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프로그램, 무엇이 공익일까

이른바 공익 예능프로그램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1박2일’은 애초 기획의도에서부터 일정부분 공익성을 담고 있었다. 바로 우리네 관광자원의 발굴과 오지에 대한 조명 등이 그것이다. ‘무한도전’은 초기 도전을 통한 성장 버라이어티로 시작해서 점점 성장의 정점에 이르자, 그 도전의 공익적 성격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도전하는 국내 봅슬레이팀들을 위해 그 스포츠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이나, 한식의 세계화를 위해 뉴욕으로 달려가는 것, 혹은 각종 사회적 이슈들은 소재 속에 녹여내는 방식은 ‘무한도전’ 특유의 공익을 보여준다.

‘천하무적 야구단’은 전형적인 스포츠 버라이어티지만 사회체육의 활성화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야구라는 스포츠의 저변을 알리는 측면에서도 그 공익적인 성격을 무시할 수 없다. 야구협회측에서 이 예능에 적극적인 지원을 해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청춘불패’ 같은 신생 버라이어티쇼 역시 대단히 공익적이다. 아이돌 걸 그룹이 유치리라는 작은 동네에 정착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실제로 이 동네 분들을 위해 일하고 봉사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쌀집 아저씨, 김영희 PD 체제로 다시 돌아오는 ‘일요일 일요일 밤에’도 거의 전면에 공익을 내세웠다. '대한민국 생태구조단 헌터스'는 개체수가 늘어난 멧돼지를 어떤 방식으로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의 불씨가 남아있지만 결국 주창하고 있는 것은 생태 살리기라는 공익이다. 이것은 고개 숙인 우리 시대의 아버지 기 살리기라는 미션을 통해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담을 것이라는 '우리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또한 '단비'는 여기서 한 차원 더 나아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다른 나라에서 봉사하는 공익 버라이어티를 표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공익을 내세운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 또한 만만찮다. 도대체 예능 프로그램에서 무엇이 공익인가 하는 점이 그 질문이다. 무언가 출연진들이 감동적인 일을 하고, 사회에 봉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공익일까. 혹자들은 이러한 공익이 전면에 포진한 예능 프로그램에 진저리를 치기도 한다. 예능에서의 이른바 억지 춘향식의 감동은 때때로 역풍을 맞기도 한다. 한 마디로 웃기기나 잘 하라는 얘기다. 이러한 관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예능 프로그램이 줄 수 있는 최대의 공익은 웃음”이라는 것이 이 관점을 대변해주는 문구가 된다.

그런데 이 말은 언뜻 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지만, 한 번 더 깊게 생각해보면 또 다른 관점으로도 읽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예능의 최대 공익이 웃음’인 것은 맞지만, 그 웃음에도 다양한 층위가 있다는 점이다. 그저 웃기기만 하려고 갖은 자극적인 방법들만 끌어 모은 예능을 가지고 우리는 공익을 운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때론 진정성이 있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이 주는 훈훈한 웃음이라는 층위는 분명 인정해줘야 할 대목이다. 그러니 ‘예능의 최대 공익이 웃음’이라 주장한다면, 그 웃음이 과연 공익에 맞는 진정성을 담고 있는가를 들여다 봐야할 것이다.

혹자는 과거 공익을 내세운 예능 프로그램들이 가져왔던 부작용들을 언급하면서 섣부르게 예능이 공익을 추구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무책임한 짓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예능의 목적이 결국에는 공익이 아니라 웃음이기 때문에, 어떤 도움을 주었다고 해도 그것이 결국에는 일회적인 것에 머물러 오히려 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한다는 시선이 담겨있다. 즉 감동적인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처음에는 뭐든 다 줄 것처럼 포장되어 방송이 되지만, 방송이 끝나고 나면, 일정한 웃음과 감동을 가져간 프로그램들은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사후관리가 되지 않는 부작용으로 나타나게 된다. 감동이 주는 카메라 앞과 뒤의 온도차는 이처럼 크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에도 또 다른 시각은 존재한다. 즉 초창기 공익을 주창한 예능 프로그램들은 그 낯선 시도 위에서 문제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는 얘기다. 디지털 혁명으로 열려진 매체 환경 속에서, 그것도 리얼을 주장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공익의 사후관리를 등한시 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1박2일’ 같은 경우, 한 번 방문해 인연을 맺은 지역주민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주기도 하고, ‘청춘불패’ 같은 프로그램은 아예 한 곳에 정착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는 아예 발생할 수가 없다.

진정성이 있는 웃음을 주는 것인가, 아니면 그 웃음 속에 사회 참여적인 부분들을 포함시켜야 하는 것인가. 예능 프로그램의 어떤 것이 공익인가 하는 문제는 제작자들이 갖는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정답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대중들이 어느 쪽에 더 공감하느냐가 이 공익 예능에 대한 앞으로의 방향을 열어줄 것이라 생각된다. 확실한 것은 예능이 공익을 얘기할 정도로 과거와 그 위치가 확연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그 공익이 어떤 것인지는 차치하고라도, 프로그램이 공익적인 부분까지 들여다보고 실제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어쩌면 이제 예능 또한 가져야 하는 책무가 되고 있다.

'1박2일', 예능의 판타지와 현실을 모두 담아내다

비행기를 타고 또 배를 타고 그것도 모자라 버스를 타고 들어간 거문도. 실로 걷던 이를 멈추게 할 만큼 아름다운 거문도 등대에서 바라보는 풍광. 그 풍광 아래서 한바탕 포복절도의 복불복을 하는 멤버들. 아마도 이 카메라 앞에서의 장면만을 보여주었다면 그들의 '1박2일'이 어쩌면 일반인들을 꿈꾸게 만드는 판타지로 다가왔을 지도 모른다. "저렇게 놀면서 돈 벌면 참 좋겠다." 혹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지도 모른다. "저희들끼리 웃고 떠드는 걸 왜 우리가 보고 있어야 하지?"

하지만 적어도 '1박2일-거문도 등대'편을 본 시청자라면 적어도 이런 얘기는 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차가 들어가지 않는 거문도 등대에서의 촬영을 위해 8톤이 넘는 짐을 손수 이고 지고 나르는 그 장면이 카메라 앞의 판타지에 숨겨진 뒤편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광경에서 '예능고도'라는 자막은 꽤 적절하다. '차마고도'의 이국적인 그 풍광들 뒤에는 그 아름다운 장면을 잡아내기 위해 때론 목숨을 거는 제작진들의 지독한 현실이 있다.

"이건 말도 안돼." 그들이 무거운 짐을 낑낑 짊어지고 가면서 쏟아내는 이 말이 아마도 대부분의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현실일 것이다. 이것은 '1박2일'처럼 야생을 표방하며 전면에 생고생을 내세우거나 '무한도전'처럼 매번 힘겨운 도전에 직면해야 하는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물론이고, '패밀리가 떴다'처럼 가족적이고 즐거운 여행을 표방하는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대부분의 현장으로 나가는 리얼 예능 프로그램들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런데 왜 그들은 이렇게 생고생을 하는 걸까. 그들이 하는 이른바 미션이라고 하는 것들은 물론 실제적인 것도 있지만, 때로는 허무맹랑한 것들도 있게 마련이다. '1박2일'이 오지로 여행을 떠나고 그 곳의 풍광을 소개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지만, 심지어 끼니를 거르거나 하룻밤 노숙을 해야 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복불복은 그 자체가 어떤 실제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목적은 단 하나, 재미다.

과거적인 노동의 가치관이라면 이 재미와 즐거움에 목숨을 거는 프로그램이 이해가 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1박2일'이 보여주는 세계는 이른바 '드림 소사이어티'의 징후를 그대로 그려낸다. 우리는 무형적인 즐거움을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니 이것은 기본적으로 즐거움과 웃음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들이 갖고 있는 이중적인 모습이다. 그 앞에서는 웃음이 넘치지만 그 뒤편을 보면 땀과 눈물이 배어있다.

하지만 그 괴리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종종 우리는 앞면이 전부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특히 '리얼'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기 때문에, 앞면 그 자체만이 실제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 앞면의 즐거움은 때론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논란의 심정적인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1박2일-거문도 등대'편이 의미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예능의 뒤편을 프로그램 속으로 잘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복불복이라는 예능적인 재미와 그 재미의 결과로서 그 즐거움을 만들어내기 위한 "말도 안되는" 제작진들의 노고를 직접 체험하게 한 점은 그래서 실로 절묘하다 할 수 있다.

'1박2일'이 리얼 예능으로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그저 운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다. 리얼 예능이란, 리얼이 갖는 고통과 예능이 갖는 즐거움이 모두 공존하는 형식이다. 리얼 없는 예능은 진정성의 비판을 받기 마련이고, 예능 없는 리얼은 재미라는 예능의 근본을 저버렸다는 비판을 받게 마련이다. '1박2일'은 바로 이 리얼과 예능, 즉 예능의 앞면과 뒷면의 모든 모습들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 1인자의 위치에 설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김C와 김성민, 예능에 리얼을 입히는 그들

확실히 예능은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 남들은 웃기려고 안달복달 예능을 하려 할 때, 오히려 진지한 얼굴로 다큐해서 호평을 받는 시대니 말이다. 그 새로운 시대의 징후처럼 서 있는 인물이 바로 김C다.

그는 강호동이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가며 "시베리아 야생 수컷 호랑이~"를 연발할 때도, MC몽이 발군의 예능감을 살려 몸 개그를 날릴 때도, 은초딩이 눈을 깜박깜박하며 또 무슨 장난을 쳐서 웃음을 줄까 고민할 때도, 이승기가 안되는 요리 실력으로 요리를 하겠다며 난리 블루스를 출 때도, 이수근이 예능의 빈 공간에 불쑥불쑥 초절정의 개그를 선보일 때도 그저 묵묵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다.

아니 무표정이 아니라 오히려 인상을 쓰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1박2일'이라는 야생의 예능 프로그램 속에서 지나치게 진지하게 "사는 건 고행"이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만 같다. 그런데 그 진지함이 예능 속으로 들어오자 놀라운 마력을 발휘한다. 그것은 이 새로운 조류로 만들어진 리얼 예능에 진짜 리얼을 입히는 존재로서 김C가 부각되는 것이다. 그는 지지리도 운 없는 사나이로 한 겨울에는 속옷 차림으로, 한 여름에는 털 잠바로 그 생생한 계절감을 전한다.

재수 없게도 복불복에 져서 홀로 도보로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여정에서도 그는 진지함의 극을 보여주었다. 방송분량은 아예 포기했고, 어두컴컴한 밤길을 묵언수행하듯 걷는 김C는 말 그대로 이 예능 프로그램을 다큐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것이 진짜 다큐일까. 그렇지 않다. 이 예능 속의 다큐는 오히려 웃음을 만들어내는 포인트가 된다. 모두가 웃기려 노력하고 웃음을 터뜨릴 때, 혼자 그 옆에 서 있는 진지한 인물은 그 대비효과를 통해 웃음이 만들어진다. 이 '1박2일'의 이 '예능 속의 다큐'가 준 웃음은 사실상 김C라는 캐릭터가 '1박2일'이라는 예능 프로그램 속에서 주는 웃음과 일맥상통한다.

'1박2일'에 김C가 있다면 '남자의 자격'에는 김성민이 있다. 김C가 주어진 야생의 상황을 버티는 것으로 그 예능에 리얼과 웃음을 선사한다면, 김성민은 여기서 한 발작 더 나가 적극적으로 힘겨운 상황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 속에서 즐거움을 얻는 모습을 통해 리얼과 웃음을 선사한다. 그의 입에 붙은 말, "나 그거 꼭 해보고 싶었는데"는 다른 멤버들의 한숨과 묘한 대조를 이루며 양측의 웃음을 강화한다.

일일 직장 체험에서도 그는 주어진 여행사 직원의 일에서 한 걸음 나아가 하고 싶은 것을 더 하려는 자세를 보였고, 모두가 두려워하는 전투기 조종에서도 그는 즐기는 자세로 하늘을 날았으며, 모두 힘겨워 하는 2PM의 UCC 만들기에서도 "한번 더"를 외쳐 주변사람들을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게 만들었고, 모두 귀찮아하는 가사일에서 조차 마치 주부가 된 것처럼 열심히 임하는 자세를 보였다.

김성민의 이런 예능에 대한 '열혈'의 자세는 리얼과 웃음을 넘어서 어떤 감동마저 주는 이유가 된다. 나이 든 아저씨들의 도전기로 이루어진 '남자의 자격'에서 고개 숙인 아저씨들과는 상반되게 긍정적이고 밝은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 땅의 아저씨들에게 어떤 힘을 부여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능에 리얼을 입히는 그들. 예능이 아니라 다큐를 하는 그들. 김C와 김성민이라는 존재는 이제 우리네 예능 프로그램이 서 있는 위치를 잘 말해준다. 설정이 아닌 리얼한 웃음은 어떤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제 예능 프로그램의 베이스가 되고 있고, 김C와 김성민은 바로 그 베이스로서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리얼 버라이어티 시대의 전면에 부각되어 있는 유재석, 강호동의 존재만큼, 이 시대의 예능을 잘 알려주는 인물로서 이들 만한 존재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예능에서 웃음만큼 중요해진 것이 진정성이 된 시대다.

시골 버라이어티 전성시대, 그 의미는?

이른바 ‘시골 버라이어티’의 시대가 되었나. ‘무한도전’은 일찍이 2006년 농촌체험을 소재로 그 시골이라는 공간이 주는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2007년에는 ‘비(?) 특집’을 통해 비 내리는 논에서의 한바탕 몸 개그를 선보이며 농촌을 버라이어티쇼의 장으로 변모시켰다. 그리고 2009년 ‘무한도전’의 벼농사 특집은 1년이라는 긴 기간으로 기획되어 실제로 농사를 짓는 그 과정을 보여주었다.

‘6시 내고향’의 예능 버전이라고 불리는 ‘1박2일’은 전국 각지의 농촌과 어촌을 찾아다니며 벌어지는 하룻밤의 해프닝을 리얼로 다룬다. 이 프로그램을 ‘6시 내고향’과 비교하는 것은 그 방영 시간대가 주중에 하는 ‘6시 내고향’과 같은 6시대이면서, 동시에 프로그램 속에 담기는 것들도 그 시골의 특산품이나 명물, 명소들이기 때문이다.

시골에 대한 주목은 이후 등장한 ‘패밀리가 떴다’의 본격적인 시골 버라이어티쇼로 이어진다. ‘패밀리가 떴다’는 시골이라는 공간을 쇼의 공간으로 바꾸면서 다양한 게임들을 마당에서 펼쳐 보여주었다. 스튜디오를 벗어난 공간으로서의 시골은 현장의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새로운 게임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시골에서 리얼로 벌어지는 1박2일 간의 해프닝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들 ‘시골 버라이어티쇼’는 주로 남성들만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왔다. 하지만 ‘패밀리가 떴다’에서 여성 멤버를 투입하면서 독특한 심리관계가 주는 재미를 선보이자, 이제는 더 이상 ‘시골 버라이어티’에 성별은 중요한 것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들의 아낌없이 무너지는 그 모습은 ‘시골 버라이어티’ 특유의 시골스런 모습과 대비되면서 주목되었다. 이효리가 몸빼바지를 입고 눈곱 낀 생얼을 카메라에 가감 없이 보여주고, 박예진이 그 가녀린(?) 손으로 거침없이 닭을 잡는 모습은 시청자를 열광케 했다.

그러니 신비로운 소녀 이미지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걸 그룹들이 시골에 가지 말란 법이 있을까. 새로이 시작된 ‘청춘불패’는 소녀시대의 유리, 써니, 카라의 구하라, 포미닛의 현아,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나르샤, 티아라의 효민, 시크릿의 선화가 시골의 집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일종의 생존(?) 버라이어티쇼라고 볼 수 있다. 화장실조차 없어 스스로 화장실을 만들던 이들이 구덩이의 간격을 맞춰보기 위해 자세를 잡는(?) 장면은 ‘청춘불패’가 보여주는 시골 버라이어티의 지점을 정확히 그려낸다.

이처럼 버라이어티쇼가 시골로 가게 된 것에는 먼저 연예인 리얼리티쇼가 대세가 된 지점과 시골이라는 공간이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연예인들이 몸빼 바지를 입고 시골에서 노동을 하는 모습은 그들의 불편한 모습 자체로 날 것의 웃음을 준다. 이른바 세련됨과 인공적인 치장을 걷어낸 뒤, 신비주의가 무너지는 그 지점에서 자연스러운 웃음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또한 시골이라는 야외공간이 갖는 장점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리얼리티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다수의 카메라의 동원을 통한 리얼한 순간의 포착은 이처럼 넓은 야외공간 속에서 빛을 발한다. 스튜디오가 갖는 좁은 공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점이다. ‘1박2일’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시골의 야생 속으로 뛰어드는 강한 리얼리티를 선보인다. 즉 계곡이나 바닷물로 입수하거나 갯벌 속에서 진창에 뒹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골이라는 공간은 의미를 창출하는데 있어서 유리하다. 버라이어티쇼는 점점 어떤 스토리성이 강조되는 시기에 도달해있고, 그 스토리는 이제 웃음의 차원을 넘어서 어떤 의미까지를 요구하고 있다. 시골은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된 지역이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의 체험을 통한 조명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 게다가 시골의 때 묻지 않은 환경(자연환경은 물론이고 그 곳을 사는 분들의 순박함까지)이 때 묻은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도 적지 않다.

물론 시골이라는 공간이 너무 쇼의 공간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의 소지도 없잖아 있다. 하지만 이들 버라이어티쇼들은 쇼가 갖는 재미의 측면과 함께 늘 이 시골이라는 공간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 모습을 연출한다. 그것이 이 공간에 빚져 인기를 얻고 있는 버라이어티쇼가 해야 할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생각해봐야 할 것은 버라이어티쇼가 주목하는 시골에 대한 가능성을 관계부처들은 얼마나 인식하고 있으며, 또 실제로 어떤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시골 버라이어티쇼가 물론 그 프로그램의 성격상 시골의 사정들을 모두 보여주고 있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대중들에게 시골이라는 공간이 주는 날것의 순박함이 넘치는 자연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어쩌면 시골 버라이어티쇼는 그 쇼적인 기능 이상을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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