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는 괴로워’ vs ‘복면달호’

최근 속속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 외국 블록버스터들 사이에서 혼자 꿋꿋이 우리 영화의 자존심을 세우고 있는 영화, ‘괴로워’. 이 영화는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통쾌한 풍자를 다뤘지만 또한 오랜 불황의 늪에 빠진 우리네 가요계의 이면을 들추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 가요계의 이면을 다룬 또 하나의 영화가 개봉을 준비중이다. 이름하여 ‘복면달호’. 제목부터 심상찮은 이 영화는 복면을 쓰고 트로트를 불러야하는 3류 록커에 대한 이야기다. 이쯤 되면 궁금해지는 점이 있다. 가요계의 이면을 다룬 이 두 영화에서 왜 두 주인공은 모두 정체성을 숨겨야했느냐는 점이다. 한 명은 성형으로, 또 한 명은 복면으로.

‘미녀는 괴로워’가 예상 밖의 선전을 한 것은 첫째, 원작에 대한 리메이크에 있어서 현지화가 성공했기 때문이다. ‘미녀는 괴로워’는 스즈키 유미코가 그린 동명의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미녀는 괴로워’는 원작과는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은 원작에는 미녀로 변신하기 전의 한나(김아중 분)의 뚱뚱한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외모지상주의로 흐르고 있는 우리 사회를 더 강도 높게 비판할 수 있는 장치가 된다. 게다가 오래 전부터 우리 가요계의 문제가 되어왔던 ‘얼굴 없는 가수’ 혹은 ‘립씽크’ 같은 이야기들이 배치되면서 영화는 원작을 넘어 좀더 우리 현실을 비추게 되었다.

‘복면달호’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는 이유는 그 상황이 ‘미녀는 괴로워’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 역시 일본의 소설가 사이토 히로시의 ‘엔카의 꽃길’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다루려는 그 내용이 우리네 가요계 현실과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록가수가 설  자리가 없는 가요 풍토와 상대적으로 잘 나가는 트로트에 대한 막연한 평가절하가 그것이다. 그러니 가창력 좋은 록가수가 트로트 가수가 되는 이야기에 어찌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실제로 우리나라 초창기 록그룹의 신화였던 ‘백두산’의 보컬 유현상은 후에 트로트 가수로 변신, ‘갈테면 가라지’같은 히트곡을 남기기도 하지 않았던가.

만일 ‘복면달호’가 저 ‘미녀는 괴로워’처럼 원작을 넘어 우리네 정서에 맞춘 리메이크에 성공한다면 그 힘은 바로 저 가요계의 문제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그만큼 문제 많고 그 문제로 침체된 가요계의 추락이, 오히려 불황기 우리 영화계를 비상하게 만든 소재가 되었다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가요계에는 심각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소재가 이 두 영화 속에서는 코미디라는 장르로 다루어진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다행인 것은 이 통쾌한 풍자를 동반한 코미디라는 틀이 문제는 물론이고 해법까지 도출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음반시장상황을 이해하게 해주고 가요소비자로서 비판적인 관점을 갖게 해주고 있다.

한나나 달호(차태현 분)나 그들이 성형 혹은 복면을 하면서 정체성을 숨기게 된 이유는 알맹이보다 중요해진 껍데기 때문이다. 전영혁씨나 신중현씨 말대로 가수는 노래 잘하면 되는 것이지만 우리네 가요계는 껍데기에 더 치중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잘 생기서 나쁠 건 없지만, 잘 생긴 것만으로 가수가 된다는 건 문제가 된다. 젊은이들에게 폼나고 멋져 보이는 음악 장르로서 R&B나 발라드, 댄스가 나쁠 건 없지만, 오로지 그 장르에만 몰려드는 음반기획은 문제가 된다. 이러한 문제들을 건드렸다는 점이 ‘미녀는 괴로워’ 이후, ‘복면달호’에서 다루어질 우리네 가요계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이유다.

TV, 웃거나 분노하거나

요즘 시청자들의 욕구는 두 가지인 것 같다. 그것은 ‘웃고싶거나, 분노하고싶다는 것’. 멜로드라마의 퇴조는 바로 그 정조가 지금의 세태와 잘 맞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완성도를 떠나서 그 주인공이 질질 짜는 영상 자체에 시청자들은 그다지 공감하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은 실제 현실에서 ‘눈물의 가치’가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평가절하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쿨(Cool)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눈물은 혼자 숨겨야할 어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TV 속에서 ‘눈물 흘리는 자’보다는 ‘힘겨워도 웃고 있는 자’를 더 리얼하게 생각한다.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각박해져만 가는 현실 속에서 매달 은행이자에 생활비에 아이들 학원비에 시달리고, 회사에서 구조조정의 칼날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오로지 입시를 위해 공부기계처럼 살아가고, 그렇게 들어간 대학에서조차 취업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멜로드라마가 보여주는 ‘사랑의 좌절로 인한 눈물’은 그다지 리얼한 공감을 일으키기가 어렵다. 그래서 그들은 차라리 이런 눈물보다는 ‘잠깐 동안의 도피’를 꿈꾼다. 케쎄라 쎄라. 눈물은 내일로 미루고 당장은 웃고 싶은 것이다.

웃고싶다, 생각하지 않고
공개개그 프로그램의 전성시대는 바로 이런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공개개그가 지향하는 호흡이 그다지 길지 않은 몇 분, 몇 초라는 것은, ‘잠시 생각은 접어두고 웃고싶은’ 시청자들의 입맛에 잘 맞아떨어진다. 게다가 이 촌천살인의 개그 속에는 현실에서 억압된 감정을 순간적으로 터뜨리는 폭발력이 있다. 마빡이의 단순한 동작 속에는 복잡한 현실을 무화시키는 강력한 웃음폭탄이 내재되어 있고, 죄민수의 막가파식 개그 속에는 사회와 권위의 억압을 해체하는 묘한 힘이 있다.

한편 이 마빡이나 죄민수 같은 소외되고 비천한 인물들은, 웃음을 찾는 시청자들 자신의 처지를 동일시시키기에 딱 알맞은 캐릭터들이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무한도전’의 힘은 바로 그런 캐릭터들에서 나온다. ‘리얼 버라이어티 개그’를 지향하고 있지만 ‘무한도전’이 주는 웃음의 원천은 연출되지 않은 리얼한 상황에 있다기보다는, 그 상황 속에 있는 캐릭터들의 힘에 있다. 소심하고 비굴하면서도 정이 가는 유재석, 호통을 치지만 어딘지 연민이 느껴지는 박명수, 쉴 새없이 떠들어대지만 순수함이 느껴지는 노홍철, 덩치만 큰 곰 같은 우직함의 정준하, 장난기 많은 막내 같은 하하, 방송에 적응 못한 듯해 연민을 일으키는 정형돈. 이 소외된 캐릭터들이 엮어 가는 실제상황이라서 공감이 가는 것이다.

분노하고 싶다, 거침없이
하지만 이 웃음은 그냥 웃음이 아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란 말이다. 개그의 두 가지 웃음 촉발인자는 이제 ‘굴욕과 풍자’가 되었다. 굴욕이 자신을 한없이 무너뜨리는 데서 웃음을 만든다면, 풍자는 상대방을 조롱하고 깎아 내리는 데서 웃음을 촉발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나타난 양태가 다를 뿐, 그 근본 유발인자는 한 가지에서 나온다. 바로 ‘분노’이다. 굴욕이 타인이 아닌 내 자신에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자학)이라면, 풍자는 바로 그 타인에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 분노를 마빡이는 자기 자신에게, 죄민수는 타인에게 터트리는 형태로 웃음을 유발시킨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풍자가 개그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요인이다. ‘형님뉴스’는 “∼가 ∼다워야 ∼지’하는 유행어를 흩뿌리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가 ∼답지 않은” 세태를 꼬집는 말이다. 죄민수의 “아무 이유 없어!”, “이 MC계의 쓰레기!”같은 말 역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권위에 대한 조롱이 아닐 수 없다. 우아한 자태의 사모님이 하는 일련의 ‘무뇌형 발언’은 ‘돈은 많으나 생각은 없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제로’의 졸부들을 비꼬는 말들이다. 웃음 속에는 이다지도 많은 분노의 칼날들이 숨어 있다. 그 칼이 정확히 시청자들의 가슴에 꽂히는 순간, 카타르시스와 함께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TV, 웃거나 분노하거나
이것은 단지 개그 프로그램의 얘기만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멜로드라마가 어려운 것은 바로 눈물이 이 사회에서 리얼한 해결방식이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이제 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웃음과 분노’가 하나의 쿨한 해결방식으로 자리잡는다. 그래서 멜로드라마가 손잡은 것은 코미디다. 따라서 작년에 코믹한 설정으로 호평을 얻었던 ‘돌아와요 순애씨’의 연장선 위에 ‘달자의 봄’이 있는 것이고, ‘환상의 커플’에 대한 열렬한 애정이 여전한 것이다. 일일드라마에 도전장을 내민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성공은 바로 이 웃음 코드를 공감 가고 리얼한 캐릭터들을 통해 잘 살린 데 있다. 눈물에 각박해진 시대에 드라마들은 웃어야 성공한다. 늘 웃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질질 짜지는 않아야 된다.

반면, 분노를 부추기는 드라마, 혹은 프로그램들이 TV의 또 한 축을 차지한다. 자극과 선정성을 무기로 들고 나오는 ‘논란드라마들’은 그 가장 강력한 무기로 ‘분노’를 사용한다. 폭력에 가까운 말들과 장면들이 오가는 화면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일종의 전이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 같다. 또한 사회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지나치게 자극적인 장면들을 포착하는 사회고발프로그램들의 영상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해결이 가진 문제점은 중독이다. 자극을 통한 문제의 해결은 더 큰 자극을 필요로 한다.

살기 어려운 시기에 웃음이 그 어려움을 위무해주는 코드로 나타난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자칫 분노로 일관되는 감정의 형태를 웃음이라는 긍정적인 형태로 변환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점점 떨어져만 가는 ‘눈물의 가치’이다. 삶에 있어서 웃음만큼 중요한 것이 ‘건강한 눈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단순한 최루성이나 구태의연한 설정으로 유발되는 눈물이 아닌, 이 시대의 감성코드와 공감할 수 있는 눈물이 어느 때보다 기다려지는 이유다.

중국식 블록버스터, ‘황후화’의 아쉬움

장예모라는 이름에서 아직까지도 ‘붉은 수수밭’, ‘국두’, ‘홍등’, ‘귀주이야기’ 등을 떠올리는 분들이라면 그의 최신작 ‘황후화’는 좀 당혹스러운 영화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리라는 배우가 똑같이 등장하지만 그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다. 먼저 제작비 450억 원이란 수치가 그렇다. 아무리 ‘영웅’, ‘연인’의 전작을 통해 이 거장의 행보가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고는 해도, 이 정도까지 블록버스터의 면모를 과시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화려한 장식이 깃든 복식들과 궁궐의 모습에서부터 단박에 시선을 잡아끈 영상의 색채와 스케일은, 천 여명에 이르는 대대적인 엑스트라들이 동원되어 마치 사람의 물결이 넘실대는 듯한 전투신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한다.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중국식 인해전술’이란 생각이 퍼뜩 드는 그 지점부터 장예모 같은 거장이 왜 이런 전술을 쓰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고개를 든다.

영화는 무언가를 알리는 다급한 ‘딱딱이(?)’ 소리와 함께 일어나 도열해 옷을 차려입는 수백 명의 궁녀들에서부터 시작한다. 화면의 색채는 붉은 빛이 감도는 노란 황금빛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 틈입하는 인서어트에서 일단의 군대가 말을 타고 달려가는 장면이 끼어든다. 그 화면의 색채는 푸른 빛이 돌면서 저 황금빛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다시 화면이 바뀌면 황금장식을 하는 황후(공리 분)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이 황금빛 장면은 다시 푸른 빛의 군대 장면과 교차된다. 이 집약된 장면들은 장차 황제(주윤발 분)의 군대와 황후의 군대 사이에서 벌어질 색채의 전쟁을 예감케 한다. 그리고 미로처럼 폐쇄된 궁궐을, 굳은 얼굴로 다급하게 걸어가는 황후의 장면이 이어지면서 캐릭터의 내적 갈등과 공간이 묘한 조화를 만들어낸다. 장예모가 아니면 쉽지 않았을 이 작다면 작은 가족의 치정사가 궁궐이라는 거대한 몸체와 합체되는 순간이다.

영화의 내용은 복잡해도 그것은 한 가족의 틀을 넘어서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 거대한 이야기의 메인 스토리를 엮어가는 인물이 황제, 황후, 세 왕자, 황실 주치의와 그 아내 이렇게 총 일곱 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관계가 복잡해 보이는 건 세 왕자 중 첫째가 배가 다른 소생이며 이 왕자가 황후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야기는 황제와 황후 사이의 대립에서 비롯되어 불게되는 궁궐 내의 피 바람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거대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들 몇몇 인물의 권력투쟁이 수천 명의 피를 부르는 구조에 있다. “그저 화려했던 과거 중국 봉건문화가 얼마나 허위적인지를 알리고 싶었다”는 장예모 감독의 말을 빌린다면 이 거대한 치정극이 보여주는 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만큼 강한 설득력을 얻는다. 이 영화는 수천 명의 군대가 궁이라는 밀폐된 공간 속에서(평원이나 성이 아니다) 황제와 황후의 명령 하나로 전쟁을 벌이는 영화다. 그만큼 비현실적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스케일이 풍자와 비판의 선을 넘어선다. 사실 의도가 그 허위 고발에 있었다면 조금은 관객들이 그 거대한 장면 속으로 빠져들지 않고 생각하게 만들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심지어 현실을 꼬집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주었어야 했다. 그렇지만 엄청난 스케일의 화려함 속에서 비판의 칼날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쿠데타군과 진압군이 궁 안에서 벌이는 전투신에 가서는 색채와 색채의 부딪침 같은 영상미학이 느껴질 정도이다. 아름다운 피 바람이 화면 가득 채워지는 순간, 영화는 블록버스터를 향해 달려간다. 중국 내에서 민감하기 이를 데 없는 권위적인 가장이 만들어내는 비극적인 가족 코드를 가지고 관객들을 끌어 모은 영화는 블록버스터의 거대함 속에 비판의식을 매몰시킨다. 그리고 놀랍게도 결국 황제의 권위에 의해 모든 것이 진압되는 상황을 연출하며, 영화를 통해 현실의 모반을 꿈꾸던 관객들에게 오히려 경고의 메시지를 날린다.

영화가 갑자기 과잉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 애초의 목적이 흐려지는 이 마지막 순간에서이다. 그러자 인해전술의 목적은 메시지의 전달을 위한 것이 아닌 좀더 상업적인 목적에 가까워진다. 즉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 모으기 위한(극장에서 봐야 진짜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스케일) ‘헐리우드 블록버스트를 의식한 중국식 블록버스트’라는 마케팅적인 접근이 보이는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의 집단 매스게임을 보는 듯한 스펙터클 속에서 2008 베이징올림픽 총감독직을 맡은 장예모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일까.

그러나 역시 거장은 거장이다. 본인 스스로 “외국영화에 잠식되는 중국시장을 위해서라도 상업적인 목적으로 영화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래서 거기에 딱 걸맞는 거대한 스케일의 영화를 만들어냈지만, 그 속에서 자신만의 색채 미학, 영상 미학을 담아 넣는 건 거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단순한 치정극의 틀을 저 만다라의 무늬를 연상케 하는 테이블에 앉힘으로서 무한한 의미의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면모 역시 대단하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장예모의 스케일 작은 영화들이 보여준 커다란 영화(?)세계가 아쉬운 건 왜일까.

재미있는 드라마는 리메이크 아니면 표절(?)

작년 완성도 높은 ‘웰 메이드 드라마’를 꼽으라면 누구나 ‘연애시대’를 얘기하는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올 들어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하얀거탑’은 ‘전문직 드라마’로서의 ‘웰 메이드 드라마’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작품은 모두 그 원작을 일본에서 들여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연애시대’는 노자와 히사시의 일본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고, ‘하얀거탑’역시 야마자키 도 요코의 베스트셀러 소설이 원작이다.

일본에서 ‘하얀거탑(원제 白い巨塔)’은 이 소설로 1978년에 드라마화 되었고 2003년 다시 리메이크되었다. 게다가 다시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되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30여 년에 걸쳐 3번이나 드라마화된 셈이다. 원작의 힘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반증이며, 동시에 ‘좋은 원작은 시공을 뛰어넘어 사랑 받는다’는 보편적인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시장은 점점 글로벌화되고 리메이크는 하나의 세계적 조류가 된 상황에서 원작이 갖는 부가가치는 그만큼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아마 재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은 우리에게 장밋빛 미래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한류’는 어디에나 있었고 뭐든 한국인이 만들면 세계가 좋아할 거라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모든 걸 낙관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드라마의 수출은 뚝 끊긴지 오래고 국내에서 신드롬에 가까운 성공을 일궈낸 영화들은 거의 모두 해외에서 고배를 마셨다. 여기에 최근 국내 드라마들의 경향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더 어둡게만 보인다.

작금의 사극 붐은 그 자체의 재미에서 비롯된 부분이 있지만, 또한 사극 이외의 현대물들이 전혀 새로운 재미를 보여주지 못한 것에 대한 반사이익도 크다. 퓨전사극이라는 새로운 재미가 시도되는 동안, 현대물들은 여전히 과거 멜로와 스타를 적절히 버무리는 ‘한류의 공식’에만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치열한 창작의 소산물이라기보다는 기획물에 가까웠다. 당연히 문화소비자들은 외면했다. 최근의 일본 원작들이 대거 국내에서 리메이크 붐을 타고 있는 것은 이제 적당한 기획물로는 어렵다는 자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리메이크는 물론 베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창작이다. 제대로 된 해석과 토착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리메이크는 성공할 수 없다. 일본 원작을 영화화했으나 실패한  ‘사랑따윈 필요없어’와 성공한 ‘미녀는 괴로워’는 그 적절한 사례가 될 것이다. 리메이크는 이제 세계적인 조류이다. 좋은 리메이크는 오히려 그 원작을 수입해온 나라로 역수출도 가능해진다. 다만 그것이 탐탁잖게 보이는 것은 어려운 원작 생산보다 성공이 쉬워 보이는 리메이크에 올인하는 상황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로또식으로 너도나도 뛰어들어 만들어내는 리메이크는 자칫 문화계의 지반을 약화시킬 수 있다.

여기에 국내 순수 창작물로 만들어진 작품들에 대해 계속되는 표절 시비는 상황을 더 어둡게 보게 만든다. ‘외과의사 봉달희’의 ‘그레이 아나토미’에 대한 표절 논란은 여전히 진행중이며, ‘달자의 봄’ 역시 일본 드라마 ‘아네고’에 대한 표절 논란이 불거졌다. 인물 설정은 물론이고 드라마 소재까지 따왔다는 것. 이 정도 되면 뭔가 새롭고 재밌는 드라마는 ‘리메이크 아니면 표절’이란 말이 나올 법도 하다.

리메이크 붐과 일련의 표절시비는 드라마 제작자들이 앞선 문화소비자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문화소비자들은 인터넷이나 여러 경로를 통해 이제 일본드라마, 미국시즌드라마를 이미 섭렵하고 있다. 그러니 과거처럼 눈 가리고 아옹하는 식은 통하지 않는다. 또한 이런 상황이니 완성도 높은 드라마들에 익숙해진 그들이 어딘가 엉성해 보이는 우리네 드라마가 시시해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리메이크된 작품을 놓고 원작과 비교하는 게 자연스럽다는 건 그만큼 외국드라마의 저변이 넓다는 말도 된다.

이제 ‘국경 없는 컨텐츠 제작’이 하나의 조류로 자리 잡아가는 시대다. 일련의 합작영화들이 나오는 상황에 합작 드라마 역시 하나의 가능성으로 자리한다. 하지만 여기서 명심해야할 것은 ‘국경이 없다’는 말이 단지 ‘자유로운 제작 풍토’같은 장밋빛 뉘앙스의 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신 그것은 그만큼 ‘전장의 구분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 저기 얽히고 설키면서 앞으로는 더더욱 그 국경이 희미해질 상황이기에 원작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대중문화 상품의 기반이 되어줄 소설이나 연극, 만화 같은 기초분야에 대한 발굴과 지원이 절실한 시점이다. 작년 우리 원작의 가능성을 보여준 연극 ‘이(爾)’ 원작의 ‘왕의 남자’, 허영만 만화 원작 ‘타짜’의 성공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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