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결 국면에 빠진 드라마들, 관전 포인트는?

지금 우리네 드라마는 대결 중이다. 각각의 드라마 속에서는 남자들 혹은 여자들이 서로 대결을 벌이고 있고, 드라마 밖으로 나와도 그 남자들이 대결하는 드라마는 여자들이 대결하는 드라마와 매일 밤 대결을 치르고 있다. 드라마가 기본적으로 갈등구조와 그 해결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르라면, 대결구도는 드라마의 핵심이기도 하다. 따라서 각 드라마의 핵심과 전하려는 메시지를 보려면 그 대결구도가 무엇인지를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지금 드라마들은 무엇과 대결하고 있으며,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월화의 대결, ‘남자이야기’ vs ‘내조의 여왕’
월화 드라마 중 ‘자명고’ 역시 낙랑공주(박민영)와 자명공주(정려원)가 대결구도를 이루고 있지만 그것이 사극이라는 점에서 예외를 둔다면, 현대극인 ‘남자이야기’와 ‘내조의 여왕’이 보여주는 대결구도는 흥미롭다. ‘남자이야기’는 자본의 힘에 철저하게 낭떠러지로 떨어진 김신(박용하)과 그런 자본을 손아귀에 주무르기 위해 어떤 짓이든 하는 채도우(김강우), 이 두 남자의 피투성이 대결을 다룬다. 반면 ‘내조의 여왕’은 한때는 퀸카였으나 지금은 알바로 전전하며 남편의 백수탈출을 위해 온 몸을 던지는 천지애(김남주)와, 한 때는 폭탄으로 천지애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으나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어 그녀 위에 군림하는 양봉순(이혜영), 이 두 여자의 대결이다.

‘남자이야기’가 자본과 그 자본의 폭력 앞에 내둘러진 강자와 약자의 대결구도를 통해 사회가 가진 모순들을 뒤집어보려 하고 있다면, ‘내조의 여왕’은 취업 문제와 직장 내 권력의 문제를 내조라는 여성적인 시점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 둘 다 사회적인 이슈를 잡고 있으며 그것이 모두 불황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나 그 접근방식은 판이하게 다르다. ‘남자이야기’는 본격 사회극에 가깝고 ‘내조의 여왕’은 코믹 풍자극에 가깝다. 좀 더 절절한 리얼리티를 원한다면 ‘남자이야기’가 갖는 박진감 넘치는 대결구도를 권하고, 가볍게 터치하면서 뒷통수를 치는 풍자를 원한다면 ‘내조의 여왕’이 갖는 코믹한 대결구도를 권한다. 남자들의 세계와 여자들의 세계가 갖는 대결의 다른 성격도 관전 포인트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다.

수목의 대결, ‘카인과 아벨’ vs ‘미워도 다시 한 번’
‘돌아온 일지매’의 후속 드라마로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은 ‘신데렐라맨’을 차치해놓고 본다면, 수목드라마 ‘카인과 아벨’과 ‘미워도 다시 한 번’의 대결구도 역시 남자들의 대결과 여자들의 대결로 나눠진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카인과 아벨’은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형인 이선우(신현준)와, 그로부터 버려지고 죽음의 위기에까지 처했다 살아 돌아온 이초인(소지섭)의 대결구도를 그린다. 뇌의학 센터를 지으려는 이선우와 응급의학센터를 지으려는 이초인의 병원 내 권력대결도 볼거리이며, 기억을 잃었다 다시 되찾은 이초인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으나 뇌종양이 재발한 형 이선우 사이에 얽히는 복잡한 대결구도(여기에는 사이에 멜로 대결도 포함된다)도 볼거리다.

한편 ‘미워도 다시 한 번’의 대결구도는 기본적으로 이정훈(박상원)을 사이에 두고 부인인 한명인(최명길)과 내연녀인 은혜정(전인화)의 대결구도를 그리고 있지만, 여기에 한명인의 정략적인 며느리로 들어온 최윤희(박예진)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그 대결양상이 복잡해졌다. 최윤희가 본래 은혜정의 숨겨진 딸이었던 것. 이렇게 되자 그녀의 시어머니와 대결을 벌이는 이가 자신의 친어머니(은혜정)가 되고, 시아버지는 갑자기 친아버지가 된다. 한편 최윤희의 동생인 최재상(김보강)이 은혜정의 딸(둘째 딸) 은수진(한예인)을 사랑하게 되면서 관계는 더 복잡해질 양상이다. 어찌 보면 ‘하늘이시여’의 얽히고설키는 막장 드라마의 구조를 연상시키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대결양상이 가지는 파괴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목드라마들은 이처럼 어떤 사회적인 맥락을 제시한다기보다는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쪽에 맞춰져 있다. ‘카인과 아벨’이 기억과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면, ‘미워도 다시 한 번’은 가족관계의 억압과 그 탈출 욕망의 부딪침을 다루고 있다.

주중 드라마들이 모두 대결구도를 이루고 있는 것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좀 더 첨예화되어 이 불황기 드라마의 한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만큼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요소로서 대결국면이 갖는 힘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대결구도는 그것을 연기하는 연기자들의 연기대결 또한 볼거리다. ‘남자이야기’에서 카리스마 연기로 변신한 박용하와 악역 연기에 도전하는 김강우, 그리고 ‘내조의 여왕’에서 푼수로 변신한 김남주와 못난이 역할에서 우아한 악역으로까지 캐릭터 폭을 넓히고 있는 이혜영의 연기대결이 그렇다. 또 수목드라마, ‘카인과 아벨’에서는 선한 눈빛에서 공포가 느껴지는 눈빛까지 변신하는 소지섭의 연기와 내적 갈등을 가진 악역 신현준의 연기대결이, 그리고 ‘미워도 다시 한 번’에서는 막장이라는 용어마저 불식시키는 최명길과 전인화의 명품 연기가 백미다.

영웅보다 인간을 선택한 ‘돌아온 일지매’

‘홍길동전’이나 ‘전우치전’ 같은 우리네 고전들의 영웅들을 보면 그 대결의 대상이 왕이거나, 체제 자체가 되는 과감성이 엿보인다. 탐관오리들을 징벌하고, 적서차별에 대항하고, 왕마저 탄복시키는 그 영웅들은 심지어 자신만의 나라를 세우기까지 한다. 당대 서민들의 억압된 정서를 속 시원히 풀어주는 그 이야기들이 얼마나 힘이 되었을 지 짐작해보는 건 어렵지 않다. 이준기가 분했던 ‘일지매’는 바로 이 계보를 잇고 있다.

하지만 ‘돌아온 일지매’에서 일지매는 이런 영웅들과는 색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물론 탐관오리로서 김자점(박근형)을 공공의 적으로 규정하고 그의 재물을 빼앗아 민초들에게 나눠주고, 그가 내통하는 청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은밀히 화포를 제작하기까지 하지만 그것은 왕과 대항하기보다는 왕의 밀서를 받고 은밀히 일을 진행중인 최명길(정동환)을 돕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일지매는 그것이 왕을 위해 하는 일이라기보다는 결국 민초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하는 일(전쟁이 나면 가장 고통받는 건 그들이라며)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지매가 하는 일련의 행동들은 과거 고전들의 영웅들이 보여주었던 체제 전복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돌아온 일지매’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적서차별이 국가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그 시스템 자체와 대항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김자점을 해하려는 일지매에게 그것이 결국에는 나라에 큰 혼란을 야기할 것이라며 제지하는 열공스님(오영수)의 대사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무엇보다 ‘돌아온 일지매’의 이런 ‘체제 내에서의 싸움’이 캐릭터로 잘 드러나 있는 인물은 구자명(김민종)이다. 그는 관원으로서 자신이 해야할 책무와 나라가 민초들에게 가하는 고통 사이에서 번민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일지매란 존재는 그에게는 딜레마다. 일지매는 탈법적인 일을 하지만 그것이 결국 민초를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은 구자명이란 캐릭터를 비극적인 인물로 만든다.

그리고 이것은 똑같이 일지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시스템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를 시스템 안에서 해결하려는 그의 노력은 “민초들에게 행복을 주기보다는 고통이라도 덜어주는” 소극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일지매의 이런 모습은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돌아온 일지매’가 영웅담류의 소재를 갖고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우울한 기운이 감도는 것은, 이 이야기가 이처럼 무거운 현실을 벗어나 호쾌한 세계를 그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 사극에서 일지매는 공적인 문제보다는 사적인 문제에 더 집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출생과 함께 버려진 일지매는 꽤 오랜 시간을 어머니의 그림자를 찾으며 방황하며 보냈고, 그 그림자 속에서 달이와 월희(윤진서)를 만나고 사랑해왔으며 지금도 그것은 진행형이다. 구자명이 가진 딜레마는 그가 평생을 사랑해온 일지매의 모친인 백매(정혜영)와의 사적인 이야기로 환원된다. 가끔씩 영웅담을 표명하는 이 사극이 멜로 드라마의 연장선으로 비춰지는 것은 일지매가 취하고 있는 이 자세에서 비롯된다.

결론적으로 보면 ‘돌아온 일지매’는 영웅을 그렸다기보다는 한 인간을 더 조명한 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늘 깨지고 다치는 일지매의 모습은 그가 초인적인 영웅이 아니라 그 또한 평범한 인간이라는 점을 자꾸 상기시킨다. 이것은 어쩌면 고우영 화백이 원작만화를 그렸던 당대 현실의 억압적인 검열 탓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만화 같은 영웅보다는 좀더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영웅을 그리려 했던 의도 탓일 수도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들이 ‘돌아온 일지매’가 촘촘한 스토리에 실험적인 연출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대중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한 드라마를 만든 것은 아닐까. ‘돌아온 일지매’는 분명 인간미 넘치는 인물들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이 어려운 시국에 대중들은 어쩌면 황당하더라도 좀더 초인적인 판타지를 제공하는 영웅을 기대했을 지도 모른다.

저녁 시간 그저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 ‘아내의 유혹’의 낚시질 영상에 걸려든 적이 있다. 그 장면에서 누군가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그 누군가의 눈빛은 정상인의 것이 아니었다. 매번 챙겨보는 드라마가 아닌지라(이걸 왜 챙겨봐야 하는 지도 모르겠지만), 그 상황의 내용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내용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상황의 풍경이 전하는 ‘이거 뭔가 벌어졌구나’하는 느낌이다. 때마침 흘러나오는 긴박한 효과음은 그 느낌이 맞았다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주면서 그 벌어진 뭔가에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하지만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대부분 드는 생각은 ‘왜 내가 이걸 보고 있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길을 가다가 우연히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는 것을 보고는 호기심에 이끌리는 것과 같다. 누군가 싸움을 벌이고 있다면 십중팔구 지나던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구경을 하려 들것이다. 누가 이길 것인가 하는 점이나, 그들이 왜 싸우는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던 평온한 일상에 갑자기 틈입으로 들어온 싸움이라는 풍경이 주는 날선 느낌이다. 그 풍경을 보면서 혹자는 일상 속에 침묵해왔던 내면의 억압을 대리해보기도 할 것이며, 혹자는 백주대낮에 웬 쌈질이라며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른다. 내용도 없고 감동도 없지만 일단 사람들은 모였다. 질은 사라지고 양만 남는 것, 이른바 막장의 본색이다.

그 질이란 것을 살펴보면(그걸 살펴본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런 일이긴 하지만), 한 마디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복수의 연속이다. 자신의 친구이자 남편의 내연녀인 애리(김서형)가 남편과 함께 은재(장서희)를 죽음으로 내몬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죽으면 이야기가 끝나므로 절대 죽을 수는 없다) 은재가 살아 돌아와 민여사(정애리)의 딸 민소희로 살아가며 남편 교빈(변우민)과 애리에게 복수를 한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복수구도이기에 좀 어설프기는 해도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볼만하다.

그런데 더 이상 구경시킬 싸움이 없었던 지 갑자기 죽은 줄로 알았던 민소희가 살아서 돌아와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은재를 몰아붙인다. 한편 애리의 아들 니노(정윤석)의 출생의 비밀이 갑자기 불거져 나오면서 은재의 오빠 강재(최준용)는 혼란에 빠진다... 끝없는 관계의 반복 혹은 돌출. 이 드라마의 키를 쥐고 있는 악역 애리가 은재의 친구이자, 강재의 애인이자, 은재남편 교빈의 내연녀란 사실은 이 드라마가 캐릭터 하나를 두고 얼마나 많은 걸 빼먹고 있는 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 익숙한 코드의 반복이 주는 식상함을 상쇄시키기 위해 이 드라마가 내세운 것은 속도다. 이른바 ‘빠른 전개’.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의 나열은 느린 속도로 전개될 때는 그만큼 욕먹을 소지도 많다. 하지만 빠르게 진행시키면 말이 달라진다. 기대효과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에서 나온다. 말도 안 되는 과정의 빠른 진행은 충분히 자극적인 결과(대립 상황, 싸움풍경)로 보상받는다. 과정이 무시되고 결과에만 집착하는 형국. 막장의 또 다른 본색이다.

그러나 속도에 편승하면서 뭉개져 보이지 않던 그 과정의 풍경은 속도에 익숙해지거나, 그 종착역에 다다르면서 속도가 느려질 때가 되면 이제 그 진면목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드라마의 말미에 다다르자 ‘왜 내가 저걸 보고 있지’하는 그 마음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다. 물론 그 중독적인 속도에서 하차하기란 쉽지 않지만 적어도 비판적인 시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시청률이란 양적 잣대가 존재의 이유가 되는 이 드라마에서 요동치기 시작하는 시청률은 드라마를 더더욱 극단적으로 치닫게 만든다.

질적인 것보다 양적인 것에 몰두하는 것, 그리고 과정보다는 결과에 몰두하는 것은 우리가 개발의 시대에 이미 익숙하게 겪어왔던 것들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작금의 정치경제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막장의 본색은 그 드라마를 파탄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드라마 한 편의 파탄이 아니라는 점이다. 질적 실패와 양적 성공, 과정의 실패와 결과의 성공이 주는 추상적인 성공 방정식은 어쩌면 전염병처럼 번질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불황이라는 호명은 때로는 이 모든 것들에 면죄부를 주기도 한다.

‘꽃남’, 그 광고 같은 세상의 마력

‘꽃보다 남자’는 극단적인 빈부 격차를 바탕으로 드라마가 구성되어 있다. 초부유층인 구준표(이민호)는 하녀와 집사까지 있는 궁전 같은 집에서 살지만, 서민층 금잔디(구혜선)는 자그마한 아파트에서 옥탑방으로 그리고 결국에는 집 없이 거리를 떠도는 처지로 살아간다. 구준표는 스포츠카에 전용비행기까지 있어 원하면 전용 섬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을 만큼 여가의 삶을 즐기지만, 금잔디는 자전거를 끌고 새벽 우유 신문 배달에, 아르바이트에 대부분의 시간을 생계로 써야한다. 하지만 이 비교체험 극과 극 같은 구준표와 금잔디에게도 똑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같은 기종의 핸드폰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구준표와 금잔디의 핸드폰이 말해주는 것
물론 이것은 PPL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만, 광고를 하는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초부유층이나 서민층이나 완전히 다른 물적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핸드폰만은 같다는 이 사실, 즉 핸드폰에 주어진 특권적인 평등의식(?)은 이 드라마 출연자들을 두고 왜 핸드폰 업체들 간의 각축전이 벌어졌는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아무리 가난해도 구준표폰을 쓸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드라마가 끝나거나 시작되기 직전에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광고가 어째서 드라마와 그렇게 잘 어울리는가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이 판타지로서의 초부유층과 현실로서의 서민층의 접점에 등장하는 핸드폰이 주는 뉘앙스는 이 드라마가 가진 힘의 원천을 살짝 드러내준다. 그것은 광고의 세계가 그렇듯이 판타지로 그려지는 물질적 욕망의 세계를 (드라마를 통해) 누구나 얻을 수 있다는 유혹이다.

‘꽃보다 남자’는 광고식 표현으로 얘기한다면 “생각대로 하면 되는” ‘비비디바비디부’ 세상이다. 그 세상의 주인은 F4로 불리는 네 명의 미소년들이고, 그들은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는 입시경쟁제로의 신화그룹 재단 학교를 다닌다. 이 생각대로 뭐든 되는 이들을 보통사람들은 선망하며 숭배한다. 이것은 흔히 TV를 볼 때 광고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와 유사하다. 판타지의 세계가 있고 그 판타지는 상품들과 연결되어 있다. 광고가 말하는 것은 손을 뻗어 그 상품을 구매하는 순간, 당신도 그 판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속삭임이다.

그러니 그 광고 같은 세상 속으로 들어간 서민 금잔디는, 광고를 바라보는 대중들의 대변자가 되어 그 판타지 세상을 대리 경험해준다. 광고 속에서 익히 보아왔던 뉴칼레도니아 같은 섬으로 광고 속 미소년들의 분신인 F4와 함께 여행하는 짜릿한 경험을 제공하고, 궁전 같은 집에서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식사를 받고, 미소년의 품에서 잠이 든다. 백화점을 통째로 빌려 쇼핑을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과 하녀-주인님 놀이를 한다.

이 광고 같은 세상에 대한 몰입도를 높여주는 것은 금잔디 앞에 중간 중간 도래하는 잔인한 현실들이다. 신화고등학교 학생들의 집단 왕따나, 구준표와의 관계 사이에 끼여드는 반대자들(강회장이나 하재경 같은)은 금잔디의 판타지를 깨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 뿐, 광고 같은 세상에서 날아온 백마 탄 미소년들은 금잔디를 다시 그 세상으로 데려감으로써 판타지는 계속된다.

‘꽃남’이 연출한 광고 속 상품의 마력
판타지는 어찌 보면 드라마의 기본 전제일 수 있다. 따라서 판타지 자체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드라마는 현실에서 풀어지지 않는 욕망들을 자신의 세계를 통해 때론 판타지로 잊게 해주고, 때론 그 실체를 드러냄으로써 현실을 사는 이들에게 어떤 자각을 주기도 한다. ‘꽃보다 남자’가 보여주는 판타지와 거기에 대한 열광적인 반응 역시 그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불온한 생각이 드는 것은 이 드라마가 가진 지나친 상품의 냄새다.

이 드라마의 시퀀스들을 보면 스토리의 진행보다도 광고적인 장면들의 나열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이야기의 흐름을 이어가는 설명적인 대사들이 나온 후에는 여지없이 멋진 장면들, 예를 들면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서 웃고 떠들며 음식을 즐기는 장면 같은 것들이 대사 없이 보여지고 그 위로 OST가 흘러나온다. 만일 이 한 장면에 특정 상품 하나를 올려놓기만 해도 이것은 하나의 광고가 될 수 있을 정도다(물론 영상은 그다지 뛰어나진 않지만). 요는 이 드라마가 이야기의 구성보다는 광고 같은 팬시한 장면들의 나열로 이루어져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여기 등장하는 캐릭터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물론 ‘숨겨진 착한 구석’이라는 통상적인 매력이 있지만, 구준표라는 캐릭터를 구성하는 대부분은 물질적인 것들이다. 보는 이들의 갖고 싶은 욕망을 부추기는 팬시한 물질의 세계는 엄청난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고, 구준표는 그 돈을 쥐고 있는 캐릭터다. 그는 그 돈을 스스로 번 것도 아니고 그저 태생적으로 얻은 것이므로, 그의 캐릭터는 생산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는 데서 나온다. 물론 이 팬시한 캐릭터를 더욱 팬시하게 하는 것은 이민호의 수려한 외모다. 이민호가 이 드라마를 통해 벼락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구준표라는 캐릭터가 내면적인 매력(마음, 연기를 통해 보여지는 것)보다는 외면적인 매력(외모, 돈, 캐릭터 자체로부터 얻어지는 것)에 편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구준표를 비롯한 F4 같은 물질적 세계 속에 살아가는 광고적(상품적) 존재들은 금잔디라는 한 여자 앞에 무릎을 꿇고 사랑을 고백한다.

여기서 상대적으로 대본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연출이 대단한 것도 아닌 ‘꽃보다 남자’가 가진 불가사의한 힘의 실체를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저 광고가 가진 상품 판타지의 힘과 유사하다. 갖고 싶은 것들이 즐비한 그 세계 속에서 뭐든 그걸 이뤄주는 캐릭터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판타지. 그 ‘비비디바비디부’의 세계가 우리를 사로잡았던 실체가 아닐까. 중독적으로 빠져들었던 드라마의 끝에서, 볼 때는 그 욕망에 끌려 바라보다가 끝나고 나면 현실과의 괴리로 인해 순간적인 허전함에 빠지는 광고가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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