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극악한 법정 속, 선한 변호사 박은빈의 존재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모두 진술에 앞서 양해 말씀 드립니다. 저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가지고 있어 여, 여러분이 보시기에 어, 말이 어눌하고 행동이 어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법을 사랑하고 피고인을 존중하는 마음만은 여느 변호사와 다르지 않습니다. 변호인으로서 피고인을 도와 음.. 사건의 진실을 밝힐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NA 채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처음으로 법정에 선 변호사 우영우(박은빈)는 어색하고 어눌하지만 또박또박 자신의 의지를 밝힌다. 자폐 장애를 가진 변호사.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제목처럼 이 특별한 인물이 주인공이자 그 자체로 메시지인 드라마다. 자신을 소개할 때,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우영우”라며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을 이야기하고, 공적인 장소에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고래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는 이상한 변호사. 

 

과연 이런 장애를 갖고도 법정에서 누군가를 위해 변호를 할 수 있을까 싶지만, 바로 그런 것이 우리의 편견이라는 걸 기분 좋게 깨주는 그런 인물이다. 당연히 이 인물이 법정에서 혹은 만만찮은 로펌 생활에서 마주하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을 시청자들은 응원하는 마음으로 보게 된다. 

 

‘이상하다’는 표현은 ‘특별하다’는 긍정적 의미도 있지만 ‘정상이 아니다’라는 부정적인 의미도 들어있다. 보통과 다르다는 것이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고, 그래서 편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현실을 우영우 또한 잘 안다. 그래서 첫 사건으로 맡은 노부부 폭행사건에서 언변이 좋지 못한 우영우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게 낫지 않겠냐는 상사의 말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피고인의 사정이 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핵심 아닌가요? 사정이 딱해 보이기로는 장애만 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갖고 있고요.”

 

하지만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우영우가 변호를 해가는 과정들을 보면 다른 변호사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는 그의 남다른 시선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화가 나 다리미를 들어 남편의 머리를 내리친 할머니가 ‘살인 미수’ 혐의로 몰리게 된 사건. 모두가 다리미의 그 우악스러운 이미지에 경도되어 할아버지의 뇌출혈이 다리미에 맞아서라고만 생각할 때 우영우는 그 원인이 다리미가 아닌 남편의 지병 때문이었다는 진실을 들여다본다.

 

우영우의 첫 번째 사건으로 다룬 다리미 폭행 에피소드는 겉으로 드러난 어떤 이미지와 편견에 사로잡혀 제대로 진실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현실을 에둘러 담아낸다. 그리고 그건 다름 아닌 우영우라는 이상한 변호사가 이 드라마를 통해 그 존재 자체로 전하려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우영우는 자폐를 갖고 있어 엉뚱하게 보이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른바 ‘정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 역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편견’이라는 ‘장애’를 갖고 있다고 드라마가 에둘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사건으로 등장하는 에피소드도 우영우의 이런 캐릭터와 메시지를 잘 드러낸다. 신부의 드레스가 벗겨지는 바람에 파혼의 위기에 처한 신부의 아버지가 예식장을 상대로 거액의 위자료 소송을 하려 하고, 이를 맡게 된 우영우가 위자료로는 도무지 받아낼 수 없는 거액 대신 결혼을 전제로 물려주기로 한 땅을 받지 못하게 된 손해 배상금으로 청구하는 대목이 그렇다. 물론 우영우는 의뢰인이 진정 원하는 것이 따로 있다는 것도 간파하지만, 이런 식으로 통상적인 관점을 뛰어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변호에 있어 우위를 가져간다. 

 

이처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우영우라는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편견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변호사가 오히려 편견에 빠져 진실을 보지 못하는 이들을 꼬집는 드라마다. 우영우라는 ‘선한’ 인물이 주인공이자 메시지가 되고 있어서인지, 이 법정드라마는 최근 쏟아져 나오는 극악한 사건들과 악마 같은 인물들이 피 튀기며 대적하곤 하는 여타의 법정물들과 사뭇 다른 매력을 드러낸다. 그건 선한 의지가 주는 기분 좋은 감동이다. 

 

최근의 법정드라마는 변호인들마저 승소를 위해 ‘악한’ 선택도 마다하지 않는 비정함을 드러낸다. 그만큼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고, 악을 이기기 위해서는 악만큼 치열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래서 얻는 정의와 공적으로 포장된 사적 복수가 우리에게 남기는 여운은 어딘지 찜찜하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우리의 마음을 파고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찜찜함을 날려주는 ‘선한 의지’의 변호사라는 캐릭터를 세워서다. 물론 자폐라는 장애를 갖고 있어 오히려 편견 뒤에 숨겨진 진실을 본다는 이 인물의 설정은 여전한 현실의 조악함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그래서 더더욱 이 인물에 빠져든다. 

 

박은빈은 한 마디로 연기에 물이 올랐다. <청춘시대> 송지원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이시한 매력을 드러냈던 그는 <스토브리그> 이세영의 씩씩함과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채송아의 순수함과 수줍음을 오가더니 <연모>의 이휘로 사극은 물론이고 남장여자라는 어려운 역할을 소화해내더니 이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로 자폐장애 변호사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기해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박은빈은 이 작품 속 우영우를 닮았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그런 반전의 면면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의미에서.(사진:ENA채널)

‘안나’, 수지의 천연덕스런 거짓 연기가 좋다

안나

“항상 그랬어요. 난 마음먹은 건 다 해요.” 쿠팡플레이 오리지널 시리즈 <안나>는 유미(수지)의 다소 역설적인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그 목소리는 차분하고 단호하다. 이 내레이션이 역설적이라는 건 바로 이어지는 차량 사고(혹은 사건)으로 드러난다. 거대한 기둥을 받아버린 차가 위태롭게 연기를 뿜어대고 힘겹게 열린 문에서 유미가 피를 흘린 채 내린다. 유미는 스카프를 풀어 백에 얹고 불을 붙여 차량 안으로 집어던진 채 걸어간다. 그러면서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사람은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씁니다.”

 

이 첫 시퀀스는 앞으로 <안나>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를 말해준다. 항상 마음먹은 건 다 한다는 유미의 말은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현실에 놓여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한다는 의미이고,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쓴다는 건 그걸 하기 위해 유미가 선택한 것이 ‘거짓’이라는 걸 말해준다. 그는 어쩌다 거짓 삶을 선택했다. 자신이 아닌 ‘안나’라는 이름의 삶을.

 

리플리 증후군. 미국의 소설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씨>에서 유래된 이 말은 우리에게는 이 소설을 영화화한 르네 클레망 감독, 알랭 들롱 주연의 <태양은 가득히>로 잘 알려져 있다. 1955년부터 1991년까지 재해석된 이 작품은 우리에게도 <미스 리플리>라는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안나>는 바로 이 리플리 증후군을 보여주는 유미라는 인물이 왜 그런 거짓의 삶을 살게 되었는가를 추적한다. 

 

평범한 양복점을 하는 아버지와 농아 어머니의 딸로 태어나 하고 싶은 건 많지만 가난해 할 수 있는 게 없던 유미. 그는 자신의 부모 이야기부터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과 연애를 하다 들켜 혼자 서울로 오게 되고, 하숙집에서 생활하며 대학 시험을 치르지만 떨어진다. 하지만 힘들게 고생해서 딸 하나 바라보고 사는 아버지에게 유미는 거짓말을 한다. 시험에 합격했다고. 

 

하숙집에조차 그가 대학에 들어갔다고 알려지고, 남몰래 재수 준비를 하던 차에 같은 학교 선배 언니가 유미를 챙겨주면서 그 학교 동아리에 들어가고 유미의 거짓 대학생활도 시작된다. 그나마 자신의 유일한 진짜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던 부모와도 유미는 점점 멀어진다. 아버지는 암으로 사망했고, 농아인 어머니는 치매를 앓게 돼서다. 유미의 거짓 삶은 더 과감해진다.

 

남자친구를 속여 같이 미국에 가려 하다 정체가 들통 나 모든 게 무산되고, ‘학력무관’ 하다는 한 갤러리에 취직한 유미는 그 곳에서 갖은 수모와 모욕을 견뎌내며 하녀 같은 삶을 살아간다. 뭐든 원하는 대로 다 누리고 살아가는 현주(정은채)의 삶에 대한 동경과 분노를 느끼던 유미는 결국 그의 돈과 여권, 학력증명서 같은 걸 훔쳐 달아난다. 현주의 여권에 적힌 ‘안나’라는 이름으로의 삶을 선택하는 순간이다. 이후 그는 잘 나가는 사업가를 속여 결혼까지 한다. 

 

어떻게 거짓으로 그 모든 것이 가능해질까 싶지만, 가짜로 꾸며진 학력이나 예쁘장한 얼굴 같은 외적인 것에 쉽게 휘둘리는 스펙사회는 안나의 거짓된 삶에 날개를 달아준다. <안나>가 흥미로워지는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유미에서 안나가 되는 거짓 삶을 선택하는 그 과정에 그저 범죄라 여겨지지 않고 그럴만하다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현실을 마주하는 순간들. 가진 자들은 뭐 하나 노력하지도 않고 뭐든 다 얻어가는 데, 없는 이들은 하고 싶어도 노력을 해도 얻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느껴지는 절망감. 

 

갤러리의 대표 이작가(오만석)은 고향의 어머니를 만나러 가고파 하루만 쉴 수 있겠냐고 묻는 유미에게 모멸감이 느껴지는 말을 쏟아낸다. “니들 문제가 뭔지 알아? 게으르고 멍청한데 남들 하는 거 다 하고 살려니까 그 모양인거야! 평생을 그러고 살래? 평생!” 하지만 그건 유미의 잘못이 아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려 했고 똑똑했다. 그리고 남들 하는 거 하고 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냥 태생이 달라 처한 현실일 뿐이었다. 그래서 유미가 거짓으로라도 안나의 삶을 살고픈 마음은 시청자들에게도 공감을 준다. 범죄를 저지르고 있지만 그게 들키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어쩌면 그 많은 리플리 증후군을 다룬 콘텐츠들로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서사지만 <안나>가 흥미진진해지는 건, 차분하게 이 유미라는 인물이 안나가 되어가는 과정을 연대기적으로 그려내며 시청자들을 몰입시켜서다. 그리고 이것을 200% 공감시키는 건 다름 아닌 이 문제적 인물을 연기하는 수지의 지금까지의 이미지를 박살내는 색다른 연기 덕분이다. 한때 ‘국민 첫사랑’으로 불리며 그 틀에 갇혀있던 수지는 이제 그 이미지를 여지없이 깨버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중이다. 그리고 그 느낌은 시청자들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수지가 이렇게 발칙한 매력이 있었던가. 마치 이런 유미에서 안나로 넘어가는 페르소나가 자신에게 절실하기라도 했던 듯, 수지는 천역덕스럽게 거짓 삶을 살아가는 연기를 해낸다. 그리고 이런 거짓을 연기하는 연기는 수지라는 배우가 껍질 하나를 벗겨내고 나온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꼭꼭 숨겨뒀던 욕망이 결국 터져 나와, 그저 청순하고 순수한 얼굴로만 비춰지던 유미라는 껍질을 깨고 안나라는 인물을 창출해낼 때, 수지는 드디어 자신의 배우라는 정체성을 찾아낸 듯하다. 이제 마음먹는 연기는 다 하겠다고 선언하는 듯한 수지의 변신이 반갑다.(사진:쿠팡플레이)

왜 오수재인가

‘왜 오수재인가’, 우리의 정체에 대해 묻는 드라마

 

“빼어날 수 맑을 재. 근데 그 이름을 함부로 쓴 거야. 빼돌린 돈을 세탁하는 계좌에 그 이름을 막 쓴 거야.” 오수재(서현진)는 TK로펌 최태국(허준호) 회장이 바하마에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하고 그 돈 세탁에 사용된 해외계좌 이름에 자신의 이름을 마구 사용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 사실을 밝히고 저들과 싸우는 건 무모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최태국 회장에게 이 일을 묻어주는 대가로 700억을 요구한다. 그걸 최태국 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름값이 700억이냐고. 

 

SBS 금토드라마 <왜 오수재인가>가 드디어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놨다. 어쩌면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는 바로 그 누군가의 ‘이름값’에 대한 것이 아닐까. 아버지가 ‘빼어날 수에 맑을 재’라고 이름을 지어준 건 그렇게 빼어나고 맑게 자라라는 염원이 있어서였을 게다. 하지만 최태국 회장 같은 이들은 그의 이름을 함부로 돈 세탁에 이용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오수재는 자기 이름이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기분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공찬(황인엽)은 그게 남 이야기가 아니다. 그가 김동구라는 이름을 쓸 때 의붓동생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썼고 진범이 잡혀 풀려났지만 그럼에도 그의 이름은 이미 더럽혀져 있었다. 누명을 벗고 출소하던 날 의붓엄마는 그의 뺨을 때렸고, 그가 김동구라는 걸 알아보는 학교 친구들은 그를 재수 없어 했다. 눈빛도 이상하다며. 오수재가 더럽혀진 자신의 이름에 분노하는 것처럼, 공찬은 자신의 진짜 이름 김동구를 찾기 위해 여전히 노력하는 중이다. 당시 진범이라 자수한 이가 진범이 아니라며 그 때의 진실을 낱낱이 밝혀내려한다. 그것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 길이라 여긴다. 

 

오수재는 자신의 이름이 돈세탁에 쓰였다는 사실을 공찬이 찾아내 준 것이 다행이면서도 마음이 영 좋지 않다. 뭔가 들킨 거 같고 쪽팔린 것 같다. 그래서 공찬을 피한다. 그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속내를 드러낼 때 공찬은 말한다. “나도 그런 거 있어요. 차라리 들켰으면 싶기도 한데 또 몰랐으면 싶기도 하고 교수님만 그런 거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또 퉁쳐요. 우리. 안 좋은 일들만 몰아닥치는 것 같은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조금만 기다리다 둘러보면 좋은 일들이 옆에 와 있어요. 일도 사람도.” 그건 오수재에게 하는 말이면서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오수재는 최태국 회장이 부탁한 아들 최주완(지승현)의 이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의 아내를 임승연(김윤서)을 만난다. 양육권과 친권을 요구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말을 꺼낸다. 딸 재희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 그러면서 재희 때문에 자신의 아이를 잃었다고 말한다. “난 재희 때문에 내 아이를 잃었어요. 튼튼이. 뱃속에서 튼튼하게 자라라고 태명을 그렇게 지었는데 어느 날 뱃속에 있는 튼튼이가 심장이 안 뛴다고 하더라구요. 재희가 있다는 거 알고 내가 매일 같이 울고 토하고 잠도 못자고 그렇게 두 달을 보냈더니.”

 

그런데 더 충격적인 건 임승연에게 최태국 회장이 재희를 자신이 낳은 딸로 세상에 알리겠다고 했다는 거였다. 너도 그게 좋지 않겠냐며. 그 이야기에 오수재는 잊고 있던 자신의 아이를 떠올리며 절망한다. 최태국 회장에 속아 미국까지 보내져 사산된 아이. 하지만 그 아이에게도 ‘하늘이’라는 태명이 있었다. 그는 깨달았다. 그 예쁜 이름을 지우고 살았다고. 그래야 살 것 같아서. “아무한테도 말 안하고 아무도 모르길 바라고...”

 

<왜 오수재인가>라는 제목이 붙여진 건 이 드라마가 결국 이름으로 대변되는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일 게다. 누군가는 함부로 이름을 이용해먹고, 누군가는 누명 때문에 진짜 이름을 숨긴 채 살아간다. 또 누군가는 대외적으로 그럴 듯하게 보이기 위해 타인의 딸을 친딸인 양 속이며 살아가고, 또 누군가는 너무 아픈 상처라 살아가기 위해 죽은 아이의 이름을 지우며 살아간다. 또 누군가는 죽은 아이를 잊지 못해 그 이름 언저리 한쪽을 쥐고 원망의 대상으로서 누군가의 이름을 증오하며 살아가고.

 

오수재는 자신의 이름값으로 복수하듯 700억을 요구하고, 그래서 그걸 받아내지만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건 700억이 별거 아니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값의 무게와 가치가 그것보다 더 크게 느껴져서다. 그래서 이 오수재가 갖고 있는 ‘이름값’에 대한 서사는 우리에게도 결코 가벼울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월급이나 연봉처럼 이름은 이 자본화된 세상에서 흔히 가격으로 그 가치가 매겨지곤 한다. 하지만 그건 가당한 일일까. 당신의 이름은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는가. 아니 어떤 진짜 가치가 있는 이름값을 하고 있는가. (사진:SBS)

KBS 월화드라마 ‘붉은 단심’이 보여주는 정치와 민심

붉은 단심

과연 권력 투쟁은 무얼 목적으로 하는 걸까. 종종 선거에서 우리는 공약보다 흑색선전과 비방이 난무하는 현실을 바라보곤 한다. 당선되면 국민을 위해 무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보다 왜 자신이 당선되어야 하며 경쟁자가 낙선되어야 하는가를 강변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선거가 끝나고 나면 애초 당선을 위해 내세워졌던 선심성 공약들이 슬그머니 사라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일단 정권을 잡아야 뭐라도 할 수 있다는 게 정치인들의 변명이지만, 권력 투쟁 속에서 이기기만을 위한 대결을 벌어다 보면 정작 이들이 왜 정권을 잡아야 하는가를 까마득히 잊어버린 건 아닌가 하는 지점에 이를 데가 적지 않다. 

 

KBS 월화드라마 <붉은 단심>을 보다보면 정치에 대한 이런 단상들을 하게 된다. 명목상 왕이지만 힘이 없는 이태(이준)와 좌의정이지만 반정공신들과 함께 조정의 모든 권력을 쥐고 흔드는 박계원(장혁)이 벌이는 치열한 권력 투쟁 속에서 정작 그 투쟁의 목적이어야 할 민초들의 삶이 소외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박계원이 쥐고 흔드는 국정농단에 의해 어머니가 스스로 독을 마시고 자결하고, 세자빈으로 맞이하려 했던 유정(강한나)의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는 상황을 겪은 이태는 어떻게든 힘을 키워 박계원과 그 반정세력들에게 복수를 하려한다. 가까스로 이태의 도움을 받아 죽을 위기를 면해 궁에서 도망쳐 나온 유정은 죽림원 사람들의 도움으로 다시 웃음을 되찾고, 이태가 왕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보름에 한 번씩 그를 만난다. 

 

이렇게 각자의 길을 가는 걸로 알았지만, 국혼으로 이들의 관계를 엇갈리기 시작한다. 이태가 만나는 유정을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는 박계원이 유정을 자신의 질녀라고 속여 중전을 만들려 하고, 이태는 병판 조원표(허성태)의 여식 연희(최리)를 중전으로 세워 그 세력을 가지려 했지만 두 사람이 궁에서 만나 서로의 편이 갈려버린 상황을 알게 되면서 뒤틀어지는 운명이다. 이태는 복수를 위해서는 연희를 선택해야 하지만 유정을 연모하는 마음을 저버릴 수 없고, 유정은 자신이 살아남고 또 박계원이 볼모로 삼은 죽림원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중전이 되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붉은 단심>은 결국 정적과 싸울 것인가 정인을 선택할 것인가의 기로에 선 이태의 갈등과 자신이 살아남고 연모하는 이태를 지켜내기 위해 어떤 선택들을 해내가는 유정 그리고 이런 사적 감정들까지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는 박계원의 치열한 권력 대결이 펼쳐지는 퓨전사극이다. 멜로에 정치대결이라는 소재가 엮어지면서 묵직하고 운명적인 사랑이야기가 비장하게 펼쳐지는 게 특징이고, 이런 감정적인 요소들을 아름다운 시각적 표현으로 그려내는 미적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토록 궁궐 안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핏빛 투쟁들이 진행될수록 저들의 투쟁에서 소외되고 있는 민초들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힌다. 유정은 유일하게 이런 상황을 꼬집고 이태가 진짜 민초들을 가까이서 보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과거 유정이 했던 말을 떠올려, 궁궐에 농부들을 불러 화단 대신 논을 일구게 하고 그 곳을 찾아가 농부의 얼굴을 처음 마주하며 이태가 놀라는 장면은 그래서 마치 정치의 안타까운 실체를 폭로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이렇게 생겼구나. 어찌 너희 얼굴을 처음 보는 것일까.” 농부의 갈라진 손과 주름 가득한 얼굴을 보고 나서 이태는 비로소 깨닫는다. 별 실효성도 없을 듯한 기우제를 왜하는 것이며 나아가 정치의 진짜 목표는 바로 이 백성들의 보다 나아지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올해 들어 두 번의 선거를 치렀다. 누구는 승자가 됐고 누구는 패자가 됐다. 하지만 선거가 끝났고 승패가 나눴지만 이들의 대결과 권력투쟁은 끝이 없다. 진영 논리에 여전히 쌓인 채 상대를 깎아내는 말들이 정치권에는 여전히 난무한다. 이들은 과연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어려워진 일상을 맞이하고 있는 대중들의 얼굴을 본 적은 있을까. 정치에서 권력 투쟁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목적은 권력 그 자체가 아니라 그걸 통해 구현해내려는 민초들의 나아지는 삶이라는 걸 매번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글:PD저널,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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