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퉁명스러워도 우린 남이 아니라는 건

 

“야 노규태 나 여기 있을 거야. 내가 밖에 있으니까 수틀리면 바로 나와. 뒤는 니 변호사가 책임질 거니까.” KBS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향미의 살해 용의자로 지목되어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받는 노규태(오정세)에게 홍자영(염혜란)은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한다. 그는 변호사로서 노규태와 함께 온 것이지만, 그 퉁명스러움 속에는 전 남편이었던 노규태에 대한 숨겨진 애정 같은 게 느껴진다. 밖에서 애타게 기다리며 당 떨어진다고 사탕을 꺼낼 정도로.

 

찌질한 노규태는 이 거짓말 탐지기 조사에 대한 두려움보다 아내 홍자영이 떠나간 것에 대한 후회가 더 크다. 그래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막판 세 개의 질문을 자신이 정하게 해달라 요청하고 그걸 물어볼 때 변호사도 참관하게 해달라는 것. 최향미와 애인 사이였냐는 질문과, 최향미의 모텔방에 들어간 적 있냐는 질문에도 “아니요”라고 답한 노규태는 “당신은 아내를 사랑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 후 속내를 털어놓는다. “예.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홍자영은 기막혀 하면서도 내심 안도한다. 먹으려 꺼냈던 사탕을 버릴 정도로.

 

이 짧은 시퀀스에는 <동백꽃 필 무렵>이 건네는 사랑과 정의 방식이 담겨진다. 어딘지 퉁명스럽지만 그래서 더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들의 표현 방식. 애초에 거짓말 탐지기 조사에 응한다고 했을 때부터 노규태는 이런 고백이 목적이었다는 게 드러난다. 왜 이런 조사에 응하냐며 화를 내는 홍자영에게서도 노규태는 담담히 말했다. “자영아. 죄 지었으면 벌 받겠지. 그냥 나 한 번 믿어봐.” 하지만 홍자영은 노규태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마냥 믿지 못하고 걱정한다. 막상 조사에 들어가면 어리버리할 것이 분명하다며. 노규태는 말한다. “당신 그래서 나 좋아했잖아. 당신 나 모성애로 좋아했지? 지금도 사고 친 자식 모른 척 할 수 없는 그런 마음이지? 미안해 당신 엄마 만들어서. 당신도 여자 하고 싶었을 텐데. 맨날 엄마 노릇하게 해서.”

 

퉁퉁대지만 그 안에 담겨진 은근한 마음의 표현은 <동백꽃 필 무렵>이 더 깊게 시청자들을 울리는 이유다. 이런 표현방식은 노규태와 홍자영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도처에서 활용된다. 동백이 박찬숙(김선영)에게 필구(김강훈)를 잠시 봐달라는 말을 힘겹게 말할 때 퉁명스럽게 쏘아대며 그 남다른 정을 전하는 박찬숙의 대사에서도 이런 방식이 보여진다. “얘. 너 너무 이렇게 예의차려도 정이 안가. 필구랑 준기랑 죽고 못사는 거 이 동네가 다 아는데 어떻게 이제야 처음으로 나한테 애 맡아달라는 소릴 햐? 그 소리를 뭘 그렇게 애를 쓰고 하고 자빠졌어?”

 

향미의 죽음을 알게 된 옹산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동백의 신변을 보호하려 나서는 모습들도 그렇다. 이 ‘소리 없이 봉기한 옹산의 장부들’을 담는 과장된 연출은 시청자들을 흐뭇하게 만들고 동백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번영회 핑계로 까멜리아를 가득 채운 옹산의 여자들의 모습에서 동백은 결국 훌쩍대며 고마운 마음을 꺼내놓는다. “그래서 저 지금 지켜주시는 거예요? 저요 옹산에서 백 살까지 살래요.”

 

이런 화법들이 전하는 진심은 그래서 더 뜨겁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건 <동백꽃 필 무렵>이 건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상은 퉁명스러워 보이지만 그래도 우린 남이 아니고 그래서 살만하다고 이 드라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슬쩍 꺼내놓고 있다.(사진:KBS)

좋은 작품과 캐릭터가 끌어내는 배우와의 시너지

 

좋은 작품과 캐릭터는 어쩌면 배우의 연기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 아닐까. 그간 그리 주목받지 못했지만 작품 속 캐릭터와 만나 반짝반짝 빛나는 배우들이 있다. JTBC 월화드라마 <보좌관2>에서 시즌1에 이어 단단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신민아, KBS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인생캐릭터를 만난 손담비 그리고 JTBC 금토드라마 <나의 나라>에서 꽤 괜찮은 몰입을 보여주고 있는 김설현이 그들이다.

 

<보좌관2>에서 신민아의 연기가 새삼 돋보이는 건, 지금껏 그가 해왔던 캐릭터들과는 사뭇 다른 강선영이라는 초선의원을 만나면서다. 그간 로맨틱 코미디의 상큼발랄한 캐릭터만을 입어왔던 신민아였지만 이 작품에서는 사랑보다 일에 더 몰두하는 여성 정치인의 캐릭터를 만나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장태준(이정재)과 연인이면서 정치적 동지이기도 하지만, 자신만의 소신을 밀고 나가는 당찬 여성 정치인 강선영은 지금껏 봐왔던 신민아의 고정된 이미지를 깨주기에 충분했다. 좋은 작품이 좋은 연기를 끄집어낸 단적인 사례다.

 

<동백꽃 필 무렵>의 손담비 또한 마찬가지다. 아마도 이 작품에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장본인으로 꼽히는 손담비는 향미라는 역할을 통해 인생 캐릭터를 만났고 인생 연기를 선보였다. 다소 맹한 얼굴로 무심하게 툭툭 던지는 그 대사들은 때론 섬뜩하게도 느껴지지만 그 이면에 존재하는 외로움이 슬쩍 드러나면서 시청자들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어려서부터 돌아갈 곳이 없던 그 부평초 같은 삶이 겨우 겨우 찾아든 동백(공효진)의 까멜리아에서 맞은 최후의 순간들은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여운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향미 역할에 손담비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이 작품 속 캐릭터와 손담비는 맞춤옷처럼 잘 맞았다. 그리고 그 존재감 없이 자존감 없는 삶의 이야기는 마치 그토록 오래도록 연기를 시도해왔지만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했던 손담비 자신의 이야기처럼 다가오는 면도 있었다. 이러니 인생 캐릭터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연기와는 사뭇 동떨어져 보였던 김설현 역시 JTBC <나의 나라>를 만나면서 연기자로서의 가능성을 보인 단적인 사례다. 서휘(양세종)와의 절절한 멜로는 물론이고 이화루라는 조직을 이끌어가는 수장으로서 만만찮은 카리스마를 가진 한희재라는 인물을 통해 김설현은 연기자의 기본이랄 수 있는 몰입의 경험을 하게 됐다. 아직 무르익었다 보긴 어렵지만 늘 연기력 논란에 시달리며 캐릭터와 자신이 겉돌던 연기가 일체되는 그 경험은 아마도 김설현에게는 향후 연기자로서의 행보에 소중한 자양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제 아무리 연기력이 좋은 배우도 작품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면 빛을 발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정반대로 아직 연기가 조금 서툴다 해도 그 연기를 200% 끄집어내주는 작품과 캐릭터가 있다. 그런 작품과 캐릭터를 만났을 때 비로소 그 연기자는 어떤 가능성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중요한 건 그 이후다. 다음 작품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줬을 때 그 가능성은 비로소 확증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니.(사진:JTBC)

‘보좌관2’, 본격 시즌제 드라마의 성공적인 귀환

 

JTBC 드라마 <보좌관>이 시즌2로 돌아왔다. 지난 6월부터 7월까지 10부작으로 시즌1을 끝낸 후 어언 4개월 만이다. 이미 미드 같은 시즌제 드라마들을 우리네 시청자들도 경험하고 있지만, 한국 드라마가 이렇게 본격 시즌제를 운영하는 일은 여전히 낯설 게 다가온다. 특히 지난 시즌 이 드라마는 지속적인 시청률 상승을 거듭하다 10회에 드디어 5.3%(닐슨 코리아)로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바 있다. 이런 흐름을 뚝 끊고 시즌2로 넘어간다는 건 여러모로 제작자들에게는 아쉬움이 남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지난 시즌 마지막회에서는 보좌관 장태준(이정재)이 그토록 마음으로 따랐던 이성민(정진영) 의원의 자살을 눈앞에서 보고 그 이면에 송희섭(김갑수)의 모략과 압력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 앞에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와신상담하는 마음으로 법무부장관이 된 송희섭에게 무릎을 꿇어 결국 그는 국회의원이 된다. 그의 오랜 친구인 고석만(임원희)은 차 안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고 그의 정치적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강선영(신민아) 의원은 그의 선택에 분노한다.

 

이 정도면 고구마 엔딩이 아닐 수 없다. 애초 꿈꿨던 새로운 정치에 대한 장태준의 꿈은 날아가 버렸고 존경하던 선배 의원과 친한 친구는 송희섭이라는 적폐에 의해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으며 사랑했던 연인은 돌아서 버렸다. 그럼에도 장태준은 그 적폐 밑으로 들어가 금배지를 단다. 이런 너무나 처절한 현실적인 시즌1의 엔딩은 충격적이었다. 그렇게 시즌1을 끝낸다는 것이 무리수처럼 보일 정도로.

 

하지만 시즌2로 돌아온 <보좌관>은 이런 우려를 첫 회부터 한 방에 날려버렸다. 시즌1의 충격적인 엔딩이 남긴 강렬한 여운은 시즌2의 첫 회로 그대로 이어졌다. 꽉꽉 눌러놓은 감정이 오히려 시즌2의 시작점부터 폭발력을 만들었다고 보인다. 강렬한 오프닝과 함께 시작된 시즌2 첫 회는 4.5%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무엇보다 시선을 끈 건 시즌2의 짧지만 압축적인 오프닝이었다. 일단의 무리들에게 두드려 맞고 피 흘리는 장태준의 모습은 아마도 앞으로 벌어질 일처럼 보였지만, 그건 또한 시즌1의 마지막의 그 처참한 장태준의 모습이 현재진행형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칼까지 맞고 장태준이 굴러 떨어진 곳에 있는 아무렇게나 버려진 현수막은 그의 모습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부당한 어떤 힘들에 대항하기 위해 누군가 들거나 세워졌을 그 현수막은 장태준처럼 무력에 의해 버려졌다.

 

하지만 장태준은 그 쓰레기더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오르고 또 오른다. 드라마는 이 인고의 과정을 ‘껍질’을 벗고 날개를 펴려는 곤충에 비유한다. 그렇지만 드디어 꼭대기에 올라 그 껍질을 벗고 날아오르려 할 때 보호막이 사라져버린 ‘먹잇감’이 될 위기에 처한다는 걸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향해 달려오는 차량을 통해 보여준다.

 

이건 장태준이라는 독특한 캐릭터에 의해 가능해진 서사다. 보통의 정치드라마들은 대부분 선악을 구분해 이편과 저편의 진영을 갖춰 싸우고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지만, 이 드라마는 정치라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한 게 아니란 걸 이 껍질의 비유를 통해 또 장태준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드러낸다. 민심을 위한 정치를 꿈꾸지만,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힘을 가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손을 더럽히기도 해야 하는 그 이전투구의 장이 정치라는 걸 장태준은 보여준다. 껍질을 깨지 않은 순수한 상태로는 날개조차 펼 수 없는 정치 현실의 실상을.

 

그래서 <보좌관2>는 시즌1의 바통을 첫 회 강렬한 오프닝만으로도 제대로 이어받는다. 장태준이라는 독특한 캐릭터의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그가 이제 손에 피를 묻혀가며 해나갈 일들을 예고한다. 그건 가깝게는 송희섭이라는 뿌리 깊은 고목을 제거해가는 일이지만, 스스로에게는 자신의 껍질을 벗고 온 몸으로 정치 현실과 부딪치며 성장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뻔한 선악 구도가 아닌, 현실정치의 처절함을 드러내는 장태준이란 캐릭터가 있어 <보좌관2>의 정치이야기는 더 실감나고 기대된다.(사진:JTBC)

'나의 나라'의 동력 절반은 안내상의 지분

 

안내상의 연기 스펙트럼이 이렇게 넓었던가. 실로 JTBC 금토드라마 <나의 나라>가 가진 강력한 동력에 있어 그 절반은 안내상의 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전(안내상)이라는 가상의 캐릭터지만, 이 인물은 이성계(김영철)와 함께 조선 건국을 하는 공신으로 등장해 왕자의 난을 일으키는 이방원(장혁)과 팽팽한 대결을 만들어낸 캐릭터다. 결국 주인공인 서휘(양세종)의 칼에 죽음을 맞이하지만, 사실상 이 드라마가 지금껏 흘러온 동력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

 

남전이란 인물은, 서휘의 누이동생인 서연(조이현)을 볼모로 잡아 서휘는 물론이고 서자 아들인 남선호(우도환)까지 쥐고 흔들었고, ‘신하의 나라’를 주창하며 이성계마저 밀어내고 어린 왕세자를 세운 후 자신이 실질적인 ‘갓 쓴 왕’이 되려던 자다. 그러니 이 드라마가 움직여온 서휘와 남선호의 동력이 바로 이 인물에 대한 감정으로부터 나온다.

 

안내상은 누구 앞에서도 좀체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카리스마를 연기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아들 남선호까지 사지로 몰아넣는 비정함을 연기했고, 이성계를 시해하려다 동료들을 배신하고 그의 충신처럼 행세하는 치밀함을 연기했다. 그러다 욕망이 비등점을 넘어서며 왕자의 난이 벌어졌을 때는 왕의 부재를 틈타 짧게나마 왕명을 참칭하기도 했다. 드라마의 힘이 사실상 악역으로부터 나온다고 봤을 때 남전을 연기한 안내상은 200%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다고 보인다.

 

사실 안내상이라는 배우의 이미지가 어딘가 가볍고 찌질하거나 코믹한 느낌을 주는 건 그의 초창기 존재감을 만들었던 문영남 작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소문난 칠공주>, <조강지처 클럽>, <수상한 삼형제> 같은 작품에서 그는 찌질한 역할을 잘 소화해낸 바 있다. 하지만 그것이 안내상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그 후로도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연기 스펙트럼이 훨씬 폭넓다는 걸 증명해왔다.

 

<성균관 스캔들>에서의 정약용이나, <하녀들>에서의 이방원 또 <화정>에서의 허균 같은 사극에서 진지한 역할은 물론이고 <송곳> 같은 작품에서 노동상담소 소장으로 독특한 리더십을 보여주는 인물도 연기했었다. 그렇게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며 스펙트럼을 넓혀 온 안내상이 최근 몇 년 동안 보여준 연기의 성취는 놀라운 것이었다. 대표적인 게 JTBC <눈이 부시게>에서 치매를 앓는 혜자(김혜자)의 아들 역할을 연기한 부분이다. 아들이지만 혜자가 아빠로 알고 있는 그 역할을 안내상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그런 인물을 연기한 바 있다.

 

그런 진지하고 절절한 역할에서부터 <60일, 지정생존자> 같은 작품에서 닳고 닳은 정치인 강상구 같은 조금은 허허실실한 역할까지 소화해내고, 또 <나의 나라>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으로 변신하는 그 연기의 과정들을 들여다보면 안내상이라는 배우의 잠재력을 실감하게 한다. 아주 조금씩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자기만의 색깔을 입혀왔고 이제는 어떤 역할에서도 거기에 맞는 얼굴을 드러낼 수 있는 연기자로 선 느낌이다. 특히 <나의 나라>는 그의 이렇게 쌓아올린 만만찮은 내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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