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이 아프면 망하는 시스템 과연 정상적인가

 

오죽했으면 아버지가 가족에게 끊임없이 죽여 달라 간청을 했을까. <그것이 알고 싶다> ‘9월8일의 비극’편에서는 뇌종양 말기로 고통 받던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죽여 달라’고 간청해 결국 딸과 아내가 보는 앞에서 아들이 아버지의 목을 졸라 죽게 한 사건을 되짚었다.

 

'그것이 알고싶다(사진출처:SBS)'

아버지가 자신의 죽음으로 끝내려 했던 것은 단지 뇌종양 말기에 겪었을 육체적인 고통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으로 인해 간병 부양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가족들의 고통 또한 끊어버리기 위함이었다. 목 졸린 흔적이 나오지도 않을 정도로 바짝 말라버린 아버지의 극단적 선택. 하지만 그로 인해 아들은 존속살인을 저지른 중죄인이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제 손으로 아버지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이 얼마나 클 것인가. 바로 그 죄책감에 아들은 자살을 시도하려 했고, 그 낌새를 알아챈 누나의 신고로 결국 이 아픈 가족의 선택이 드러나게 되었다. 죽여 달라는 아버지와 그걸 외면하지 못한 아들 그리고 그 아들의 자살기도까지. 무엇이 이 가족을 이렇게 극으로 몰았던 것일까.

 

<그것이 알고 싶다>가 보여준 같은 9월8일에 있었던 또 다른 아버지의 자살은 그 아버지가 죽는 순간에까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했다는 점에서 더욱 슬프다. 렌터카를 해 산에 차를 세워두고 차 안에서 번개탄을 피워 자살한 아버지는 혹여나 자동차가 불에 탈 것을 염려해 통 밑에 음료수 캔을 세워 두었다는 것.

 

죽기 전 이 아버지의 이틀 간의 행적은 그 죽음이 얼마나 쓸쓸했을까를 가늠하게 한다. 먼저 선친의 묘소를 다녀오고 친분 있던 이들에게 작별인사를 남기고는 자살할 장소를 찾아다녔고 차 안에서 죽기 전 과일 통조림 하나를 따 먹었다고 한다. 그것이 한 가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자신에게 준 마지막 시간이었던 셈이다.

 

얼마 전 딸의 취직소식에 기뻐했던 아버지. 하지만 바로 그 딸의 취업은 아버지로부터 기초수급대상으로 받던 의료혜택이 끊기게 만들었다. 그것도 어느 정도 유예기간을 준 것도 아니고 단칼에 끊어버렸다는 것. 결국 아버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치료 중심의 의료제도에서 제외되어 있는 돌봄이나 보살핌은 고스란히 그 고통을 가족 당사자들에게 지운다. 즉 지금의 의료 제도에서 돌봄이나 보살핌은 의료와는 상관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막상 병원에서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해지면 국가는 아무런 의료적인 혜택을 주지 않는다는 것. 전문가들은 호스피스 진료에 대한 보험 제도를 정부가 외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나마 기초수급대상으로 지정되면 보조를 받지만 그것도 가족 중 일부가 돈을 벌게 되거나 진급을 하거나 하면 끊어 버리는 게 이 기계적인 시스템의 잔혹한 현실이다. 그러니 심지어 수술실에 들어갈 때 “살아서 나온다기보다는 죽어서 나왔으면” 하는 마음까지 생기는 것일 게다.

 

치료 중심의 의료제도는 임종 직전에 놓인 환자의 권리마저 앗아가는 실정이다. 병원에서 임종하는 분들이 전체의 86%에 달하지만 일단 병원에 들어가면 가능성과 상관없이 끝없이 뭔가 조치가 취해지는데 이것이 엄청난 고통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잘못된 제도 때문에 병원에서 마지막을 고통으로 보낸다는 것은 너무나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

 

환자에게 최선일지 알 수 없는 치료에 매여 있는 제도는 결국 가족들의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타살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질병으로 가계가 파탄 나거나 빈곤층으로 전락하게 되고 또 그럼으로써 취약계층에 놓인 분들이 집에서 자살 같은 선택을 하는 건 실로 구조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이 알고 싶다>가 보여준 안타까운 두 아버지의 선택은 그래서 언제 우리 앞에 벌어질 지 알 수 없는 문제로 다가온다. 오죽하면 그런 선택을 할 것인가. 오죽하면.

<슈스케5>, 박시환의 부활을 기대하는 이유

 

‘탈락’이 적힌 편지를 받은 박시환은 진짜 탈락할 것인가. 박시환은 이번 <슈퍼스타K5>에서 상당히 주목받는 후보자다. ‘제2의 허각’이라는 닉네임이 나올 정도의 사연을 가진 인물. 매년 <슈퍼스타K>에 도전했던 이력. 정비공으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일하며 노래를 놓지 않았던 그다. 첫 출연에 볼트를 쥐고 노래하는 모습은 그래서 대단히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슈퍼스타K5(사진출처:mnet)'

하지만 그는 노래에 있어서 기초가 없다는 지적을 많이 들었다. 기본기가 부족해 고음에서는 약간 불안한 느낌을 주었고 디테일들이 잘 살아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몇 차례 탈락의 위기에 몰렸다가 다시 구제되는 걸 반복했다. 특이한 것은 그런 탈락과 구제의 과정 들을 박시환은 꽤 담담하게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이번 탑10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아일랜드 미션에서도 김광진의 ‘편지’를 부르고 결국 탈락이 적힌 편지를 받게 되었던 그였지만 그는 약간의 아쉬움을 표현했을 뿐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런 담담함 혹은 체념(?)은 박시환이 그간 살아온 힘겨웠던 삶을 잘 말해준다. “그동안의 인생은 그냥 사는 거였어요. 지금은 제 의욕을 갖고 살아 보려는 거 같아요. 사는 거 같아요.” 그는 이렇게 지금 현재를 즐거워하면서도 “자격도 없는데...”라며 자신을 낮추는데 익숙해져 있다.

 

그것은 변방에서 잉여처럼 치부되며 살아온 이들의 자기 보호본능에서 비롯된 습관 같은 것일 게다. 무수한 상처에 익숙해지면서도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당연히 받아들이고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찾아내는 것. 하지만 이 약간은 쓸쓸하고 슬픈 정조가 박시환에게 특별한 느낌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부족한 디테일들이 묻힐 만큼 그의 떨림 속에는 사람의 마음을 처연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김광진의 ‘편지’는 그래서 온전히 박시환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기나긴 그대 침묵은 이별로 받아두겠오. 행여 이 맘 다칠까 근심은 접어두오. 사랑하는 사람이여 더 이상 못 보아도 사실 그대 있음으로 힘겨운 날들을 견뎌왔음에 감사하오. 좋은 사람 만나오 사는 동안 날 잊고 사시오. 진정 행복하길 바라겠오. 이맘만 가져가오.’ 여기서 ‘그대’는 심사위원 혹은 <슈퍼스타K5>를 지칭하고 있는 게 아닐까.

 

너무나 함께 하고 싶지만 늘 떠나는 것(탈락)을 준비하고 있는 박시환은 결국 탈락이 적힌 편지를 받았다. 역시 그는 담담했다. 하지만 곧 이것이 완전한 끝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게 되었다. 이번 <슈퍼스타K5>는 그 어느 때보다 시청자와의 줄다리기가 치열했던 오디션이었다. 그만큼 이 프로그램에 적응된 시청자들에게 반전을 선사하기 위해서, “패자부활전은 없다”고 선언하기도 했고, ‘블랙위크’ 같은 새로운 제도를 신설했으며, 아일랜드 미션에서는 미리 합격과 탈락을 적어놓은 편지를 통해 막판에 운명을 뒤집는 오디션을 수행하기도 했다.

 

너무 많은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나왔고, 그 흐름을 이제는 완전히 꿰뚫어보고 있는 시청자들. 그래서 <슈퍼스타K5>가 선택한 것은 마지막 한 자리를 온전히 시청자의 투표로 남겨놓는 것이었다. 과연 박시환은 이 마지막 관문까지 통과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제2의 허각’이라는 닉네임처럼 그는 이 시대에 잉여로 치부되는 많은 젊은이들의 희망이 될 지도 모르겠다. 어딘지 체념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그 얼굴이 다시 꿈을 노래할 수 있다면.

<투윅스>, 진정 다 가진 드라마였던 이유

 

<투윅스>가 종영했다. 종영했지만 이 놀라운 드라마가 헤집고 간 파문은 꽤 오랫동안 여운으로 남을 듯하다. 우리네 드라마 현실에서 이처럼 실험적이면서도 대중성을 가진 작품을 시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투윅스>는 우리네 드라마에서 좀체 성공하기 힘들다는 스릴러 액션을 다루면서도 그 안에 가족드라마의 문법을 성공적으로 묶어낸 작품. 게다가 그 안에 우리네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준엄하게 꾸짖는 시선까지 담아놓았다.

 

'투윅스(사진출처:MBC)'

2주라는 짧은 시간을 나눠 하루를 한 회 분량으로 풀어내는 형식미는 이 드라마의 시간을 훨씬 더 숨 가쁘게 만들었고 그 2주를 끝없이 뛰어다니던 장태산(이준기) 옆에 늘 함께 하는 딸 수진(이채미)을 판타지로 엮어내는 방식은 탈주극이 가족드라마의 테두리 안에 온전히 놓여질 수 있게 해주었다.

 

어찌 보면 이 드라마는 가족의 의미라는 통상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여기서 머물지 않고 범죄자의 가족, 이를테면 김선생(송재림)과 한치국(천호진), 조서희(김혜옥)와 그의 장애를 가진 아들까지 가족 이야기를 확장함으로써 그 의미를 사회적인 시각으로 넓혀놓았다.

 

즉 자신의 가족을 위해 희생하면서도 타인의 가족을 걱정하는 장태산과 그 주변 인물들(임승우(류수영) 같은)이 있는 반면, 제 자식만을 챙기려 타인을 불행에 몰아넣는 조서희 같은 인물이 있고, 뒤늦게라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김선생 같은 인물이 각각 사회적인 틀 안에서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되묻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가족주의가 가진 이중성이다. 모두가 자신 때문이 아니라 가족을 위해서였다고 말하곤 하지만 그것이 가족의 테두리 안에만 머물 때 가족주의는 가족 이기주의가 된다. 마지막 회에 이르면 <투윅스>는 그래서 가족의 범주를 확장시킨다. 수진이는 사실상 두 명의 아버지를 갖게 된 것이고 박재경 검사(김소연)는 장태산 가족과 유사가족 형태를 이룬다. 장태산에게 살갑게 같이 살지 않겠냐고 묻는 한치국 역시 또 하나의 가족인 셈이다.

 

이렇게 가족의 의미가 사회적으로 확장되자 드라마는 좀 더 사회성 있는 울림을 갖게 되었다. “내가 무서웠던 것도 니 마음이 약해서였고, 내 협박에 도망치지 못한 것도 니가 용기가 없어서였어. 선택은 니가 한 거라고 이 모자란 자식아.” 문일석(조민기)이 장태산(이준기)에게 던지는 이 말이 더 아프게 다가오는 건 5년마다 우리가 듣는 ‘선택’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조서희처럼 겉으로는 번지르르하게 저마다 국민을 외치지만 정작 국민은 없고 사적 이익만 있던 이들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겪었던가.

 

이 모든 불행이 저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 때문이라는 것. “뭘 시켜도 찍소리 못하는 놈”이었기 때문에 장태산의 불행이 비롯됐다는 문일석의 비아냥은 그래서 그저 드라마의 한 대사로 여겨지지 않는다. 조서희라는 악역이 권력이 목표가 아니라 돈이 목표라는 건 우리를 더 암울하게 만든다. 권력이야 5년의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그렇게 착복된 돈은 두고 두고 서민들의 등골을 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문일석의 비아냥은 그래서 장태산을 변화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도망치기만 하던 장태산이 공세적으로 돌변해 문일석과 조서희 일당을 압박하게 됐던 것. 결국 마지막에 문일석과 장태산이 정 반대의 입장으로 바뀌었을 때 장태산은 자신의 선택이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다치는 걸 걱정해서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장태산도 이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도 이 이주 간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 주변사람을 진정 걱정한다면 제대로 된 선택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토록 긴박한 탈주극에 이처럼 뭉클한 가족극이면서 동시에 이토록 날카로운 사회극을 한 작품 속에 녹여낼 수 있었던 건 결국 소현경이라는 작가 덕분이다. 이 작품을 쓴 소현경 작가는 이제 확실한 자기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고 여겨진다. 주말드라마이면서도 미니시리즈의 긴박감을 엮어냈던 <찬란한 유산>으로 비로소 주목을 받기 시작한 그녀는 <검사 프린세스>, <49일> 같은 밀도 있는 작품실험을 거쳐 <내 딸 서영이> 같은 국민드라마를 만들어냈지만 진정한 성취는 <투윅스>를 통해 이뤘다 여겨진다.

 

<내 딸 서영이>가 익숙한 가족드라마 속에서 특별한 지점들을 뽑아낸 작품이었다면 <투윅스>는 낯선 설정 속에서 익숙함을 균형 있게 맞춘 작품이라는 점에서 진일보한 것이다. 물론 시청률에서야 <내 딸 서영이>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런 실험적인 시도로 10% 시청률을 유지했다는 것은 놀라운 필력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소현경 작가 특유의 균형감각 덕분이다. 이 작가는 보편적인 시청층이 요구하는 드라마적 설정들(가족 설정 같은)마저 장르 속에 잘 녹이는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

 

좋은 드라마는 좋은 배우를 만든다. <투윅스>의 거의 모든 배우들이 호연을 펼쳤지만 그래도 이 드라마의 중심을 만든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이준기와 조민기를 말할 수 있을 게다. 이준기는 이 드라마를 통해 확실히 자신의 연기 영역을 넓혀놓았다. 아빠 연기를 제대로 소화해낸 이준기는 이제 좀 더 폭넓은 연기자의 세계로 들어오게 되었다. 한편 이 드라마의 사실상의 힘을 만들어낸 조민기의 악역 또한 상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연기자의 팽팽한 대결이 있어 <투윅스>는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동시간대 시청률 2위로 종영했지만 <투윅스>는 2등짜리 드라마가 아니었다. 대본과 연출과 연기가 그렇고, 작품성과 대중성을 함께 가져간 점도 그러하며 또한 드라마가 던지는 사회적 메시지 역시 결코 작다 할 수 없었다. 시청률을 무시할 순 없지만 시청률만을 위해 만들었다면 아마도 이처럼 많은 성취들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투윅스>는 진정 다 가진 드라마였다.

은경표 PD에 강용석, 신정아, 뭐가 문제일까

 

경향신문이 단독 보도한 신정아의 방송MC 컴백 기사는 충격적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이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는 은경표 PD는 신정아를 4개월 간 쫓아다니며 출연을 확정지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고 한다. “여성으로 큰일을 겪은 만큼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을 대변하는 역할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여 출연을 결정했다.” “사고방식이 정돈되어 있고, 이런 프로그램에 적합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신정아(사진출처:SBS)

학력위조와 정권 측근과의 부절절한 관계를 겪고 횡령 혐의로 구속됐다 보석으로 풀려난 신정아가 이런 ‘큰일’을 겪었기 때문에 ‘여성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건 사실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이다. 이것은 여성들 입장에서 들으면 오해의 소지마저 있다. 방송에 나오는 것조차 부적합한 인물이 여성을 대변한다는 것이 과연 상식적인가.

 

‘프로그램에 적합한 캐릭터’라는 말은 이 프로그램이 도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물론 범법자라도 갱생의 기회는 가질 수 있는 일이지만, 방송은 공공재의 성격도 띄고 있다. 따라서 범법 행위를 저지르고 그것으로 세간의 입에 오르내린 결과 이름 석자를 알리게 된 이들이 바로 그 악명 때문에 방송에 출연할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자칫 심각한 사회적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방통위라는 조직이 있어 방송사를 심사하고 허가하는 업무를 하고 있는 것은 방송이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공공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니 TV조선에서 신설할 것이라는 토크쇼 <강적들(가제)>에 신정아라는 이름이 거론되는 것 자체가 이 방송사가 가진 선정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일이다. 시청률이 된다면 방송 윤리 같은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

 

게다가 이 <강적들>이라는 신설 토크쇼에는 여 아나운서 막말 비하 발언 등으로 국민 비호감으로 전락해 정치권에서조차 퇴출되었다가 최근 방송인으로 거듭나면서 ‘이미지 세탁’ 논란에도 휘말렸던 강용석 변호사의 이름도 들어있었다. 물론 강용석 변호사는 이 제안을 고사했다고 밝혔지만. 이 프로그램을 제작한다는 은경표 PD 역시 만만찮은 이력(?)의 소유자다. 10대 성폭행 혐의는 물론이고 연예 기획사로부터의 각종 수뢰 혐의 등으로 연예계 비리 수사에 한 획을 그었던 인물이 아닌가.

 

그러니 PD부터 MC들까지의 면면을 보면 왜 가제가 <강적들>인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보도된 내용을 통해 보면 이 프로그램은 사회적인 이슈와 시사 문화 트렌드 등 다양한 주제의 토크쇼라고 밝히고 있지만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들에 오히려 포인트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들이 던지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만들어낼 노이즈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올리버 스톤 감독은 94년에 제작한 <킬러 Natural born killers>에서 시청률이 된다면 살인자의 엽기적인 행각마저 생중계되는 방송의 선정성을 꼬집은 바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작인 <테러 라이브> 같은 영화도 라디오 청취율에 목매는 MC와 시청률을 위해서는 테러범과도 딜을 하는 극단의 방송 행태를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허구지만 이 허구가 허용되는 이유는 대중들이 작금의 방송사들이 보여주는 시청률 지상주의에 공감하기 때문일 게다.

 

TV조선은 < 강적들 > 이라는 가제를 가진 이 프로그램을 10월 중에 방송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시청률만 가져갈 수 있다면 이런 그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려낼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안타까운 작금의 방송 현실을 드러내준다. 도대체 어디까지 갈 것인가. 악명이라도 시청률이라면 누구든 허용되는 사회라면 심지어 저 올리버 스톤 감독의 <킬러>에 등장하는 킬러 미키(우디 해럴슨)를 꿈꾸는 이들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법이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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