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크 다큐와 다큐 드라마, 같은 듯 다른 길

올 초 느닷없는 성추행 동영상에 인터넷은 후끈 달아올랐다. 동영상이 유포되면서 언론들이 일제히 이를 보도했고, 경찰들은 ‘성추행범 검거’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이틀 후, 이 퍼포먼스(?)는 고교생들의 자작극임이 밝혀졌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발칙한 고교생들이 덧붙인 말이다. “우리의 동영상을 검증이나 여과 없이 방영한 방송 등 미디어의 행태 등에 비춰 UCC 동영상의 정치·상업적 악용 가능성에 주목해달라”고 했던 것. 물론 동영상이 극장이나 TV에 어떤 영화나 드라마 같은 틀로서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작품(?)은 현실을 오도하는 부적절함을 남긴 것이 분명하지만, 그 목적으로만 보면 진정한 ‘페이크 다큐’의 한 면모를 보인 것은 틀림없다.

페이크 다큐, 사기와 작품 사이
최근 케이블 TV를 통해 하나의 장르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소위 페이크 다큐는 고교생들이 만든 동영상처럼 ‘장르 패러디’의 성격을 갖고 있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진실성을 꼬집으면서 동시에 그 장면 속에 잡히는 진실처럼 보이는 사회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고교생들이 만든 동영상은 그런 면에서 보면 지금 미디어들의 선정성을 끄집어냈다는 데서 의미가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동영상이 어떠한 허구적 장치를 담보할 수 있는 틀이 없었다는 데서, 작품이 아닌 사기가 되었던 것이다. 1999년 인터넷을 발칵 뒤집히게 한 ‘블레이 위치’나 2006년 토론토 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상을 받은 페이크 다큐, ‘대통령의 죽음’은 영화라는 틀로 소비될 수 있었기에 사기가 아닌 작품이 되었다.

즉 페이크 다큐가 가진 전략적 의미는 다큐보다는 그 다큐를 담고 있는 그릇으로서의 영화라는 허구에 더 방점이 찍힌다. 이들 영화의 틀을 가진 페이크 다큐가 보여주는 영화적인 의미는 허구를 현실처럼 믿는 대중들에게 그것은 본래 허구였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는 데 있다. 즉 허구를 깨기 위해 다큐라는 무기를 쓰는 것이다.

환타지를 제공하는 가짜들
그렇다면 최근 케이블 TV에서 들고 나온 프로그램들을 ‘페이크 다큐’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가짜 다큐를 보여주는 것은 맞지만 이 프로그램들은 그 그릇으로 영화 같은 허구가 아닌 다큐멘터리를 취하고 있다. 즉 이들 프로그램들이 파괴하고 있는 것은 허구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라는 현실이다. 이것은 마치 뉴스 프로그램 속에 선정적인 거짓장면을 넣은 후에(이것은 고교생들의 성추행 동영상을 통해 실제로 벌어졌다) 사실은 페이크 다큐였다 말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본래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갖는 신뢰성을 무너뜨려 가면서 이들 프로그램이 얻어내려는 목적은 다른 데 있다. 현실에서라면 보기가 쉽지 않은 자극적인 장면들을 현실인 것처럼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이것은 페이크 다큐가 가진 환타지 파괴가 아니라 정반대의 방향, 즉 환타지 제공의 목적을 갖고 있다.

시청자들은 이들 프로그램 속에 ‘실제 소재를 바탕으로 제작진이 재구성한 페이크 다큐멘터리입니다’라는 자막 고지가 나온다고 해서 이 프로그램을 통해 얻는 자극이 줄어들지 않는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현실성에 있는 게 아니고 환타지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는 포지셔닝 이론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드라마의 환타지를 깨는 다큐 드라마
즉 페이크 다큐는 허구라는 그릇 속에 들어가야 그 진가를 발휘한다. 그것이 아닌 페이크 다큐(?)는 TV가 가진 신뢰성을 저 기반에서부터 무너뜨리는 제살 파먹기와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이런 상황에 주목을 끄는 것이 ‘다큐 드라마’라는 형식을 표방하면서 만들어진 ‘막돼먹은 영애씨’다. ‘다큐’라는 진실성을 담보하는 단어에 ‘페이크’라는 정반대의 의미를 붙여 ‘페이크 다큐’가 탄생했듯이, ‘다큐 드라마’는 ‘다큐’라는 현실성에 정반대축에 있는 ‘드라마’라는 환타지가 붙어 탄생했다. 목적은 페이크 다큐와 같다. 드라마가 가진 환타지를 다큐라는 형식을 통해 깨겠다는 의도다.

‘막돼먹은 영애씨’라는 제목 역시 다큐 드라마처럼 상반된 두 의미를 갖고 있다. ‘막돼먹은’이란 단어에 연기자 이영애가 붙은 것이다. 드라마는 영애씨(김현숙)의 음성변조와 모자이크 처리된 얼굴을 보여주며 다큐의 한 틀로 시작하지만 곧 드라마 형식으로 전환된다. 즉 ‘막돼먹은 영애씨’는 다큐가 아닌 드라마라는 걸 공공연히 드러내면서 다큐적인 속성들을 활용해 트렌디한 드라마들의 환타지를 깬다. 도저히 안될 것 같은 사랑은 저 트렌디 드라마의 해피엔딩과는 상반되게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처럼 다큐를 활용해 드라마의 허구성을 파괴하고 있다는 점에서 ‘막돼먹은 영애씨’는 그 목적에 있어서 진짜 페이크 다큐의 장르적 미학을 제대로 따르고 있다 말할 수 있다.

케이블 TV들이 ‘페이크 다큐’라 부르는 프로그램들은 다큐멘터리를 표방하지만 거짓이고, ‘막돼먹은 영애씨’ 같은 다큐 드라마는 드라마라는 허구를 표방하지만 진실에 가깝다. 전자는 환타지를 더 적극적으로 끄집어내고 후자는 환타지를 부순다. 똑같이 다큐를 표방하고 있어도 양자가 그 길이 서로 다른 것은 이처럼 목적이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지금 방영되고 있는 케이블 TV의 ‘페이크 다큐’라 불리는 프로그램들에 어느 정도의 안전장치가 필요한 이유는 그 목적이 자극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왜 아버지들은 즐거우면 안될까

왜 이 땅에 사는 아버지들은 즐거우면 안되는 걸까. 이준익 감독의 ‘즐거운 인생’에는 인생이 즐겁지 못한 아버지들이 등장한다. 실직해 잘 나가는 교사 아내에 얹혀 살아가는 기영(정진영), 낮에는 택배, 밤에는 대리운전으로 자식 교육비 대기 바쁜 성욱(김윤석), 기러기 아빠로 한 대라도 더 중고차를 팔아 돈을 벌어야 하는 혁수(김상호)가 그들이다.

세대의 마이너리티, 가장
그래도 한 때 그들은 자신들이 조직했던 활화산이란 밴드 이름처럼 활활 타올랐던 적이 있다. 지금은 휴화산이 되어버린 그들. 그들이 ‘왕의 남자’, ‘라디오스타’를 통해 줄곧 마이너리티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던져주었던 이준익 감독이 ‘즐거운 인생’을 통해 보듬고자 하는 이들이다.

‘왕의 남자’에서 광대들을 왕과 동등한 위치로 끌어올리고, ‘라디오스타’에서 한물간 스타를 영월이란 변방으로 보내 다시 중심으로 치고 들어온 것처럼, ‘즐거운 인생’은 명퇴나 구조조정으로 고개 숙인 가장을 그 이전의 시간, 즉 젊음의 시간으로 돌려보내 한바탕 즐거운 난장을 벌인다. 즉 ‘왕의 남자’는 신분의 마이너리티를, ‘라디오스타’는 지역적인 마이너리티를 그리고 ‘즐거운 인생’은 말하자면 가장이라는 ‘세대의 마이너리티’를 그리고 있는 셈이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가 어떤 통쾌한 구석을 갖는 것은 바로 이 마이너리티들이 중심을 치고 가는 이야기 얼개에 숨겨져 있다. 즉 이 소외된 이들이 본래의 모습을 통해 세상의 인정을 받는 순간, 그들을 소외되게 만들었던 현실의 제도나 왜곡 같은 것들이 깨지는 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비천한 광대가 왕과 마주서서는 그보다 더 많은 자유를 가진 존재로 부각되고, 세월에 의해 밀려난 왕년의 스타가 영월이란 변방에서 그 주민들과 라디오를 통해 진심으로 소통하면서 그 진가를 보여주는 그런 이야기 구조 말이다.

가장들과 어깨동무 해주는 청춘들
‘즐거운 인생’은 그 연장선상에서 현실에 한없이 무너져 내리면서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들을 청춘의 꿈이었던 음악을 끌어들여 즐거운 인생으로 복권시킨다. 중요한 것은 이 마이너리티들의 위치상승이 욕망이 아닌 본 모습으로의 귀환을 뜻한다는 점이다. 즉 ‘즐거운 인생’은 특별할 것 없이 누구나 즐거워야 하는 인생을 즐겁지 못하게 살아가는 가장들에게 당신도 즐거울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영화다.

마이너리티를 넘어서는데 있어서 이준익 감독이 쓰는 또 하나의 방식은 당대의 동지들을 끌어 모으는 것이다. ‘왕의 남자’가 저 육갑(유해진), 칠득(정석용), 팔복(이승훈) 같은 광대를 끌어들였다면, ‘라디오스타’는 영월이란 변방의 주민들을 동지로 끌어들인다. 마찬가지로 ‘즐거운 인생’이 동참시키는 동지들은 대책 없는 청춘들이다. ‘라디오스타’에서 최곤(박중훈)을 따라다니는 노브레인을 통해 전조를 보였던, 음습한 지하클럽에서 미래가 불투명하지만 그래도 음악이 있어 마냥 즐겁기 만한 청춘들은 ‘즐거운 인생’에서 이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있는 가장들과 기꺼이 어깨동무를 해준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음악이라는 소통의 창이 있기 때문이다. “이 아저씨는 믹 재거를 닮았어!”, “니가 믹 재거를 아니?”, “당근이지, 내가 롤링스톤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활화산 밴드를 따라다니는 젊은 여자애들과 늙다리 가장들이 술좌석에서 음악을 통해 소통되듯, 음악은 또한 현준(장근석)이란 조금은 까칠한 청춘과 이 가장들을 엮어놓는다. 억눌린 청춘들은 억압되어 자기의 즐거운 삶을 찾지 못하는 가장들과 동격으로 읽히면서 락이란 음악으로 공명한다. 이것은 락이 가진 저항성, 억압의 분출 같은 강력한 촉매제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버지들은 충분히 즐거울 자격이 있다
꺾어진 꿈들이 각각으로 있을 때는 자학적인 삶을 살아가다가, 하나둘 모이게 되자 “왜 우린 안되는데?”하는 현실에 대한 모반을 꿈꾸게 된다. 가족의 행복이라는 미명 하에 거추장스런 양복이나, ‘365일 6000원’이란 문구가 덕지덕지 써진 택배직원 제복을 걸쳐 입고 동분서주하는 자신의 삶이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찢어진 청바지와 티셔츠에 문신을 한 채 ‘즐거운 인생’을 찾아간다.

성욱의 처가 40대 중반에 밴드를 한다는 이 엄청난(?) 탈선에 대한 이유를 묻는다. 그러나 성욱의 답변은 단순하다. “하고 싶으니까.” 이 단순한 한 마디가 깊게 가슴을 후벼파는 것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현실의 가장들이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저 ‘브라보 마이라이프’에서 조민혁 부장(백윤식)이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은데 한번쯤은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한번쯤은... 그러면 사치일까...”라고 말하듯, 이 시대의 마이너리티, 가장들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사치가 되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들의 어깨가 무언가를 걸머지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했었다면, 한없이 작아질 것을 요구하는 가장수난시대에 이제 가족들이 그 중압감을 덜어내고 어깨동무를 해줘야하지 않을까. 아버지들은 충분히 즐거울 자격이 있다.

미래 개그맨의 자질, 순발력, 개인기, 연기력

모든 것은 무대개그의 시작을 알린 ‘개그콘서트’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그간 개그의 양대산맥으로 내려오던 ‘유머일번지’류의 콩트 개그와 ‘일요일 일요일 밤에’류의 토크쇼가 갖는 ‘안전함’의 틀을 깼다. 그 ‘안전함’이란 두 가지 측면을 말한다. 경쟁이 없다는 것과 일방향성 개그라는 것.

무대개그는 개그맨들의 무한경쟁을 알리는 신호탄인 동시에, 관객과 개그맨이 호흡하는 개그의 쌍방향 시대를 예고했다. 개그는 더 이상 스튜디오에서 안전하게 짜진 형태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연달아 ‘웃찾사’, ‘개그야’가 같은 형식으로 경쟁에 뛰어들면서 이른바 개그의 춘추전국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무대개그 역시 한계의 징후들을 보이고 있다.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다양한 개그를 쏟아져 나오게 했던 바로 그 무한경쟁에서 비롯된다. 경쟁하는 개그가 가져오는 개그 컨셉의 단명으로 인해 웃음은 있어도 웃기는 자는 부각되지 않는 상황을 맞게 된 것.

과도한 경쟁 속에서 참신하고 실험적인 시도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나, 이것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 나오게 되자 너무 빠르게 소비되는 현상을 불러온 것이다. 지금 무대개그 프로그램들이 쏟아내는 아이디어들은 계속 쳐다보고 있지 않으면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진화 자체는 발전적인 것이지만, 너무 빠른 진화는 단명을 낳는다.

무대개그의 가장 큰 영향, 리얼리티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무대개그들이 현재의 개그 프로그램들에 준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무대개그가 갖는 현장성, 대전성격, 몸 개그 같은 요소들은 ‘무한도전’이나 ‘타짱’ 같은 개그 프로그램에 직ㆍ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그 중 무대개그가 개그 프로그램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리얼리티’다.

만일 지금의 무대개그 이후, 포스트 개그 프로그램을 예측하면서 가장 먼저 갖추어야할 요건을 말하라면 바로 ‘리얼리티’가 될 것이다. 이것은 비단 개그 프로그램만의 문제는 아닐 정도로 TV 전체 프로그램의 기본 요건이 되어가고 있다. 더 이상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빼앗기는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리얼리티’에 의해 부각되는 것은 즉흥성(애드리브)이다. 짜진 틀 밖의 어떤 즉흥적인 대사가 순간적인 리얼함을 확보하면 웃음이 유발되는 것. 최근 개그 콘서트에 신설되어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애드리브라더스’는 그 대표적인 형식이 될 것이다.

리얼리티와 연관되어 더 확장되어질 것으로 보이는 것은 ‘현장성’이다. 관객의 반응을 좀더 포착해내기 위해 좀더 관객 속으로 개그가 이동한다는 말이다. 무대개그 속에서 카메라가 공개홀을 벗어날 수 없다면, 그 공감의 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무대를 벗어나 현장 속에 뛰어드는 저 ‘막무가내 중창단’류의 현장개그가 가진 현장성이 중요해진다.

또한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개그의 인해전술(한 코너에 등장하는 개그맨들의 숫자는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증가했다)로 이것은 개그맨들의 희소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 양적으로 팽창된 개그맨들은 또한 그 속에서 살아남은 몇몇 개그맨들의 개인 브랜드화를 부추긴다. 이렇게 스타가 되어 브랜드화된 개그맨은 저 ‘무한도전’의 경우처럼 리얼리티에 흠집을 만들 수 있다. 그것이 실제상황인지 아니면 브랜드화된 개그맨의 연기인지 헷갈리게 되는 것이다.

개그맨들은 참신하지만 다수 속에 익명으로 존재하거나, 유명해졌지만 브랜드화되어 식상해지는 양쪽의 압박을 받게 된 상황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개그 하는 층의 변화도 감지되고 있다. 개그맨 자체가 브랜드화 되자 그 사라져 가는 리얼리티를 확보하기 위해 일반인들(여기는 개그맨이 아닌 타 분야의 탤런트도 포함된다)의 개그 진출이 활발해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이미 UCC를 활용하는 쇼 프로그램(예를 들면 스타킹 같은)을 통해 전조를 보이고 있다.

개그맨의 자질, 순발력, 개인기, 연기력
이렇게 변화되는 상황 속에서 개그맨들이 우선적으로 갖춰야 하는 자질은 뭐가 있을까. 그 첫 번째는 순발력이다. 순간적인 촌철살인의 말 몇 마디와 행동 한두 개로 좌중을 휘어잡을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해진다. 이 순발력과 함께 강조되는 것은 개인기다. 읽고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에 더 민감해진 세대들에게 말 개그는 아무래도 몸 개그가 가진 파괴력을 따라가기가 어렵다. 게다가 몸 개그는 언어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다는 점에서 점점 글로벌한 환경 속에서 개그를 해야 하는 개그맨들의 필수무기가 될 것이다.

이러한 리얼리티 개그의 또 한 측면은 그 반작용으로서의 콩트 개그를 촉발시킬 가능성도 있다. 오히려 꽉 짜진 틀 속에서 ‘정극을 하는 개그맨들’을 통해 웃음을 유발시키는 것. 이것은 전통적으로 ‘개그맨은 연기자’라는 등식과도 연결된다. 따라서 개그맨이 만약 순발력과 개인기로 주목을 받고 점점 성장해 자체 브랜드화 된다면 그 생명력을 이어가기 위해 필요해지는 것은 이제 연기력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아담 샌들러 같은 연기파 코미디언이 등장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개그 프로그램들은 진화의 진화를 거듭해오고 있다. 그 진화 과정 속에서 당연히 발생하는 것은 다양해진 개그 프로그램들이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한 상황이지만 이러한 시도들이 결과적으로는 좀더 공감을 넓혀갈 수 있는 웃음의 초석이 된다는 점에서, 그 어느 것도 실패라는 낙인을 쉽게 찍을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의 개그 프로그램은 현재 승승장구하건, 혹은 주목받지 못하건 그 살을 깎는 노력들의 융복합으로서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바로 ‘리얼리티’다.

사극이 신화를 끌어들이는 방법

역사를 다루는 사극이 사료가 거의 없고 신화만 존재하는 시대를 끌어들인다는 것은 과거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없는 사료를 상상력으로 메워나가는 이른바 퓨전 사극이 등장하면서 신화는 공공연히 사극의 소재가 되고 있다.

하지만 신화를 사극이란 틀의 드라마로 보여준다는 것은 말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신화를 날 것 그대로 그려낸다면 자칫 무협지나 환타지가 될 소지가 있다. 물론 사극의 스타일이 무협지 같거나 환타지 같은 것은 이해될 수 있는 일이지만 신화를 소화해내서 보여주는 사극 자체가 무협지나 환타지가 되는 건 문제가 있다.

신화는 역사는 아니지만 사극으로 들어왔을 때 적어도 그 상징적인 의미를 되새기게 만들어져야 한다. 퓨전사극 ‘주몽’은 주몽신화를 드라마로 끌어오면서 신화적 의미보다는 영웅적인 인간의 건국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따라서 신화를 통해 그려졌던 주몽은 물론이고 해모수나 금와 같은 인물들은 신의 옷을 벗고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주몽은 알에서 태어난 게 아니고 해모수와 유화부인 사이의 사랑으로 태어난다.

물론 거기에는 삼족오에 대한 이야기나, 다물활 같은 신물에 대한 신화적 이야기들이 환타지적인 스타일로 그려지고 있지만 그것은 주몽이란 인물의 신탁을 의미할 뿐, 그 자체로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는 물리적인 힘을 주지는 못한다. 드라마가 그려내는 고구려 건국은 신적인 능력을 가진 인물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한 영웅적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반면 ‘태왕사신기’가 신화를 끌어들이는 방식은 이것과는 다르다. 광개토대왕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단군신화를 본격적으로 화면에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이 사극은 단군신화에서 환웅과 웅녀 그리고 호족의 이야기를 영웅 탄생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즉 환웅이 말한 신탁에 기대 그 예언으로서 태왕과 그를 보필할 사신이 탄생한다는 얘기다.

신화 속 곰과 호랑이의 이야기를 웅족과 호족의 싸움으로 해석하는 현실적인 선택을 했지만 ‘태왕사신기’가 택한 것은 환타지다. 환웅(배용준)은 전지전능한 인물로 등장하고 웅족의 대표인 새오(이지아)와 호족의 대표인 가진(문소리) 역시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들이다.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이란 상상의 동물 또한 실제로 등장한다. 사극으로서는 대단한 모험을 감행한 셈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두 가지다. 그 첫 번째는 CG의 힘이다. ‘태왕사신기’는 신화를 끌어오는 방식으로 CG를 통한 환타지를 선택했다. 애초에 단군신화를 끄집어내면서 두루뭉실 인간의 이야기로 신화를 훼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좀 낯선 면이 없잖아 있지만 ‘태왕사신기’가 CG를 활용해 신화 자체를 그려 내려한 점은 적절한 선택이었음에 분명하다.

여기에 ‘태왕사신기’는 안전장치를 하나 더 집어넣었다. 그것은 이 신화를 극중 인물의 이야기 속으로 다루었다는 점이다. 현고(오광록)의 내레이션을 통한 접근은 사극 속에서 자칫 붕 뜰 수 있는 환타지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을 갖는다. 즉 ‘태왕사신기’가 신화를 끌어들이는 방식은 나름대로의 효과를 거두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첫 회에서 이미 다 알고 있는 단군신화를 굳이 CG로 다 그려낼 필요가 있었나 싶은 것이다. 신화의 내용을 화려한 그래픽으로 보여준 것이 의미를 가지려면 이제 앞으로 진행될 담덕(배용준)과 사신의 이야기들이 단군신화의 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 있을 때이다. 사극이 신화를 끌어들이는 방식에 있어서 ‘주몽’이 했던 선택, 즉 신의 이야기가 아닌 인간의 이야기로 환원한 사극이 아닌 지금의 과감한 CG를 동원한 신화를 바탕으로 깔고 가는 선택의 적절함은 전적으로 앞으로 진행될 전개에 달려있다. 기왕에 꺼낸 CG라는 카드가 그저 볼거리에 머무르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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