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영화의 새장 연 ‘식객’, 그 아쉬움

허영만 화백의 ‘식객’이란 원작만화는 일본의 ‘미스터 초밥왕’이나 ‘맛의 달인’을 보며 입맛을 다셨을 독자들에게 우리네 입맛을 되돌려준 고마운 작품이다. ‘우리 음식의 재발견’이라 할 정도로 만화는 철저한 사전 취재와 실제사례들을 통해 생생한 우리네 맛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반응은 폭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것을 영화화한 ‘식객’은 기본적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고 들어가는 이점을 갖고 있다. 게다가 ‘식객’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된 요리영화라는 점에서 먹고 들어가는 영화다. 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 ‘담뽀뽀(1986)’가 있다면 중국에는 ‘금옥만당(1995)’, ‘식신(1996)’이 있고 우리에게는 ‘식객’이 있다고.

그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영화는 초반부에 운암정 후계자를 뽑는 대결에서 봉주(임원희)에게 패배한 성찬(김강우)이 시골집에서 자신을 찾아온 진수(이하나)와 국장에게 밥상을 차리는 장면을 보여준다. 손수 지은 밥에 된장찌개, 각종 반찬에 누룽지까지 이 영화의 첫 번째로 등장하는 밥상은 화려하진 않아도 우리네 요리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면들이었다.

하지만 원작의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아니면 너무 많은 걸 보여주려 한 탓일까. 원작 만화가 가진 에피소드들을 한 편의 영화로 묶어내는데 있어서 ‘식객’은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다. 그 중심적인 모티브를 원작만화의 미덕이었던 이 서민적인 밥상에 두지 않고, 성찬과 봉주의 ‘요리대결’로 가져가면서 영화는 정작 주목해야할 요리들을 소외시킨다.

이것은 저 ‘담뽀뽀’가 가진 일본식 사연 중심의 스토리와 ‘금옥만당’, ‘식신’이 가진 중국식의 과장된 대결구도를 적절히 봉합한 듯한 느낌을 준다. 원작만화가 천착하려 했던 요리에 대한 치열한 접근이 빠져버리자, 요리 자체와 요리와 관계된 사연을 가진 인물들의 관계는 겉돌게 된다. 그나마 이 부분이 맞아떨어지는 곳은 원작만화에서도 백미로 꼽히던 ‘고구마 에피소드’에서이다.

영화의 사건들은 생활과 생계, 혹은 삶과 연계된 요리 이야기를 배제하고, 대결구도 속에서 이기기 위해 만들어내야 하는 과제로서의 요리 이야기로 흘러간다. 스토리가 극단적으로 한일 간의 민족주의적 색채마저 띄게 되는 것은 영화가 선택한 대결구도라는 장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대결구도 속에서 요리가 화려해질수록 사람 손길이 닿은 서민적인 밥상이 주던 훈훈한 감동은 점점 사라진다.

허영만 화백의 ‘식객’이 감동을 주었던 것은 그 안에서 다루던 음식이 특별난 것이 아닌 서민들의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속 대사에서도 등장하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의 수는 세상의 어머니의 숫자와 같다”는 말은 사실상 허영만 화백이 가진 음식에 대한 생각이다. 그러니 ‘식객’의 진짜 묘미는 요리사들의 대결 이야기가 아닌 서민들의 이야기에 있다. 거기 들어있는 요리가 맛있고 심지어 감동까지 주는 것은 요리는 물론이고, 그걸 만든 사람의 손길이나 마음이 닿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부분은 원작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감독 나름의 선택이 달랐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만화원작과 영화를 너무 비교하는 관점에서 본 결과일 수도 있다. 실제로 영화 ‘식객’은 만화원작에서는 보이지 않던 도시와 시골, 상류층과 서민의 대결구도를 끄집어내 괜찮은 우리 식의 요리 영화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상품화되어 대량생산되는 요리와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요리의 대결구도를 가져가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것 역시 영화 속에서 구체적인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영화는 여러 편의 에피소드를 대결구도라는 틀 속에서 순서에 따라 나열하는 구조로 간다. 에피소드 하나하나를 요리로 치자면 이 영화는 한 상 떡 벌어지게 차린 화려한 밥상 같은 느낌이다. 그러니 그 자체의 다채로운 맛을 즐기는 관객이라면 충분한 재미를 선사해줄 수 있는 영화가 될 것이다. 하지만 좀더 소박하고 서민적인 밥상을 기대했던 분들이라면 이 화려한 밥상을 대하면서 무언가 2%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그 상 위에 올려진 요리 하나하나에 숨겨진 서민적인 사연 같은 것들이 그 화려함 속에 묻혀졌다는 아쉬움이다. 때론 수십 개의 화려한 메뉴를 선보이는 집보다, 한두 개의 메인 메뉴로 승부하는 집의 입맛이 그리운 법이다.

소녀그룹, 아역스타의 인기, 그 이면

상큼하고 깜찍한 어린 소녀들이 언발란스하게 디스코 춤을 추면서 “텔 미~”를 연발한다. 이름하여 원더걸스. 누가 봐도 영락없는 아이들(idol)스타들이지만 좋아하는 팬층은 10대에 머물지 않는다. 20대 젊은이들부터 40대 아저씨들까지 다양하다는데 한 편에서는 이런 어른들의 소녀 취향(?)을 가지고 ‘로리타 콤플렉스’까지 나오는 모양이다. 하지만 특별한(?) 성적 취향을 가진 소수라면 모를까, 다수의 아저씨들이 원더걸스를 좋아하는 이유를 로리타 콤플렉스로 설명하려 드는 건 과장된 해석이라 생각된다.

헬로 키티와 원더걸스는 닮았다
이 소녀그룹에 대한 아저씨들의 열광은 오히려 캐릭터 비즈니스의 연장선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연예 엔터테인먼트를 비즈니스적으로 접근할 때, 연예인들은 하나의 캐릭터 비즈니스의 일환으로서 소비된다. 드라마가 됐건, 영화가 됐건 컨텐츠에 등장하는 스타들은 배역에 맞는 이미지를 새롭게 갈아입고 대중들에게 제시된다. 기존에 대중들에게 강력한 이미지로 각인된 스타는 새로운 컨텐츠에 대한 시장진입 리스크를 줄여준다. 대중문화 속 아이들(Idol)이란 마치 팬시한 상품을 대중들이 좋아하듯이 그 자체가 캐릭터 상품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최근의 소녀그룹은 하나의 새로운 캐릭터 트렌드라고 볼 수 있다. 그 캐릭터는 ‘청순→발랄→섹시→도전’을 거쳐 이제 ‘상큼 발랄’의 이미지로 변모했다. 소녀그룹의 연령대가 20대에서 10대로 내려온 것은 소비되는 이미지의 이런 변화로 설명된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 어린 아이돌스타라는 컨셉트의 상품이미지에서 언뜻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키덜트(kidadult, kid와 adult의 합성어로 20, 30대이지만 여전히 어린 감성을 가진 어른) 문화상품의 이미지다. 어른들에게도 여전히 소비되는 미키 마우스나 헬로 키티 같은 문화상품.

이렇게 캐릭터 지향적인 소비가 반대로 보여주는 것은 음반시장의 퇴행이다. 과거의 가수라 함은 노래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는데 이제는 가수가 하나의 캐릭터 이미지가 되고 있다는 말이다. 원더걸스의 ‘텔 미’는 특별한 가사의 내용이 없다. 그저 “네가 날 사랑할 줄은 몰랐다. 그게 너무 좋다. 그러니 자꾸만 말해 달라.” 그런 내용의 반복이다. 가사에 걸맞게 음률도 단순하고 반복적이다. 이것은 디스코 같은 복고를 지향한 뮤비 컨셉트와 캐릭터 컨셉과 종합적으로 판단했을 때 다분히 기획된 것이다. 구닥다리의 느낌에 쉽고 친숙한 노래는 오히려 캐릭터 컨셉트에 대한 집중도를 높여준다.

솔직한 미숙함이 가진 리얼리티라는 파괴력
캐릭터 컨셉트를 키덜트 문화상품으로 포장한 것은 ‘원더걸스’라는 이름과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조금은 어색한) 원더우먼 캐릭터에서도 드러난다. 복고적이며 다분히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캐릭터 이미지를 차용하자 원더걸스는 이제 단순히 10대 아이들 스타가 아니라 30, 40대에게도 소비될 수 있는 캐릭터가 된다. 이처럼 젊은 연령대와 나이든 연령대의 양자를 소비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키덜트 문화상품 마케팅의 장점이다. 이것은 여러 세대가 동시에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어떤 소통의 창구로서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한편에서는 지나친 상품화의 결과로 보기도 한다.

이밖에도 원더걸스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컨셉트는 ‘미숙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솔직한 리얼리티’라는 점이다. 음반기획사에서 ‘만들어진’ 아이들 스타들의 문제는 리얼리티가 떨어진다는 데 있다. 이 말은 너무 상품화된 캐릭터로 보여지기 때문에 구매에 있어서 때론 거부감이 느껴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원더걸스는 좀더 날것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솔직함으로 제시되고, 현재의 모든 대중문화상품의 기본 컨셉트가 되는 리얼리티를 담보한다. 이렇게 되면 캐릭터에 대한 매력이 있는 한, 노래가 어설프든, 춤이 어설프든 그것은 또 다른 매력으로 전환된다. 호감가는 솔직한 미숙함은 때론 앞으로의 성장가능성까지 기대하게 만든다.

키덜트 문화가 양산하는 어덜키드
키덜트 문화가 장난감이나 완구시장 같은 전통적인 캐릭터 시장에서 이제는 대중문화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또 한편으로는 어덜키드(애 어른)의 양산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대중문화 속의 캐릭터는 바로 사람이기 때문에 키덜트 문화가 요구하는 것은 어린 나이의 소녀나 소년이 되기 때문이다. 최근 사극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아역스타들을 보면 어덜키드 문화의 탄생을 예감케 된다.

어린 제왕의 카리스마를 보여준 유승호, 비련의 여주인공 윤소화를 연기한 박보영, 성인 못잖은 멜로 연기를 펼친 어린 김처선 역의 주민수, 여기에 성인 악역 못잖은 섬뜩함을 연기한 어린 정한수 역의 백승도, 놀라운 감정연기를 보여준 이산 역의 박지빈 등등의 아역스타들에게 대중들이 놀라는 것은 그 ‘성인 못잖은’ 연기력이다. 이 사극들의 어린 연기자들만 모아놓고 보면 성인 사극의 아이 버전을 보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키덜트 문화의 대중문화 침투는 이제 소년, 소녀들이 문화상품의 첨병으로 소비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국민여동생이란 미명 하에 어린 캐릭터 이미지로 소비되었던 문근영이 ‘댄서의 순정’이라는 복고적인 느낌의 영화 속에 등장했을 때 이미 예기되었던 것들이다. 문화상품이란 유행을 타는 것이기에 그걸 가지고 뭐라 하긴 그렇지만, 우려되는 것은 자칫 키덜트 문화가 가져올 수많은 어덜키드가 어린아이 어른 할 것 없이 하나의 바람직한 전범으로 제시되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다. 아이는 그래도 아이다워야 하지 않을까.

‘로비스트’가 가진 묘미와 딜레마

일주일 내내 사극이 방영되는 요즘, 현대물로서 ‘로비스트’의 가치는 오히려 더욱 빛난다. 실제로 매번 과거의 역사 속 드라마들의 시간대를 보다보면 늘 같은 밥상에 물리듯 싫증도 나게 마련이다. 그럴 때 ‘로비스트’는 입맛을 돋워주는 별미 같은 드라마가 된다. 무엇보다도 보는 맛이 일품인 드라마다. 그 색다른 코스요리는 먼저 스케일에서부터 시작한다.

보는 맛이 일품인 드라마
드라마들이 국내의 가정집들을 오가고, 기껏해야 지방 정도의 공간을 이동하던 것에 비하면 ‘로비스트’는 스케일이 큰 드라마다. 해외로케를 한 드라마들은 종종 있었지만 이처럼 해외에 상주하면서 찍은 드라마는 일찍이 없었다. ‘로비스트’라는 직업상 국제적인 면모를 띨 수밖에 없는 것. 드라마가 이동하는 공간은, 동해안의 작은 어촌 마을에서부터 시작해 미국의 뉴욕, 워싱턴은 물론이고 키르키즈스탄까지 광대하다.

단순히 장소만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움직이는 인물들의 면면도 새롭다. 로비스트라는 직업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말. 미국 영화에서나 보던 미국 정보국 인물들과 마피아들, 거기에 연루되는 무기 거래상들 그리고 국정원 요원들까지 드라마가 보여주는 인물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기 어려웠던 캐릭터들이다. 그 속에 서로 다른 이유로 로비스트가 되어가는 해리(송일국)와 마리아(장진영)의 뒤얽히는 이야기는 지금껏 우리 드라마가 보여주지 못했던 부분이라는 점에서 참신하게 다가온다.

게다가 드라마는 동해안 북한잠수함침투사건이나 린다 김 사건 같은 실제 벌어졌었던 사건들을 드라마 속에 풀어놓는다. 물론 허구적인 상상력이 곁들여진 것이지만 뉴스의 한 장면으로 보았던 그 사건들은 눈앞에서 생생하게 재연된다. 이미 알고 있던 사건의 심층적인 재연은 그 자체로도 충분한 볼거리가 된다. 이것은 최근 들어 사실에 허구의 상상력을 부여하는 팩션이 열풍처럼 유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스토리를 앞서는 볼거리
이런 정도로만 봐도 ‘로비스트’는 블록버스터 드라마로서 사전에 치밀한 계획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블록버스터는 흔히 사이즈가 크다는 것으로만 인식되어 있는데, 좀더 정확히 얘기한다면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더 클 것이다. 이것 또한 ‘로비스트’가 현재 달라지고 있는 매체 환경에 제대로 적응한 드라마라는 걸 말해준다. HDTV의 보급과 점점 커져서 홈 시어터로 가고 있는 TV, 그리고 이제는 국외까지 넓어진 시장에 맞게 좀더 큰 스케일에 대한 요구 등을 이 드라마는 정확히 수용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드라마의 블록버스터화는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할 수밖에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블록버스터화 되다보니 생기는 문제점들도 있다. 먼저 블록버스터는 기본적으로 시청자들의 볼거리 욕구를 자극시키는 영상들을 잡아내야 한다는 점이다. ‘로비스트’가 소재로서 보여준 동해안 북한잠수함침투사건이나 첫 회에 미리 보여준 키르키즈스탄에서의 총격전은 스토리보다 그 볼거리가 더 중요한 장면들이다.

보통의 드라마가 스토리를 먼저 구성하고 거기에 맞는 장소를 헌팅 하는 순서로 작업된다면 블록버스터 드라마는 때론 그 순서가 역전된다. 먼저 볼거리가 되는 장소나 설정을 먼저 구상하고 그 위에 스토리를 얹는 것이다. 해리가 마리아에게 총을 겨누는 미국에서의 대면장면 같은 것은 그 장면이 보여주는 자극적인 볼거리가 먼저 구성됐을 가능성이 높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총을 겨눠야 한다는 설정 자체가 시청자들에게는 어떤 스토리의 인과성 이상으로 더 어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장면은 여러 번, 예고장면을 통해서 방영되며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게 사실이다.

블록버스터의 딜레마
이것은 볼거리를 강조해야 하는 블록버스터들이 어쩔 수 없이 갖는 딜레마일 것이다. 그리고 실상 그 볼거리만으로도 드라마는 충분히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너무 반복되면 문제가 된다. 스토리 속에서 인물들이 보여주는 감정 선이 시청자들에게 이입되기도 전에 계속되는 볼거리에 짓눌리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극중인물들은 자칫 볼거리에 압도당한 수동적인 존재가 되기도 한다. 볼거리 속에 끼워 맞춰질 수 있다는 얘기다.

‘로비스트’는 기획이나 제작, 그리고 소재까지 잘 만들어진 드라마다. 특히 몸을 아끼지 않는 송일국과 장진영, 그리고 선과 악의 이중적인 면을 특유의 카리스마 연기로 소화하고 있는 허준호, 비운의 주인공, 한재석 게다가 놀라운 연기변신을 보여주고 있는 김미숙까지 연기자들의 호연이 두드러지는 드라마다. 하지만 가끔 이 연기자들의 연기가 너무나 어렵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스토리 자체가 자연스러운 극적 긴장감으로 가지 못하고, 볼거리 설정 속에서 연기력으로 장면을 소화해내야 하는 연기자들의 고충이 언뜻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볼거리 많은 색다른 맛의 드라마, ‘로비스트’가 가진 딜레마다.

‘M’의 작품성과 상품성

이명세 감독의 ‘M’에 대한 반응이 양극단으로 엇갈리고 있다. 한편은 이 기존 내러티브 형식을 파괴한 영화의 시도를 참신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반면 다른 한편은 관객을 지독한 혼란 속에 빠뜨리는 이 영화를 감독 자신의 과잉된 자의식의 산물로 보는 쪽이다. 무엇이 이렇게 엇갈린 반응을 만들었을까.

내러티브 vs 비내러티브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내러티브의 세계다. 내러티브는 일정한 시공간에서 발생하는 인과관계로 엮어진 실제 혹은 허구적인 사건들의 연결을 의미한다. 즉 현실에 있을 법한 그럴듯한 세계가 우리가 영화를 통해 익숙하게 봐왔던 것들이며, 보기를 기대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M’이 그리는 세계는 내러티브의 세계만이 아니다. ‘M’은 꿈이라는 공간을 시각적으로 그려내는 작품이기에 논리적인 연결고리가 느슨하게 되어있다. 영화를 보면서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아니면 소설 속의 내용인지를 헷갈리게 되는 것이다.

관객들은 이 헷갈리는 미로 속에 들어가 갑갑함을 느끼면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이미지와 음향의 세례를 받아낼 수밖에 없다. 영화를 보면서 이 초반부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면 꿈의 세계를 보다 지쳐 잠이 들 수도 있다. 이것은 관객들이 불편해하고 한편으로는 불쾌해하는 이유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돈주고 영화관까지 가서 이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느냐는 거다. 그런데 감독은 바로 이 관객을 혼동에 빠뜨리는 부분을 의도했다고 밝힌 바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인 민우(강동원)가 겪는 바로 그 혼동을 똑같이 느끼게 의도했다는 말이다.

동화(同化) vs 이화(異化)
이명세 감독의 이 말은 마치 관객이 민우에게 동화되기를 기대했다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부분은 그다지 성공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관객들이 민우에게 동화되었다면 영화는 민우의 감정선을 따라서 움직여야 할텐데, 그러한 공감대가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영화는 영화 속 주인공이나 스토리에 동화되어 몰입하기보다는, 객관적인 입장이 되어 영화를 보는 자신을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 속 민우의 첫사랑, 미미와의 아련한 기억이 예쁜 그림으로 그려지기는 하지만, 민우를 혼동에 빠뜨릴 정도의 납득할만한 이유를 찾기가 어렵다. 이 부분이 그나마 이 영화 속에서 내러티브를 갖는 지점임에도 불구하고 (물론 이미지는 파격적이지만) 스토리는 관습적이다. 이것이 관객들을 불편하게 하는 두 번째 이유다. 초반부의 힘겨운(?) 이미지들을 겨우 버티고 봐왔는데 결국 얘기란 것이 고작 관습적인 첫사랑이라니.

영상 vs 스토리
하지만 영화를 내러티브로 보지 않고 이명세 감독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잔치 자체를 즐기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영화가 말해주는 것보다는 영화가 보여주는 것에 더 열광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영상의 언어가 모국어임을 자처한다. 만일 이 말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이 영화는 시도 자체가 의미 있는 작품이 된다. 헐리우드 장르에 의해 만들어진 관습적인 내러티브 구조 속에서 영화가 가진 영상미학은 시도 자체가 거부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M’의 시도는 내러티브라는 족쇄에 묶여있는 영화를 좀더 자유롭게 풀어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는 의미가 있다.

문제는 이런 실험적인 시도를 지금의 대중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이다. 내러티브에, 동화(同化)에 익숙해져 그런 영화에 기꺼이 주머니를 열어왔던 관객들은 아마도 속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대중들의 기호를 도외시하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예술에 대해서 이제 대중들은 용납하려 들지 않는다. 특히나 대중문화라고 불리는 영화라는 장르에 있어서는 더더욱.

작품 vs 상품
이명세라는 감독과 강동원이라는 아이콘이 주는 기대감을 갖고 영화관을 찾았던 분들은 이러한 불편함 속에서 극장을 나서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이명세 감독과 강동원이라는 배우는 문화를 만들어가는 예술인이라는 측면과 함께, 대중문화에서 소비되는 상품으로서의 이미지를 모두 갖고 있다. 영화가 상영되기 전까지 이들은 상품으로서 홍보되고 광고되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며 상품으로서의 영화가 나쁘다는 의미도 아니다.

‘M’이 영화 홍보에 있어서 그렇게 ‘첫사랑’이라는 단어에 천착하고, 거기에 강동원과 이연희의 아련한 이미지를 포장시킨 것은 상품으로서의 영화를 부각시키기 위한 전략이다. 물론 그것 자체에도 나름대로의 영화적인 재미가 있는 게 사실이다. 첫사랑이란 코드는 영화가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아련한 아쉬움’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M’에 대한 양극단의 평가는 작품으로서의 ‘M’과, 상품으로서의 ‘M’ 사이에 벌어진 균열 때문에 생긴 것이다. ‘M’을 예술작품을 보듯 진지하게 바라본다면 그 낯설고 불편한 이미지들 속에서 어쩌면 초현실주의 그림들과 현대음악을 발견하는 재미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데이트를 하다가 강동원이라는 아이콘과 첫사랑이라는 문구에 극장을 들어섰다면 자칫 불편함만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M’은 작품성은 뛰어나지만 상품성은 떨어지는 영화다. 재미의 기준을 작품성에 두고 보면 재미있지만 상품성에 두고 보면 재미없는 영화다. 그리고 그 재미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다. 다만 재미있다, 없다를 떠나서 장르적이고 관습적인 기획영화들의 홍수 속에서 ‘M’이 보여준 시도 자체를 폄하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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