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크쇼, 이대로는 멸종하고 만다

 

지금 토크쇼는 전체적으로 위기다. <놀러와>가 5% 시청률에서 고전하다 성급하게도 폐지결정이 내려진 것은 작금의 토크쇼가 처한 상황을 잘 말해준다. 이 시대의 명MC인 유재석조차 <놀러와>를 ‘위기의 토크쇼’라고 자평하며 별의 별 노력을 다 했을 정도다. 한때 20%에 육박하는 시청률과 연일 방영 후 화제가 되던 <놀러와>를 생각해보면 이런 상황이 너무 갑작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무릎팍도사'(사진출처:MBC)

이런 상황은 <놀러와>에 강력한 대항마로 등장했던 <힐링캠프>도 마찬가지다. 이 프로그램은 한 때 새로운 토크쇼의 아이콘처럼 등장했지만, 어느새 하향곡선을 그리더니 지금은 겨우 7% 시청률에 머물러 있다. 화제성도 예전만 못하다. 무엇보다 연예인들이 게스트로 출연해 속 깊은 토로를 하는 것을 대중들은 어느새 식상해하고 있다. 심지어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던 연예인들조차 <힐링캠프>에 출연해 자기변호의 기회를 갖는 듯한 뉘앙스는 시청자들로서는 이 프로그램이 누구를 위한 ‘힐링’을 하고 있는 것인가를 되묻게 만들었다. 프로그램의 주인은 시청자다.

 

화요일 밤을 토크쇼 격전장으로 만들었던 <승승장구>와 <강심장> 역시 그 화려했던 시절이 하나의 추억거리로 남게 되었다. <승승장구>는 6% 대의 시청률에 머물러 있고 <강심장> 역시 7% 대 시청률까지 내려갔다. 하향 평준화된 상황이니만큼 경쟁의 느낌도 사라졌다. 이렇게 된 것은 이 토크쇼들이 너무 정체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승승장구>는 언젠가부터 KBS의 다른 프로그램 출연자들을 홍보하는 토크쇼가 되어버렸다. <1박2일>시즌2의 MC들이 하나하나 출연하고 <남자의 자격>에서 합창단을 이끌었던 금난새 지휘자가 출연하는 식이다. <강심장>은 MC를 신동엽으로 교체하면서 새로운 동력을 만들려 했지만 토크쇼도 아니고 그렇다고 버라이어티쇼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가 이제는 걸림돌로 작용하는 상황이다.

 

MBC가 목요예능의 잇따른 참패를 만회하기 위해 야심차게 강호동의 <무릎팍도사>를 새로 시작했지만 역시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첫 복귀에 9.3%의 괜찮은 시청률을 냈지만 다음 회에 7.8%로 떨어졌다. 이것은 역시 연예인 게스트가 출연해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 1인 게스트 토크쇼들에 대해 대중들이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과거 유일한 1인 게스트 토크쇼였던 <무릎팍도사> 시절을 반복하기에는 그 휴지기에 너무 많은 유사 토크쇼들이 나왔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목요일 밤의 강자였던 <해피투게더3> 역시 한때 위기의식을 느끼고 <개콘> 팀을 투입해 새롭게 토크쇼를 정비했지만 지금은 7-8%대의 시청률에 머물러 있다. 무언가 변화를 줘보려고 노력한 흔적은 역력하다. 하지만 그 기본 콘셉트가 다르지 않다. 과거 ‘쟁반노래방’이나 옛 친구를 찾는 ‘해피투게더-프렌즈’ 같은 완전히 다른 형태의 토크쇼가 아니라는 얘기다. 시청자들로서는 꽤 비슷한 형식을 반복해서 보는 듯한 인상이 짙다.

 

금요일 밤의 <고쇼>는 고현정이 MC로 나선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지만 역시 그다지 성공적인 토크쇼로 자리하지 못했다. 배역을 캐스팅한다는 콘셉트가 초기 흥미를 끌었지만 역시 토크쇼는 MC의 역량이 중요한 법이다. 윤종신과 정형돈이 옆에서 열심히 보조해주었지만 역부족. <고쇼>는 결과적으로 그 기대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지금 이 자리는 향후 이수근과 신현준의 후속 프로그램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한다. 과연 이건 괜찮은 선택일까.

 

그나마 KBS의 <안녕하세요>와 MBC의 <라디오스타>를 빼고 나면 이렇다 할 토크쇼의 성공적인 모습을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토크쇼는 왜 전체적으로 위기를 맞게 된 걸까. 그것은 이미 위에 열거한 내용들 속에 그 답이 나와 있다. 토크쇼가 너무 많은 탓이다. 우리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내내 토크쇼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게다가 몇몇 토크쇼는 MC만 다를 뿐 그 형식 또한 유사하다(이를 테면 <승승장구>나 <힐링캠프>, <무릎팍도사>는 그 외형은 달라도 1인 게스트 토크쇼가 갖는 대화의 방식은 유사하다). 그러니 대중들에게는 너무 유사한 토크쇼들이 반복적으로 소비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유재석이나 강호동, 또 백전노장이라고 하는 이경규가 MC를 맡는다고 해도 좋은 결과가 나오기 어렵다. 과당경쟁은 서로의 토크쇼 생명력을 갉아먹기 마련이다. 결국 해법은 토크쇼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주중 예능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만일 토크쇼를 계속 하겠다면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시도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게스트가 나오면 무슨 얘기할 지 뻔한 그런 토크쇼는 이제 대중들의 관심 밖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이 부분에서 <라디오스타>와 <안녕하세요>가 왜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토크쇼, 이대로는 모두 멸종하고 만다.

싸이가 부른 건 정말 ‘반미 랩’이었을까

 

언론에서는 여전히 싸이가 지난 2002년과 2004년 했던 랩과 퍼포먼스를 ‘반미’라고 표현한다. 미국 언론이야 자신들의 입장차가 있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해도, 우리 언론 역시 ‘반미’라 하는 것은 어딘지 잘못된 표현처럼 여겨진다. 물론 내용이 크게 보면 ‘미국에 반대’한 것이니 반미란 표현이 그다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특정 상황에 대해 특정 미국인을 비판한 것을 두고 ‘반미’라는 국가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건 너무 구태적인 국가주의적 발상이 아닐까.

 

사진출처:YG엔터테인먼트

싸이는 여기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반미가 아니라 반전의 의미였다”는 것. 미국을 비판하는 노래를 했다고 반미라 부른다면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던 무수히 많은 미국의 가수들(이를테면 밥 딜런 같은), 이라크 전에 반대했던 미국의 많은 저널리스트들 역시 반미주의자라고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는 이들의 행위를 반전이라 부르지 반미라 부르지 않는다.

 

싸이의 랩과 퍼포먼스는 무작정 벌어진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이유와 정황이 있다. 2002년 미군 탱크를 가지고 나와 땅바닥에 내동댕이친 퍼포먼스는 당시 우리네 여중생 미선, 효순양이 미군 탱크에 치여 사망한 사건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당시 가해자였던 장갑차 운전병 마크 워커와 관측병 페르난도 니노는 미 8군 군사법정에서 차례로 무죄 평결을 받고 간단한 사죄의 말을 남긴 채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또 2004년 싸이가 부른 랩은 당시 선교사 김선일 씨가 이라크 무장괴한에 피랍되어 무참히 살해당한 사건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넥스트 신해철이 발표한 ‘디어 아메리카’에 함께 참여해 파병 반대와 전쟁을 초래한 당시 부시 정권을 비판한 것. 이처럼 당시의 정황과 비판의 대상을 명확히 하면 싸이의 랩과 퍼포먼스를 그저 ‘반미’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게다. 실제로 당시 부시 정부의 이라크전을 반대한 지식인들도 상당히 많았고(<화씨 911>의 마이클 무어 같은) 그걸 지지하는 미국인들도 많았지 않은가.

 

싸이의 반미가 아닌 반전 행위는 예술가들이라면 당연한 일이고 그 표현 또한 제한될 이유가 없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싸이의 행위는 비난 받을 일이 아니고 의식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사회의 문제에 대해 강 건너 불구경 하는 것이 아니라 가수로서 참여하려 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한국 대 미국이라는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 때문에 곡해가 생긴다. 싸이가 비판한 것은 불특정 다수의 현재 모든 미국인이 아니고 2002년과 2004년 시점의 부시정권과 당시 사건에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던 몇몇 주한미군들이다. 이 특정 과거의 일을 소환해와 ‘반미’라 일반화 시키는 것은 너무나 큰 곡해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표현은 지나칠 정도로 과격했다. 당시 상황이 그만큼 격앙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싸이가 반복해서 사과한 것은 당시에 자신이 했던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과잉된 표현’이다. "선동적이고 부적절한 언어를 썼던 것에 대해 깊이 후회하고 있다. 내가 쓴 단어들로 말미암아 상처 받은 모든 분께 사과한다."는 것. 싸이 측은 또 "당시 공연 자체에 대한 사과가 아니라 과도한 단어를 사용해 어느 누구라도 상처를 받게 했다면 그런 여지를 둔 부분에 대한 사과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것은 정확히 말하면 사과라기보다는 해명에 가까운 것이다. 굳이 ‘후회’니 ‘사과’니 하는 단어를 쓰는 것은 이 사안에 대해 정서적인 대응을 하기 위한 것이었을 게다. 중요한 것은 싸이의 이번 사태가 현 달라진 국가를 뛰어넘는 문화 교류라는 새로운 흐름과 구태적인 민족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사고방식의 부딪침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세상은 이미 지구촌화되어 한국말로 부른 노래가 미국 빌보드 차트 2위에 랭크되는 시대지만, 여전히 국가 대 국가라는 잣대로 반미니 친미니 하는 옛 단어들이 자꾸만 끄집어 올려진다.

 

국가를 뛰어넘어 바라보면 ‘반미’라는 국가를 나누는 표현은 ‘반전’이라는 지구를 하나로 묶어내는 표현으로 바뀔 수 있다. 국가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지구촌의 잘못된 일들에 반대하는 일을 자꾸만 국가주의로 몰아넣는 일은 다분히 퇴행적인 행위다. 이렇게 국가주의를 뛰어넘는 시각은 그래서 향후 한류 같은 국제적인 문화교류의 과정에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일이다. 싸이가 부른 건 ‘반미 랩’이 아니다. 싸이가 사과한 건 당시 했던 반전 퍼포먼스 그 자체가 아니다. 곡해하지 말자.

시청률은 지표일 뿐, 살생부가 될 순 없다

 

아마도 시청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프로그램은 없을 게다. 그것은 유재석이라는 발군의 MC가 무려 9년 동안이나 이끌어온 장수 프로그램 <놀러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시청률이 빠진다고 폐지 결정이라니. 그것도 제작진이나 출연자와의 고민은커녕 일방적인 통보라니 그간 함께 고생해온 시간에 대한 예의조차 없는 행동이다.

 

'놀러와'(사진출처:MBC)

시청률 하락은 분명 시청자가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가 맞다. 하지만 그것이 프로그램을 폐지하라는 신호는 아니다. 특히 <놀러와>처럼 오랜 시간을 끝없이 변신과 진화를 거치며 버텨내온 프로그램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MBC라는 몸통에 병이 나서 <놀러와>라는 손가락이 예전처럼 잘 움직이지 않는다고 그 손가락을 잘라내는 게 방법일 수는 없지 않나.

 

물론 아예 가능성조차 없는 프로그램이라면 폐지 수순을 밟는 것이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놀러와>는 다르다. 그 동안 달라진 예능 트렌드 속에서 위기를 맞기도 했었지만 이 토크쇼는 특유의 ‘착한 토크 방식’으로, 또 편안함을 무기로 시청자들을 다시 끌어 모았고, ‘세시봉 콘서트’ 같은 음악과의 접목을 통해 토크쇼의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위기 대처 능력이 충분히 있다는 방증이다.

 

이것은 최근 <놀러와>의 변화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새롭게 시작한 ‘트루맨쇼’가 좀 더 솔직한 남자들의 이야기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얻어가고 있고, ‘수상한 산장’ 역시 지금껏 시도하지 않았던 ‘잠자리 토크(?)’로 주목을 끌었다. 유재석이 ‘위기의 토크쇼’라고 말할 만큼 <놀러와>에 대한 위기의식은 MC들조차 공유하고 있는 상황이다. 모두가 그 위기를 넘어서려 노력하고 있는 프로그램의 폐지결정은 자칫 MBC의 다른 프로그램들에게도 찬물을 끼얹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잘 나가던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떨어진다면 정확한 그 원인을 찾아 변화를 모색해봐야 할 일이지, 애꿎은 프로그램을 희생양으로 내세울 일이 아니다. MBC가 가진 가장 큰 문제는 경영진들의 ‘내 탓이요’ 마인드가 부재하다는 점이다. 자신들은 잘못한 게 없고 모두가 제작진의 문제이고, 파업의 여파 때문이라는 식이다. 위기에 있어서 좋은 수장과 나쁜 수장의 차이는 그 집단의 문제에 스스로 책임을 지느냐 아니면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느냐의 차이다. 과연 현재의 MBC 경영진들은 좋은 수장의 역할을 하고 있을까.

 

만일 시청률표를 하나의 살생부로 들고 다니며 휘두른다면 MBC에 남아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몇 되지 않을 게다. 시청률은 시청자의 마음을 읽는 지표로 활용해야지, 그것이 가진 차가운 숫자와 그로 인한 방송사의 수익 그리고 그로인한 경영진의 정치적인 입지의 문제로만 읽어내면 문제가 발생한다. 지금 시청자들의 마음이 MBC로부터 떠나는 것은 일선에서 고생하는 제작진들이나 프로그램 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 시청자들이 사랑했던 MBC의 모습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들고 있는 일부 MBC 정책결정자들의 잘못된 일련의 선택들에서 비롯된 것이다.

 

MBC가 버려야 할 것은 <놀러와> 같은 변화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MBC가 버려야 할 것은 날 선 비판의식을 갖고 대중들의 눈과 입이 되어주었으나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기자들과 PD들이 아니다. MBC가 버려야 할 것은 시청률이 바닥을 치는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유재석처럼 열심히 노력해온 MC들이 아니다. MBC가 버려야 할 것은 일부 경영진들의 내 탓은 없고 남 탓만 하는 마인드다. 시청자들의 이반된 정서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 마음이다. 유감스런 <놀러와> 폐지로 인해 더 이상 MBC에 놀러가지 않겠다는 시청자들의 이 정서를.

<청담동>이란 이상한 나라에 앨리스가 온 까닭

 

청담동은 ‘이상한 나라’다. 거기서는 백 하나의 가격이 누군가의 몇 달치 월급이고 옷 한 벌이 누군가의 일 년치 봉급이다. 그런데도 물건이 없이 못 팔 지경이다. 아니 심지어 가격을 더 높이면 높일수록 사람들이 더 몰려든다. 그래서 드라마 <청담동 앨리스>에 등장하는 아르테미스 코리아라는 명품(사치품?) 브랜드의 이제 겨우 33세 회장인 차승조(박시후)는 가격을 끊임없이 더 올리라고 한다. 결국 이 명품의 탈을 쓴 사치품은 가격과 상품의 질 때문이 아니라 ‘공포’ 때문에 팔리는 것이기 때문이란다. 살 수 없으면 살 수 없을 것만 같은 공포감.

 

'청담동 앨리스'(사진출처:SBS)

이 부자들의 섬 같은 청담동이라는 이상한 나라에 앨리스 한세경(문근영)이 들어온다. 그녀는 전형적인 88만원 세대. 등록금 대출로 대학 졸업과 동시에 빚쟁이가 되고 여기저기 취업전선을 뛰어다니지만 해외유학을 다녀오지 못한 약한 스펙으로는 취업이 어렵다. 게다가 남자친구는 쓰러진 어머니의 병수발을 하다 빚더미에 올라앉고 범법행위를 한 후 도망자 신세가 되어버리고, 부모님은 대기업들의 횡포에 점점 기울어가는 골목상권의 피해자가 되어간다. 한쪽은 껍데기에 불과한 옷 한 벌에 수백 만 원을 펑펑 쓰고, 다른 한쪽은 돈 몇 푼이 없어 빚쟁이로 쫓겨 다니는 이 기묘한 세상. 청담동은, 아니 이 나라는 ‘이상한 나라’다.

 

청담동이 이상한 나라가 된 건 태생적으로 모든 게 결정되어버리는 양극화된 빈부의 삶 때문이다. 한세경은 “노력이 나를 만든다”는 신념으로 살아왔지만 그녀에게 직장상사인 신인화(김유리)는 혹독한 현실을 일깨워준다. 한세경의 노력으로도 될 수 없는 것.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은 바로 ‘태어날 때부터 결정된 삶에 의해 생겨나는 안목’이란다. 즉 한세경의 부족한 스펙이란 유학을 다녀오지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유학갈 형편이 되지 않는 삶을 살아오면서 갖게 된 낮은 안목이라는 것.

 

결국 “노력이 나를 만든다”는 신념이 그저 ‘희망고문’이 되어버리는 이 이상한 나라를 보고는 절망하는 한세경에게 그녀의 아버지는 더 절망적인 이야기를 해준다. 노력해도 안 된다는 것을 몰라서 꿈이나 희망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아버지는 이미 노력해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헛된 꿈이나 희망이라도 갖고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현실을 말한다. 아버지의 이 고백은 이제 청담동에 발을 딛고 현실을 바라보기 시작한 한세경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만들어버린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남편 잘 만나 청담동 사모님이 된 고등학교 동창 서윤주(소이현)와 한세경은 빈부의 양극단에 서서 만나게 되고 둘은 서로 부딪치게 되지만 어쩌면 그 둘은 똑같은 앨리스인지도 모른다. 서윤주 밑에서 심부름을 하며 굴욕을 당하던 한세경이 어느 날 찾아와 서윤주의 과거를 꺼내 협박하며 자신도 어떻게 하면 너처럼 될 수 있냐고 묻는 장면은 그래서 흥미롭다. 도무지 성장의 사다리는 보이지 않는 사방이 막혀져버린 막막한 현실 속에서 한세경이 청담동 며느리를 꿈꾸는 것은 어쩌면 과거 서윤주가 선택했던 그 길일 수 있다.

 

사랑조차 돈이 있어야 되는 이 현실을 한세경은 받아들인 것(그 선택이 끝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지만). 하지만 정반대의 인물도 있다. 돈을 찾아 떠나버린 서윤주와 결혼까지 했지만 버림받고 절치부심해 아르테미스 코리아 회장으로 돌아온 차승조가 그렇다. 그는 ‘돈이 전제되지 않은 사랑은 없다’고 말하는 이 이상한 나라에서 한세경의 순수한 사랑을 목도하고는 펑펑 눈물을 흘린다. 물품을 빼돌려 고소위기에 몰린 남자친구를 위해 차승조에게 한세경이 보낸 적금통장과 편지는 돈의 또 다른 가치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사치와 과시에 불과한 돈이지만, 그 적금통장 속에 알알이 적혀진 사연들은 한세경의 한없이 순수한 사랑의 표징이니까.

 

과연 한세경은 앨리스가 될 것인가 아니면 신데렐라가 될 것인가. 청담동 며느리가 된 서윤주가 신데렐라를 꿈꾸며 사랑 따윈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인물이라면, 그녀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한세경 역시 그 신데렐라가 되고 말 것인가. <청담동 앨리스>는 바로 이 한세경이 신데렐라의 유혹을 느끼면서도 앨리스로 돌아오길 바라는 그런 드라마다. 정체성의 혼란으로 한 바탕 청담동이라는 이상한 나라를 경험하지만, 결국은 자기가 살던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런 앨리스. 이 절망적인 현실을 그녀는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앨리스를 지켜주고 싶은 그 마음은 아마도 이 드라마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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