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극보다는 상상력, 결과보다는 과정

 

<1박2일>은 언제부터 복불복만 남게 되었을까. 본래 <1박2일>은 게임 버라이어티가 아니다. <무한도전>이 시도했던 여행 특집의 한 지류로서 ‘여행’이라는 소재를 본격적으로 다뤄왔던 여행 버라이어티가 <1박2일> 아니던가. 그런데 최근 <1박2일>을 보면 여행지에 대한 기억보다는 거기서 벌인 복불복 게임만 떠오른다. 어떤 벌칙을 받았고 누가 밥을 굶었으며 누가 야외취침을 했는가만이 반복되는 느낌이다.

 

'1박2일(사진출처:KBS)'

물론 복불복 게임이 자극적인 재미를 주는 건 사실이다. 이 재미의 핵심은 단순한 게임과 그로 인한 엄청난 결과에서 생긴다. 즉 가위바위보나 돌림판 같은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게임을 하지만 그 결과로 누구는 따뜻한 방안에서 자고 누구는 혹한에 야외취침을 하는 데서 나오는 자극이 핵심이라는 점이다. 간단하게 상황을 긴장으로 만들고 그 결과로 인해 생고생을 하는 모습이 우습기 때문에 복불복 같은 게임은 <1박2일>만이 아니라 <무한도전> 같은 여타의 예능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복불복에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다. 그것을 적절히 사용했을 때는 프로그램을 보는 맛을 높여주지만 너무 과도하게 사용하면 프로그램의 색깔을 지워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이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조미료와 같다. 라면스프는 어떤 음식도 되살려내는 ‘마법의 가루’ 역할을 해주지만 너무 많이 쓰면 음식은 기억나지 않고 라면 스프 맛만 기억나게 하는 법이다. 결국 복불복의 과잉 사용은 <1박2일> 본연의 여행의 맛을 느낄 수 없게 만든다.

 

<1박2일> 복불복 대축제 특집은 바로 그 복불복 게임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돌림판을 돌려 거기 나와 있는 대로 복불복을 행하는 이 단순한 놀이는 그 자체로는 웃음을 주었을 지 몰라도 <1박2일> 본연의 유쾌함이나 즐거움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돌림판이 지정하는 대로 여름에 파카를 입기도 하고, 우스꽝스런 분장을 한 채 거리를 활보하며, 낙오자가 된 이는 미스코리아 분장을 하고 연예인에게 등목을 받는 미션을 수행하지만 이것이 여행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것은 연예인들이 하는 이벤트나 행사처럼 보일 뿐이다.

 

서울이 공간으로 지정되었지만 이 특집을 통해 서울만의 여행지로서의 맛이 얼마나 느껴졌는지를 떠올려보면 그 한계를 실감할 수 있다. 과거 <1박2일>에서 경복궁을 재발견하고, 북촌의 한옥마을과 개구리가 뛰어노는 개울을 찾아 나섰던 여행들과 비교해보라. 우리는 지금 그 때 <1박2일> 멤버들이 어떤 복불복을 했던가는 기억하지 못해도 어떤 곳을 찾아가고 거기서 무엇을 발견했는지는 기억하고 있다.

 

물론 무계획 여행이라는 것이 하나의 아이템일 수는 있다. 그렇다면 장소와 상관없이 여행 그 자체가 주는 설렘이나 낯선 곳에서 느끼는 한가로움, 또 새로운 사람과의 우연한 만남이 주는 왁자지껄함 같은 여행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파고들었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그저 복불복의 연속은 당장의 맛을 내기 위해 조미료만 가득 친 결과만을 만들 뿐이다. 처음 이 형식을 만들었던 이명한 PD는 복불복은 재미와 자극을 위한 부수적인 것일 뿐 핵심은 아니라고 밝힌 적이 있다. 결국 <1박2일>의 핵심은 여행에 있다는 얘기다.

 

또한 복불복 게임의 남용이 씁쓸하게 여겨지는 부분은 이런 형식의 놀이가 지나친 결과주의를 조장하기 때문이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외침은 물론 예능적인 재미를 위한 이기주의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는 식으로도 읽힌다. 놀이가 과정의 즐거움이 되지 못하고 결과만 탐닉할 때, 그것은 자칫 문화의 퇴행을 만들어낸다. 한 때 어떻게 놀아야 할지 알 수 없었던 남자들이 폭탄주 문화에 빠져 들었듯이 취하면 다 똑같지 어떻게 취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는 식의 결과주의에 복불복 게임이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으로 보면 끊임없이 새로운 게임을 고민하고 그 게임에 새로운 스토리를 입혀 그 과정을 즐기는 <런닝맨> 같은 게임 버라이어티가 가진 가치가 새삼스러워진다. 108개의 CCTV를 활용해 데스노트에 적힌 순서대로 런닝맨들의 이름표를 떼려는 사신 정우성과, 그 108개의 CCTV를 다 꺼버리고 그와 맞서려는 런닝맨의 대결은 그 결과만 보면 허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는 과정들이 흥미진진하기 때문에 그만큼 가치가 있다. 게다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진지하게 몰입하는 정우성의 모습은 놀이에 빠져드는 것 자체가 우리 삶에서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를 환기시킨다.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놀이에 대한 편견이 남아있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하라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논다’는 것을 ‘게으르다’거나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다’거나 심지어는 ‘불량’하고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것과 동의어로 인식할 정도니 말이다. 그래서 막상 놀라고 하면 어떻게 놀아야할 지 갈피를 못잡는 것일 게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 삶은 놀이의 과정일 수 있다. 그 놀이가 결과만을 추구할 때 우리네 삶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삶에 복불복식의 놀이가 주는 잠깐의 즐거움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자극이 본질을 뒤집을 때 삶은 무미건조해져 버린다. 결국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에만 집착하는 복불복은 그 적절한 선을 유지하지 못할 때 독이 되기 십상이다. <1박2일>의 그 재미있던 복불복이 지금은 오히려 독이 되고 있는 것은 그런 이유일 것이다. 반면 <런닝맨>의 놀이는 낯설고 때론 유아적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것은 우리가 가진 놀이에 대한 편견을 깨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게 여겨진다. <1박2일>의 복불복과 <런닝맨>의 게임 속에는 이처럼 우리가 놀이를 바라보는 너무나 다른 시선의 차이가 들어가 있다.

<그것이 알고 싶다>가 파헤친 귀족학교의 반칙

 

돈이면 뭐든지 되는 세상인가. <그것이 알고 싶다>는 살인을 교사하고도 버젓이 호화병실 생활을 해 국민적인 공분을 일으켰던 ‘사모님의 이상한 외출’ 편에 이어, 이번에는 돈이면 미래도 사는 이른바 ‘귀족학교’ 국제중학교의 각종 비리와 반칙들을 다루었다. 좋은 대학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라 불리는 국제중학교에 가기 위해 줄을 서는 아이들과 그 미래가 보장된다는 얘기에 몇 천만 원에 달하는 학비에 촌지를 내는 학부모들, 그리고 그것을 공공연히 장사하는 국제중학교는 말 그대로 조폭 영화에서나 나왔을 법한 뒷거래들이 횡행하고 있었다.

 

'그것이 알고싶다(사진출처:SBS)'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이라는 꼼수가 그렇다. 누가 들어도 가난하고 소외된 학생들을 위한 전형을 떠올리고 또 실제로 그런 취지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국제중학교에서는 그런 뜻과는 상관없이 이른바 상류층의 입학 장사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제작진이 입수한 사회적 배려 대상자 명단을 통해 확인한 결과 그 대상자들이 거주하는 곳은 몇 십 억짜리 호화주택들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대기업 임원의 아들의 입학비리로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는 국제중학교는 이른바 대한민국 1%의 상류층을 위한 학교로 변호사, 의사 같은 전문직은 알아주지도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위화감만 조성하는 국제중학교가 왜 굳이 필요할까. 1% 상류층을 위한 학교가 만들어내는 교육의 부패가 나머지 99%의 공분을 사고 있는 것은 돈이면 미래도 쉽게 살 수 있는 반칙들이 너무나 당연한 듯 벌어지는 것을 목도하기 때문이다. 제작진이 확보한 2013년 영훈중학교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 점수표와 추천서를 통해 확인한 결과, 제 아무리 높은 교과 성적을 받은 우수한 학생이라도 집안이 대기업 임원이나 판사, 검사가 아니라면 오히려 떨어뜨리는 ‘제 멋대로 인’ 전형이 드러났다. 학습계획서와 추천서 같은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편파적이었던 것.

 

특권층과 부유층들이 낸 이른바 ‘학교발전기금’은 수천만 원에 이르렀고 심지어 어떤 학생은 합격발표가 나기도 전에 거액을 기부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문제는 이 피해가 고스란히 학생들에게도 이어졌다는 점이다. 어떤 학생은 격에 맞지 않는다며 왕따를 당해 거의 점심을 먹지 못하고 학교를 다니다가 결국은 전학을 결정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학부모가 아이를 위해 대출까지 해가며 매번 억지로 돈을 상납해왔지만 그 때 뿐 별 효과가 없었던 것. 이것을 과연 학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입학에서부터 돈 거래가 이뤄지고, 소외계층을 위해 만들어 놓은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 같은 제도를 저들 입맛에 맞게 바꿔 활용해 학업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떨어뜨리고 대신 상류층 자제들을 입학시키며, 어렵게 들어온 학교에서도 학생을 볼모로 끊임없이 금품을 요구하고 그게 아니면 결국 학생의 전학을 권고하는 이 폭력과 꼼수와 반칙이 횡행하는 곳을 과연 학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국제중학교가 저질러온 비리와 반칙들에 대해 대중들이 공분하는 것은 거기에서 우리네 교육의 암담함이 보이기 때문이다. 교육이 모두에게 평등한 미래를 제공하지 못하고 그래서 잘 사는 집에 태어난 아이들은 평생을 엘리트 코스를 밟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성장과 성공의 발판마저 마련되지 않으며 그것이 오로지 돈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마음은 참담할 수밖에 없을 게다.

 

국제중학교의 비리는 마치 우리 사회의 현실을 표본처럼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기 이를 데 없다. 1%를 위한 편법들이 만드는 그들만의 세상은 나머지 99%의 눈물 위에 세워지기 마련이다. 또 이런 편법들을 당연시 여기며 특권의 삶을 살고 있는 1%들이 세울 우리 사회의 미래는 얼마나 암담할 것인가. 국제중학교의 문제는 그래서 우리 모두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대중들의 공분과 허탈감을 안다면 반드시 그 부패된 교육의 살을 도려내야 할 것이다.

<정글> 병만족의 생고생, 재미는 없는 이유

 

<정글의 법칙> 히말라야편에서 병만족의 웃음을 찾는 것 쉽지 않다. 이들이 서 있는 공간이 웃음을 허락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말 그대로 고행의 연속이었다. 고산병으로 숨 쉬는 것조차 불편한 그 곳을 20킬로가 넘는 배낭을 짊어지고 올라가는 과정에서 극도로 예민해진 병만족이 말다툼을 하는 장면은 그들이 얼마나 힘겨운 고투를 벌이고 있는가를 말해주었다.

 

'정글의 법칙(사진출처:SBS)'

그 와중에도 김병만의 희생과 도전정신은 보는 이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오지은의 무거운 배낭까지 대신 짊어지고 오르는 모습은 마치 인간의 한계를 시험해보려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목적지인 폭순도 호수까지 가까스로 올라가 그 절경 앞에 감탄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산병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정준은 숨을 쉴 수가 없다며 고통을 호소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날 것의 생고생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해졌고, 그래서 그 땀이 보여주는 진정성이 분명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정글의 법칙>이 그간 시청자들에게 전해주었던 즐거움과 재미는 상대적으로 사라져버렸다. <정글의 법칙> 히말라야편은 마치 등산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깨알 같은 재미를 찾기가 어려워졌다. 한 편 내내 산을 오르고 오르며 고통스러워하는 병만족의 모습을 확인했을 뿐이다.

 

이번 히말라야편은 현지 적응 훈련으로 들어간 바르디아 정글에서도 생각만큼의 재미를 끌어내지는 못했다. 야생동물 관찰이라는 새로운 재미요소가 있었지만 그것이 너무 오랫동안 반복되면서 지루해진 것도 사실이다. 야생의 뱅갈호랑이를 보는 장면은 물론 흥미로운 일이지만 그 과정은 오로지 기다리는 것일 수밖에 없다. 먹거리를 자체적으로 해결하기가 어려운 척박한 환경이기 때문에 야생동물을 찍은 대가로 음식을 제공하는 방식이 반복됐는데 이것 역시 <정글의 법칙> 특유의 재미를 반감시키기도 했다.

 

그나마 이번 편에서 발견한 웃음은 안정환이었다. 그는 깨알 같은 농담으로 고생하는 병만족들의 웃음을 잃지 않게 만들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이번 히말라야편은 <정글의 법칙> 특유의 다큐와 예능 사이에 놓여진 재미가 상당부분 사라져 버렸다. 사냥의 재미도 찾기가 어려웠고 힘겨운 와중에도 즉석에서 상황극을 할 정도로 여유 있는 웃음은 더더욱 찾기 어려웠다. 숨어서 야생동물을 내내 관찰하거나, 하루 종일 산을 오르는 장면만이 반복되서 나온 느낌이다.

 

이것은 히말라야라는 공간의 특징 때문일 수도 있다. 극에서 극으로 바뀌는 기후와 그냥 서 있는 것조차 힘든 고산지대의 특성이 웃음이 사라지게 된 원인이라는 점이다. 결국 히말라야라는 공간은 그림은 멋있지만 다양한 재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예능의 공간으로서는 너무 혹독했다는 점이다.

 

<정글의 법칙>이 다큐와 변별력을 가질 수 있는 건 거기에 여유와 웃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예능적인 포인트가 없다면 굳이 <정글의 법칙>을 볼 까닭이 없다는 얘기다. 물론 지난 뉴질랜드편에서 불거져 나온 진정성 논란에 대한 해답으로서 히말라야 같은 극한의 오지를 선택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글의 법칙>만이 갖고 있는 다큐와 예능 사이에서 벌어지는 재미는 담보할 수 있었어야 한다.

 

<정글의 법칙>은 생존을 위협하는 극한의 정글 속으로 뛰어들면서도 그 안에서 또한 도시인들이 느끼기 어려운 자연이 주는 행복감을 전해주었던 프로그램이다.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곳은 불편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 때문에 누리게 되는 관계의 해방이나 자유 같은 즐거움이 병존하는 곳, 그곳이 바로 <정글의 법칙>이 아니었던가. 극한의 오지에서 생고생을 하는 병만족의 노력은 그래서 그 진심이 전해지지만, 안타깝게도 재미는 그다지 없는 편이다. 다큐가 아닌 예능 <정글의 법칙>이 살아나야 이 프로그램만의 독특한 매력이 되살아나지 않을까.

병든 세상까지 고치는 심의(心醫), <허준>

 

오로지 올곧은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 일일까. <구암 허준>이 그려내는 이른바 심의(心醫)의 길에 어떤 감동이 느껴졌다면 그것은 아마도 허준(김주혁)의 그 고군분투가 지금 현재 우리네 현실에 어떤 울림을 던져주기 때문이었을 게다. 오로지 병자만을 바라보는 심의의 길은 부조리한 세상에서는 그 자체로 가시밭길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길을 통해 허준은 아픈 병자들만이 아니라 아픈 세상까지 고쳐나간다.

 

'구암 허준(사진출처:MBC)'

혜민서(惠民署). 말 그대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곳이지만, 부패한 관리들이 있어 이 곳 역시 병이 들었다. 순번을 바꿔주는 식으로 백성들의 돈이나 뜯어내고, 약재나 빼돌려 착복하는 곳이 되어버린 것. 허준은 이를 엄금하려 하나 서리들의 만만찮은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국법 또한 허준이 가려는 심의의 길을 방해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병자를 외면하지 말라는 스승 유의태(백윤식)의 가르침을 지키려 하나, 국법은 집으로 찾아오는 가난한 병자를 도운 허준에게 벌을 내린다. 내의원은 사사로이 병자를 볼 수 없다는 국법 때문이다.

 

‘중문과 정청을 오가며 어필 현판을 천 회 낭독하라’는 벌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허준이 수행하는 것은, 그 행위 자체가 잘못된 법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어의 양예수(최종환)는 자신이 책임을 질 것이니 앞으로는 내의원도 돈을 받지 않는다면 병자를 사사로이 봐도 된다는 결정을 내린다. 결국 허준은 병자만 고친 것이 아니라 잘못된 법도 바로 잡았던 것.

 

또한 자신을 모함했던 혜민서 서리가 온 몸에 농가진이 생겨 혜민서로 실려 오자 허준은 자신이 심지어 농가진에 전염되면서도 끝까지 병자를 고쳐낸다. 이 사실에 감복한 혜민서 서리들은 허준을 마음 속으로부터 존경하게 되고 결국 혜민서를 바로잡겠다는 그의 뜻에 따르게 된다. 허준은 병만 고친 것이 아니라 병든 마음까지 고친 것이다.

 

<구암 허준>이 단지 조선시대의 한 명의가 성취한 의술의 이야기만을 다루었다면 어쩌면 얄팍한 잔재미에 머물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구암 허준>은 병자들을 구하는 허준의 모습을 통해 한 가지 뜻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는 성인의 길을 모색한다. 병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한 가지로 병만이 아니라 병자들의 마음까지 고쳐주고, 올곧은 심의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병든 세상까지 고친다는 건 이 이야기가 가진 묵직한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실로 병든 세상이 아닐 수 없다. 돈 많은 세상의 갑들은 바로 그 돈으로 을들을 유린하고, 국민의 종이 되어야할 정치인들은 오히려 권력을 이용해 국민들을 기만한다. 광주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했던 전직 대통령에게 공소시효를 늘리고 벌금을 받아내기 위해 추징법을 세우려 하자 ‘인권침해’ 운운하는 세상이다. 법이 범법자들을 오히려 보호하게 될 때 그 누가 그 법을 믿으려 할 것인가.

 

<구암 허준>을 보면서 현재를 개탄하게 되는 것은 허준이 걸어가는 그 올곧은 길이 이 시대에는 이미 사라져버린 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오로지 병자만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허준처럼, 오로지 국민만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정치인, 법조인, 공무원들은 기대하기가 어려운 세태일까. 병든 세상까지 고치는 허준의 이야기는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그만큼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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