장면을 그러나 이제 시청자들은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것 같다.

이런 경향은 ‘주몽’이란 작품 속에 무수히 나타난다. 비금선 신녀의 출현이나 주몽을 저주하기 위해 제를 올리던 부여의 마우령 신녀가 번개에 맞아 죽는다는 설정 같은 건 아무리 퓨전사극이라 해도 사극의 틀을 너무 벗어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래도 사극을 표방하는 작품 속에서 재미를 위해 진지함을 잃어버린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주몽’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최근의 ‘연개소문’을 보면 뜨거운 불길 속에서도 기를 끌어 모아 태연히 불을 뚫고 나오는 연개소문의 모습이 등장한다. ‘주몽’만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과장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대조영’은 그나마 진지한 사극의 틀을 온전히 유지하려 애쓰는 작품으로 보인다.

드라마적 재미를 위해 어느 정도의 ‘퓨전’은 어쩌면 당연한 대세인지도 모른다. 무협, 환타지, 게임 등으로 달라진 시청자들의 마인드는 오히려 퓨전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확실한 ‘퓨전’을 보여준 ‘주몽’은 재미있다. 우리가 신화와 역사를 통해 보았던 무표정한 인물들은 드라마로 퓨전되면서 톡톡 튀는 개성적인 인물로 재탄생되었다.

주몽, 소서노, 금와, 대소, 유화부인, 오이, 마리, 협보 등등, 이제는 역사서를 보면서 바로 이 수많은 캐릭터들의 얼굴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들이 엮어내는 고구려라는 국가의 탄생은 당대 주몽과 유민들처럼 시청자들의 바람이기도 했다. 우리는 주몽이 한나라를 몰아내고 하나의 국가를 탄생시키는 그 장면을 보기 위해 끝없이 채널을 고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잦은 완성도에 대한 논란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시청률과 논란의 상관관계는 퓨전사극이 가진 재미와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주몽’이 처음 직면한 문제는 역시 퓨전사극의 가장 큰 문제인 역사고증 논란이다. 우리의 눈을 화려하게 사로잡은 등장인물들의 의상이 중국풍이며 건축물도 조선시대 양식이라는 점. 철기라는 게임의 레벨적 장치로 사극 전체의 재미를 끌어낸 드라마 도입부의 설정, 즉 한나라의 철기문명에 멸망한 고조선의 설정 역시 거짓이라는 점. 퓨전사극으로서 인물간의 멜로 구도를 만들기 위해 설정된 주몽과 소서노, 예씨 부인의 삼각관계 역시 지나친 설정이라는 점 등이 그것.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부여와 고구려의 관계에 대한 왜곡이다.

부여와 고구려의 관계를 지나치게 대결구도로 만들었다는 것은 고구려 건국이라는 이 드라마의 목표를 위해 부여라는 역사를 희생시켰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게 만든다. 역사 속에서 부여는 고구려를 잉태한 모(母)국가 역할을 했고, 또한 온조가 세운 백제도 성왕 시절 수도를 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했을 정도였다. 부여의 부정은 아무리 퓨전사극이라 해도 지나친 것이라는 게 학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특히 ‘주몽’이 최초의 고구려사극이라는 점에서 그 부정적인 영향은 대내외적으로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밖에도 스케일 문제와 환타지 역시 퓨전사극이라는 미명 하에 벌어진 일이었다. 만일 정통사극을 주창했다면 고작 십수 명의 별동대로 수만의 한나라군과 맞서는 장면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해 비금선 신녀가 등장하면서 불거진 ‘신물3종세트’논란은 ‘주몽’이 가려던 환타지사극의 실체를 보여준 것이었다. 이후 논란이 점점 거세지자 후에는 결국 슬그머니 사라져버린 신물에 대한 이야기는 ‘주몽’의 목적이 점점 시청률쪽으로 선회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청률에 대한 집착은 결국 우리에게 사상 유례 없는 주인공 없는 사극을 2회에 걸쳐보게 만들었다.

이런 시청률 지상주의는 결국 퓨전사극이 가진 함정이기도 하다. 사극에서 역사가 중심이 되지 않고, 재미가 중심이 되자 결국은 작품성보다는 시청률에 더 치중하게 된 것이다. 어찌 됐든 ‘주몽’은 우리에게 고구려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사극임에는 틀림없다. 거기에는 퓨전사극이 갖는 재미의 요소가 가장 큰 몫을 차지했다. 그러나 바로 그 재미라는 것 때문에 모처럼 나온 고구려사가 왜곡되고 재단된 것 또한 사실이다. 드디어 ‘주몽’은 끝났으나 문제는 여기부터다. 역사 자체도 재미거리로 변형시키는 강력한 퓨전사극의 맛을 보여준 ‘주몽’은 이후의 사극에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역사냐 재미냐 양날의 칼을 쥐고 있는 퓨전사극의 숙제다.

퓨전사극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역사를 날 것 그대로 꺼내 보여준다면 재미있을까. 예상은 부정적이다. 그래서일까. 역사에 상상력의 날개를 달고 퓨전사극이 각광받는 시대가 됐다. 퓨전사극의 계보는 과거 ‘다모’, ‘대장금’, ‘해신’ 등에서부터 내려오고 있지만 최근 열풍의 진원지는 역시 ‘주몽’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주몽’이라는 강력한 민족적 자긍심을 자극하는 소재에, 역사라는 무거운 갑옷을 벗고 더 전개가 자유로워진 퓨전사극이라는 형식이 맞물린 결과다.

결과적으로 시청률면에서 승승장구한 주몽은, 최근 연장방영에 대한 논란들마저 연착륙시켰다. 이례적으로 MBC 신종인 부사장은 인터뷰를 통해 “그간 거듭돼온 방송사의 고무줄편성에 대한 시청자들의 우려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며, “주몽 만큼은 끝까지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각인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인터뷰가 나온 지 채 1주일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른바 ‘신물 3종 세트’가 논란이 되면서 ‘주몽’은 “이러려고 연장했냐”는 누리꾼들의 비판에 직면해있다.

드라마 ‘주몽’은 시청률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미 스케일 문제나, 단편적이고 자극적인 억지설정, 고구려 건국보다는 부여패망에 더 집중되어 있는 듯한 전개구성 등등 완성도에 있어서 수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그런데 이번 이 문제로 인해 ‘주몽’은 완성도의 비판 위에 그 정체성까지 의심받게 되었다. 그것은 과연 이 드라마를 더 이상 사극으로 봐야하는가의 문제다.

환타지 같은 전개와 환타지 그 자체는 다르다
‘주몽’이 시작과 함께 호평을 받은 것 중 하나는 그것의 전개가 게임이나 환타지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게 유사한 재미를 준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주몽’은 그 배치된 인물과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거의 롤플레잉게임을 닮았다. 시작부터 완성된 영웅이 아닌 단계적으로 미션을 완수하면서 업그레이드되는 영웅, 점점 강한 아이템을 얻어 가는 과정, 반지의 제왕을 연상케 하는 갑옷들 등등 그런 것들은 실제 게임과 환타지를 즐기는 젊은 시청자들의 입맛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그것이 과도했던 걸까.

최근 비금선 신녀의 갑작스런 출연과 그 출연과정에서 보여준, 사극이라 하기엔 과도한 환타지적인 요소, 게다가 그녀가 주몽에게 제시한 “다물활 이외의 남은 두 개의 신물” 발언은 지금까지 위태롭게 유지해왔던 사극의 틀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과거 ‘주몽’의 환타지적인 요소를 굳건히 사극의 틀로 붙잡아두고 있던 인물들은 여미을을 중심으로 한 신녀들이었다. 그것은 과거 신권과 왕권이 혼재된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역사 속 실재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왕자들간의 경합에서 나온 다물활 에피소드는 여미을 신녀의 신탁만 있었을 뿐, 실제로 다물활의 어떤 환타지적인 능력을 보여준 바는 없다. 이것은 전부 여미을 신녀가 하는 말을 통해 그 상징적 의미가 전달되었던 것이다. 또한 일식이 일어나는 에피소드에서 역시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사건 위에 여미을의 예언이 힘을 발휘했기 때문에 여전히 환타지가 아닌 사극의 범주 안에 놓일 수 있었다. 그러나 여미을이 죽고 사라져버린 예언의 힘 때문일까. 비금선 신녀의 갑작스런 등장(그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빛과 연무에 휩싸인 화려한(?) 등장)은 그 선을 넘어버렸다. 게다가 그 신녀의 목적은 새로운 신물을 찾으라는 퀘스트의 제시이다. 이로써 ‘주몽’은 환타지적인 전개와 환타지 사이에서 하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넘어버린 격이 됐다.

퓨전사극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과거에 이런 문제가 나올 때마다 드라마 제작자들이 숨는 지점은, ‘이 드라마는 퓨전사극’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퓨전사극의 한계는 어디까지를 두고 봐야 하는 것일까. 퓨전사극이 주목받는 시대라 마치 정통사극은 역사, 그 자체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물론 사극 역시 역사가 아니다. 말 그대로 역사를 극화한 것이 사극이기 때문이다.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왜곡이 아닌 이상 대세에 지장이 없다면 사극으로 수용되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퓨전사극으로 넘어가면 이건 좀더 복잡해진다. 그 한계를 어디까지 두어야 사극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점 때문이다. 아직까지 여기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잣대는 상식뿐이다.

상식적으로 우리는 ‘삼국지’를 창작물로 생각하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역사 자체가 상상의 산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수호지’의 경우에는 조금 다를 수 있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가상으로 설정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역사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을 법한 개연성을 갖고 있다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서유기’는 다르다. 이것은 역사를 넘어서 완벽한 가상의 세계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지’와 ‘수호지’가 역사소설에 가깝다면 ‘서유기’는 환타지에 가깝다. 이 역사소설과 환타지 사이가, ‘주몽’이 지금까지의 여타 사극들과 다르게 위치한 지점이다.

과거에도 ‘소금산 에피소드’에서 ‘주몽’은 이 서유기적인 면모를 보인 바가 있다. 드라마 인물들의 유기적인 전개가 이루어진 결과가 아닌, 신탁에 의해 준비되어진 결과는 시청자들을 실망시킨다. ‘주몽’의 사극제작에 있어서‘사료가 없다’는 것은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상식을 넘어서는 공상이나 환상이 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저 무협영화에서 주인공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볼 때 처음엔 즐거웠으나, 차츰 ‘날아다니지 못하면 바보 되는 주인공들’에 식상해진 경험이 있다. 퓨전사극은 여전히 사극이며 환타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극으로 기대하고 있던 드라마가 그 경계를 넘어버릴 때 시청자들은 사극의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허공에 붕 뜨게 된다. 퓨전사극처럼 그것이 땅이 아닌 허공에 매달린 줄이라고 해도, 떠오른 몸은 다시 줄로 내려앉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 한 판 줄타기의 소재가 어느 시대나 한두 번쯤 나올 수 있는 그런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는데 있다. 이건 우리 모두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오던 그 신화적 인물, 주몽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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