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 진짜 짝짓기 프로그램의 자극

'짝'(사진출처:SBS)

짝짓기. '동물의 암수가 짝을 이루거나, 짝이 이루어지게 하는 일. 또는 교미하는 행위.' 이 단어는 사람들의 만남에 쓰이는 게 아니다. "짝짓기를 합니다" 흔히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그램에서 듣는 단어. 그런데 우리는 남녀가 나와 서로에 대한 속마음을 드러내고 마지막에 가서 커플이 되는 그런 프로그램을 '짝짓기 프로그램'이라고 부른다. 사실 의미 그대로 생각해보면 이 '짝짓기 프로그램'이라는 지칭 속에는 이 자극적인 성향에 대한 약간의 비판적 뉘앙스가 들어있는 셈이다.

'사랑의 스튜디오'나 '산장미팅 장미의 전쟁' 같은 예전 짝짓기 프로그램 속에도 일반인들의 사생활 노출이나 꺼내기 민망한 속내를 끄집어내는 자극적인 구석은 늘 있어왔다. 하지만 이들 프로그램에는 어떤 안전장치 같은 것이 있었다. 즉 프로그램은 물론 실제상황이지만 그 상황이 다분히 게임적인 틀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누가 누구를 선택하느냐에 대한 '짝짓기'적 시각의 자극은 바로 이 게임처럼 다루어지는 틀로 인해 어느 정도 용인되었다. 게임이란 출연자들이 속내를 드러내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숨길 수 있는 도구도 됐던 셈이다.

하지만 '짝'은 다르다. 이 프로그램은 지금껏 본격적으로 지상파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리얼리티쇼'의 첫 얼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얼리티쇼가 전 세계적인 트렌드이면서도 우리네 지상파에서 시도되지 않았던 것은 그 일반인들의 사생활을 낱낱이 드러내는 그 정서가 어딘지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짝'의 출현은 다큐멘터리로 시작됐다. 마치 남녀의 심리를 탐구하는 다큐처럼 애정촌에 일단의 남녀를 투입하고 그들 사이에 일어나는 화학작용을 약간의 분석적(?) 시각으로 만들어냈던 것.

하지만 이것은 본격적인 리얼리티쇼의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시청자들은 그것이 다큐멘터리라기보다는 리얼리티쇼에 가깝다는 것을 '감지'했고, 그러자 아예 '짝'은 노선을 바꾸었다. 어느 정도의 논란을 감수하더라도(어쩌면 논란을 활용하면서), 본격적인 진짜 '짝짓기 프로그램'을 선보이려 한 것이다.

마치 해외의 도촬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이 그런 것처럼 애정촌에 남자들와 여자들이 들어오고 그들이 하는 지극히 사적인 행위에 카메라가 달라붙는다. 그 사이에 벌어지는 지극히 본능적인 욕망들이 그들의 행동과 말에 의해 노출된다. 일반인 사생활 노출이 갖는 자극을 극대화하는 것. 게다가 간간히 제작진은 그들의 속내를 끄집어내기 위한 미션을 부여한다. 이것은 남녀의 심리를 파악하겠다는 연구의 목적을 갖는다면 어떤 실험적인 다큐멘터리가 될 수 있지만, 그 자체를 자극으로 끄집어내 보여주겠다고 하면 노골적인 '짝짓기' 중계가 된다. 성행위가 없지만(해외의 리얼리티쇼는 이것도 보여준다), 구애행위를 하는 그들의 모습 역시 본능을 바라본다는 점에서는 큰 자극인 셈이다. 게다가 때로는 자극적인 속내를 꺼내기 위해 익명성을 장치로 사용하기도 한다. 쪽지에 각자 궁금한 점을 적고, 그것을 무작위로 뽑아서 남자를 세워두고 질문하는 건 그래서 대단히 자극적인 장치가 된다. 이런 미션에서, '속궁합'에 대한 질문이 나오는 건 그래서 놀랄 일이 아니다.

이름이 아니고 남자○호, 여자○호로 불리는 것은 분명 그들의 최소한의 사생활을 지켜주기 위한 장치다. 또 가끔씩 거기 출연자들의 행위나 말을 통해 남자와 여자의 일반적인 심리론을 덧붙이는 것도 자극을 유화시키기 위한 장치다. 하지만 이것은 장치이자 명분이기도 하다. 진짜 '짝짓기'를 날 것으로 보여주기에는 아직 대중정서가 이를 용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적당한 포장이 필요한 것이다.

'짝'은 자극적이다. 우리가 막연히 감추어놓았던 그 사적인 것들을 카메라가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적인 것들은 결혼이나 사랑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남녀 관계의 세계를 '짝짓기'의 본능적인 세계로 바라보게 만든다.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거기 출연자들은 어쩌면 우리들의 욕망을 대리할 수 있는 캐릭터이기도 한데, 그들의 사생활이 벗겨지는 것은 또한 우리들이 숨겨놓은 사생활이 벗겨진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판단이 만들어내는 논란은 끝이 없다. 하지만 그럴수록 본능을 바라보고픈 욕망도 커져가는 것이 사실이다. '짝'은 어쩌면 전통적으로 용인된 짝짓기 프로그램의 연장선 위에서 우리 방송에는 좀체 들어오기 힘들었던 리얼리티쇼를 조금씩 중독시키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짝'이 향후 점점 더 많아질 지상파의 리얼리티쇼의 첨병처럼 여겨지는 건 그 때문이다.

인순이, 무엇이 그녀를 '나는 가수다'라고 외치게 했나

'나는 가수다'(사진출처:MBC)

인순이는 누가 봐도 전설이다. 그녀가 지금껏 해온 삶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녀는 희자매라는 당시로서는 흔치않은 걸 그룹으로 데뷔했고, 혼혈의 편견이 여전할 때 솔로로 홀로섰다. 오로지 실력으로 KBS 7대 가수상을 수상했고, 이제 잊혀지는가 싶을 정도로 10여년 간이나 활동을 접고 있다가 조PD와 함께 발표한 곡 '친구여'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또 '거위의 꿈'은 원더걸스의 '텔미'를 누르고 '뮤직뱅크'에서 1위를 차지했고, 2010년 발표한 '아버지'라는 곡은 당시 라디오 방송횟수에서 이효리나 비 같은 젊은 가수들을 누르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나는 가수다'의 무대에 섰다. 그녀가 이 무대에 선다고 했을 때 '나가수 자문위원회'에서는 심지어 이를 반대하기도 했다. '전설은 전설로 남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뒤집은 건 인순이의 '가수 선언'이었다. 자신은 늘 현역 가수로 남고 싶다는 것. 그래서 그녀는 '나는 가수다'에 올랐다. 어쩌면 그 제목이 자신의 존재증명이라도 된다는 듯이. 그렇게 전설은 다시 가수로 돌아왔다. 여전히 긴장되고 여전히 설레는 무대 위에서 온몸을 던져 노래 부르는 그녀는 진정한 가수였다.

전설. 혹은 레전드. 정말 달콤한 말이다. 하지만 달콤함만큼 씁쓸함도 있는 말이다. 전설이라는 말 속에는 어딘지 과거형의 뉘앙스가 살아있다. 그래서 전설로 추대되면 그 남긴 공적에 존경을 받을 수는 있지만(물론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현재형을 희생해야 한다. 전설은 누군가의 기억으로 되살아나는 존재이지, 지금 현재 자신의 힘으로 현재의 관객과 소통하는 존재는 되기가 어렵다. 인순이가 버린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녀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선택했다.

이것은 그녀가 지금껏 살아온 삶의 행보 그대로다. 그녀는 늘 현재를 선택해왔다. 희자매가 꽤 인기를 끌었을 때도 자신의 가창력은 혼혈이라는 이질적인 외모에 가려 대중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홀로서기를 선택했다. '밤이면 밤마다'로 엄청난 인기를 얻고는 갑자기 달라진 가요계 환경 속에서도 밤무대에 서서 노래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다시 복귀한 무대가 '가요무대'나 '열린음악회'만이 아니라 '뮤직뱅크' 같은 현재형 무대였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그녀는 또 지금 현재를 선택했다. '나는 가수다'라는 현재형 무대를.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현재형 무대에 머물도록 만들었을까. 인순이라는 조금은 낯선 이름을 고집하면서 그녀는 왜 그토록 과거로 매몰되거나 한때 '노래 잘하는 혼혈 가수가 있었다'는 기억 속에 머물기를 거부했을까. 그것은 어쩌면 자신이라는 존재의 증명을 위한 안간힘이었을 지도 모른다. 태어날 때부터 거부되는 존재처럼 치부된 세상을 향해, 그녀는 "나는 인순이다!"라고 외치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가 지금 무대 위에서 부르는 노래는 그 어떤 설명을 들려주지 않아도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아버지'라는 심금을 울리는 노래나 심지어 댄스곡인 '난 괜찮아' 같은 노래마저도 특별하게 들리는 것은 그 노래를 다름 아닌 이미 전설이 되도 좋을 만큼 많은 삶의 질곡을 겪어온 현재형 가수 인순이가 부르기 때문이다.

전설이 되긴 쉬워도(물론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모두가 전설이라 부를 때 그것을 거부하고 "나는 가수다!"라고 선언하는 건 더 어려운 일이다. 인순이는 그 어려운 일을 현재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하고 있다. 인순이 같은 거목과,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젊은 가수들이(상대적으로) 같은 무대에 서는 것이 가능한 건, 오로지 박제된 상찬을 버리고 스스로 무대로 내려온 가수 인순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녀는 가수다.


의외로 큰 '슈스케' 효과, 지상파까지?

'슈퍼스타K3'(사진출처:Mnet)

'슈퍼스타K2'의 성공은 신호탄에 불과했던가. '슈퍼스타K3'는 단 3회만에 10% 시청률을 넘겨버렸다. 많은 이들이 엄청난 수치의 시청률에 놀라지만, 그 시청률이 함의하는 것은 사실 더욱 놀랍다. 이것은 늘 한계로 지목되던 케이블이 지상파를 뚫는 것이 가능한 일이며, 또 그 방법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방법은 말 그대로 역발상이다. 케이블이 가진 한계를 장점으로 바꾸는 것. 그 마니아적인 속성을 특성으로 만드는 것. 이것은 '슈퍼스타K3'의 면면에서 드러난다. '슈퍼스타K2'의 엄청난 성공은 '슈퍼스타K3'의 변신을 예상하게 한 것이 사실이다. 즉 그 정도의 시청률이라면 마니아적이고 케이블적인 특성을 벗어나 좀 더 보편적이고 지상파적인 점잖음(?)으로 돌아올 것만 같았다. 그래야 지상파 시청자들의 유입을 좀 더 끌어올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예상은 멋지게 빗나갔다. '슈퍼스타K3'는 '슈퍼스타K2'보다 더 케이블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 편집을 통한 연출은 더 독해졌고, 따라서 지상파라면 분명 피했어야 하는 자극적인 상황은 오히려 더 도드라졌다. "독설의 시대는 갔다"고 선언한 이승철의 심사는 딱히 독설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여전히 강했다. 즉 독한 직설이지만 너무나 공감가는 지적이기에 듣는 사람마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그런 심사였다. 이만한 자극과 재미를 대체할 수 있는 지상파 프로그램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슈퍼스타K3'는 케이블의 특성을 극대화했다.

그러면서도 아낌없는 제작비를 쏟아 부음으로써 프로그램이 지상파 못지않은 세련됨을 유지하려 애썼다. 즉 이것은 케이블이 지상파가 되려한 것이 아니라, 지상파가 못하는 부분을 해냄으로써 지상파를 넘어서려 한 것이다. 지상파의 보편적인 시청층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의 입맛에 맞게 지상파를 흉내 내기보다는, 이미 보게 된 지상파 시청자들을 거꾸로 케이블에 중독시키는 방식이다. 이 도전의 성패는 이미 '슈퍼스타K2'를 훌쩍 넘겨버린 '슈퍼스타K3'의 시청률이 말해주고 있다. 많은 이들은 이미 '슈퍼스타K3'를 통해 케이블적 감성이 주는 묘미를 체감하고 있다.

이것은 '슈퍼스타K3'라는 프로그램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딘지 자극적이고 어딘지 싸 보이기도 하지만 어딘지 계속 보고 싶은 그 케이블적 감성으로 보편적 시청층들(지상파 고정 시청자들 같은)을 끌어오려는 CJ E&M의 행보는 이미 시작되었다. 종편시대에 접어들면서 벌어진 스카웃 전쟁 속에 종편도 아닌 케이블인 CJ E&M이 뛰어든 것은 그저 시류에 편승한 포석이 아니다. 오히려 거기에는 종편보다도 더 거시적인 CJ E&M의 야심이 숨겨져 있다.

CJ E&M이 KBS의 간판급 예능 PD들, 예를 들면 '1박2일'과 '남자의 자격'을 세팅한 이명한PD나 '남자의 자격'의 신원호PD, 그리고 '개그콘서트'의 김석현PD를 영입한데는 단지 그들의 능력을 높이 샀다는 통상적인 선택의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이른바 스타PD다. 즉 자신의 이름으로 시청자층까지 끌어 모을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얘기다. 게다가 이들은 모두 KBS라는 보수적인 고정 시청층을 확보한 방송사의 PD였다. 그들이 케이블로 온 것이다. tvN이라는 케이블 자체제작방송사의 대명사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지상파 시청자들의 유입은 이들 스타PD들의 이름만으로도 어느 정도 담보될 수 있는 상황이란 얘기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그렇게 지상파에서 익숙했던 이명한PD나 신원호PD의 프로그램을 기대하고 온 시청자들은 거기서 과연 지상파스러운 그들의 프로그램을 볼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다. 그 곳은 이미 CJ E&M이라는 케이블 소속이 아닌가. 게다가 이것은 '슈퍼스타K'가 준 교훈이기도 하다. 오히려 가장 케이블적인 방송이어야 케이블에서 더 먹힌다는 것. 그러니 지상파에서 이적한 스타PD들은 지상파의 시청자들을 끌고 오지만 결과적으로는 케이블적인 감성을 전파하게 될 공산이 더 크다. '슈퍼스타K'가 그런 것처럼.

지상파보다 더 강하고 자극적이지만 어느 정도의 격조를 담보한 케이블의 반격은 이미 시작됐다. 그 첨병에 '슈퍼스타K'가 서 있고, 새로 이적한 지상파 스타PD들이 그 뒤를 준비하고 있다. 이것을 촉발한 프로그램이 바로 '슈퍼스타K'다. 즉 '슈퍼스타K'는 시청률만으로는 추산할 수 없는 효과를 케이블에 가져온 셈이다.


'혹성탈출', 원숭이의 시점으로 바라보니

'혹성탈출'

원숭이들이 지배하는 세상? 1968년에 나왔던 '혹성탈출'을 TV로 보며 자란 세대라면 '혹성탈출'이라는 제목에서 먼저 이런 생각이 떠올랐을 지도 모른다. 무너진 자유의 여신상으로 집약되는 그 옛 영화에서 우리는 원숭이들에 의해 우리에 가두어진 인간들을 충격적으로 바라봤었으니까. 하지만 2011년 '진화의 시작'이라는 부제를 달고 돌아온 '혹성탈출'은 '진화'라는 그 키워드에 더 집중한다.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가의 얘기가 아니라 진화는 어떻게 일어나고 그 결과는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를 이 영화는 영화적 상상력으로 흥미롭게 풀어낸다.

애초부터 시저라는 챔팬지가 자신이 떼어낸 목줄을 인간의 목에 걸 의도는 없어 보인다. 결국 갇혀있던 우리를 빠져나와 세상을 일대 혼돈으로 몰아넣는 그 장면들 속에서도 그는 인간을 죽이려는 다른 유인원들에게 "안돼!"하고 소리친다. 즉 시저와 유인원들의 반란(?)은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인간들의 욕망에 의해 우리에 갇힌 시저와 유인원들은 자신들의 집(정글,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것뿐이다.

흥미롭게도 원숭이가 인간을 압도하며 이 지구라는 생태계에 새로운 최강자로 서게 되는 것은 바로 저 진화에 의한 자연선택의 결과다. 인간은 과학의 이름으로 생태계를 교란시켰고, 그래서 환경이 바뀌었으며, 다만 그 바뀐 환경에서 인간보다 원숭이들이 더 잘 적응해낸 것뿐이다. 즉 인간의 추락은 인간 스스로 판도라 상자를 열어버림으로 해서 생겨난 진화의 결과라는 얘기다.

'인간보다 나은 원숭이와 원숭이보다 못한 인간'이라는 풍자는 어딘지 고전적(?)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원숭이 사냥을 벌이는 인간을 먼저 보여주고 그렇게 잡힌 원숭이의 눈 속으로 카메라가 들어가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인간의 시점이 아니라 원숭이의 시점으로 이 영화가 흘러간다는 복선이다. 그래서 한참 영화를 보다보면 인간이 아닌 원숭이의 편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이 영화를 즐기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인간은 똑똑한 원숭이들을 싫어해.' 우리에 갇힌 시저에게 누군가 건네는 이 말은 우리가 원숭이 같은 유인원을 바라보는 양가적 감정을 잘 드러낸다.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유인원을 보며 친근감을 느끼는 동시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들이 지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우면서도 그들이 어쩌면 우리와 같은 뿌리라는 것에 불쾌감을 느낀다. '혹성탈출'은 이 친근하면서 놀랍지만 섬뜩하고 두려운 유인원이라는 존재에서 시작해 차츰 그 내면으로 들어간다. 두려움 때문에 자연을 수정하고 인공적으로 만들려는 인간의 욕망은 원숭이들의 눈으로 바라보면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폭력이다.

그래서 시저의 눈으로 그 폭력적인 인간을 바라보다가 결국 우리를 빠져나와 유리창을 깨고 자동차를 막아 세우며 도시를 질주하는 유인원들의 광경은 놀랄만한 스펙터클의 쾌감을 안겨준다. 만일 이것이 테러리스트들과 대결을 벌이는 형사물이라면 이러한 파괴는 불쾌감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유인원들이 인공을 마구 헤치고 달리는 장면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우리에게 안긴다.

결국 2011년에 다시 돌아온 '혹성탈출'의 힘은 바로 이 시점의 이동에서 생겨난다. 우리는 시저라는, 지능이 인간보다 뛰어난 침팬지의 가면을 쓰고 도시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자 도시가 가진 그 답답함과 저들의 욕망을 토대로 축조된 세상의 부조리함이 보이게 된다. 병을 정복한다는 명분으로 유전자를 마구 조작하고, 인공적인 도시의 안락함 속에 자연조차 우리에 가둬 전시하는 인간의 욕망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1968년에 만들어진 '혹성탈출'의 그 '혹성'이 지구를 제 3자화해 그곳을 '탈출하고픈 어떤 곳'으로 그려낸 것처럼, 2011년 '혹성탈출' 역시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시저의 눈으로 바라본 탈출하고픈 도시가 지구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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