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티의 늪에 빠진 TV

늦은 시각까지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사무실. 한 워킹맘이 아픈 아이의 화상전화를 받는다. 아이는 물수건을 이마에 대고 누운 채, “엄마 언제 와”하고 애처롭게 묻는다. 아이의 모습에 눈물을 글썽이는 엄마가 “금방 갈 게”하고 말한다. 제 일처럼 걱정해주는 동료들에게 “많이 아픈가봐요”하며 회의실을 나선 워킹맘. 갑자기 표정이 180도 달라진다. 아이가 영상통화를 통해 말한다. “엄마 나 잘했지?” 아이와 엄마가 만세를 부르고 이어 “쇼를 하면 엄마의 퇴근이 빨라진다”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케이티에프 ‘대한민국 보고서 - 육아문제 편’의 장면이다.

최근 새로운 영상시대를 예고하는 듯한 이 캠페인성 광고는 현재의 TV 프로그램들이 일제히 주창하기 시작한 ‘리얼리티’의 실상을 보여준다. 화상전화처럼 영상이 생활이 된 세상에서 살게되면서, TV는 아이의 실제 같은 연기처럼 리얼리티를 주장해야 먹히게 됐다. 하지만 그 리얼한 화면으로 목적을 달성한 연후에 남는 개운치 않은 기분은 왜일까. 그것은 이 광고가 스스로 주장하듯, ‘쇼’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저 진짜가 아닌 쇼였다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쇼를 하라!”고 권유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목적을 위해서는 거짓 리얼리티도 허용되는 세상에 살게 된 것일까.

요즘 TV의 화두는 ‘리얼리티’다. UCC처럼 대중화된 영상시대 속에서 연출된 화면에 대한 식상함과 TV보다 더 리얼한 사건사고들이 가득한 사회가 요구한 결과다. 그것은 쇼 프로그램에서부터, 개그 프로그램, 예능 프로그램, 심지어는 광고에까지 광범위하게 침투해있다. 리얼리티쇼의 전조를 보였던 ‘몰래카메라’는 늘 터져 나오는 진실공방에도 불구하고 건재하다. ‘리얼 버라이어티쇼’를 표방하고 나선 ‘무한도전’의 성공으로 TV 쇼 프로그램들은 저마다 리얼리티를 외치고 있다. 현장의 리얼리티를 강조하며 등장한 무대개그프로그램들은 이제 정해진 대본조차 최소화시키며 애드립을 강조한 실시간 개그(애드리브라더스 같은)를 선보이고 있다. 케이블을 가득 메우고 있는 건 가짜로 리얼리티를 강조하는 가짜 다큐 프로그램들이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들이 주장하는 리얼리티는 진실일까. ‘무한도전’이 얘기하는 리얼리티는 거기 등장하는 개그맨들의 실제 맨 얼굴과는 거리가 있다. 그것은 이미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 속에서 캐릭터화된 개그맨들이 그 설정 안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애드립을 구사하는 것일 뿐이다. 애드립을 강조한 ‘애드리브라더스’ 역시 완전한 실시간 개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어느 정도의 포맷 안에서의 리얼리티를 보여준다. 케이블의 가짜 다큐들은 다큐가 가진 리얼리티의 현장성을 자극적인 장면들을 끌어내기 위한 연출의 방식으로 쓴다는 점에서 위험수위에 도달해있다.

TV 프로그램들이 일제히 리얼리티를 표방한 쇼를 하기 시작하면서 상대적으로 실제 리얼리티를 담보하고 있는 다큐멘터리나 뉴스보도는 외면 받는 상황을 맞고 있다. 이것은 현장의 이야기가 무한정 쏟아져 나오는 UCC와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인터넷뉴스의 영향이 크지만, 또한 리얼리티를 쇼의 차원으로 끌어들이면서 TV 스스로 신뢰성을 훼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진짜 리얼한 영상들이 매일같이 튀어나오는 인터넷(최근에는 여기에도 거짓영상들이 나오고 있지만)과 경쟁하면서 TV가 리얼리티쇼(진짜 리얼리티가 아닌)는 재미는 가져왔지만 방송 최대의 무기일 수 있는 신뢰성을 떨어뜨렸다.

리얼리티의 늪에 빠진 TV, 쇼하는 TV에서 이제 불거져 나오는 것은 진위 공방이다. 과거라면 그저 지나쳤을 연예인의 재미를 위한 거짓말 한 마디는 진실의 도마 위에 오르고 논란을 일으킨다. 이미 포맷이 다 드러난 ‘몰래카메라’에 등장하는 연예인들은 실제로 속은 것인지 아니면 속은 척 한 것인지에 대한 공방이 이어진다. 리얼 버라이어티쇼에서 벌어진 무인도 설정은 그것이 진짜 무인도였는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을 일으킨다. 가짜 다큐 속 성 추행범의 가짜 검거 사실은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는다.

쇼하는 TV가 조심해야 할 것은 저 케이티에프 ‘대한민국 보고서 - 육아문제 편’의 장면이 워킹맘의 상황을 희화화하고 왜곡했다는 논란을 일으킨 것처럼 자칫 거짓말 조장하는 TV로 전락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제 TV를 켜면서 시청자들은 그 영상이 갑자기 잠을 자다 벌떡 일어나 휴대폰에 입김을 불어넣어 뽀샤처리(포토삽 효과 처리)를 하고 최대한 얼굴을 멀리 둔 채 전화를 받는 에스케이텔레콤의 ‘영상통화 완전정복 - 화면조정 편’처럼 조작된 것인지 아닌지를 생각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지금도 계속 울려 퍼지는 “쇼를 하라!”라는 명령어가 끔찍하게 느껴지는 건, 목적을 위해서는 “거짓말을 하라!”는 얘기로 들리기 때문이다.
(사진자료 : KTF Show ‘대한민국 보고서 - 육아문제 편’)

‘사랑’,  ‘마이 파더’, ‘두 얼굴의...’, ‘즐거운 인생’

물 드는 건 가을 나무들만이 아니다. 가을을 타고 온 영화들이 선보이는 사랑의 다채로운 색깔 역시 극장을 물들이고 있다. ‘디워’와 ‘화려한 휴가’로 대변되는 여름방학 영화 시즌이 사회적 논쟁으로 물들었다면, 추석과 함께 시작되는 가을 영화 시즌은 ‘사랑’으로 물들고 있다.

남자의 사랑, 곽경택 감독의 ‘사랑’
“지랄 같네. 사람 인연.” 낮게 읊조리는 채인호(주진모)의 이 대사는 이 영화가 가진 결을 모두 내포한다. 먼저 거친 대사에 걸맞게 이 영화는 남자의 사랑을 다룬다. 멋지고 쿨한 남성과의 로맨스를 꿈꾸는 여성들의 환타지가 있다면, 가녀린 여성을 끝까지 지켜주는 마초적인 남성들의 환타지도 있다. 여성들의 환타지가 식상한 것이 되어버린 요즘, 남성들의 환타지는 과연 그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멜로는 여성의 전유물이란 공식을 깨고 남성들의 멜로가 새로운 코드가 될 수 있을까. 여러 모로 귀추가 주목되는 작품이다.

곽경택 감독의 전작들과 유사한 굵직한 남성성의 맥락을 갖고 있는 이 영화는 ‘친구’의 연장선상에서 읽히며 남성들의 사랑에 꼭 등장하는 ‘사람 인연’의 문제를 끼워 넣는다. 즉 성공이라는 축과 사랑이라는 축이 부딪치는 그 지점에 영화적 긴장감이 놓이게 되는 것이다. 확대해서 보면 남자들의 삶이란 결국 이 두 축의 어느 한 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어떤 것이다. ‘친구’에서 그것이 성공이란 측면으로 달려갔다면, ‘사랑’에선 사랑으로 달려간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그 어느 쪽의 길도 해피엔딩은 없었다. 그것이 감독의 세계관인지 아니면 남자들 삶 자체가 비극적인 것인지는 전적으로 관객들이 판단할 몫이다.

깊이 있는 사랑, ‘마이 파더’
‘마이 파더’를 가지고 제목에서 연상해 아버지 영화일 거라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이 영화는 ‘파더’, 즉 아버지가 아닌 ‘마이’라는 주인공의 관점에 맞춰지는 영화다. 그것도 굳이 ‘파더’가 아닌 ‘마이 파더’라는 ‘나의’ 아버지라는 관점이 중요하다. 실제 잘 알려진 인물인 제임스 파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아버지 황남철(김영철)과 제임스 파커(다니엘 헤니)는 그저 평범하게 부자관계로 얘기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이것은 제임스 파커가 가진 자신을 버린 모국에 대한 이야기고, 그 모국과 동일시되는 아버지 황남철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가 전하는 사랑의 해답은 입양된 이들이 모국을 찾아 부모를 찾을 때 흔히 하는 말속에 숨겨져 있다. “어머니, 아버지 안 미워해요.” 제임스 파커가 가진 부모에 대한 이 입장은 황남철과 그가 단순한 부자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된 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측면에서 모국에 대한 입장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가족관계를 넘어서는 사랑은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된다. ‘마이 파더’는 사실 세상의 모든 모래 같은 관계들에 던지는 제임스 파커란 실제인물의 인간에 대한 끈끈한 사랑을 전하는 영화다. 두 말할 것 없는 김영철이란 배우의 존재감과 더불어 다니엘 헤니의 연기자로서의 변신을 즐기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영화다.

성장하는 사랑, ‘두 얼굴의 여친’
‘두 얼굴의 여친’은 마치 ‘엽기적인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하지만 그처럼 가볍지만은 않은 영화다. 영화는 두 얼굴을 가진 여친, 아니(정려원)의 엽기발랄로 상큼한 코미디 영화처럼 시작한다. 초반부 만화 같은 연출과 제목에서 풍겨지듯 좀체 무거워질 필요가 없을 듯 여겨지던 영화는 그러나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제목처럼 두 얼굴로 변신한다. 초반부 ‘여친’과의 애정모드로 시작한 이 영화는 점점 ‘두 얼굴’이 갖는 정체성의 문제로 빠져든다.

‘여친’을 사랑하는 구창(봉태규)은 그녀의 두 정체성을 모두 받아들이는 사랑의 성장을 겪게 되지만 영화는 거기서 발랄하게 끝나지 않는다. 새로운 반전으로 좀 무거운 질문들을 하게 만든다. 청춘의 발랄한 사랑과 고민스런 성장을 그려내며 후반부에서 완벽하게 변신하는 이 영화는 코미디에서 시작해 좀 무겁다 싶은 멜로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영화 곳곳에 숨겨진 톡톡 튀는 대사와 아이디어들은 영화의 설정 자체가 갖는 약점들을 극복하고도 남게 만든다. 시종일관 웃다가 허전한 퇴장이 아닌, 어딘지 찡한 구석을 만드는 사랑 영화를 찾는다면 권할 만한 영화다.

인생에 대한 사랑, ‘즐거운 인생’
“인생 뭐 복잡할 거 있나. 즐겁게 살면 되는 거지.” ‘즐거운 인생’은 이렇게 생각하는 건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세상에 던지는 신나는 모반이다. 늙다리가 되어가면서 참 인생 별거 없다고 생각할 즈음, “아닙니다. 당신의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당신은 지금 충분히 즐거운 인생을 살 자격이 있습니다.”하고 말해주는 그런 영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현실에 치이면서, 정작 사랑하지 않았던 자기 인생을 보듬어주는 그런 영화가 ‘즐거운 인생’이다.

무거운 현실의 이야기를 비틀어 웃음을 터트리게 만드는 이준익 감독 특유의 유머와 인생 패배자들 역할을 더도 덜도 아닌 무게감으로 연기해내는 정진영, 김윤석, 김상호의 연기력, 게다가 그 쟁쟁한 연기자들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장근석의 존재감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즐거움을 준다. 지금이라도 내 삶이 어딘가 엇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한번쯤 현실을 내려놓고 푹 빠져서 보길 권한다. 어쩌면 웃다 울다 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볼 기회를 얻을지도 모를 일이다.

추석 시즌에 맞춰진 사랑을 담은 영화들은 포스터가 담아내는 것처럼 사람들을 다룬다. 그 사람을 전면에 내세우는 이들 영화들이 이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어느 것이든 자신을 반추하게 만드는 이들 사랑을 담은 영화들은, 흘러가는 삶의 한 지점을 갈무리하는 이 시기에 다채로운 결로 우리의 감성을 건드려 줄 것이다.

장르, 사회극, 사극 속에서 계속되는 멜로의 실험들

미드(미국드라마), 일드(일본드라마)로 대변되는 외국드라마 전성시대에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 드라마의 문법을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고 있는 건 아닐까. 엄청난 물량이 투입된 제작비에 완벽한 사전제작으로 꽉 짜여진 완성도 높은 외국드라마들을 보다가 무언가 어수룩한 우리 드라마를 보면 단박에 그 열등감에 휩싸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지금까지 우리 드라마들이 쌓아온 공력은 적지 않다. 그것을 모두 무시한 채 그저 미드, 일드는 정답이고 우리 드라마는 오답이라는 편견은 어딘지 부적절해 보인다.

모든 멜로가 죄인은 아니다
특히 멜로에 강점을 가진 우리 드라마들이 어느 순간부터 멜로드라마를 ‘표방하지 않게 된’ 것은 미드, 일드가 준 영향임에 틀림없다. 한 마디로 쿨해 보이는 그네들의 드라마를 보면서 왜 우리는 매번 똑같은 삼각 사각 구도에 신데렐라 이야기, 그리고 눈물이나 짜는 그런 드라마밖에 없는가 하는 비판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우리의 멜로드라마를 다 싸잡아 비판하는 건 문제가 있다. ‘멜로드라마 = 식상한 것’이라는 등식으로 괜찮은 멜로드라마들 역시 시청률의 무덤에 던져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90일 사랑할 시간’같은 실험적인 멜로드라마의 시청률 실패이다. 소재만으로 보면 불륜에 불치 코드가 뒤섞여 있었지만 이 드라마는 이 두 가지를 엮어서 전혀 다른 형태의 멜로드라마를 직조해냈다. 하지만 당시 멜로드라마라고 표방하기만 하면 하나같이 철퇴를 맞는 분위기에서 방영된 이 드라마는 역시나 참담한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물러나야 했다. 멜로라는 말은 쑥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위에서 표현한대로 드라마들은 멜로드라마를 표방하지 않았을 뿐, 멜로를 완전 버린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비판으로 식상한 틀을 벗어버린 멜로는 다양한 외투를 입고 새로운 진화의 길을 걸어온 것으로 보인다.

장르 속으로 들어온 멜로
미드, 일드의 영향으로 등장한 우리네 전문직 장르 드라마들은 장르를 구사하면서도 여전히 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본격 수사물을 표방했던 ‘히트’는 범인을 좇는 이야기만큼 시청자들을 설레게 한 것이 차수경(고현정)과 김재윤(하정우)의 닭살 멜로였다. 차수경에게 ‘바보팅이’라고 말하는 김재윤의 모습에서 저 미드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캐릭터나, 일드의 쿨한 캐릭터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우리 식 로맨틱 코미디류의 멜로드라마에서 익숙한 귀여운 남자가 있었을 뿐이다.

‘외과의사 봉달희’는 의사라는 전문직의 장르 드라마를 구사하면서 그 중심에 봉달희(이요원)와 버럭범수 안중근(이범수)의 멜로드라마를 접목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네들의 톡톡 튀는 사랑법이 병원이란 공간에서 인간으로서의 의사들 이야기와 맞물리면서 독특한 아우라를 형성했다. 한편 ‘에어시티’의 실패는 공항이라는 공간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장르의 실패로도 볼 수 있지만, 오히려 멜로드라마를 적극 활용하지 못한 데서도 패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장르드라마라는 무게에 짓눌려 어정쩡하게 구사한 한도경(최지우)과 김지성(이정재)의 멜로라인은 드라마를 이도 저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최근 종영한 본격 느와르 ‘개와 늑대의 시간’ 역시 멜로를 상당부분 뺐다고 해도 여전히 그 중심에 멜로드라마가 섞여 있다. 이 느와르만의 특징은 복잡하게 얽혀있는 인간관계들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 없는 주인공들의 심리를 다룬다는데 있다. 따라서 이수현(이준기)과 강민기(정경호) 그리고 서지우(남상미)의 삼각구도는 심리적으로 멜로드라마의 구조를 그대로 가져온다. 다만 그 양상이 사랑타령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총을 든 느와르의 양태로 나타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사회극을 표방한 멜로
한편 SBS가 계속해서 사회극을 표방한 드라마를 내놓는데는 역시 이 멜로에 대한 대중들의 무조건적인 혐오를 염두에 둔 포석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그 사회극 속에는 여전히 멜로드라마가 존재한다. ‘쩐의 전쟁’은 사채업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그 안에 기본적으로 금나라(박신양) - 서주희(박진희)의 멜로드라마를 엮었고, 여기에 공식적으로 이차연(김정화)이란 인물을 끼워 넣어 삼각라인을 만들었다. 드라마는 한창 사회적인 이슈들을 잡아나가다가 마지막회에 이르러 주인공들의 결혼식으로 흘러가는 멜로드라마의 양상을 보였다.

‘내 남자의 여자’는 과거 전형적인 틀을 가진 식상한 멜로드라마를 철저히 부수는 멜로드라마이다. 이 드라마는 멜로드라마들이 가진 전형성을 마치 탐구라도 하듯이 현미경을 들고 조명해나간다. 식상한 멜로드라마들이 어찌어찌 우여곡절을 겪다가 결혼에 골인하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면, 이 드라마는 결혼에서 시작해서 결국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그 중심에 결혼이라는 틀 속에서 사랑과 질투, 분노, 기쁨 같은 것들이 환타지가 아닌 현실적인 결론으로 끌고 가기에 ‘내 남자의 여자’는 사회극과 멜로드라마가 그 정점에서 만난 드라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현재 방영되고 있는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은 멜로드라마라는 틀을 통해 사회를 들여다보는 실험적인 작품이다. 결론을 정해놓지 않고 멜로드라마가 가질 수 있는 인물들을 배치해놓은 다음, 그 화학반응을 통해 인간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식이다. 당신이 알고 있는 이웃이라고 하는 사람은 사실 당신이 아는 그 한도 내에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드라마는 말한다. 그 기본 틀은 정윤희(배두나)를 사이에 둔 백수찬(김승우)과 유준석(박시후), 그리고 유준석을 따라다니는 고혜미(민지혜)가 이루는 사각관계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이들 사각관계 내부에서 벌어지는 멜로드라마가 아닌, 그 틀 바깥에 존재하는 많은 이웃들(조연들)의 화학관계를 통해 그 멜로를 이어가는 차이를 보인다. 즉 멜로는 나타난 현상이지 목적은 인간관계 자체에 놓여 있다는 말이다.

우리 식의 멜로드라마, 외면 말아야
이러한 멜로드라마의 실험과 진화는 최근 불고 있는 사극 열풍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사극의 메인 테마가 되고 있는 것이다. ‘왕과 나’는 내시인 나, 김처선(오만석)이 왕(고주원)이 사모해온 여인 윤소화(구혜선)를 운명적으로 사랑하는 이야기다. 새롭게 시작한 ‘이산’에서도 정조 이산(이서진)과 성송연(한지민)의 애틋한 멜로드라마가 그려진다. 현대물에서는 외면한 운명적인 멜로드라마를 사극이라는 형식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멜로드라마는 늘 식상하다는 편견 속에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멜로드라마는 늘 우리가 보는 드라마 속에 존재해왔다. 다만 새로운 외투를 입고 나타났을 뿐이다. 멜로드라마는 그렇게 비하되거나 구닥다리로 손가락질 받을 존재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네 드라마들의 성패를 가름하는 진짜 숨은 주역인지도 모른다. 상대적으로 타 분야보다 더 많은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는 멜로드라마를 외국 드라마와 단순히 비교하면서 그 가치를 평가절하 하는 것은 우리 드라마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일이다. 멜로는 죽지 않았다. 다만 끊임없이 다양한 틀 속에서 실험을 해왔을 뿐이다.

작년에 이어 또다시 사극전성시대가 열렸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시청률 수위를 단 한번도 놓치지 않은 KBS의 ‘대조영’을 위시해, 새롭게 돌풍으로 일으키고 있는 SBS의 ‘왕과 나’, 그리고 MBC의 ‘이산 정조’와 ‘태왕사신기’가 나란히 배치됨으로써 금요일을 뺀 일주일 내내 사극이 방영되게 됐다. 그런데 최근 방영을 시작한 사극 세 편이 모두 그 중심에 사랑을 주테마로 다루고 있어 눈길을 끈다.

‘왕과 나’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스스로 거세한 김처선(오만석)이란 내시의 이야기다. ‘사랑을 위해 거세한다’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 자체가 극적인 이 이야기는 절대권력을 가진 왕, 성종(고주원)과 후궁이었던 폐비 윤씨(구혜선), 그리고 내시인 처선의 운명적인 사랑을 다룬다. ‘태왕사신기’는 이야기의 모티브 자체를 사랑과 질투에서부터 따왔다. 단군신화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등장한 환웅을 사이에 둔 호족의 가진과 웅족의 새오 간의 사랑과 질투는 다시 광개토대왕 시기의 담덕(배용준)을 사이에 둔 기하(문소리)와 수지니(이지아)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산 정조’ 역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정조(이서진)와 성송연(한지민)의 사랑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처럼 사극 속에 등장하는 멜로 코드는 별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 드라마들의 특징은 사랑을 그저 약방의 감초처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들 사극이 보다 적극적으로 여성 시청층을 겨냥하겠다는 의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운명적인 사랑을 다루는 전통적인 멜로드라마는 늘 수요층이 있게 마련인데, 최근 들어 현대극에서 멜로드라마가 퇴조하면서 여전히 남은 수요층을 사극이 끌어안는 형국이다.

또한 여기에는 사극의 달라진 시각도 한 몫을 차지한다. 과거의 사극에서는 주로 영웅으로서의 주인공을 사극에 담았다면, 지금의 시대가 요구하는 사극은 영웅보다는 한 인간(영웅이라도 인간적인 면모의 영웅)을 다룬다. ‘왕과 나’는 왕보다는 나의 이야기에 더 초점이 맞춰지고 따라서 나의 시선으로 보기 때문에 왕과 얽히는 멜로 드라마도 수평적으로 구성할 수 있게 된다. ‘태왕사신기’는 영웅적인 인물의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이야기 속에 운명적인 멜로드라마를 넣어 극성의 강화와 함께 이야기 흐름을 만들어낸다. ‘이산 정조’는 정조의 인간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데 있어서 성송연이란 운명적인 연인이 등장한다.

사극들이 저마다 사랑에 빠졌지만 각 사극들이 보여주는 사랑의 강점들은 제각각 다르다. ‘왕과 나’가 가진 멜로드라마의 강점은 시대적 아픔 속에 운명적으로 얽히는 관계 자체가 가장 큰 관전포인트가 된다. ‘태왕사신기’는 두말할 것 없는 배용준이라는 멜로드라마의 제왕이 있어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이산 정조’ 역시,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명대사로 기억되는 ‘다모’의 이서진과, ‘경성스캔들’에서 맑고 밝은 씩씩한 면모를 보여준 한지민이 엮어 가는 사랑이야기가 관전 포인트이다. 그 어느 것이든 기대를 갖게 만드는 이들 사극 속에서 한동안 침체기를 겪었던 운명적 멜로드라마가 날갯짓을 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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