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낮술’, 배고파도 웃고 살자 본문

옛글들/블로거의 시선

‘낮술’, 배고파도 웃고 살자

D.H.Jung 2009. 3. 6.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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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술'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스트레스의 한 가운데 선 낮이라는 시간대에 입에 착착 달라붙을 것만 같은 술에 대한 욕망이 연거푸 몇 번 잔을 넘기다보면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곤 한다는 것을. 머리는 지끈지끈, 불콰한 얼굴은 후끈후끈, 곧 왜 낮술을 시작했을까 하는 후회가 들기 시작한다.

물론 전도유망한 직장에서 점심시간을 빌어 한 회식자리의 포만감이라면 다르겠지만, 모두들 일을 하는 낮 시간에 음습한 주점 모퉁이에 앉아 소주를 까는 이들의 심정은 말한 대로의 적당한 괴로움과 욕망 그리고 곧 드러나는 욕망의 배반이 안주거리로 올라오게 마련이다. 이 낮술에서 갖게되는 정서 즉 기대감과 배반감 같은 것이 바로 '낮술'이라는 유머의 세계다.

이야기는 한 주점에서의 농담에서부터 시작한다. 실연당한 혁진(송삼동)에게 친구들은 정선으로의 여행을 제안한다. 정작 혁진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데, 친구들은 널 위해 가려는 건데 네가 빠지면 되느냐며 혁진을 몰아세운다. 어쩔 수 없이 가겠다고 약속한 혁진. 그러나 다음 날 정선버스터미널에는 혁진 혼자만 덩그라니 오지않는 친구들을 기다리게 된다.

이 첫 번째 시퀀스는 이 영화의 전체 골격을 그려낸다. 혁진은 그렇게 아무런 기대감이 없었다가(아니 하고싶지도 않았다가), 누군가에 의해 기대감을 갖게 만들어지고, 하지만 곧 그 기대가 무너지는 상황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혼자 낮선 공간에 떨어진 그가 그냥 서울로 돌아가려 하자, 친구인 기상(육상엽)이 근처에 자기가 아는 형님의 펜션을 제안해 기대를 갖게 만들고, 막상 도착하자 예상과 전혀 다른 상황에 기대가 무너지고, 그런데 또 옆방에 왠 여자가 그를 다시 기대하게 하고.... 그것은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낮술을 대할 때의 그 정조를 그대로 반복한다.

결국 혁진은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몰리게 되고 친구 기상에 의해 구원(?)받지만 그것은 또 한번 배반의 배반을 거듭한다. 이렇게 한 바퀴를 빙 돌아온 혁진은 다시 이 이야기가 시작되는 정선 버스터미널로 돌아오는데, 영화는 그 끝 부분을 다시 처음 부분과 연결시키듯 끝냄으로써 이 낮술의 상황, 즉 기대와 배반의 연속이 우리네 삶에서 반복적으로 겪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 가난한 영화가 가진 지칠 줄 모르는 유머감각이다. 마치 리얼 버라이어티쇼를 재구성하듯 영화는 차츰 반복된 이야기를 퇴적시켜 웃음의 진폭을 높여가며 나중에는 특별하지 않게 주인공이 툭툭 던지는 말에서조차 웃음이 터지게 만든다. 이것은 또한 서서히 취하게 해 나중에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얼토당토한 유쾌함에 빠져들게 만드는 낮술의 효과와 거의 같다는 점에서, 영화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낮술'은 마치 배고픈자들이 갖게 마련인 '기대없음'을 술 한잔의 유혹으로 부추기는 영화로, 이것은 또한 저 독립영화가 가진 정서와 맞닥뜨리는 지점이기도 하다. 불황 속에서 당장 배가 고픈데 무슨 웃음이 나올까. 그럼에도 어떤 작은 기대감은 여전히 존재하며, 그것이 비록 배반으로 끝난다 하더라도 바로 그 욕망(혹은 꿈)으로 인해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을 특유의 유머로 전해주는 영화다. 그러고보면 가난한 자들의 가장 큰 무기는 당장 배가 고파도 그것을 웃음으로 전화시키는 바로 이 유머감각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