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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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 ‘젠틀맨’을 둘러싼 국가주의적 잡음들

D.H.Jung 2013. 4. 2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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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틀맨’이 포르노? 국위선양?

 

왜 그저 음악을 음악으로 듣고 즐길 순 없는 걸까. 심지어 ‘젠틀맨’이 ‘국위선양 포르노그래피’라는 과격한 표현까지 나왔다. 동아대 정희준 교수가 쓴 이 글의 골자는 ‘젠틀맨’이 사실은 포르노 수준의 선정적인 뮤직비디오임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이 좋아하고 유튜브 클릭수가 폭발하는 등의 이른바 ‘국위선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찬양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문화를 담고 있기 보다는 미국문화를 열심히 홍보해주는 ‘젠틀맨’은 한류가 아니라 미국문화의 첨병으로 봐야 한다는 얘기다.

 

사진출처:싸이의 '젠틀맨' 뮤직비디오

아마도 보수적인 시선으로 본 ‘젠틀맨’의 뮤직비디오가 못내 역겨웠었던 모양이다. 지나치게 편향적인 글인데다가 그 근거 역시 해외의 반응(그것도 과격하게 안 좋은!)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면 이 글 자체가 지나치게 미국 반응에 민감한 느낌마저 든다. ‘젠틀맨’이 보여주는 B급 유머는 물론 우리가 이제는 ‘SNL 코리아’ 같은 데서 토요일마다 보며 열광하는 미국식의 유머임에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한국적인 정서가 없는 건 아니다(이엉돈 피디를 어떻게 미국 SNL에서 볼 수 있겠는가!). 만일 이게 없다면 어찌 우리네 대중들이 좋아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정희준 교수의 ‘젠틀맨’이 미국문화의 첨병이라는 얘기는 싸이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네 대중들의 미국 편향을 지적하는 얘기이기도 하다. 과연 그런가.

 

사실 싸이는 글로벌하게 네트워킹된 세상이 만들어낸 문화현상이다. 그것은 이미 국가나 언어의 장벽을 초월한다. 싸이가 곡을 발표한 지 단 이틀만에 전 세계의 음원차트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은 과거 국가주의적인 시각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흔히들 모국어라고 말할 때 드러나는 국가적인 배타성이 싸이에게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빤 강남스타일!”이라고 부를 때 저편에서는 그것을 자기네 언어로 비틀어 “Open condom style!”로 듣거나 “말이야!”라는 말을 “마리아!”로 듣는 식이다. 여기서 국가나 언어의 장벽은 오히려 창조적인 재해석의 즐거움으로 바뀐다.

 

그러니 정희준 교수의 이야기처럼 싸이의 곡을 미국문화니 한류니 하는 식으로 국적성을 드러내는 논리는 이제 구시대적 발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미국문화나 남미의 문화, 일본문화, 중국문화 나아가 유럽문화와 이슬람문화를 바로 집 안에 앉아서 자유롭게 즐기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여기에 문화적 사대주의나 국가주의의 논리를 가져오면 이 국가를 초월한 다양성 추구 시대에는 어딘지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되고 만다. 아마도 정희준 교수는 ‘젠틀맨’이 가진 선정성에 대해 언론들이 관대한 것을 국가적인 망신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언론이 지나치게 ‘젠틀맨’을 국위선양 운운하며 국가주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것과 마찬가지로 정희준 교수의 논리 역시 그 국가주의적 시선 안에 포획되어 있다.

 

이러한 시각이 불편하게 여겨지는 것은 갑자기 촉발적으로 생겨난 싸이 현상에 국가나 정부가 뒤늦게 숟가락을 얹는 식의 모습을 보게 될 때다. 그래서 정부의 관계부처들이 싸이를 ‘한류의 첨병’이니 또 그 방식을 해석해 ‘창조경제’니 하는 식으로 이름붙이는 것은 현상은 이해되지만 의도는 불편하게 다가온다. 대중문화가 국가를 초월한 SNS 같은 네트워크를 타고 지구촌화된 전 세계로 뻗어나갈 때 거기에 ‘메이드 인 코리아’라는 딱지를 붙이는 건 너무 속보이는 일이 아닌가.

 

싸이는 자신의 음악이 그저 대중음악의 하나가 아니라 국가를 대표하는 상품으로 인식되는 상황의 불편함을 이미 드러낸 적이 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을 ‘국민가수’가 아니라 ‘국제가수’라고 이름붙인 이유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미국식(이 표현도 우습긴 하다)의 유머를 즐기면 안 되는가. 그걸 즐긴다고 우리의 본질이 달라지기라는 하는 걸까. 과거처럼 국가 대 국가로 폐쇄된 세계에서라면 그것은 침공이니 침략이니 하는 배타적인 표현을 당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국가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지구촌의 시대에 여전히 국가주의적인 배타성이 과연 유효한 걸까. 싸이의 ‘젠틀맨’을 둘러싼 국가주의적인 잡음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안타까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