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무엇이 그들을 날게 하는가

'뿌리깊은 나무'(사진출처:SBS)

사실 이건 대단한 오해다. 한석규는 지금껏 많은 작품을 통해 다양한 연기의 결을 보여 주었다. '쉬리' 같은 작품에서 액션을 보여줬다면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는 차분하고 잔잔하지만 그 밑에 출렁대는 내밀한 감정의 멜로를 보여줬고, '넘버3' 같은 작품에서는 한없이 껄렁껄렁한 삼류 깡패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음란서생' 같은 사극에서도 그의 진가는 그대로 드러났고 '이층의 악당' 같은 로맨틱 코미디에서도 그 존재감은 여전히 빛났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 한석규를 광고 속에 그 중후한 목소리로 기억하곤 한다. 이건 아마도 한석규의 TV출연이 많지 않은데다, 그가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서의 성대모사의 대상으로서 소비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그런 일면적인 면만 갖고 있을 거라 생각한 한석규라는 배우가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 이도를 연기하는 모습에 대중들이 놀라는 건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이 작품의 세종은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막연히 생각했던 그런 세종이 아니다. 아버지 태종 이방원(백윤식)의 밑에서 그 피의 집권을 바라보며 깊은 트라우마로 갖고 있는 왕이며, 그래서 태종과는 달리 백성 하나의 목숨에도 눈물을 흘리고 애통해하는 그런 왕이다.

게다가 때론 저잣거리 농담에서부터 욕을 툭툭 뱉어내기도 하고, 속으론 아파하면서 겉으론 웃으며 신하들 앞에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는 인물이며, 자신의 아픈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겨우 나인 소이(신세경)에 불과할 정도로 외롭고 고독한 왕이다. 이런 복잡한 심사를 가진 역할을 제 옷 입은 듯 자연스럽게 소화해내는 일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한석규라는 배우가 우리 앞에 툭 불거져 나와 보이는 건 그 깊은 오해를 삽시간에 무너뜨리는 농익은 연기력과 세종이라는 섬세하고 입체적으로 잘 구축된 캐릭터가 만났기 때문이다.

이런 오해는 송중기도 마찬가지다. 꽃미남이라는 칭호의 대변자처럼 예쁘장한 얼굴은 어쩌면 송중기라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가능한 배우의 진면목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트리플'의 지풍호라는 캐릭터에서도 그는 꽃미남의 이미지 속에 있었고, 그의 존재감을 한껏 높여준 '성균관스캔들'이라는 사극에서조차도 그는 꽃미남 선비에 갇혀 있었다. 그래서 송중기가 젊은 세종 이도의 역할을 한다고 했을 때 대중들이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다 여겼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송중기는 '뿌리 깊은 나무'의 첫 회에 첫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부터 이런 꽃미남 이미지를 보기 좋게 부숴버렸다. 송중기는 아버지 태종의 말 한 마디에 친인척은 물론이고 자신의 장인까지 죽는 것을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세종의 깊은 트라우마를 연기해냈다. 동시에 어딘지 겉으론 유약해보이지만 내면 깊숙이 백성 하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 만큼의 강인함 또한 보여주었다. "내가 조선의 왕이다! 감히 왕을 참칭하지 말라!"고 그가 아버지 태종에게 소리치는 장면은 그래서 송중기라는 유약해 보이는 꽃미남 배우가 껍질 하나를 벗어던지는 장면처럼 보여지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젊은 세종에서부터 나이 지긋한 세종의 두 역할에 걸쳐 송중기와 한석규 이 두 연기자를 다시 발견하게 된 이유는 도대체 뭘까. 그것은 아마도 이 작품이 가진 세종이라는 인물의 매력 덕분일 것이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왕이면서도 사실은 가장 몰랐던 왕, 세종을 성공적으로 그려냄으로서 결국 세종이란 왕을 재발견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니 그 캐릭터를 입은 송중기와 한석규 또한 그들이 가졌던 본래 연기자로서의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 게다. 그들 역시 우리가 잘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잘 몰랐던 연기자들이 아닌가.


 '뿌리', 자신과 싸워야했던 고독한 군주의 초상

'뿌리깊은나무'(사진출처:SBS)

'뿌리 깊은 나무'가 그리는 세종은 대단한 파격이다. 욕쟁이에, 똥지게를 지고, 개소리를 연구하는 왕. 게다가 어린 시절 아버지 이방원(백윤식)의 피의 정치를 보고 자라며 갖게 된 트라우마는 그를 정신분열의 상태로까지 몰아넣는다. 세종(한석규)이 젊은 세종(송중기)과 논쟁을 벌이는 이 셰익스피어 희곡 같은 장면은 이 왕의 깊은 내상을 밖으로 드러낸다. 아버지와는 다른 정치를 하려 했으나 그것이 얼마나 이상적이고 힘겨운 것인가를 실감하며 절망하는 세종의 내면이 이 장면에 압축되어 있다. 도대체 이 왕은 무엇이 그리도 괴로운 걸까.

일찍이 마방진 에피소드에서 상징적으로 제시되었듯이 세종은 왕 하나만을 남기고 필요하면 모두 제거해버리는 아버지 태종의 패도정치가 아니라, 모든 백성이 저 마다의 자리를 잡아서 함께 살아가는 모두가 상생하는 정치를 꿈꾼다. 즉 태종이 죽이는 정치를 했다면 세종은 살리는 정치를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자신이 살린 첫 번째 백성, 똘복(장혁)은 그를 죽이려 궁에 들어와 있고, 어린 시절 아버지 태종의 실체를 까발리고 자신을 조롱했던 정기준을 살리려 했으나 그 역시 밀본의 수장으로 돌아와 자신의 학사들을 죽이고 있다. 그는 살리려 하지만 그들은 죽이려 한다.

세종은 모두를 살리기 위해 홀로 고독하게 싸우고 있지만, 그런 왕을 이해하는 이들은 없다. 세제개혁을 위해 새로이 여론을 조사하겠다는 얘기에 조정은 술렁이고 신하들은 반기를 들려 한다. 그런 신하들을 바라보며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느냐"고 반문하는 장면에서는 왕의 외로움이 묻어난다. 갖은 명분을 붙여 자신이 하려는 일을 막아 세우는 그들을 보며 새로운 나라를 꿈꾼 왕의 절망감은 클 수밖에 없다. 이런 왕을 이해하는 유일한 인물이 나인에 불과한(그것도 말 못하는) 소이(신세경)라는 건 아이러니다. 모두가 왕의 책임을 묻고, 왕 스스로도 모든 게 내 책임이라고 할 때, 소이는 "전하의 책임이 아니옵니다"라고 말해준 유일한 인물이다.

"이 조선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 책임이다. 꽃이 지고 홍수가 나고 벼락이 떨어져도 내 책임이다. 그게 임금이다. 모든 책임을 지고 그 어떤 변명도 필요 없는 자리! 그게 바로 조선의 임금이라는 자리다." 이 아픈 고백은 세종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것을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외로운 심사가 겹쳐져 있다. 장인어른이 아버지 태종에 의해 죽게 되었을 때, 소헌왕후조차 이렇게 얘기하지 않았던가. "이 모두가 전하 때문이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그간 사극이 좀체 깊게 다뤄지지 않았던 왕이란 존재의 고독을 매력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왕이란 자리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의 결과물이 아니다. 세종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온전히 백성을 위한 삶을 꿈꾸면서, 본인은 정작 깨질 듯한 두통과 참을 수 없는 트라우마에 불면의 밤을 지샐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이 사극의 팽팽한 긴장감은 어찌 보면 밀본이라는 세력이 가진 위협감이나 똘복이라는 복수의 화신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가장 큰 긴장감은 세종의 내면 속에 있다. 자신이 꿈꾸는 조선을 위해 '살리는 정치'를 하려는 자아와,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괴로워 이를 모두 포기하고픈 자아가 부딪치는 것. 똘복과의 대결이 아니라, 똘복을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를 고민하는 세종의 갈등 속에 이 팽팽한 긴장감이 들어있는 셈이다.

그래서 이 사극은 기묘한 지점이 생겨난다. 마방진의 숫자 하나가 달라지면 전체가 흐트러지듯이 사극의 한 사건은 왕에게도 고스란히 그 여파가 전달된다. 외적인 상황들이 사건으로 터져 나오지만 그것이 결국 세종의 내면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세종이 욕을 하고 기물을 때려 부수거나 누구의 책임이냐를 두고 소이를 윽박지를 때 이 사극의 긴장감은 그래서 더 고조된다. 얼마나 인간적인 왕인가. 백성을 위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고(이것은 아버지 태종의 트라우마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 삶이 지독스럽게 고통스럽고 외롭다는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왕. '뿌리 깊은 나무'가 보여주려는 그 깊은 뿌리는 세종이 한글을 창제했다는 그 꽃이 아니라 그 꽃이 피어나기까지 꿈틀대고 괴로워했던 세종의 내면에 있다.


'뿌리', 장르의 종합선물상자된 이유

'뿌리깊은나무'(사진출처:SBS)

'뿌리 깊은 나무'의 첫 시작은 액션 스릴러였다. 궁에 겸사복으로 들어온 채윤(장혁)이 세종(한석규)을 살해하기 위해 상상으로 재구성하는 액션 신은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액션은 채윤의 어린 시절인 똘복(채상우)과 세종의 젊은 시절인 이도(송중기)의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정치드라마라는 장르로 옮겨간다. 세종과 태종 이방원(백윤식) 그리고 정도전 일파의 정치 대결구도가 그것이다.

이 정치 대결의 이야기는 그러나 정치드라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무휼(조진웅)과 조말생(이재용)의 대결구도로 넘어가면서 액션 장르와 뒤섞인다. 태종이 밀본(정도전에 의해 만들어진 비밀결사)을 찾아내는 과정은 정치적인 해석과 지적인 추리가 절묘하게 얽혀있는 시퀀스였다. 그리고 이제 이 사극은 집현전 학사 연쇄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채윤의 이야기를 통해 '별순검'이 일찍이 가져왔던 조선판 CSI식의 추리를 본격화하고 있다.

물론 그 중간 중간에 건익사공(작은 대롱에 한 줌 물로 사람을 일사시키는 기술)이나 출상술(일종의 경공법)같은 무협적인 요소까지 가미시키고, 왕이 쌍소리를 하고 똥지게를 지며 개소리(?)를 연구하는 식의 코믹적인 요소도 빼놓지 않는다. 이 정도면 사극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장르들을 소화하고 있는 셈이다. 장르 사극의 종합선물세트라고 할까.

사극이 퓨전화되고 장르화되면서 하나의 새로운 사극은 다른 사극에 그만큼 밀접한 영향을 주게 되었다. 역사 바깥으로 나온 사극이라는 공간이 장르화를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뿌리 깊은 나무'는 여러 기존 사극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반촌의 이야기에서는 '제중원'이나 '성균관 스캔들'이 엿보이고, 추리적인 요소는 '별순검'이, 액션적인 요소는 '추노'가, 정치적인 요소는 기존 정치사극들이 떠오른다. 실제로 송중기와 장혁의 조합은 그들이 출연했던 작품들을 연상케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조합에도 불구하고 '뿌리 깊은 나무'는 어떻게 기존 사극들 그 이상의 장르적 재미를 보여주고 있는 걸까. 아마도 이것은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장태유PD의 연출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연출적인 측면만 빼놓고 보면 이 사극은 우리네 사극들의 전통보다는 오히려 (장르 운용에 묘가 있는) 미드가 가진 장르적 전통을 더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궁 안에서 숨 가쁘게 돌아가는 사건들은 '24'같은 미드의 긴박감을 연상시키고, 채윤이 북방에서 벌이는 전투 신들은 '글래디에이터'처럼 인물에 집중함으로써 불필요한 스펙타클의 비효율을 넘어선다.

무엇보다 '뿌리 깊은 나무'가 성취하고 있는 것은 이렇게 다양한 선대의 사극들이 해놓은 성과와 다채로운 장르들이 결합하고 있으면서도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는 점일 것이다. 정치적인 이야기와 액션 그리고 추리가 각각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모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사극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이기도 하다.

사극만큼 다양한 장르와 소재의 실험이 가능한 공간은 없다. 사극은 역사는 물론이고, 역사 바깥의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가능성이 열려진 공간이다. 옛이야기가 가진 힘은 현대극의 장르들이 실험할 수 있는 한계를 훌쩍 넘어서게 해준다. 그러니 정통사극에서 퓨전사극을 거쳐 장르사극까지 넘어온 마당에 사극이 실험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없다고 한탄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껏 거쳐 온 이 모든 것들을 조합하고 변용하는 것만으로도 사극의 새로운 세계를 끊임없이 창출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지금 그 사극의 무한한 가능성을 우리 앞에 펼쳐 보여주고 있다.

지붕 뚫던 '하이킥', 바닥 뚫은 이유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사진출처:MBC)

먼저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라는 이 시트콤의 화자가 이적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그는 대장항문과 의사로 줄곧 항문만 바라보면서 살아온 인물. 이 설정은 이 시트콤의 냉소적이고 풍자적인 시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때론 더럽고 때론 힘겨운 현실을 마치 항문을 들여다보듯 보고 있다는 얘기다. 얼마나 기가 막힌 시점인가! 아마도 작가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항문을 바라보듯 지독한 구석이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극 초반에 주목된 두 캐릭터, 백진희와 안내상은 이 현실을 잘 말해주는 캐릭터다.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되지 않는 청년백수에, 등록금 때문에 진 빚에 허덕이며 고시원을 전전하는 백진희는 이 시대 암울한 청춘의 자화상이다. 그녀의 악몽 같은 현실은 꿈에서조차 잊혀지지 않는다. 꿈속에서 윤계상이 면접관으로 나와 그녀를 면접하는 '취집시험(취업+시집)'은 여성들에게 있어서 두 가지 로망인 일과 사랑, 그 무엇에서도(이 둘은 사실 연결되어 있다) 철저히 루저가 되어버린 청춘의 한 단상을 그려낸다.

백진희가 이 시대 청춘들의 힘겨운 자화상이라면, 안내상은 이 시대 가장들의 힘겨운 자화상이다. 친구의 야반도주로 하루아침에 파산해버린 그는 말 그대로 집도 절도 없는 홈리스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처남인 윤계상 집에 얹혀살면서도 여전히 반찬 투정을 하는 옛 삶에 머물러 있다. 그의 자화상이 비극적인 것은 그가 왜 파산했고 왜 그런 처지에 있게 되었느냐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의 비극은 그런 처지에 있으면서도 그가 아무런 변화나 노력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이 시대에 갑자기 권위를 잃어버린 가장들처럼.

물론 그렇게 각박한 세상에 각박한 인물들만 있는 건 아니다. 박하선과 윤계상은 이 시트콤에서 천사표 캐릭터다. 그런데 이 시트콤이 바라보는 이들 천사표들은 착하기는 하지만, 그래서 늘 당하는 존재거나, 아예 현실을 잘 모르는 존재다. 박하선이 그 착한 캐릭터로 이 시트콤에서 웃음을 주는 방식은 한없이 망가지는 것이다. 그녀는 선의로 한 일이지만 세상은 그런 그녀를 눈물짓게 만든다. 윤계상은 물론 망가지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현실과 유리되어 있는 인물이다. 착하지만 그는 현실에 대한 실제적인 이해가 부족하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는 '웃으면서 회 뜨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이 각박한 현실이 그저 '착하게 산다'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캐릭터들이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이순재는 한방병원 원장이었고,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이순재는 학교에 급식을 납품하는 중소기업 사장이었다. 어느 정도 잘 사는 가족이 이 시트콤들의 배경이었던 것. 물론 힘겨운 현실을 반영한 캐릭터가 없었던 건 아니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는 빈둥빈둥 백수가 되어버린 가장 이준하(정준하)가 등장하고,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는 이순재네 집에 더부살이로 들어온 신세경과 신신애(서신애) 자매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 두 시트콤에서는 이렇게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끌어안는 가족애 같은 것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집을 잃고 길바닥에 나 앉게 된 안내상네 가족이나 청년 실업으로 오갈 데 없는 백진희를 안아주는 건 그런 가족이 아니다. 그들은 현실상황에 의해 파탄 나버린 채, 너무 착하거나 현실을 너무도 모르는 박하선 혹은 윤계상의 집에서 불안한 더부살이를 해나간다. '거침없이 하이킥'이나 '지붕 뚫고 하이킥'의 인물들이 그래도 여전히 성장을 꿈꾸는(때로는 신데렐라를) 상승하는 캐릭터들이었다면,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의 인물들은 현실에 짓눌려 한없이 바닥으로 하강하는 캐릭터들이다.

도대체 무엇이 달라진 걸까. 한때는 거침없었고, 한때는 지붕을 뚫던 '하이킥'은 왜 바닥을 뚫기 시작한 걸까. 빚쟁이들에게 몰려 우연히 발견된 지하 땅굴이라는 특이한 공간은 지금의 '하이킥'이 바라보는 지독한 현실을 그대로 상징한다. 기껏 탈출구라고 뚫은 것이 옆집 화장실이었다는 시퀀스 역시 이들의 우습지만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절망감뿐일까. 바로 그 바닥을 뚫고 들어간 지하 땅굴이 그동안 소통되지 않던 힘겨운 자들을 연결해주는 소통의 장이 되고, 때로는 '실크로드'가 되는 장면은 이 시트콤의 작은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 짧은 다리의 역습은 현실적이지 않은 판타지가 되거나, 지극히 현실적인 비극이 될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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