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마더', 김혜자만으로도 충분한 영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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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김혜자만으로도 충분한 영화

D.H.Jung 2009. 5. 27.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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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부터 2002년까지. '전원일기'의 엄마로서 국민엄마라는 호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김혜자. 하지만 그 무려 22년 간의 세월로 쌓아놓은 국민엄마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각인되는데는 겨우 2시간 남짓한 시간이면 충분했습니다. '마더'는 국민엄마라는 막연한 호칭 속에 숨겨진 보다 깊은 엄마의 동물적인 본성을 끄집어내 그 끝까지 달려보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마치 큐브 조각을 맞추듯 꽉 짜여있는데다가 상상하기 어려운 전개와 반전이 스릴러 구조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섣부른 리뷰는 그 자체로 스포일러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일단은 배우 김혜자에게만 집중해보도록 하죠. 사실 이 영화는 김혜자라는 배우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전율을 느끼게 해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대단히 단순하면서도 인상적입니다. 들판 저 편에서 김혜자가 카메라를 향해 천천히 다가옵니다. 그 모습은 몹시도 지쳐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어딘지 핀이 나간 듯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꽤 야성적인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지치고 힘겨운 어미라는 동물적 모성을 가진 존재를 보았는데, 그녀는 갑자기 멈춰서더니 난데없는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저 흐느적 흐느적거리는 듯한 느낌으로 몸을 흔드는 그녀의 동공은 반쯤 풀린 듯 보입니다. 그런데 순간 고개를 살짝 틀며 바라보는 그 동공이 번쩍하는 느낌이 듭니다. 누군가를 노려보는 듯한 그 눈빛은 본능적인 야수성을 살짝 보여주죠. 그러니 그 춤사위는 슬픈 듯하면서도 섬칫한 느낌을 줍니다. 그러고보니 그저 흐느적 대는 듯한 춤사위가 제법 박자를 맞춰 어깨를 들썩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이라는 우리네 정서는 바로 그런 걸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딘지 슬프지만 어쩐지 처절하기도 하고 분노 같은 감정이 뒤섞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것을 어깨춤으로 풀어내기도 하는 그런 것 말입니다. 엄마라는 존재는 사실 그 감정들의 총체임에 틀림없습니다. 정작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자식을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는 모성은, 인간만의 특징이 아니라 동물 보편에 해당하는 특징이죠. 그러니 이 동물적 본성 앞에 이성적인 세계는 종종 무릎을 꿇고맙니다.

이 영화는 이처럼 모성이라는 동물적 본성과 소위 이성적인 세계 사이의 긴장감을 다루고 있습니다. 살인사건과 거기에 연루된 아들을 구하기 위해 벌이는 모성이라는 무기를 가진 엄마의 수사는 스릴러적인 형사물이 갖는 긴장감을 유발하면서도 인간의 본질을 묻는 고대비극의 비장감을 갖고 있습니다. 김혜자가 연기하는 엄마는 따라서 이성적 존재와는 거리가 있죠. 그저 아들을 위해서라면 본능적으로 몸이 앞서는 그런 존재입니다.

엄마가 이렇게 본능에 몸을 싣고 있는 것은 사실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성의 세계가 부조리하기 때문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모순적인 사회의 모습은 여기서도 똑같이 등장하죠. 형사는 여전히 과학수사와는 거리가 멀고, 변호사는 정의의 잣대가 아니라 돈의 잣대에 의해 움직입니다. 수사물에 푹 빠진 진태(진구)는 친구인 도준(원빈)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이 필요해서 그리고 어쩌면 그 수사놀이를 하는 것이 즐거워서 도준의 엄마를 돕습니다.

다만 영화가 전작들과 다른 것은 그 부조리한 세계를 향해 이야기가 점점 넓혀지는 것이 아니라, 엄마라는 존재 속으로 그 부조리한 세계를 조금씩 응축해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성이라 불리지만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어떤 일을 겪었을 때 엄마의 품 속으로 숨곤 하죠. 그러면 엄마는 그저 등을 두드리고 자식에 대한 지지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성과는 상관없는 본성이죠.

영화의 마지막에서도 김혜자는 관광버스 안에서 또 춤을 추는데 그것이 또한 인상적입니다. 다만 다른 것은 첫 장면에서의 춤이 독무였다면 마지막 장면에서의 춤은 군무라는 점이죠. 아마도 모성은 다 같다는 것을 그 여러 엄마들이 뒤섞여 춰대는 춤사위를 통해 영화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마더'는 엄마로 시작해서 엄마로 끝나는 이야기이고 김혜자로 시작해서 김혜자로 끝나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처음 가졌던 엄마에 대한 막연한 생각은 극장을 나설 때의 그것과는 전혀 다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늘 우리네 엄마로서 자리해온 김혜자라는 연기자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김혜자의 한없는 자식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눈빛과, 그 눈빛 너머에 또한 존재하는 광기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