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애로 보여지는 동지의식

참 이상한 일이다. 인터넷사전에 ‘형제애’라고 치면 ‘형이나 아우 또는 동기(同氣)에 대한 사랑’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반면, 왜 ‘자매애’라는 단어는 없는 것일까. 신데렐라와 못된 언니들 혹은 콩쥐와 팥쥐 같은 고전들 속 캐릭터들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틀에 박힌 텍스트 공식들이 만들어낸 결과일까.

하지만 드라마들은 꽤 여러 번 자매애의 가능성을 포착한 바 있다. ‘여우야 뭐하니’의 병희(고현정)와 준희(김은주), ‘연애시대’의 은호(손예진)와 지호(이하나), ‘내 남자의 여자’의 지수(배종옥)와 은수(하유미)가 대표적이다. 이들의 자매애는 모두 늘 만나면 서로를 못 잡아먹어 한이라는 듯 으르렁대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사실은 서로를 깊이 배려하고 있는 속내를 내보인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이렇게 자매들이 드라마 속에서 서로 의견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여성들의 서로 다른 입장(애정관, 결혼관 등등)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각자 캐릭터들의 개성은 더 살리고, 공감의 폭은 더 넓어진다. 재미있는 것은 애정관, 결혼관이 달라 싸우던 이들이 결국에는 자매라는 끈으로 묶여지면서 묘한 동지의식을 끌어내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여성들의 연대의식 같은 것이다. 그 대표주자로 꼽을 수 있는 건 역시 ‘내 남자의 여자’의 지수와 은수다.

“이런 언니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들의 자매애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이라는 연대의식 속에서 피어났다. 이 드라마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드라마 자체가 추구하는 것이 멜로가 아닌, 결혼제도나 남녀문제 같은 사회성 짙은 메시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여우야 뭐하니’나 ‘연애시대’ 역시 기존 관습에 던지는 사회성 짙은 질문들이 있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여우야 뭐하니’가 사회 통념으로 생각되는 나이와 결혼의 문제에 있어서 병희와 준희란 캐릭터를 통해 연령차를 극복하려 했다면, ‘연애시대’는 은호와 지호를 통해 결혼이란 사회적 관습에 연애라는 잣대를 들고 질문을 던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멜로가 가진 틀이 강했기에 ‘내 남자의 여자’처럼 그것이 전면에 부각되진 않았지만 그 속에서 이들 자매들이 보여주는 은근한 서로에 대한 애정은 바로 이런 동일한 적(?)을 앞에 두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자매애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아도 자매들 간의 동지의식이 드라마 자체로 드러나는 캐릭터들이 있다. 그것은 ‘막돼먹은 영애씨’의 영애와 영채다. 둘은 서로 다른 외모로 똑같은 외모지상주의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 비슷한 결론에 다다른다. 막돼먹은 영애씨가 살기 어려운 만큼, 잘 빠진 영채씨의 삶도 어렵다는 것. 결국 이 드라마는 이 둘의 대비와 거기서 얻어지는 한 가지 결론, 즉 ‘이 사회에서 여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영애와 영채가 굳이 자매애를 강조하지 않아도 한 가닥의 끈으로 연결되는 것은 그들이 이 시대를 사는 여성이라는 동지의식이다.

멜로 드라마들이 보여주었던 연애에 시청자들이 식상해했던 것은 어쩌면 그 연애 밑바닥에 공유되어 있는 남성중심의 사고방식이나 사회체계에 더 이상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현대의 여성들에게 참신하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아예 남성중심의 사고방식을 제거해버린 여성들만의 환타지(커피 프린스 1호점)를 그리거나, 그런 사고방식과 싸우는 여성들의 이야기(막돼먹은 영애씨)가 유리하다. 만일 드라마 속 자매들의 끈끈한 정에 마음을 빼앗겼거나, 자매들이 좀더 자매애를 보여줬으면 하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도 그들과 한때 암묵적인 동지였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시대, 연애보다 애틋한 것은 어쩌면 자매애다.

‘왕과 나’, 왕이 아닌 나의 이야기

‘왕과 나’는 제목부터가 도발적이다. 기존 왕조 중심의 사극과는 달리 ‘왕’과 ‘나’를 동등한 위치에 놓거나, 혹은 ‘나’에게 더 방점을 찍어두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사건을 두고도 시점에 따라 사건은 다르게 해석된다는 점에서 ‘왕과 나’의 재미는 바로 이 뒤집어 놓은 시점에서부터 비롯된다. 왕이 아닌 나의 이야기, 혹은 왕과 대척점에 선 나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더 이상 권위주의 시대가 아닌 현재의 가치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나의 시점을 반영한 사극들
“내시는 사람도 아니란 말이냐. 내시에게 사람이길 포기하라 명하시니 내 그 어명을 받들 것이다.” 내시부를 혁파하기 위해 예종이 금혼령을 내리자 그 수장인 조치겸(전광렬)이 분노하며 하는 이 말은 왕의 뜻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겠다는 이른바 선전포고인 셈이다. 한술 더 떠서 조치겸이 대전 앞에서 시위를 한다고 하자, 그의 양부인 노내시(신구)는 통쾌한 듯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암 누가 궁궐의 주인인지 똑똑히 보여줘야 하느니라.” 이런 대사들은 ‘나’의 시점이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런 밑으로부터의 시점은 왕조 중심의 사극이 막을 내리고 퓨전사극이 등장하면서 태동해왔던 것들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다모’의 채옥을, ‘대장금’의 장금이를, ‘상도’의 임상옥 같은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이 뿐만이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해신’의 장보고나 ‘불멸의 이순신’에서의 이순신, 그리고 심지어는 ‘주몽’의 주몽까지 모두 그 시점은 낮은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할 것이다. 즉 장보고는 당나라의 노예로 팔려가고, 이순신은 역모죄로 몰락한 양반집 자제로 차별을 겪는다. 주몽은 대소와 영포 왕자 아래에서 철부지 왕자로서 시작한다.

이렇게 주인공을 낮은 시점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사극이 기본적으로 성장드라마를 갖고 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시대의 감수성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즉 시청자들은 권위주의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태생적으로 무소불위한 왕 혹은 영웅에 매료되기보다는, 좀더 자수성가한 영웅,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영웅을 요구한다. 이제 신화적인 존재를 신화로서 그리는 것은 현대인들에게 아무런 공감을 주지 못한다.

상승한 나와 하강한 왕의 줄다리기
그런 면에서 ‘왕과 나’는 바로 이 낮은 시점의 재미를 극대화한 사극이라 할 것이다. 한쪽에서는 나인 김처선(오만석)의 성장드라마가 흘러가고, 또 한 편에서는 왕의 인간드라마가 흘러나오는 이 사극은 나의 상승과 왕의 하강이 서로 만나 부딪치는 극적 구조를 갖고 있다. 거기에 윤소화(구혜선)라는 여자가 왕과 나의 줄다리기의 정 중앙에 서게 되면서 상황을 더 극적으로 만든다. 즉 신분으로서의 나는 왕을 모시고 그 왕에게 사랑하는 여자의 합궁을 도와야 하는 존재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나는 왕의 여자를 사랑하는 상황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한참 후의 일이나 김처선의 어린 시절이 그려지고 있는 현재 그 관계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어린 시절의 처선(주민수)과 소화(박보영) 그리고 자을산군(유승호)은 물론 신분차이는 있지만 신분과 위치를 넘어선 오누이 혹은 친구의 관계를 보여준다. 신분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맺어진 이런 관계는 후에 신분 관계로 엮이면서 세 인물 모두에게 상처를 줄 것이 분명하다. 이 사극이 그저 퓨전이니 정통이니를 벗어나 셰익스피어 같은 고전적인 인간의 운명을 다룰 가능성이 보이는 부분이다.

도저히 아역이라 할 수 없는 존재감 넘치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주민수, 박보영, 유승호, 그리고 저 ‘주몽’에서 주몽을 키워주고 후에는 대결구도에 서게된 금와의 역할을 고스란히 이어서 하게 된 조치겸 역의 전광렬이 보여주는 카리스마는 모두 성장한 후 신분과 관계로 환원될 드라마에 결정적인 힘을 부여할 것으로 보인다.

왕보다는 나의 이야기에 더 주목하게 되는 ‘왕과 나’는 제목에서부터 현대의 개인주의적 가치를 심어놓았다. 요컨대 이 드라마는 ‘왕과 김처선’이 아닌 ‘왕과 나’인 것이다. 여기서 ‘나’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달리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따라서 시청자들은 김처선의 여러 면모들 속에서 각자 ‘나’에 해당하는 모습을 찾아내는 재미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김처선이란 인물에 감정이입만 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극에 있어서 왕의 시대가 가고 이른바 ‘나’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며느리 전성시대’ vs ‘황금신부’

주말드라마들이 일제히 기지개를 켜고 있다. 가장 큰 요인은 시즌의 변화다. 여름 휴가 시즌이 지나면서 주말 시간대 시청자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는 것. 하지만 아무리 시즌이 달라져도 돌아온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잡아놓을 컨텐츠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때마침 시작해 주말극의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며느리 전성시대’와 지루했던 투병(?) 이야기를 지나 베트남 신부, ‘진주(이영아)의 친부 찾기’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는 ‘황금신부’가 그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먼저 ‘며느리 전성시대’가 갖는 의미는 가장 크다 할 것이다. 전통적인 주말드라마가 가진 가족드라마의 성격을 온전히 회복시킨 이 드라마는 고전적인 소재이면서도 시대를 넘어 먹히는 ‘서로 다른 양가집의 결혼이야기’를 주 모티브로 삼고 있다. 이것은 마치 저 ‘사랑이 뭐길래’의 변주처럼 보인다. 보수적인 대발이 아버지(이순재) 대신 오향심 여사(김을동)가, 현모양처에 가끔 반항적 행동을 하는 어머니(김혜자) 대신 서미순(윤여정)이, 신부와 집안 양측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대발이(최민수) 대신 복수(김지훈)가, 톡톡 튀는 개방적인 아내(하희라) 대신 미진(이수경)이 포진해 결혼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해프닝을 재미있게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가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보수적인 아버지 대신 보수적인 시어머니를 집어넣어 요즘 달라지고 있는 고부 관계를 포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전 세대에 걸쳐 공감을 자아내게 마련인 결혼이란 이벤트 아래 벌어지는 고전적인 스토리에, 현대적인 변주가 힘을 발하는 이유다. 혹자들은 식상하다 할 것이지만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잘 먹히는 결혼소재는 결혼을 해야하는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거기에 얽힌 양가집 사람들의 관계가 독특한 재미를 선사한다. 이것은 이 드라마의 시청층이 결혼이란 대사를 치른 사람이거나, 곧 치를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그 공감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즉 결혼이란 시대불문, 관심을 가질 가족의 이벤트라는 것이다.

반면 ‘황금신부’가 보여주는 스펙트럼은 너무나 변화무쌍하다. 처음 라이따이한의 소재를 잡은 시작은 사회성 짙은 메시지를 가진 드라마였는데, 차츰 전통적인 멜로드라마로 흘렀다. 지영(최여진)에게 배신당한 준우(송창의)가 공황장애를 겪고 이를 사랑으로 지켜낸다는 진주의 이야기가 전통적인 신파의 구조로 그려졌다. 중요한 것은 신파가 먹히지 않는 달라진 지금의 현실에서, 그 공감대를 다시 불러일으키기 위해 베트남 신부를 데려왔다는 점이다. 순애보 같은 이야기는 이제 우리에게는 도시는 물론이고 시골처자에게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공감되지 않는 현실과는 별개로 전통적인 순애보와 신파를 원하는 보수적인 시청층이 존재한다는 점. ‘황금신부’는 베트남 신부를 통해 그 부분을 공략한 결과 좋은 결과를 얻고 있다.

현재 ‘황금신부’는 이 순애보적 이야기에 가족극으로서의 훈훈한 이야기를 섞는 반면, 동시에 ‘출생의 비밀’이라는 또 다른 카드를 꺼내들고 있다. 여러모로 이 드라마는 베트남 신부라는 설정 하나로 과거의 신파 드라마가 갖는 파괴력을 끌어 모으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신파라면 어떨까. 여전히 거기에 공감하고 재미를 느끼는 층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며느리 전성시대’와 ‘황금신부’는 어떤 면으로든 주말 드라마의 위기의식에서 생겨난 퇴행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안에도 나름의 현대적인 공감의 틀을 마련하고 있다는 점이다. ‘며느리 전성시대’가 가진 새로운 고부 관계의 틀과, ‘황금신부’가 가진 순애보가 사라진 시대의 다국적 사랑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단순히 구닥다리라 여기며 비판만 할 일이 아니다. 모든 드라마가 잣대를 젊은 층의 시선에만 둘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들 전통적인 드라마들이 여름 시즌을 지나 돌아오고 있는 시청자들을 온전히 안아줄 수 있다면 말이다.

예쁜 남자와 거친 남자 사이, 이준기

참 지독한 배역을 맡았다. ‘개와 늑대의 시간’ 속에서 이수현과 케이 사이를 오가는 연기를 펼치고 있는 이준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연기자들과 캐릭터는 적어도 드라마를 찍는 동안에는 동일인물이다. 그렇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으면 캐릭터가 살 수 없기 때문. 그런 면에서 보면 지금 기억과 관련해 자기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인물은 비단 ‘개와 늑대의 시간’의 이수현만이 아니다. 그 연기를 하고 있는 이준기 역시 똑같은 개와 늑대의 시간을 겪고 있다.

이준기라는 배우를 발굴해낸 멘토의 김우진 이사는 “이준기의 인기는 순정만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중성적 매력에 있는 듯하다”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중성적 매력이란 여성적이란 뜻이 아니다. 여성적인 꽃미남의 외모를 갖추고 있지만 또한 남성적인 날카로움 혹은 터프함도 동시에 갖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무려 1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지금의 이준기를 있게 만들어준 캐릭터는 ‘왕의 남자’의 공길이다.

공길이란 캐릭터는 말 그대로 중성적이다. 겉으로 표현된 것은 여성적인 모습이 대부분이지만 그의 배역을 두고 게이라던가, 동성애 같은 말들이 나오지 않았던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그가 연기한 공길은 기본적으로 남성이지만, 모성애 같은 여성성이 극대화된 캐릭터였던 것.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연산군이나 장생을 보듬는 모성애로서의 여성성은 이준기의 여장남자 연기에 사회적 편견의 잣대가 적용되지 않게 했다.

문제는 공길이란 캐릭터를 벗고 스크린 밖으로 나온 중성적 이미지의 이준기가 공길을 통해 얻게된 이미지, 즉 여성성이 강조된 꽃미남, 예쁜 남자 같은 크로스 섹슈얼로 소비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후 이준기가 토로했듯이 ‘벼락스타가 짊어질 운명’ 같은 것이었다. 이미지 자체가 자산인 연기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로 굳어진 이미지는 양날의 칼이다. 연기자의 본분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다양한 역할로의 변신’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따라서 연기자 이준기에게도 똑같은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 작용한다. 살해당한 부모의 아픔을 갖고 자라온 이수현이 강중호(이기영)의 보살핌 속에서 국정원 요원이 되고, 상처가 지워질만할 때 원수인 마오(최재성)를 만나는 장면에서 이준기는 첫 번째 개와 늑대의 시간을 겪었다. 평범한, 어찌 보면 ‘마이걸’의 서정우 같은 이미지의 이준기는 돌연 눈에 핏발을 잡아가며 총을 들이대는 거친 남자로 돌변했다.

하지만 그것은 신호탄이었을 뿐. 언더커버로 들어간 청방에서 갑작스런 사고로 당한 기억상실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원수 밑에서 충실한 개가 되어 비열한 썩소를 날리는 이준기는 복수심과 따스함의 이중성을 갖고 있던 이수현에서 어두운 그림자로서의 케이라는 인물을 끌어낸다. 그리고 결국 정해진 대로 케이가 자신이 이수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캐릭터는 더 복잡해진다. 그리고 모든 걸 포기하려 할 때,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처럼 청방에서 언더커버로 활동하다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은 기억의 양파껍질을 벗겨내는 과정처럼 보인다. 이수현이란 한 인물 속에서 벌어지는 것이지만, 거기에 기억이 덧붙여지면서 이 캐릭터는 다양한 프리즘의 빛깔을 쏟아낸다. 그리고 이준기가 연기하는 이수현의 이런 다양한 모습들은 이 드라마가 하고자하는 이야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복수심은 때론 훌륭한 동기부여가 된다”거나, “기억을 잃었다는 건 완벽한 언더커버 요원이 됐다는 걸 뜻한다”는 식의 대사들은 이 드라마가 한 가지 현상에 부여된 양면을 읽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걸 말해준다.

그래서 드라마를 죽 보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 저 이수현이란 친구를 저렇게 힘들게 만드는 걸까. 물론 그것은 정보를 쥐고 있는 자들인 정학수(김갑수)나 마오(최재성) 같은 인물들이, 정보가 없는 자들을 이용해 벌이는 권력게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것 같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양파껍질 같은 기억을 갖게 된 인간이란 존재의 문제다.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기억이란 장치 하나로 숨가쁘게 변신하는 감정을 가진 존재. 따라서 이준기에게 이런 양면을 보여주는 이수현이란 캐릭터는 넘어야할 산이면서도 그 자체로 이미지 변신의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한 드라마에서 두 이미지가 다 보인다)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이준기는 개와 늑대의 시간을 겪고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