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와 최불암의 ‘한국인의 밥상’

“이거 궁예 아니신가?” 길거리에서 만난 아저씨는 김영철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아마도 KBS 대하 사극 <태조 왕건>에서 김영철이 연기했던 그 궁예 역할이 지금까지도 강렬하게 남은 탓일 게다. 이른바 ‘관심법’이라는 유행어까지 만들 정도로 세간의 화제가 됐던 캐릭터가 아니었던가. 그 궁예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살갑게 동네사람들에게 다가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KBS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가 그려내는 풍경이다.

늘상 지나던 동네이니 특별할 게 없어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또 새롭다. 세월의 더께가 앉은 노포들과 그 곳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분들에게서는 그 세월만큼의 이야기들이 묻어난다. 콩나물 비빔밥 집에서의 점심 한 끼는 어머니처럼 푸짐하게 챙겨주는 아주머니와의 대화가 새롭고, 60년 째 가업을 이어 이용원을 하고 계시다는 아저씨와의 대화 속에서는 젊은 날의 방황을 거쳐 돌아와 이제는 자부심까지 갖는 그 마음이 느껴진다. 염천교 수제화 거리에서 만난 수제화 장인에게서는 그 손을 거쳐 얼마나 많은 분들이 불편함을 덜어냈을 지가 엿보이고,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동네 구멍가게 아주머니에게서는 외국인들이 돌아가서도 그 아주머니를 통해 느꼈을 ‘한국의 정’이 느껴진다. 

이 프로그램은 제목에 들어가 있듯, 김영철이라는 배우가 아니면 담아내기 힘든 느낌 같은 것들도 들어있다. 1973년 극단에 입단하며 시작된 배우의 길은 현재까지 일일이 다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의 작품들로 이어져왔다. <태조 왕건>의 궁예, <야인시대>의 김두한, <아이리스>의 백산, 영화 <달콤한 인생>의 강사장 역할처럼 강렬한 카리스마를 보여줘 왔지만, <아버지가 이상해> 같은 드라마의 변한수 역할 같은 따뜻하고 헌신적인 역할도 보여줬다. 그러니 이 많은 역할을 해온 배우가 연기라는 세계 바깥으로 나와 동네를 걷는 그 장면 자체가 이체롭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많은 인물들을 연기해온 그가 바로 그 실제 인물들을 만나는 순간들이 그렇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은 제작발표회에서도 나왔던 이야기지만, 그 구도가 떠올리게 하는 또 다른 프로그램이 있다. 그건 바로 2011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370여회가 넘게 전국 각지를 찾아다니며 그 곳의 밥상을 소개했던 최불암의 <한국인의 밥상>이다. <한국인의 밥상>같은 장수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며 ‘동네 천 바퀴’를 돌고 싶다 포부를 밝혔던 데서도 드러나듯, 두 프로그램은 닮은 구석이 많다. 

먹방이 한창 유행하던 시절, <한국인의 밥상>은 다소 진지한 접근으로 전국 각지에서 철마다 나오는 식재료들과 그것들을 특유의 방법으로 해먹은 요리법을 소개해왔다. 처음에는 너무 진지한 다큐 같은 느낌이 강했지만 보면 볼수록 그 깊이에 빠져들게 되는 프로그램. 마치 전국 각지에 존재하는 우리네 밥상을 마치 백과사전처럼 온전히 정리해내겠다는 그 포부도 좋지만, 그걸 현지에서 살아가는 분들의 소박한 삶과 이야기로 전하는 대목도 빼놓을 수 없는 묘미다. <한국인의 밥상>이라고 해서 ‘밥상’만 보일 줄 알았더니 ‘한국인’이 보이는 것.

이걸 가능하게 하는 인물은 역시 프로그램을 지금껏 이끌어온 최불암이다. 우리에게는 <수사반장>의 캐릭터가 더 강렬하게 남아 있지만, 어쩌면 이 프로그램과 더 어울리는 모습은 <전원일기>의 김회장이 아닐까. 1980년부터 2002년까지 무려 1088회를 방영했던 진짜 ‘국민드라마’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은 이 드라마를 통해 김회장은 우리 시대의 ‘아버지’로 자리 잡은 바 있다. 그러니 그가 지방을 찾아다니며 쉽지 않은 노동에 두툼해진 아주머니의 손을 잡는 장면은 그 자체로 뭉클한 면이 있다. 맛깔나게 담아주는 내레이션 또한 빼놓을 수 없지만.

궁예의 김영철과 수사반장 최불암. 이들이 연기가 아닌 실제 현실 속 길을 걷게 된 건, 그들이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 때문이다. 이름 모를 서민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스스럼없이 어우러지며, 만만찮은 삶의 경험을 공감대로 그들과 나눌 수 있는 인물로 이들 만한 배우들이 있을까. 두 프로그램이 모두 그들의 필모그래피처럼 장수하는 프로그램이 되길.(사진:KBS)

완벽한 우리식 재해석, 리메이크라면 ‘라온마’처럼

진짜 OCN 주말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는 리메이크 드라마가 맞을까? 이젠 형제복지원 사건까지 등장했다.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랑인을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부산 형제복지원에 감금하고 가혹행위를 한 인권유린 사건’으로 12년 간 무려 513명이 숨졌지만 그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한국판 홀로코스트’라고도 부른다. 

<라이프 온 마스>는 사고를 당한 경찰이 깨어나 보니 과거라는 영국 드라마 원작의 설정을 가져오면서 1988년도를 소환했다.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그 사회적 분위기를 드라마 속에 담아놓은 것. 형제복지원 사건이 이야기 속에 담겨지게 된 건 그래서 너무나 적절한 선택이라고 여겨진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결국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벌어진 ‘사회정화’가 그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라이프 온 마스>는 김민석의 친형인 김현석(곽정욱)이 저지른 일련의 살인들의 이유로 형제복지원 사건을 소환해왔다. 실적을 올리기 위해 마구잡이로 때려잡아 복지원에 집어넣은 경찰과 3년 간 그 곳에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며 자신과 환자들을 학대했던 간호사, 그리고 그 형제복지원의 원장까지 김현석이 살해했고 살해하려던 이들은 모두 그 시대가 만들어낸 악마 같은 인물들이었다. 결국 악마는 김현석이 아니라 살해당한 그들이었다는 것. 

<라이프 온 마스>는 1988년에 맞는 ‘쌍팔년도식’ 수사방식을 담아 넣는 방식으로도 이러한 우리식의 재해석을 시도한 바 있다. 강동철(박성웅) 형사의 다소 강압적이고 주먹구구식의 수사방식은 한태주(정경호)와 부딪치면서도 묘하게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그러한 수사방식은 원작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네 정서를 이끌어낸다. 이미 <살인의 추억> 같은 작품에서 봤었던 그 시대의 공기 같은 것이 거기에서는 묻어난다. 

과거로 간 한태주가 TV에서 계속 <수사반장>을 보고 거기 주인공이었던 최불암이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장면도 독특하다. 그건 원작이 가진 장치를 가져오면서도 우리들에게 친숙한 <수사반장>의 최불암을 오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은 <라이프 온 마스>의 버터 냄새를 우리 식의 된장 냄새로 바꿔주는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재해석들이 들어가 원작과는 완전히 다른 작품처럼 느껴지기 때문일까. 원작을 이미 본 시청자들도 이제 후반부로 접어들며 도대체 한태주가 지금 겪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어디선가 계속 걸려오는 전화와 그 목소리의 정체가 누구인지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한태주가 겨우 붙잡은 김현석이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한 이야기는 시청자들을 더 궁금하게 만들었다. 또 원작에 대한 재해석이 결말도 바꾸지 않을까 하는 예측을 하게 만든다.

원작이 있는 리메이크작품의 가장 큰 한계가 ‘정서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에 있다면, <라이프 온 마스>는 그것을 극복하는 차원을 훌쩍 넘어서 완전한 다른 작품 같은 재해석을 해내고 있다. 리메이크도 하나의 새로운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걸 <라이프 온 마스>는 보여주고 있다.(사진:OCN)

‘라이프 온 마스’에서 ‘수사반장’ 감성이 느껴진다는 건

OCN 토일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에 최불암이 등장했다. 그것도 과거 <수사반장>의 한 장면 속에서 TV 바깥으로 빠져나오는 장면이다. 물론 그건 사고 이후 1988년으로 가게 된 한태주(정경호) 형사가 보는 환영 속에서다. 흑백화면의 <수사반장>에서 튀어나온 최불암은 한태주를 다독이며 “자넬 도와주러 왔네”라고 말했다. 

아주 짧은 장면이지만 <수사반장> 속 최불암이 이런 방식으로 <라이프 온 마스>에 들어왔다는 건 실로 의미심장한 까메오이자 오마주가 아닐 수 없다. <라이프 온 마스>는 현재에서 과거로 가게 된 인물이 겪는 현실과 꿈,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혼돈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1988년의 복고적 감성을 담고 있는 수사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수사물은 과연 지금의 수사물과 무엇이 다르고 또 달라야 하는 걸까. 

지금의 수사물은 MBC <검법남녀>가 보여주듯, CSI류의 과학수사가 만들어낸 새로운 풍경들이 담겨지는 게 당연하지만, 1988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담는 수사물이라면 사건도 또 그 사건의 수사과정도 달라지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라이프 온 마스>가 가져온 정서는 바로 최불암으로 대변되는 <수사반장>의 감성이다. <라이프 온 마스>의 사건은 마치 <수사반장>의 시그널이 흘러나올 것 같은 우리 식의 정서가 깔려 있다. 

어느 조그마한 마을 갈대밭에서 청산가리가 들어간 막걸리를 마시고 죽은 이장의 살인자를 추격하는 사건이 그렇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유순희(이봉련)가 용의자로 지목되었고, 그 스스로도 자신이 이장을 죽였다고 증언해 사건은 그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를 뒤집는 한태주의 끈질긴 수사과정. 어딘가 이상함을 느낀 한태주는 순희의 딸 영주(오아린)가 이장에게 지속적인 추행을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그 청산가리가 든 막걸리를 이장에게 갖다 준 건 영주지만 그걸 시킨 건 이장의 딸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이장의 딸은 남편마저 락스를 지속적으로 먹여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고, 심지어 운신이 불편한 엄마까지도 음식에 락스를 타 먹이고 있었다. 보험금을 타내기 위한 비정하고 치밀한 존속 살인사건이었다는 것.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건 비정한 사건 속에서도 <수사반장>식의 따뜻한 감성을 더했다는 점이다. 정신이 온전치 못했지만 순희는 딸이 잘못될까봐 거짓진술을 했고, 딸은 엄마가 잘못될까봐 침묵하고 있었다는 모녀 사이의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을 확인하게 되는 지점이 그렇다. 

이런 식의 수사는 과거 <수사반장>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그저 엽기적인 사건만을 해결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인간’에 대한 따뜻함과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시선이 담겨져 있었다는 것. 최불암이 구축한 캐릭터는 그래서 그 비정한 현실 앞에서 잔뜩 인상을 쓰고 있지만 그 안에 인간에 대한 연민이 담겨진 그 시선을 보여주곤 했다. <수사반장>이 단순한 수사물이 아니라 휴먼드라마 같은 느낌을 줬던 건 그래서다. 

이번 최불암과 <수사반장>에 대한 오마주는 <라이프 온 마스>가 그저 1988년으로 되돌아가 사건을 해결해가는 그 독특한 장르적 재미만을 추구하고 있지 않다는 걸 보여주었다. 사건에 있어서도 또 그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에 있어서도 사건만이 아닌 사람이 보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은 <라이프 온 마스>가 영국 드라마의 리메이크지만 완전히 우리네 드라마처럼 해석되고 있다는 중요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최불암이 <수사반장>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드라마라니.(사진:OCN)

‘1박2일’, 잠깐 출연해 따뜻함 남긴 최불암과 김주혁

잠깐 출연했지만 남은 잔향은 그 어느 때보다 짙다. 그저 보기만 해도 훈훈해지는 그런 반가운 얼굴들. 설 명절을 맞아 KBS 예능 프로그램 <1박2일>에서 보게 된 최불암과 김주혁이 그들이다. 

'1박2일(사진출처:KBS)'

설빔이라고 기상천외한 옷들과 분장을 한 채 런웨이를 끝내고 명절에 걸 맞는 ‘세배 미션’이 복불복으로 주어졌을 때 마침 <한국인의 밥상> 내레이션 녹화를 위해 KBS에 들어가고 계신 최불암 선생님을 본 <1박2일> 멤버들.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쪼르르 달려가 반갑게 선생님을 맞았다. 

<제빵왕 김탁구>에 나온 동구에게 “너 빵 아니냐”고 던지는 말 한 마디에 빵 터지면서도 어떤 따뜻함을 느끼게 해준 최불암은 곧바로 김종민에게 대상 탄 것에 대한 축하의 말을 건넸다. 잠깐 함께 해달라는 PD의 요청을 기꺼이 수락하고 김종민의 대상에 대해 재차 의미 있는 말 한 마디를 덧붙인다. 

머리를 써서 받는 상이 아니라 성실함을 인정해주는 이런 상이 진짜 대상이라는 것. 그러자 짓궂게도 그런 김종민을 바보로 몰아세우자 최불암은 그가 머리를 안 쓰는 건 “겸손” 때문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무엇보다 그 ‘성실함’이란 현재 <한국인의 밥상>을 꾸준히 해온 최불암 본인이 해온 삶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었다. 출연자들의 농담은 이처럼 최불암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와 섞여 정겨워졌다. 

아마도 전국을 돌며 그 곳의 그 때 나는 먹을거리와 요리들 그리고 그 고장의 독특한 문화까지 소개해주는 <한국인의 밥상>은 여러모로 <1박2일>과 닮은 면이 많을 것이다. <한국인의 밥상>이 여타의 음식 프로그램들과 사뭇 달랐던 건 몸소 현장을 직접 뛰어다닌 그 성실함과 그래서 프로그램에 제대로 얹어진 최불암 특유의 구수함과 훈훈함이다. 

물론 <1박2일>은 더 오랜 세월 방영되고 있지만 지금의 멤버들은 오히려 최불암의 이런 모습에서 배울 점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1박2일>이 남달랐던 것 역시 그저 가벼운 웃음이 아니라 어떤 따뜻함을 주는 웃음이었다는 걸 새삼 환기시켜주기 때문이다. “파-”하는 그 웃음이 사실은 <전원일기>를 찍을 때 옆방에 계신 노모를 생각해 소리를 가리려는 배려에서 나온 것처럼.

한편 두 번째로 만나게 된 영원한 구탱이형 김주혁 역시 그가 <1박2일>을 통해 부여한 온기가 최불암과 다르지 않다는 걸 확인시켜줬다. 늘 동생들을 생각하며 한 번도 빼놓지 않고 <1박2일>을 챙겨봤다는 김주혁. 영화 <공조> 인터뷰를 하면서 <1박2일> 홍보만 잔뜩 했다는 역시 어딘가 허당기가 있어보여도 정이 느껴지는 그런 인물이다. 

늘 이기기보다는 지는 쪽을 보여준 ‘꽝 손’이었지만 그래서 <1박2일>에 인간적인 느낌을 부여했던 그가 아닌가. 다시 한 번 출연해달라는 말에 “마음이 반반”이라고 솔직히 밝히면서 그는 “(영화) 홍보가 아니라 진짜”로 한 번 출연하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가 <1박2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잘 보여준 대목이다. 

짧은 출연이었지만 최불암과 김주혁은 <1박2일>이 추구해야할 웃음의 성격을 잘 보여줬다. 그간 <1박2일>의 원동력이었던 그 웃음은 다름 아닌 ‘인간미’가 묻어나는 따뜻한 정이 있는 웃음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트렌드가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것이 바로 그것이니.


'한국인의 밥상', 최불암 목소리에 침이 고이는 이유

'한국인의 밥상'(사진출처:KBS)

도대체 최불암의 목소리에는 고소한 참기름이라도 들어있는 것일까. 정말 신기한 일이다. 단지 내레이션만 들었을 뿐인데도, 입 안 가득 침이 고인다. 만일 내레이션에도 어떤 급이 있다면 최불암은 단연 최고 등급의 공력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하다. '한국인의 밥상'이라는 마치 밥처럼 담담하기 그지없는 프로그램에 때론 고소한 참기름 향내를 더해주고, 때론 훈훈한 밥의 온기를 전해주는 최불암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이 프로그램을 진수성찬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밥상'에 깔리는 최불암의 내레이션은 잘 들어보면 이미 입 안 가득 침이 고인 듯 찰기가 흐른다. 그래서 그걸 듣는 사람 역시 똑같이 입 안에 침이 고이게 만드는 것일 게다. 전국에서 찾아낸 우리네 밥상 앞에서 마치 입맛을 다시는 것 같은 그 목소리는 그래서 내레이션이라는 기능적인 장치 그 이상의 효과를 만들어낸다. 밥상을 소개하면서 그걸 보고 듣는 이들의 식욕을 당기게 하는 것만큼 가장 큰 효과가 있을까.

하지만 그 식욕을 만들어낼 정도의 찰기 있는 목소리는 지나치지 않아 자극적이지 않고, 심지어 담백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찰기 있는 목소리를 바탕으로 하되, 또박 또박 한 마디 한 마디 마치 대사의 맛을 살리듯 읽어내는 최불암의 단단한 발성에서 비롯된다. 식욕이 느껴지되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함을 주는 목소리는 '한국인의 밥상'이라는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그대로 살려내기도 한다. 이 프로그램은 전국의 대표적인 음식을 소개하면서도 기성의 시끌벅적한 음식 프로그램과는 궤를 달리한다.

최근 '트루맛쇼'라는 다큐멘터리가 들춰낸 음식 프로그램들의 치부는 우리가 음식을 대하는 방식이 얼마나 천박한 자극에 머물러 있는가를 고스란히 드러내주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의 밥상'은 이 상품으로 전락한 음식을 하나의 문화로 가치로 복원하는 역할을 해주고 있다. '결정 맛 대 맛'이나 '찾아라! 맛있는 TV' 같은 음식 버라이어티쇼나, 저녁 방송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VJ특공대'식의 음식소개 코너들이, 음식 자체를 제대로 소개하기보다는 음식에 대한 자극적인 욕망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과는 달리, '한국인의 밥상'은 지극히 담담하게 음식 그 자체의 의미에 더 집중한다. 마치 음식으로 치면 패스트푸드의 맛이 아닌 슬로우푸드의 맛처럼 이 프로그램이 담담하면서도 질리지 않는 맛을 유지하는 것은 이 조금은 완고한 프로그램의 성격 때문이다.

하지만 이 완고함과 진지함 속에서도 여유로움을 만들어내는 건 역시 최불암이라는 존재다. 내레이션 중간에 갑자기 화면 속으로 쑥 들어와 버린 것처럼 거기 서 있는 최불암은 목소리에 연기까지 덧붙인다. 어느 시골길에서 혹은 어느 어촌 바닷가에서 혹은 어느 산사에서 마치 전국의 음식을 진지하게 연구하려 돌아다니다 멈춰선 듯한 최불암은 설명 중간 중간에 특유의 표정과 제스처를 집어넣는다. 때론 허허로운 웃음을 내레이션에 넣음으로써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꽉 찬 정보전달에 여백을 만들기도 한다.

물론 이 신들린 듯한 내레이션을 더더욱 맛나게 만들어주는 건 대사다. 마음으로 먹는다는 사찰음식과 스님들의 수행을 "억지로 물을 내지 않아도 익어가며 물을 내는 열무김치처럼" 같은 적절한 표현으로 쓰여진 대사는 최불암의 목소리와 착착 맞아 떨어지며 감칠맛을 더하게 해준다. 그래서 '한국인의 밥상'이라는 맛좋은 상차림은 단지 음식이라는 소재에 카메라를 들이미는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 제대로 된 소재와, 그걸 차근차근 정보적으로 담아낸 영상들과, 때론 정겹기까지 한 어느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들은 물론 잘 준비된 재료들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그 준비된 재료에 맛좋은 표현으로 손맛을 내는 최불암이라는 '한국인의 밥상'만이 가진 비기(?)다. 최불암. '한국인의 밥상'에서 그는 정말 맛있다.

'그대 웃어요'는 보면 볼수록 최불암을 닮은 드라마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삶은 그렇게 힘겨운 것이라는 듯 잔뜩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사람좋은 인상으로 쇳소리처럼 바람빠지는 웃음 소리를 내는 최불암은 바로 이 드라마의 얼굴 같습니다. 처음에는 왜 제목이 '그대 웃어요'인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최불암이 그 특유의 웃음을 지을 때서야 비로소 그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목 앞에는 아마도 이런 문장이 생략되어 있었겠지요. '삶이 힘들더라도'.

'그대 웃어요'의 할아버지 강만복은 간암판정을 받았지만 손주의 행복한 결혼을 보고 싶어 그 사실을 숨깁니다. 자식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할아버지가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한다는 걸 알고 역시 이를 숨깁니다. 그러니 이 드라마는 밑바탕에는 이 숨겨진 마음, 힘겨운 현실이 자리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숨긴 채 서로 웃습니다. 그러면서 행복을 느낍니다.

이 드라마의 희비극을 넘나드는 기막힌 설정은 보는 이를 울다가 웃게도 웃다가 울게도 만들어버립니다. 할아버지에게 간이식을 해주기 위해 결혼도 안한 손주며느리가 몸을 챙기는 그 눈물겨운 상황을 이 드라마는, 시어머니의 오해 즉 손주며느리가 임신을 했다는 상황으로 넘기면서 웃음으로 바꾸어버립니다. 간이식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밉상 사돈인 서정길(강석우)인 사실을 알게된 며느리 백금자(송옥숙)가 간을 달라며 쫓아다니면서 서정길의 술을 빼앗아 먹는 장면은 우스우면서도 눈물겹습니다.

결혼식을 하고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간다면서 사실은 떠나지 않고 호텔에 머무는 자식들과, 결혼식장에서 쓰러진 할아버지 때문에 혹 신혼여행을 망치지나 않을까 저어하는 시어머니는 전화통화를 하며 서로 거짓말을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지만 그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 설정 속에서 눈물과 웃음은 또 한번 교차합니다.

몸을 가눌 수 없어 비틀거리고 고통에 혼자 밤을 지새우면서도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웃어주고 있는 이 드라마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요. 흔히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고 있어서 행복한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건(그것이 빠르냐 더디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죠)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비극적인 상황이지만 그래도 웃으면서 살아야 행복하다고 이 드라마는 말합니다.

이 드라마에 절절한 공감이 가는 이유는 그 비극적 상황을 애써 비극으로만 비추어 눈물을 짜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힘겨움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 그 힘겨움 속에서 어떤 행복감과 즐거움을 찾아내려는 이 드라마가 불황의 그늘 속에서 늘 찡그릴 수밖에 없는 고통을 느끼는 우리네 서민들에게 잠시나마의 위안이 되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웃으라고 하면서 눈물을 나게 하는 '그대 웃어요'는 참 고약한 드라마입니다. 그 우스운 설정에 깔깔 웃게 만들고는 순간적으로 눈물이 핑 돌게 만드는 이 드라마는 참 못됐습니다. 그런데 그 고약하고 못된 드라마가 가슴을 훈훈하게 만드는 건, 아마도 저 허허로운 웃음 속에 삶의 무게까지를 담아내는 최불암을 닮은 구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지붕킥'의 이순재, '그대 웃어요'의 최불암

많은 연기자들이 있지만 지금 우리네 아버지를 대변하는 연기자 둘을 찾으라면 단연 이들을 떠올릴 것이다. 이순재와 최불암. 이 둘은 지금 시대의 아버지들이 겪는 두 가지 양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들의 캐릭터 이미지에 공감하는 대중들의 마음 속의 아버지를 가늠하게 한다.

먼저 '거침없이 하이킥'의 야동순재를 통해 전 세대로 그 공감대를 넓힌 이후, '지붕 뚫고 하이킥'의 멜로순재로 돌아와 여전히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연기자, 이순재. 그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이 시대에 어떻게 아버지들이 적응해 나가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야동순재'에서 중요한 것은 '야동'이 의미하는 '야한 동영상'이 아니라, '야동'이라는 용어가 가지는 젊은이들의 인터넷 문화이다.

이순재는 단지 야한 걸 봤기 때문에 젊은이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게 아니라, 어색하지만 바로 그 인터넷 문화로 파고들어온 아버지와의 공감대가 순식간에 세대의 벽을 넘어섰기 때문에 젊은이들의 마음 속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그는 '지붕 뚫고 하이킥'에 와서는 이제 잠깐 젊은이들의 문화를 어깨 너머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문화를 노년에도 똑같이 누리려 한다. 로맨스 그레이를 연기하는 그가 김자옥을 위해 각종 이벤트를 하고, 줄리엔의 김자옥에 대한 호의에 질투하는 모습은 나이와 상관없이 똑같은 연애 감정을 표현한다.

이순재라는 아버지가 보여주는 핵심적인 것은 이처럼 젊은이들의 문화와 소통하기 위해 과거 고압적이었던 아버지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김자옥 앞에서 방귀를 참다가 결국 장례식장에서 그가 폭발하듯 방귀를 꾸는 순간, 우리는 권위적인 아버지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이순재는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여전히 사위와 딸에게 고압적인 아버지지만 그것은 늘 시트콤이라는 틀 속에서 그 이면을 드러내며 무너져 내린다.

반면 '그대 웃어요'의 최불암은 정반대의 위치에서 우리네 아버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 드라마에서 최불암이 연기하는 강만복이라는 캐릭터는 지나간 아버지 시대의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아침에 일어나 국민체조를 하는 이 아버지는 '돈보다 귀한 것은 인연'이라는 전통적인 가치를 쥐고 달라진 현 세태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 '귀한 인연' 때문에 과거 자신과 가족들을 살 수 있게 해주었던 회장님의 아들, 서정길(강석우)이 흥청망청 사업에 실패하자, 그를 거두어 사람을 만들어보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 달라진 세태 속에서 아버지의 이 안간힘은 쓸모없는 일처럼 여겨진다. 서정길은 '인연보다는 돈'에 휘둘려 자식까지도 거래하는 파렴치한 인물이다. 이 한 세대를 거쳐 강만복이라는 아버지와 작금의 서정길이라는 아버지가 보여주는 달라진 모습은, 이 드라마가 풍자하려는 세태를 잘 보여준다.

강만복이라는 아버지는 그래서 혼자 남은 듯한 쓸쓸함에 노년을 보내지만 그래도 이 부족한 이들을 모두 가족이라 생각하며 가슴으로 끌어안는다. 돈 때문에 평생의 인연이 끊어지는 그 과정을 목도하면서 혼자 책상에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삼키는 강만복의 모습은 우리 시대 아버지의 또 다른 면을 보게 한다. 달라진 세태 속에서 자꾸만 잊혀져가는 아버지의 자리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 강만복이고, 최불암은 어쩌면 허허 웃은 그 웃음 속에 담긴 수만 가지 뉘앙스로 그걸 가장 잘 연기해내고 있는 연기자라고 할 것이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는 이제 이 권위 없는 시대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 시대는 늘 젊은이들의 것이고, 아버지는 그들과의 소통을 위해 그 세계를 기웃거리거나, 달라진 세태를 안타까워하며 과거의 가치를 향수하며 잊혀져 간다. 이순재와 최불암은 바로 그 아버지들의 모습을 대변해내는 연기자로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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