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세상까지 고치는 심의(心醫), <허준>

 

오로지 올곧은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 일일까. <구암 허준>이 그려내는 이른바 심의(心醫)의 길에 어떤 감동이 느껴졌다면 그것은 아마도 허준(김주혁)의 그 고군분투가 지금 현재 우리네 현실에 어떤 울림을 던져주기 때문이었을 게다. 오로지 병자만을 바라보는 심의의 길은 부조리한 세상에서는 그 자체로 가시밭길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길을 통해 허준은 아픈 병자들만이 아니라 아픈 세상까지 고쳐나간다.

 

'구암 허준(사진출처:MBC)'

혜민서(惠民署). 말 그대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곳이지만, 부패한 관리들이 있어 이 곳 역시 병이 들었다. 순번을 바꿔주는 식으로 백성들의 돈이나 뜯어내고, 약재나 빼돌려 착복하는 곳이 되어버린 것. 허준은 이를 엄금하려 하나 서리들의 만만찮은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국법 또한 허준이 가려는 심의의 길을 방해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병자를 외면하지 말라는 스승 유의태(백윤식)의 가르침을 지키려 하나, 국법은 집으로 찾아오는 가난한 병자를 도운 허준에게 벌을 내린다. 내의원은 사사로이 병자를 볼 수 없다는 국법 때문이다.

 

‘중문과 정청을 오가며 어필 현판을 천 회 낭독하라’는 벌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허준이 수행하는 것은, 그 행위 자체가 잘못된 법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어의 양예수(최종환)는 자신이 책임을 질 것이니 앞으로는 내의원도 돈을 받지 않는다면 병자를 사사로이 봐도 된다는 결정을 내린다. 결국 허준은 병자만 고친 것이 아니라 잘못된 법도 바로 잡았던 것.

 

또한 자신을 모함했던 혜민서 서리가 온 몸에 농가진이 생겨 혜민서로 실려 오자 허준은 자신이 심지어 농가진에 전염되면서도 끝까지 병자를 고쳐낸다. 이 사실에 감복한 혜민서 서리들은 허준을 마음 속으로부터 존경하게 되고 결국 혜민서를 바로잡겠다는 그의 뜻에 따르게 된다. 허준은 병만 고친 것이 아니라 병든 마음까지 고친 것이다.

 

<구암 허준>이 단지 조선시대의 한 명의가 성취한 의술의 이야기만을 다루었다면 어쩌면 얄팍한 잔재미에 머물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구암 허준>은 병자들을 구하는 허준의 모습을 통해 한 가지 뜻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는 성인의 길을 모색한다. 병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한 가지로 병만이 아니라 병자들의 마음까지 고쳐주고, 올곧은 심의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병든 세상까지 고친다는 건 이 이야기가 가진 묵직한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실로 병든 세상이 아닐 수 없다. 돈 많은 세상의 갑들은 바로 그 돈으로 을들을 유린하고, 국민의 종이 되어야할 정치인들은 오히려 권력을 이용해 국민들을 기만한다. 광주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했던 전직 대통령에게 공소시효를 늘리고 벌금을 받아내기 위해 추징법을 세우려 하자 ‘인권침해’ 운운하는 세상이다. 법이 범법자들을 오히려 보호하게 될 때 그 누가 그 법을 믿으려 할 것인가.

 

<구암 허준>을 보면서 현재를 개탄하게 되는 것은 허준이 걸어가는 그 올곧은 길이 이 시대에는 이미 사라져버린 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오로지 병자만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허준처럼, 오로지 국민만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정치인, 법조인, 공무원들은 기대하기가 어려운 세태일까. 병든 세상까지 고치는 허준의 이야기는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그만큼 크다.

이보영, <적도>를 거쳐, <서영이>를 넘어 <목소리>로

 

이보영. 사실 <적도의 남자> 이전 그녀가 무슨 작품을 했는지 기억하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미 2003년도에 데뷔해 드라마만 무려 16편을 찍은 그녀였지만 존재감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다. 이렇게 된 데는 그녀의 도도하면서도 심지어 차갑게까지 보이는 이지적인 이미지가 작용했다. 매력은 밖으로 발산되기보다는 안으로 꾹꾹 눌러졌다. 드레시한 옷을 입고 나오는 신데렐라는 그녀의 이지적인 모습과는 좀체 어울리지 않았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사진출처:SBS)'

<적도의 남자>는 비로소 이보영의 매력을 찾아냈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책을 읽어주는 여자. 중견기업의 딸로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가다 집안이 몰락하자 생활전선으로 뛰어나온 여자. 그래서 숨기려 해도 밖으로 드러나는 도도함과 이지적인 매력. 게다가 이 여자는 시각을 잃어버린 첫사랑과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는 여자다. 단단한 이성의 껍질로 고고하게 서 있는 여자가 어느 날 그 껍질이 깨지는 사랑 앞에 여성을 드러낼 때, 이보영의 매력도 활짝 피어났다.

 

<내 딸 서영이>는 <적도의 남자>의 이보영이 가진 매력을 고스란히 가져왔다. 가난하지만 똑똑하고 혼자서도 세상과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여자가 바로 서영이였다. “늘 아버지 행동이 자식들 위할 거라는 착각 이제 그만 좀 두세요.” 이 도발적인 대사는 아마도 이보영이 아닌 그 누군가가 했다면 더 큰 정서적인 논란이 생겨났을 지도 모른다. 서영이라는 인물의 정당성은 그래서 상당 부분 이보영의 이미지에 기댄 면이 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이제 이보영의 매력, 활용편이다. 이 드라마에서 이보영은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빈 구석(?)을 한껏 드러냈다. 국선변호사로서 공무원의 복지부동을 천연덕스레 연기하고,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 능력을 가진 어린 박수하(이종석) 앞에서 매번 속을 들키고 망가지는 모습은 심지어 그럼에도 여전히 도도해 보이는 이보영의 매력을 더욱 강조시켰다. 이보영은 드디어 자신의 매력을 어떤 식으로든 보여줄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시각장애인에게 책 읽어주는 여자와 두 차례나 연거푸 연기하게 된 변호사라는 직업은 이보영의 매력이 단지 섹시함이나 백치미 같은 여성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그녀는 심지어 보이시할 정도로 지적인 워킹 우먼으로 서 있을 때 그 매력이 배가 된다. 단색의 스커트에 소박해도 깨끗하게 빤 흰 블라우스만 입고 있어도 여성들의 워너비 의상이 되는 건 그 때문이다. 그녀는 치열한 생활 전선 속에서도 자신의 기품을 잃지 않는 능력 있는 여성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녀가 드라마에서 그저 멜로의 대상이 되는 여성에 머물지 않고 좀 더 사회적인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지적인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적도의 남자>에서 정의와 사회의 약자들에 대해 시선을 던졌고, <내 딸 서영이>에서는 부모 세대와의 갈등을 겪고 홀로서기 하는 젊은 여성들의 문제를 부각시켰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는 물론 달달한 연애에서 늘 진심이 들키는 여성이면서도 세상의 진실을 추구하는 국선변호사이기도 하다.

 

이보영의 멜로나 가족드라마가 사회적 소통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 것도 그녀의 이지적이고 능동적인 워킹 우먼의 이미지 덕분이다. 복수극의 틀 속에서 사회정의의 문제를 꼬집어낸 <적도의 남자>가 그렇고, 지극히 가족드라마의 공식 안에 있으면서도 그 무수한 세대 간의 사회적 소통을 가능하게 했던 <내 딸 서영이>가 그렇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아예 이 소통의 문제를 멜로와 사회극의 두 차원에서 다룬다.

 

긴 긴 무명생활의 <적도>를 거쳐 모든 세대를 아우르게 했던 딸 <서영이>를 넘어선 그녀는 이제 자신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때로는 차가울 정도로 이성적이고, 때로는 뜨거울 정도로 감성적이며, 때로는 귀여울 정도로 허술하면서, 때로는 꾹꾹 눌려 숨겨둔 슬픔이 밖으로 터져 나오기도 하는 그 냉정과 열정을 오가는 그녀가 냉혹한 현실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워너비가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인다. 현실과 싸우려면 이 정도의 당당함이 있어야 할 테고, 그 안에서도 행복을 찾으려면 그만큼의 지극히 여성적인 귀여움은 필수가 아니겠는가. 바야흐로 무수한 이보영들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꿈꾸게 되는 시대다.

<상어>, 복수극과 멜로 사이에서 길 잃었나

 

박찬홍 감독에 김지우 작가. 드라마를 좀 봤다 싶은 시청자들에게 이 이름은 각별할 것이다. <부활>과 <마왕>이라는 이들의 전작이 갖고 있는 아우라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이들 작품들은 시청률은 상대적으로 낮았지만 모두 웰 메이드 드라마라는 호평을 받았다. 심지어 당시로서는 너무 앞서가 보였던 꽉 짜인 스토리 전개를 시청률이 따라오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상어(사진출처:KBS)'

<상어>는 이들의 아우라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작품이다. 시작 전부터 김남길과 손예진의 합류로 기대감을 한껏 모았던 것도 전작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는 부정적인 영향도 존재한다. 그것은 전작들이 폭넓은 대중성을 확보하지는 못했다는 점. 따라서 마니아 드라마처럼 여겨지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시청률은 안 나와도 호평은 받는.

 

하지만 <상어>가 과연 마니아 드라마일까. 아마도 1,2년 전만 해도 그런 호칭을 받았을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이미 <추적자> 같은 작품이 복수극과 사회극의 접점으로써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싸인> 같은 작품 역시 형사물이나 스릴러는 드라마로서 성공할 수 없다는 편견을 뒤집은 바 있다. 그렇다면 <상어>는 이들 작품과 비교해 과연 웰 메이드라 말할 수 있을까.

 

<상어>의 이야기 구조는 <추적자>와 유사하다. 불편한 진실에 대한 접근방식이 그렇고, 복수극이라는 장르적 틀을 갖고 있는 것이 그렇다. <상어>가 결국 하려는 이야기는 ‘과거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이다. 서울중앙지검장 오현식(정원중)이 진실을 위해 과거를 파헤치려는 검사 며느리 해우(손예진)에게 “묻어둬. 과거란 들출 때만 존재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 작품의 메시지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즉 이 드라마는 우리의 근대사로부터 지금까지 남아있는 뿌리 깊은 과거사 청산의 문제를 한 가족사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 가야호텔그룹 회장인 조상득(이정길)은 그 과거사를 덮으려 하는 인물이고 그 과정에서 이수(김남길)와 가족은 죽음으로 내몰린다. 조상득의 손녀 딸인 해우는 조상득의 과거사와 연관된 오현식의 아들 준영(하석진)과 결혼함으로써 복잡한 가족 내의 숨겨진 갈등이 생겨난다. 기성세대들은 과거사를 덮으려하고 이수를 여전히 잊지 못하는 그의 친구(이자 여전히 연인)들은 그 과거의 진실을 파헤치려한다.

 

그리 복잡한 이야기도 아니고 어려운 이야기도 아니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전작과는 달리 주제의식을 향해 달려가기보다는 드라마의 대중적인 코드들에 더 충실해졌다. 이수가 돌아왔지만 본격적인 복수극이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몰라보는 이수와 해우 사이의 안타까운 멜로나, 이수와 준영 사이의 우정 또는 이수와 관계된 과거 인물들(동생, 친구 등)과의 만남 등에서 머뭇대고 있는 건 그 헤어진 이들이 다시 만나는 시퀀스들이 전형적인 드라마들의 성공방정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상어>의 연출력은 ‘웰 메이드’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만큼 단단하다. 또 이를 연기하는 김남길이나 손예진의 호연 또한 볼만하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스토리는 어딘지 너무 지지부진하게 여겨진다. 이수의 말 한 마디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해우로 하여금 과거의 그를 떠올리게 하고 그녀를 뒤흔드는 시퀀스들은 너무 반복되면서 지루해져버렸다. 이 드라마는 물론 과거의 불편한 문제를 다시 들춰내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드라마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건 어딘지 정체된 느낌을 만들어낸다.

 

<상어>는 멜로와 복수극이 얽혀있는 드라마다. 복수극이 드라마의 속도감을 만들어낸다면 멜로는 감정을 덧붙인다. 이 두 가지가 잘 엮어진다면 그 힘은 의외로 강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상어>는 멜로의 늪에 빠져 복수극이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진실을 파헤쳐야할 검사 해우의 혼돈과 방황에 드라마가 머물러 있는 셈이다.

 

이수의 복수극은 물론 여타의 복수극과는 다르다. 그것은 해우의 눈을 통해 자신의 가족사에 얽혀 있는 불편한 과거사를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우를 사랑하는 이수 역시 복수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 진실을 그녀 앞에 내놓으면서도 “도망치라!”고 분열되는 것. 이것은 마치 그리스 비극을 보는 것 같은 비장미를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감정에 드라마가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은 이 좋은 설정마저 지루하게 만들 수 있다.

 

“상어는 부레가 없어. 살기 위해선 끊임없이 움직여야 된대.” 이것은 이수가 처한, 진실을 밝혀야만 비로소 자신의 존재가 의미 있어지는 상황을 에둘러 말하는 것일 게다. 해우는 상어 조각을 만들어 이수에게 주면서 “눈에 보이진 않지만 부레도 만들어 줬어. 언제나 편안하게 숨 쉴 수 있게 하려고...”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수에 대한 해우의 사랑을 담고 있다. <상어>가 더 속도감이 있어지려면 안타까워도 해우가 달려 하는 부레를 떼어내야 한다. 그래야 끊임없이 움직일 수 있다. 상어처럼.

빵빵 터지다 먹먹해지는 실업청년들의 한 방

 

한음아 이따 저녁에 뭐 먹을래? 불고기 어때? 별론데? 그럼 숯불갈비 먹을까? 고기 말고 밥 먹자. 그럼 전주비빔밥 먹자. 그냥 참치 마요네즈 먹을래. 그래. 삼각김밥은 그게 최고야. 새로 나온 날치알 먹어봤냐? 그건 원 플러스 원 아니잖아.

 

'개그콘서트(사진출처:KBS)'

오성(김진철)과 한음(이혜석)이 캐치볼을 하며 이런 대화를 나누는 곳은 아마도 변두리 공터 어디쯤일 게다. 모두가 서울로 출근해서 텅 비어버린 한낮에 동네 한 귀퉁이에서 저녁으로 어떤 삼각김밥을 먹을까 고민하는 이들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희망조차 사치인 이들 실업청년들은 그 단단한 현실의 절망 덕분에 좀체 웃지도 울지도 화를 내지도 못하는 얼굴이 되어버린 듯하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답답한 현실이다. 2002년 월드컵의 감동을 이야기하다가, 그 감동이 월드컵 경기 때문이 아니고 당시 광화문 사거리에서 지갑을 주운 것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지갑 안에 들어있던 ‘만 사천 구백 원’을 그리워(?) 하며 “그 때처럼 막 쓰고 싶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빵 터지다가도 마음 한 구석이 저릿해진다.

 

모두가 누리거나 즐기는 어떤 것들이 이들에게는 생계가 되는 현실을 ‘오성과 한음’은 애써 무덤덤하게 표현한다. “오랜만에 해외에 나가서 바람이나 쐬고 오자”는 말에 “이번에도 새우 잡냐?”고 말하고, 클럽에 마치 놀러갈 것처럼 얘기하다가 “주방은 오천오백 원, 홀서빙은 사천구백 원”이라고 말하며, 차에 여자 태우고 여자 집에 간 친구에게 “좋았겠네”라고 말하자 “그럼. 일산은 대리비 2만원이거든”이라고 말하는 식이다.

 

심지어 보이스 피싱을 당하면서도 “다행히 구천 원은 인출이 안된다”며 안도하는 이들은 함께 근무하면서 월급도 제 때 나오고, 유니폼도 쫙 차려입고, 교회도 열심히 다녔던 ‘군대 시절’을 그리워하며 “아 다시 삽질하고 싶다”고 말한다. 가진 것 없고 미래도 보이지 않는 변두리 청년백수들이지만 이들이 보이는 허세는 그래서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들의 선명한 대비를 만들어낸다. 당장 로또 한 장 살 돈도 없으면서 10억이 돈이냐 말하는 허세가 그렇다.

 

너 로또 되면 10억 당첨 되면 뭐 할거야? 10억이 돈이냐? 요즘 10억 갖곤 강남에 집 한 채도 못 사. 그렇긴 하지. 10억 은행에 넣어봤자 한 달 이자 이백도 안 나와. 하긴. 너 이번 주 로또 샀어? 아직 돈 모으고 있는 중이야. 다음 주에는 같이 사러 가자. 그 때까지 무리야.

 

여자 친구도 없을 법한 그들이 그래도 자존심을 지키려 하는 여자 이야기는 그 대상이 온통 연예인들뿐이다. 김태희나 이민정, 한혜진, 이효리 같은 언감생심 꿈에도 못 꿀 연예인들을 끌어다 마치 사귈 것처럼 고민하는 대화는 그 엄청난 격차 때문에 큰 웃음을 주지만 쓸쓸함을 남긴다. “김태희와 자기가 사귀면 누가 더 아깝냐”는 말도 안 되는 질문에 그래도 친구라고 고민하는 모습이 그러하며, 모두 남자친구가 있다는 친구 이야기에 말이라도 “뺐을까?”하고 던져보는 허세가 쓸쓸하다.

 

어딘지 허무함까지 느껴지는 이들이지만 그 힘없는 캐치볼의 대화 속에는 세상을 향한 뾰족한 풍자들도 숨어 있다. 영어공부해서 미국 간다는 친구에게 가서 뭐할 거냐는 말에 “대변인.”이라고 천연덕스럽게 하는 얘기나, 욕을 막 하며 “취업 준비 중”이라는 친구에게 어디를 갈 거냐고 묻자 “우유회사”라고 하는 얘기, 또 끝말잇기에서 ‘아베’라는 단어가 나오자 “할 말이 없다..”고 속내를 드러내고 십센티의 ‘아메리카노’를 “아 베 아 베”로 부르는 친구에게 누구 노래냐고 묻자 “십 센티? 십팔 센티인가?”하고 말 장난 개그를 거는 식의 얘기가 그렇다. 현실에서 멀어져 있는 이들은 뒤틀어진 세태에 대한 공분을 저들의 언어 속에 담아낸다.

 

한음아. 넌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냐? 난 거위. 왜? 꿈이 있잖아. 넌? 난 갈매기가 될 거야. 왜? 새우과자 배터지게 먹을 수 있잖아.

 

거위나 갈매기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이들의 이야기가 어찌 우스울 수만 있을까. ‘오성과 한음’이 그리는 세태 풍자는 이처럼 한없이 맥빠진 허무의 세계를 보여주지만 그 깊은 허무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를 더 명쾌하게 보여주는 면이 있다.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애써 무덤덤한 듯 얘기하고 있는 이들의 처절함. 이것이 이 개그가 가진 빵빵 터지다가도 먹먹해지는 한 방이 아닐까.

 

<개콘>이 그간 직설화법으로 던진 세태 풍자들이 답답한 세상에 대한 속 시원한 일갈을 보여주었다면, ‘오성과 한음’은 그 한없는 무표정과 캐치볼처럼 하릴없이 반복되는 어눌한 대화를 통해 이들과 현실 사이에 놓여진 엄청난 괴리감을 실감하게 해준다. 오랜만의 <개콘>다운 풍자정신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을 다시 되살려낸 <개콘>의 현실감각이 반갑고 또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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