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팍 도사’, 그 새로운 화법

지난 10월29일 밤 11시. MBC ‘황금어장’의 ‘무릎팍 도사’에서는 시청자들이 지금까지 토크쇼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장면들이 연출되고 있었다. 천하장사에서 개그맨으로 전향해 최고의 위치에 올라 있는 강호동의 앞에는 황석영이라는 우리 시대의 대문호이자 현대사의 산증인이 앉아 있었던 것. 강호동과 황석영, 이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조합은 보는 이에게 심지어 불편한 마음까지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쇼가 진행되고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 불편함이 그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너무나 죽이 잘 맞았고, 격의가 없었다.

황석영은 이 프로그램에서 심지어 이런 이야기까지 해주었다. “작가는 시정배라고 생각을 해요. 시정 사람들 속에 있는 거야, 같이. 시시껄렁한 일상을 살고 글 쓰는 데만 엄정함을 유지하고, 일상이라든가 자기 자아라든가 이런 건 그냥 열어놓는... 나도 사실 광대거든.” 이 말은 대중들이 막연히 갖고 있는 신화로서의 황석영 이미지를 순식간에 깨버렸다. 황석영은 자신을 시정배라고 했고, 또 ‘자신도 광대’라고 말함으로써 강호동과 유세윤, 올밴과 스스로 동격이 되었다. 물론 이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더 깊다. 글 쓰는 데 있어서 엄정함을 유지하지만, 바로 그 글이 저 밑바닥 현실까지 닿아 있어야 진실을 담을 수 있기에 일상에서는 늘 자신을 시정배처럼 낮춘 상태로 열어둔다는 것이다. 역시 대문호다운 자세가 아닐 수 없었다.

황석영은 토크쇼 내내 강호동의 직설적인 멘트에 기꺼이 박장대소를 해주었고, 강호동은 황석영의 그 진솔한 모습에 절로 고개를 숙였다. 서로 이질적이라 생각해 가졌던 불편한 긴장감이 차츰 해소되면서 소통의 편안함으로 변화되어갈 때, 시청자들은 그 토크쇼에 깊숙이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실험적이었지만 쇼는 재미에 있어서나 의미에 있어서나 대성공이었다.

그런데 이 별난 토크쇼가 연예인이 아닌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유명인들을 게스트로 초대한 것은 황석영뿐만이 아니었다. 양준혁, 박세리, 이만기, 장미란, 추성훈 같은 스포츠인들은 물론이고 산악인 엄홍길, 바이올리니스트 사라장(장영주), 발레무용가 강수진, 만화가 허영만, 소설가 이외수 같은 문화계 전반의 인물들이 이 토크쇼를 거쳐갔다. 그들은 이 즐거움을 목적으로 하는 토크쇼에 등장해 아낌없이 자신의 맨 얼굴을 보여줌으로서 때론 웃음을 주었고 때론 뭉클한 감동의 눈물을 선사하면서 박수를 받았다. 도대체 ‘무릎팍 도사’의 어떤 면이 이처럼 다채로운 인물들이 출연해 가식 없는 이야기를 나누게 만드는 것일까.

토크쇼라는 형식이 대중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서 그 시대의 담화방식을 닮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틀에 박혀 있던 토크쇼들 사이에서 새로운 형식으로 등장해 그 영역을 점차 넓혀온 ‘무릎팍 도사’가 걸어온 길을 통해 우리는 어쩌면 이 시대의 달라진 담화방식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토크쇼, 홍보와 진정성 사이 딜레마에 빠지다
토크쇼의 사전적 정의는 ‘텔레비전, 라디오 따위에서, 유명인이나 기타 다른 사람을 초대하여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네이버 국어사전)’이다. 그 정의가 꽤 광범위하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담화방식을 가진 프로그램은 모두 이 범주에 포함된다. 즉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MC가 있고, 초대된 게스트가 있어 그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쇼. 이것이 토크쇼의 간단한 형식이다.

그런데 이 간단한 형식 속에서 중요해지는 것은 토크쇼의 입장과 게스트의 입장이 그 형식 속에 적절히 반영되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토크쇼의 입장은 게스트들에게서 재미있는 이야기나 그동안 몰랐던 사실들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연예인의 사생활은 그 중에서도 가장 시청자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요소다. 반면 게스트의 입장은 토크쇼를 통해 자신을 알리는 것이 주목적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시작한다면 토크쇼라는 자리는 자연스러운 홍보의 기회를 제공하는 자리가 된다. 하지만 현재 이 토크쇼의 입장과 게스트의 입장은 상충된다. 토크쇼의 입장만 내세우다가는 출연할 게스트를 찾기가 어렵게 되고, 게스트의 입장을 맞추다보면 토크쇼가 자칫 홍보의 장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과거 ‘야심만만’이 훌륭했던 점은 바로 이런 게스트의 입장과 쇼의 입장을 설문조사라는 공적인 방식으로 적절히 절충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소재를 게스트의 입장에 맞추는 직설적인 방식을 피하고 설문이라는 우회의 방법을 통하자, 이야기에 대한 공감의 폭이 넓어졌다. 영화나 드라마 속 설정을 보통사람들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 상황으로 일반화시키자 출연진들은 누구나 그 이야기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영화나 드라마 홍보를 하려는 당사자들, 즉 게스트의 입을 반드시 통할 필요도 없게되었다. 누구나 얘기하고 회자되는 이야기 속에서 홍보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야심만만’의 그 우회홍보전략은 5년여의 장기집권을 끝으로, 시청률이 10%대 미만까지 추락했고 결국 쓸쓸하게 종영했다.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하게도 그것은 게스트의 입장과 토크쇼의 입장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할 수 있었던 그 균형이 깨졌기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홍보성 질문들이 설문으로 등장했고, 출연진 역시 홍보를 위한 인물로 맞춰지면서 심리에 대한 정보는 온데간데없고 프로그램은 연예인들의 신변잡기로 흐르게 되었다. 여기에 2007년 들어 급부상한 리얼리티쇼들은 한편으로 ‘야심만만’의 진솔했던 이야기마저 홍보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2007년도의 이 토크쇼들이 직면하게된 홍보와 진정성 사이의 딜레마는 리얼리티쇼의 영향을 받으면서 몇 가지 방향으로 해결책을 모색하게 된다. 그 하나는 토크의 수위를 높이는 것이다. 그 해에 급부상한 김구라라는 아이콘으로 대변되는 독설이 토크쇼로 들어오면서 폭로성의 막말들이 쏟아져 나왔고, 호통은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또 하나는 저 ‘야심만만’이 가졌던 양자의 입장을 절충하는 새로운 포맷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것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해피투게더’의 목욕탕 토크, ‘놀러와’의 방석토크, ‘상상플러스’의 대박토크, ‘야심만만2’의 올킬 시스템 같은 것이 그것이다. 마치 게임 형식을 빌고 있지만 실상은 출연한 게스트들의 뒷얘기를 끌어내는 것이 이 토크쇼들의 목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방식은 어떤 것으로도 이 토크쇼가 직면한 딜레마를 해결하기에는 미봉책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마치 이 모든 것을 해결해버리겠다고 자처한 듯 새로운 형식으로 등장한 것이 ‘무릎팍 도사’다. ‘무릎팍 도사’는 으레 빙 둘러 말하는 화법이 고착되어 있던 토크쇼에 직설어법을 들고 나왔다. 한계에 봉착했던 ‘야심만만’의 강호동은 묘한 복장을 하고 ‘무릎팍 도사’로 돌아와 전혀 새로운 토크쇼의 세계를 열어 보인다.

‘무릎팍 도사’앞에 신비주의 옷을 벗는 연예인들
무릎팍 팍팍! 이 단순한 구호는 마치 주문 같다. 이 주문 앞에 연예인들이 그간 숨겨온, 혹은 숨기고 싶었던 맨 얼굴은 TV라는 마법의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공개된다. 다음날 인터넷에는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폭탄선언을 한 연예인들의 말들이 기사가 되어 뉴스를 장식한다. 쇼는 쇼일 뿐이라고? 적어도 ‘무릎팍 도사’의 경우 쇼는 그저 쇼가 아니다. 쇼는 바로 리얼리티며, 그 리얼리티는 마치 영화 ‘트루먼쇼’의 트루먼의 일상처럼 연예인들의 실제상황을 보여주는 좋은 기사거리가 된다. 현실과 쇼가 묘한 동거를 시작하는 곳이 바로 ‘무릎팍 도사’라는 코너다.

형식은 간단하다. 연예인이 도사 앞에 질문을 가지고 등장하고, 무릎팍 도사 강호동과 건방진 도사 유세윤, 그리고 올밴은 거침없는 질문공세를 퍼부어 출연자의 속내를 드러내게 한다. 중요한 것은 이 인터뷰 형식이 대결구도를 가진다는 점. 무릎팍 도사 측은 출연자가 얘기하지 않으려는 당혹스런 부분을 끄집어내 진실(?)을 밝히려 하고 출연자는 거기서 벗어나려 때론 땀을 뻘뻘 흘리고 때론 공세를 취해 강호동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연예인의 사생활을 파고드는 시도는 ‘야심만만’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하지만 ‘무릎팍 도사’는 홍보 편향으로 리얼리티가 떨어진 ‘야심만만’이 갖고 있는 약점을 대결형식과 좀더 과감해진 질문, 그리고 인터뷰형식의 관건인 적절한 출연자 선정으로 보완한다. ‘연예인의 맨 얼굴 드러내기’라는 리얼리티쇼의 본질을 ‘야심만만’처럼 우회적인 방법이 아닌 보다 직접적으로 건드린 것이다.

질문은 시청자가 당혹스러울 정도. 노골적인 질문공세는 마치 저 ‘제리 스프링어쇼’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일반인도 아닌 연예인들이 왜 무릎팍 도사의 부름에 기꺼이 출연해 무릎을 꿇는 것일까. 그것은 달라진 연예인들의 이미지 마케팅 전략에서 비롯된다. 이제 연예인들은 더 이상 스타로서 저 하늘 꼭대기에만 있어서는 전혀 빛을 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과거의 스타가 신비의 베일에 싸여 있을수록 빛을 발했다면, 현재의 스타는 우리와 같은 눈높이여야 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살아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연예인들의 스타로서 범접할 수 없는 이미지와 함께, ‘생얼’과 깨는 이미지의 ‘직찍사’가 유포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여기에는 연예인들의 신비주의가 이제는 위험한 이미지 관리방법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 한몫을 차지한다. 누구나 손에 휴대폰이라는 카메라를 들고 다니고 그렇게 우연히 찍힌 사진은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유포되는 세상에서 신비주의를 주창한다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갖고 온 새로운 전략은 신비주의와 탈신비주의를 적절히 구사하는 것이다. 이효리는 뮤직비디오와 스테이지 위에서는 섹시코드의 대명사로 신비주의 전략을 구사하지만 무대를 내려와 ‘패밀리가 떴다’로 들어가면 바로 탈신비주의로 돌아간다. 화려한 의상을 벗고 몸빼 바지에 수건을 두르는 순간, 그녀는 편안한 누나 같고 털털한 여자친구 같은 이미지를 동시에 갖게 되는 것이다.

여기가 ‘무릎팍 도사’와 거기 출연하는 연예인들이 만나는 지점이다. ‘무릎팍 도사’는 달라진 환경 속에서 또한 달라져야 하는 연예인의 탈신비주의 전략을 만족시킨다. 그래서 ‘무릎팍 도사’는 누구든 그 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털털한 보통사람이 되는 마법의 프로그램이다.

논란 연예인들에게 면죄부를 주다
‘무릎팍 도사’의 이런 속성, 즉 연예인들을 탈신비화시키는 프로그램의 장점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이들은 바로 논란 연예인들이었다. 과거 한 때의 잘못으로 대중들에게 영원히 이미지에 오점을 남긴 연예인들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 토로의 기회를 얻었다. 한편 ‘무릎팍 도사’는 논란 연예인들의 아픈 얘기를 끄집어낸다는 점에서 폭로의 형식을 띄게 된다. 폭로와 토로. 이 두 입장이 이 토크쇼 속에서 부딪치게 되면서 쇼에 긴장감을 만들어내게 되는데, 이것은 이미 토크쇼의 기본적인 성격으로 자리하고 있는 진정성과 홍보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폭로는 토크쇼가 진정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형식이며, 토로는 결국 연예인들의 홍보와 맞아떨어지는 형식이다.

그래서 과거 방송을 통해 어떤 문제를 일으켰거나 물의를 일으켰던 연예인들은 기꺼이 이 프로그램에 들어가 감췄던 그 문제를 오히려 들추어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릎팍 도사’는 살벌한 질문들을 통해 진솔한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풀어내는 한바탕 살풀이를 하게된다.
‘무릎팍 도사’의 복장과 캐릭터 설정이 신기 오른 점쟁이를 표방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살풀이를 하는 기능과도 맞닿는다. 폭로와 토로는 저 진정성과 홍보처럼 어떤 균형이 이뤄졌을 때 힘을 발하지만, 또한 웃음을 주기 위한 토크쇼로서는 위험성 또한 내포하고 있다. 폭로는 자극적인 막말로 변할 수 있고, 토로는 하나의 자기변호, 자기홍보로 순식간에 변질될 수 있다. 여기서 ‘무릎팍 도사’가 취하고 있는 점집, 점쟁이 설정은 진가를 발휘한다. 이것은 현실적인 토크쇼의 배경이 아니라 어떤 허구 속의 배경이다. 그 속에 들어가면 강호동은 도사라는 캐릭터를 연기하게 되고, 게스트들은 점집을 찾는 사람의 연기를 하게 된다. 이것은 안전장치다. 무릎팍 도사가 게스트의 아픈 얘기를 면전에서 콕콕 집어 집요하게 끄집어내는 것은 마치 점 집이 가진 치유적인 접근처럼 보여진다. 대면하기 힘든 과거의 상황과 대면하게 함으로써 그 마음의 짐을 오히려 덜어내는 것이다. 한편 이 형식 속에서 게스트들은 기꺼이 자기 속에 있던 못다한 말들을 끄집어내게 된다. 물의를 일으킨 연예인들은 그 사건을 얘기하면서 잘못을 인정하기도 하고, 오해가 섞인 부분들은 해명의 기회를 갖기도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 살풀이의 끝에는 무릎팍 도사의 덕담이 이어진다. 도사의 까칠함이 찬양으로 바뀌면서 연예인들은 한 꺼풀의 이미지를 벗어낸다. 늘 마지막 멘트가 “○○○여! 영원하라!”인 것은 이 위험해 보이는 토크쇼가 가진 진짜 얼굴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TV 속에서 벌어지는 이 한바탕의 살풀이는 그저 쇼가 아니다. 다음날이면 대문짝만하게 인터넷을 장식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이미지로 살아가는 연예인들에게 있어 그 이미지를 실제적으로 바꾸어주는 이 살풀이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문제는 다시 그 균형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무릎팍 도사’가 하는 질문이 과연 진짜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해명을 위한 질문인지가 헷갈리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후자로 가게된다면 이 쇼는 가짜임이 판명날 것이고 그 결과는 저 ‘야심만만’이 가게된 전철을 밟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로 드러난다. ‘무릎팍 도사’가 논란 연예인 면죄부 프로그램이냐는 비판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연예인을 무릎 꿇리고 거침없는 질문공세로 맨 얼굴을 드러내게 만드는 ‘리얼 인터뷰 쇼’라는 애초의 의도는 희석되고 물의를 일으킨 연예인들에게 오히려 변명의 기회를 주는 면죄부 프로그램이 되어가고 있다는 비판은 정당한 것이었다. 이것은 무릎팍 도사가 인기를 끌면서 초심을 잃어버린 결과였다. 물의 연예인들이 매주 등장해 자신의 소회를 얘기하는 것은 좋지만, 결론적으로 무릎팍 도사가 ‘그들의 죄를 사해주는 것’은 시청자들을 무시한 오만한 행위로 비춰지기도 한 것이다.

‘무릎팍 도사’와 달라진 이 시대의 화법
그렇다면 그것으로 ‘무릎팍 도사’는 저 ‘야심만만’같은 홍보 프로그램으로 전락한 토크쇼의 길을 가게 됐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렇지 않다. ‘무릎팍 도사’는 바로 이런 비판 속에서 오히려 초청 게스트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연예인들에게만 집중되던 게스트 자리에 타 분야의 유명인들을 앉혀 놓은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이 토크쇼가 직면한 ‘연예인 홍보프로그램’의 이미지는 누그러지고, 대신 이 토크쇼가 가진 기능적인 장점들이 부각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직설어법과, 탈신비주의 혹은 탈권력화의 형식이다. 그리고 바로 이 두  가지는 이 시대의 화법과 조우하게 된다.

직설어법은 독설이 어떻게 이 시대의 한 화법으로 자리잡았는가를 설명해주는 키워드다. 이제 방송 프로그램 속에서 우리는 어디서든 독설을 만난다. 그만큼 과거 방송의 경향은 홍보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독설 자체가 등장했을 때 신선하다 느낄 수 있었다. 신비화되어 있는 그 어떤 것을 독설이 순간적으로 무너뜨렸을 때, 느껴지는 쾌감은 김구라 같은 인터넷방송에서나 허용되었던 직설어법의 소유자를 지상파로도 끌어들였다. 바로 이 흐름은 지금의 직설어법의 발원지가 인터넷 화법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인터넷 속에서 운용되던 화법은 마치 김구라가 지상으로 나온 것처럼 현실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이 비방과 막말에 가까웠던 독설이 주는 쾌감은 차츰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극이란 더 큰 자극을 만들 뿐, 그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따라서 독설이 새로운 전략을 찾은 것은 이른바 ‘공감형 독설’이다. 남들은 쉬쉬 얘기하지 못하는 것을 거침없이 얘기한다는 독한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독설로 불린다. 하지만 그 독설이 어떤 공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독설이 아닌 진정성으로 넘어간다. 바로 이 점은 ‘무릎팍 도사’가 유명인들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직설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힘이 된다.

한편 탈신비주의, 탈권력화를 지향하는 토크쇼들은 일제히 1인 MC체제를 버리고 집단 토크쇼로 전향한다. 한때 유행처럼 생겨났던 ‘자니윤쇼’, ‘주병진쇼’, ‘이홍렬쇼’, ‘이주일쇼’, ‘서세원쇼’, ‘김형곤쇼’ 같은 1인 MC체제의 쇼는 무언가 구닥다리가 되어 버렸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집단 토크쇼에서는 한 명의 MC가 아닌 여러 MC들이 나와 말들을 쏟아낸다. 이것은 정확히 쏟아낸다는 표현이 맞다. 과거의 1인 MC 체제의 토크쇼에는 기본적으로 질문-답변이라는 순서가 있었다. 하지만 집단 MC 체제에는 이러한 순서는 거의 무시된다. ‘명랑히어로’에서 김성주가 좀 진지하게 어떤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할 때, 김구라는 아예 그 이야기 자체를 끊어버리고 자신의 이야기로 방향을 돌린다. 그리고 김구라의 이야기 도중에도 신정환은 계속 엉뚱한 이야기로 맥을 끊으려 노력한다. 심지어 카메라가 신정환을 잡고 있는 와중에도 말들을 계속 튀어나온다. 그것은 자막의 형태로 마치 만화를 보는 것처럼 화면 속에 들어온다. 집단 토크쇼의 묘미는 비록 글자로서라도 화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고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말의 상찬에 있다.

과거의 중앙 집중식 토크쇼 형식이 점점 사라지고, 중앙이 없이 서로 주장들이 난무하는 집단 토크쇼로의 변화는 작금의 인터넷 환경을 반영한다. ‘라디오스타’에서 서로 자신이 메인 MC라고 주장하는 것은 고스란히 인터넷에서의 대화방식을 닮았다. 인터넷에서의 대화 방식이란 중앙이 없고 대신 무수한 중앙들이 서로의 주장을 하며 부딪치는 형태다. 이처럼 수직적인 대화구조가 수평적인 형태로 변모하면서, 어느 한 사람의 주도 하에 끌려가는 1인 MC체제의 토크쇼는 점점 과거의 유물이 되어가고 있다.

‘무릎팍 도사’가 선택한 화법이 말해주는 것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대세로 자리한 집단 MC 체제의 토크쇼 속에서도 ‘무릎팍 도사’는 여전히 1인 체제(물론 유세윤과 올밴이 있지만 이들은 분명 보조자일 뿐이다)로 굳건히 버티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무릎팍 도사’만이 가진 독특한 장치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집단 토크쇼에서는 게스트의 (홍보이기 쉬운) 발언을 막아내기 위해 MC들이 서로 자기들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이것은 중심 없는 대화로서 어떤 재미를 주기는 하지만 자칫 대화의 깊이를 상쇄시킬 위험이 있다. 어쩌면 대화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대화 방식이 주는 재미에 치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게스트는 이 방식 속에 들어가려면 저 스스로 대화의 욕구를 지워버려야 한다. 이것은 MC와 게스트가 어떤 균형 잡힌 틀 안에서 대화를 하는 형식이 아니다. 무게 중심은 매번 고정적으로 출연하는 MC들에 집중되기 마련이다. 출연 게스트들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토크쇼로서는 대단히 불안한 상황인 것이다.

반면 ‘무릎팍 도사’는 1인 토크쇼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MC와 게스트 간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한다. ‘무릎팍 도사’는 다른 토크쇼와는 차별된 구도를 갖추고 있다. 그것은 출연진들이 카메라를 향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옆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대신 MC 강호동은 게스트와 마주보고 있으며 그것을 옆에서 찍는 카메라는 그 장면 자체를 자연스럽게 대결구도로 포착해낼 수 있다. 이것은 물론 과거 1인 토크쇼 중에서도 보이던 장면이다. 하지만 그 과거의 구도에서 MC와 게스트는 기본적으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향해 보고 말한다. 즉 시청자에게 직접 토로하는 이 방식 속에서 MC는 게스트가 하고 싶은 얘기를 끄집어내게 하는 보조자의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무릎팍 도사’는 시청자에게 직접 토로하려는 게스트의 시선을 MC 강호동이 붙잡아두고는 그가 원하는 방식의 대화로 이끌어간다.

이 대결구도를 취하고 있는 형식은 사실상 토크쇼 본연의 모습이기도 하다. 토크쇼 속에서 MC는 시청자들이 원하는 게스트와, 시청자를 연결시켜주는 영매의 역할을 하는 것이 주 임무다. ‘무릎팍 도사’에 영역 구분 없는 인물들이 출연하고 그 속에서 모두가 진솔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토크쇼의 기본자세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이 기본자세를 유지하면서도(어쩌면 유지하기 위해) 달라진 시대에 맞는 달라진 게스트 섭외나 달라진 토크의 방식을 고민하는 점이다. ‘무릎팍 도사’에 심지어 시대의 지성들까지 나아가 기꺼이 무릎을 꿇는 이유는, 이 때론 개구지고, 때론 까칠하며, 때론 함께 울어줄 줄 아는 도사가 이 시대의 화법에 맞는 영매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담화라는 이름의 물줄기는 수직적으로 내려오기보다는 점점 수평적으로 흐르고, 포장하기보다는 진정성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 글은 월간중앙(http://magazine.joins.com/monthly/) 1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실종된 기획의도, 연예인 신변잡기로 가는 ‘명랑히어로’

‘명랑히어로’가 처음 방송을 탔을 때, 그것은 토크쇼의 놀라운 진화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그저 웃고 떠들고 즐기는 연예인들만의 이야기로 채워지거나 출연자들의 홍보수단으로 활용되던 토크쇼를 넘어서 사회 시사문제를 예능 프로그램 속으로 과감히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시사문제라면 늘 심각하고 무언가 특정한 사람들만이 거론해야될 것으로 오인되었던 것을 ‘명랑히어로’는 가볍게 씹어줌으로써 그것이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웃고 떠들면서 체화시켰다.

‘명랑히어로’의 형식변화, 진화일까 퇴화일까
하지만 무슨 일인지 이 재미와 의미까지 가질 수 있었던 훌륭한 형식은 오래 가지 못했다. 어느 순간 포맷은 가상장례식을 표방한 ‘두 번 살다’로 바뀌었다. 그러자 ‘명랑히어로’가 가진 외부에서 끌어오는 토크쇼의 화제는 결국 과거 토크쇼들이 하던 연예인들의 이야기로 퇴행했다. 토크쇼의 진화로서 받아들여지던 ‘명랑히어로’는 이 순간부터 퇴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두 번 살다’란 결국 화제에서 현재 벗어나고 있는 연예인을 죽음이라는 형식 속으로 집어넣고는 다시 그를 회고해 살려내는 토크쇼다. 이것은 한 마디로 죽어가는 이미지를 살리는 작업과 마찬가지다. 결국 연예인 홍보라는 얘기다.

그나마 ‘두 번 살다’는 그 형식만으로는 참신한 면이 있었다. 누군가 결국은 맞이하게 될 죽음을 미리 체험해본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며, 또 그것이 토크쇼 형식으로 들어왔을 때 묘한 재미를 선사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사실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하는 가상 장례식에서 문상의 형식으로 자리를 한 선후배 연예인들이 오히려 고인(?)의 험담을 할 때다. 즉 이 형식은 본래 의도를 거스를 때 재미를 줄 수 있는 구조다. 이것은 그만큼 대중들은 홍보지향형 토크쇼를 금세 간파해내고 쉬 식상해한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있다는 자인인 셈이다.

그 한계를 일찍이 알았기 때문일까. 이제 바뀌어진 형식은 ‘명랑한 회고전’이다. 이것은 형식적으로도 전혀 새롭거나 참신한 것이 아니다. 그저 한 명의 주인공을 세워놓고 그 사람에 대해 증언을 하는 형식은 아침방송에 늘 등장하는 고전적인 토크쇼의 그것일 뿐이다. ‘인생중간점검프로젝트’라고 거창하게 붙여 놓았지만 이것은 결국 ‘두 번 살다’의 노골화된 홍보 토크쇼로의 귀환이라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초창기 ‘명랑히어로’와 비교해보면 과도하게 연성화된 형식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의도가 산으로 가는 ‘명랑토론회’
한편 새로운 코너로 등장했던 ‘명랑토론회’ 역시 처음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게스트가 책을 한 권 선정하고 그 책에 대한 이야기를 ‘TV 책을 말하다’같은 교양프로그램이 아닌 예능 프로그램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는 바로 ‘명랑히어로’가 초기 시사문제를 끌어들였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초반 신선하다 생각했던 이 포맷은 점차 책 이야기는 사라지고 게스트를 꿔다 논 보릿자루처럼 세워놓은 채, 저들끼리 신변잡기를 늘어놓는 코너로 변질되고 있다.

박진희가 들고 나온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반짝반짝 빛나는’은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부부가 그래도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해주는 소설이다. 그런데 ‘명랑토론회’에서 이 책을 가지고 고작 한 이야기는 자신들의 연애에 얽힌 스킨십 이야기나 첫날밤에 대한 이야기에 불과했다. 정작 책을 들고 나온 박진희는 거의 아무런 얘기를 하지 못했고, 마지막에 가서 긍정적으로 하는 말이 “보통의 남자는 이런 감성 이해할 수 없겠구나 하고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낯선 것이 아니다. 이미 ‘라디오스타’에서 목격했던 김구라, 신정환, 윤종신, 김국진 4자 구도로 만들어진 그 분위기의 연장선이다. 물론 ‘라디오스타’는 여전히 매력적인 구도를 갖고 있지만 그 형식이 과도하게 스핀오프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만큼 형식의 과도한 소비가 참신한 형식마저 식상하게 만든다는 얘기다. 게다가 이것은 취지가 ‘라디오스타’와는 다르다. ‘라디오스타’는 말 그대로 스타들을 게스트로 출연시켜 그들의 이야기를 하는 연예인 토크쇼를 표방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홍보성 멘트를 불식시키는 불친절한 형식이 어떤 공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명랑한 책이 지구를 움직인다’는 캐치프레이즈에서 알 수 있듯이 책을 읽고싶은 욕구를 만들어내야 그 의도에 부합하는 것이다.

토크쇼에 있어서 의외성이 갖는 참신함과 의도 자체가 산으로 가는 것은 전혀 다르다. 프로그램 말미에 박진희가 그나마 챙겨준다고 한 말과 거기에 대해 김국진이 보탠 자성적인 말은 그래서 의미 있게 들린다. 박진희는 “여섯 가지 다른 생각을 배우고 가서 좋은 것 같아요”라고 말했고(물론 이 말은 아마도 자기 생각과는 달랐던 MC들의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표현한 것일 것이다), 거기에 대해 김국진은 마치 자신들의 토크쇼가 엉뚱한 곳에 와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이 “여섯 가지 생각이 한 가지 생각보다 못한 적도 있어요”라고 말했다. ‘명랑히어로’, 그 이름에 걸맞는 명랑한 토크쇼로 다시 거듭나야 하지 않을까.

‘페퍼민트’, 이하나와 김광민의 특별한 만남

순간 ‘수요예술무대’가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이미 무대 위에 서있던 김광민은 이하나에게 앉으라고 권했고, 이하나는 어색한 듯 앉으며 “제가 게스트가 된 것 같네요”하고 말했다. 그 농담은 92년부터 2005년까지 무려 13년 간이나 수요일밤을 예술로 만들어주었던 ‘수요예술무대’의 진행자 김광민에 대한 이하나의 헌사였다.

‘수요예술무대’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클래식이든 재즈든 팝이든 가요든 장르에 구애받지 않던 음악프로그램이었다. 장르는 달랐지만 그 다른 장르를 모두 품을 수 있는 무대가 있다는 것이 이 프로그램이 가진 가능성이었다. 그 프로그램은 무대 위에 올려지고 라이브로 펼쳐지는 음악과, 그 음악을 듣는 관객이 있다면 다른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자신이 진행자로서 부족하다고 얘기하는 이하나에게 김광민은 자신이 13년 동안 했어도 지금의 이하나보다 못하고 어색했다고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피아노 앞에 앉으면 그렇게 진지하고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그는, 진행자의 자리에 서면 그렇게 수줍어하고 어눌한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색해했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김광민을 대중들에게 깊이 각인시켰다.

그것은 김광민만의 얘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수요예술무대’라는 프로그램의 특징이 되었다. 놀라운 입담을 가진 진행자의 매끄럽고 재치 넘치는 멘트는 사실 음악프로그램의 사족과 같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음악이고, 그 음악과 관객과 어떻게 교감하느냐였다. 김광민의 음악 속에서의 진지함과 진행자로서의 어눌함은 그런 면에서 ‘수요예술무대’가 가진 음악중심주의를 그대로 표방하고 있었다.

이것은 ‘페퍼민트’가 지향하는 것과도 같다. 이하나의 ‘페퍼민트’에는 잘 마련된 무대와 관객이 있다. 그러니 이 음악중심주의를 표방하는 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무대를 채워줄 음악인들이다. ‘페퍼민트’가 열어놓은 무대 위에는 재즈연주자도 있고 록커도 있고 포크 가수도 있고,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인디 가수들까지 누구나 오른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이 무대가 순위도 아니고 인지도나 인기도 아닌 오로지 음악을 통한 소통을 위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하나는 진행자로서 어색하다. 진행자가 관객과 시청자들을 대신해서 무대에 오른 음악인들을 만나는 역할을 갖고 있다면 어색함은 어쩌면 불편함을 주는 행위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하나의 어색함에는 다른 것이 있다. 음악하는 사람들에 대한 과한 존경과 애정에서 그것이 비롯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저 ‘수요예술무대’의 김광민이 보여주었던 어색함과 맞닿는 부분인지도 모른다.

미니콘서트를 하던 김종서가 객석에 앉아있는 이하나에게 말했다. “이런 프로그램은 처음이네요. 왜 거기 가 앉아 있어요?” 그러자 이하나는 “미니 콘서트에는 저도 관객의 한 명이니까요”라고 말했다. 김종서 옆에서 기타를 치던 김태원이 옳다며 한 마디 의미심장한 말을 거들었다. “예. 좀 그렇게 들어줘야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하나의 이 프로그램의 성격을 정리하는 듯한 마지막 멘트. “뮤지션을 향한 페퍼민트의 무한한 애정은 계속됩니다.” 이하나는 그렇게 ‘페퍼민트’의 향기가 되어가고 있고, 그 기분 좋은 향기는 음악을 타고 차츰 세상으로 퍼져가고 있는 중이다.

‘무릎팍 도사’를 보면 2009 토크쇼가 보인다

올 예능을 단적으로 정리하자면 그 한 축이 리얼 버라이어티쇼이고 다른 한 축은 토크쇼라고 할 수 있다. 그 중 토크쇼에 있어서 올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을 고른다면 단연 ‘무릎팍 도사’가 꼽히지 않을까. 그것은 ‘무릎팍 도사’가 얻은 시청률 성적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기존 토크쇼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때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걸어온 ‘무릎팍 도사’의 실험적인 행보가 전체 토크쇼에 일으킨 영향력을 말하는 것이다. 올 한 해 ‘무릎팍 도사’는 우리네 토크쇼에 어떤 실험을 했고 그것은 내년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탈신비주의, 탈권위주의 바람
‘무릎팍 도사’의 핵심적인 특징은 배틀 구조의 화법으로 진행되는 토크의 진검 승부라는 점이다. 마치 탐문하듯이 상대방이 원하든 원치 않든 시청자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끌어내려는 도사와, 그것을 숨기거나 아예 자포자기하듯 털어놓는 게스트의 입장이 절묘하게 부딪치는 이곳은 기존 연예인들 혹은 유명인들이 갖고 있던 신비주의 혹은 권위주의의 껍질을 벗겨내는 곳이기도 하다. 과거 신비주의 마케팅이 주조를 이루던 시대라면 이 대결구도는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겠지만, 이제 탈신비주의가 어떤 대세가 된 상황에서 이 도사와 게스트가 벌이는 한판 굿은 가능해진다. 그 양자가 공유한 목적은 신비주의라는 겉옷을 벗어 던지는 것이다. 이를 통해 대신 연예인 혹은 유명인은 친근한 이미지를 대신 얻게 된다. 반면 도사가 얻는 것은 바로 그 연예인, 유명인의 껍질을 벗겨내는 쾌감이다.

도사의 직설어법은 여타의 토크쇼에서 에둘러 홍보가 아닌 척 가장한 채 홍보를 하는 그런 방식을 깨뜨려버린다. 올해 다른 토크쇼들은 여전히 이 방식을 어떻게 잘 위장한 채 고수할 것인지만을 고민해왔다. ‘야심만만2’도 올킬 시스템을 내세우고 있지만 여전히 게스트의 홍보에 집중하고 있고, 게스트의 카테고리화로 어떤 주제를 상정하는 방식을 취하는 ‘놀러와’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해피투게더’나 ‘샴페인’ 같은 토크쇼에도 해당되는 얘기다. ‘명랑히어로’는 초기에 시사문제를 끌어 들여 이 문제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지금의 ‘두 번 살다’라는 컨셉트는 역시 인물 홍보로 돌아가고 있다. 이러한 토크쇼들 역시 직설어법을 따르고 있지만 거기에 상응하는 ‘무릎팍 도사’ 같은 형식은 구축하지 못했다. 과거의 형식에 화법만 바꾼 셈. ‘무릎팍 도사’가 보여준 화법과 형식의 균형은 2009년 토크쇼들의 주된 고민거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연예인 중심주의 벗어난 게스트 섭외의 확장
무엇보다 올해 ‘무릎팍 도사’가 토크쇼의 변화에 기여한 부분은 게스트 섭외에 있어서 연예인 중심주의를 벗어났다는 점이다. 언제부턴가 토크쇼라고 하면 늘 연예인들이 출연해 자신들의 신변잡기나 홍보거리를 토로하는 공간으로 인식되었던 것이 사실. 초기 ‘무릎팍 도사’도 이 한계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했었다. 논란 연예인을 섭외한 것은 참신한 부분이었지만 그것 역시 논란 연예인에게 면죄부를 씌워주었다는 역홍보의 한계를 드러낸 부분이다. 한참 공격적인 발언을 하던 도사가 마지막에 가서 “○○여! 영원하라!”고 외치는 장면은 이 토크쇼 역시 연예인 홍보의 한 분파임을 자인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에 직면해서 ‘무릎팍 도사’가 꺼낸 비연예인 게스트라는 카드는 주효했다. 비연예인 출연은 연예인 홍보라는 지적을 간단히 뛰어넘으면서 동시에 그만큼 신선하게 다가왔다. ‘무릎팍 도사’는 양준혁, 박세리, 이만기, 장미란, 추성훈 같은 스포츠인들은 물론이고 산악인 엄홍길, 바이올리니스트 사라장(장영주), 발레무용가 강수진, 만화가 허영만, 소설가 이외수 같은 문화계 전반의 인물들을 비롯해 심지어 우리 시대의 소설가 황석영까지 토크쇼로 끌어들여 한바탕 걸판진 솔직한 토크의 재미 속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연예인보다는 비연예인이 출연했을 때 더 높은 시청률을 보였다는 점은 앞으로 우리네 토크쇼들이 게스트를 섭외하는데 있어 새로운 이정표를 보여준 셈이 아닐 수 없다.

집단MC체제? 1인 토크쇼로도 충분
무엇보다도 ‘무릎팍 도사’가 내년 토크쇼의 어떤 전범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모두가 집단 MC체제를 부르짖을 때 홀로 1인 토크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건방진 도사 유세윤과 올밴이 있지만 이들은 보조적인 위치에 있을 뿐, 그 진짜 형태는 1인 토크쇼로서 게스트와 메인 MC의 토크 대결이 중심을 이룬다. ‘무릎팍 도사’는 정통 토크쇼 구조를 유지하면서, 대신 토크의 형식과 대화의 방식을 바꾸는 것으로 정면승부를 통해 그간 홍보와 진정성 사이의 딜레마에 빠져있던 토크쇼의 문제를 뛰어넘었다.

이것은 현재 경기불황으로 인해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집단 MC체제에 있어서 하나의 가능성이 된다. 하지만 ‘무릎팍 도사’ 같은 1인 체제가 구조조정의 한 선택으로 대세를 이룬다고 해도 똑같이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박중훈쇼’ 같은 1인 체제의 토크쇼가 생기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 쇼의 경우처럼 그저 과거로 회귀하는 1인 토크쇼는 어쩌면 시대착오일 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1인 토크쇼라도 그 구조 위에 이 시대의 화법을 적용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토크쇼는 늘 반복되는 것 같지만 또 한 편으로는 그 시대에 맞게 얼굴을 고쳐오며 진화해왔다. 그 전방위에 서 있는 것이 바로 ‘무릎팍 도사’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