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초부터 의학드라마의 새 장을 열고 있는 ‘하얀거탑’. 그 참신함의 진원지는 ‘멜로 없는 전문직 드라마’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멜로가 있는’ ‘외과의사 봉달희’에 대한 시선은 방영 전부터 곱지 못했다. 또다시 의사에는 관심 없고 사랑타령에만 관심있는 ‘무늬만 전문직 드라마’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첫 선을 보인 ‘외과의사 봉달희’에서만큼은 그런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사실 많은 기사들은 두 의학드라마를 비교하면서, 그 초점을 ‘멜로의 존재여부’에 두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과거 소위 ‘전문직 드라마’라는 포장을 한 드라마들이 영 시원찮았다는 반증이지만, 그렇다고 과연 ‘멜로가 있고 없는’ 것으로 진짜 전문직 드라마와 그렇지 않은 걸 예단할 수 있을까. 무조건 멜로가 있다고 해서 ‘전문직 드라마’가 아니라고 판단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전문직 드라마’라 칭할 수 있을까. 요는 그 멜로의 비중이 어떻게 되느냐의 문제이다. 전혀 초점이 다른 이 드라마들을 멜로를 기준으로 단순비교하는 것은 괜한 오해만 낳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려했던 ‘외과의사 봉달희’의 포장이 벗겨지자, ‘하얀거탑’이 과연 의학드라마였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아직까지 한번도 제대로 된 ‘의학드라마’를 본 적이 없으니, 남녀구도 없이 욕망을 향해 무한질주하는 이 매력적인 ‘하얀거탑’에 우리는 너무 쉽게 ‘의학드라마’란 호칭을 주었던 건 아닐까. 이제사 생각해보면 ‘하얀거탑’은 병원을 배경으로 하고, 의사가 나오지만 ‘의학드라마’라는 호칭보다는 ‘정치드라마’가 더 적절한 것 같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하얀거탑’에 ‘의학드라마’라는 호칭을 부여하면서 ‘외과의사 봉달희’가 상대적으로 폄하되고 있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의사가 등장하는 드라마로서 ‘하얀거탑’만큼 시청자들의 숨을 턱턱 막게 한 드라마는 별로 없다. 그만큼 리얼리티가 살아있고 구성과 연출도 탄탄하며 연기자들의 연기 또한 흠잡을 데 없는 드라마다. 하지만 그 본질을 ‘의학드라마’로 보기엔 모자란 부분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병원 사람들의 이야기’다. 환자는 병에 고통받는 사람이고 의사는 그 사람을 치유하는 사람이며 이들이 함께 울고 웃는 곳이 병원이다. 즉 ‘의학드라마’라면 기본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이야기 속에 담겨 있어야 한다. 아무리 검증된 수술 장면이 리얼하고 의사들 사이의 힘 대결이 볼만해도 ‘하얀거탑’에는 바로 이 ‘사람 살리는 의사’이야기가 부족하다. 극중 캐릭터에서 최도영(이선균 분)이 그런 이야기를 분명 하는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드라마의 거의 90% 이상의 힘은 정치에 쏠려 있다. 장준혁(김명민 분)이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은 ‘생명을 구한다’는 의미보다는 ‘정치적인 입지’를 갖느냐 마느냐의 의미가 강하다. 마치 최도영이란 캐릭터는 ‘이 드라마가 의학드라마’라는 호칭을 붙이기 위한 마지막 양심처럼 보인다.

‘하얀거탑’엔 없고 ‘외과의사 봉달희’엔 있는 것은 바로 환자다. 병에 고통받는 환자의 이야기들이 그걸 고치려는 의사 이야기와 맞물렸을 때, 비로소 ‘의학드라마’라 칭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겨우 4회가 지난 ‘하얀거탑’과 첫 회를 끝낸 ‘외과의사 봉달희’를 두고 이처럼 단정하는 것은 무리한 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얀거탑’에서 최도영이란 캐릭터가 ‘의학드라마’의 가능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이고, ‘외과의사 봉달희’에 형성되는 멜로 라인이 ‘무늬만 의학드라마’의 불안감으로 남기 때문이다. 이 두 드라마는 언제 어떻게 변신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이 전혀 다른 성질의 두 드라마에 대한 단순 비교들로 인해 정작 볼 것을 못 보는 상황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모처럼 새로운 시도들을 하고 있는 두 드라마들이 제각기 가진 서로 다른 재미들을 편견 없이 만끽하기를.

주말드라마를 보면 연기자가 보인다

최근 홀연히 나타나 주말 드라마의 판도를 바꿔놓은 연기자가 있다. 바로 사극의 제왕, 유동근. 그는 갖은 비판과 혹 허우적대던 ‘연개소문’을 단박에 기대감으로 채웠다. 그의 출연과 함께 ‘연개소문’이란 사극은 지금부터 새로 시작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심지어는 지금까지의 ‘연개소문’이 걸어온 길은 그저 사족에 지나지 않았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렇게도 어려웠던 시청률 25%를 손쉽게 넘기면서 수위를 지켜오던 경쟁사극 ‘대조영’을 제쳐버렸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단지 유동근이라는 대배우만의 힘이었을까. 여기에는 물고 물리면서 드라마의 성패를 좌우하는 연기자들의 부침이 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가장 불리한 시간대를 지킨 ‘대조영’의 연기자들
주말드라마 삼파전에서 가장 불리한 시간대를 갖고 있는 것이 ‘대조영’이다. 9시부터 시작하는 ‘연개소문’과 10시부터 시작하는 MBC 주말극 사이인 9시30분대에 끼어있어, 양 드라마의 공격을 받는 형국이 되기 때문. 만일 ‘연개소문’의 청년시절이 좀더 존재감 있게 흘러왔다면 ‘대조영’은 맥없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나 청년시절의 ‘연개소문’은 존재감이 없었다. 그나마 그 드라마의 힘을 이어준 것은 김갑수라는 괴물 배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특유의 광기 어린 연기로 수양제역을 소화함으로써 연개소문의 공백을 채워 넣었다.

‘연개소문’과 함께 한창 ‘환상의 커플’이 상종가를 치며 앞뒤로 압박해왔을 때 ‘대조영’을 지켜낸 인물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대조영’의 연개소문 역을 한 김진태였다. 호랑이 같은 눈빛을 부라리며 안면근육을 떨며 호통을 치는 모습에 빨려들지 않을 시청자가 없었다. 때론 자상한 아버지처럼, 때론 광기 어린 제왕처럼 변신의 변신을 보여주는 김진태 앞에 양만춘 역할의 임동진이 가세하자 그 힘은 하늘을 찔렀다. 심지어 연개소문이 죽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이 두 카리스마의 충돌이 빚어내는 숨막히는 연기대결이 펼쳐졌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드라마는 제목이 ‘연개소문’이나 ‘양만춘’이 아닌 ‘대조영’이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인공 대조영이 차츰 앞으로 나오고 그들은 역사 속에 사라져야할 인물들이었다. 연개소문이 죽으면서 김진태가 사라진 자리를 양만춘 역의 임동진이 채워 넣었으나 그마저 사부구(정호근 분)가 제거해버리자 ‘대조영’의 드라마적인 힘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 빈 자리를 온전히 대조영 역할의 최수종이 채워놓기도 전에 유동근이 출연한 것이다.

진짜 ‘연개소문’을 만드는 연기자들
결과적으로 ‘대조영’에서 만들어놓은 수많은 인물들에 대한 기대감은 새로운 ‘연개소문’을 도와준 격이 되었다. ‘연개소문’이 새롭게 주말드라마의 강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유동근 이외에도 새롭게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이 선 굵은 카리스마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의 책사 역할로 돌아온 우리의 영원한 시라소니 조상구, ‘야인시대’의 나미코 역할은 물론이고 ‘대장금’에서 장금과 열띤 경쟁을 벌였던 이세은, ‘태조 왕건’에서 견훤 역할을 했던 서인석 등이 가세하자 유동근의 절대 카리스마와 조화를 이루면서 기대감을 만들었던 것. 여기에 ‘대조영’에서 익숙해진 ‘검모잠(안승훈 분)’같은 인물의 출연은 재미를 더해주었다.

따라서 이것은 지금까지의 ‘연개소문’과는 다른 카리스마 넘치는 드라마가 연출될 공산이 크다. 적어도 연기자들만큼은 확실한 힘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걱정되는 것은 마치 역사를 가르치는 듯한, 설명조의 지지부진한 전개로 비판을 받아온 이환경 작가가 얼마나 속도감 있게 이들 연기자들의 맥을 살리면서 긴박한 드라마를 엮어나갈 것인가이다. 아무리 훌륭한 연기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캐릭터의 설정이나 스토리 진행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지금 ‘연개소문’은 그 연기자만으로 충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얀거탑’의 노련한 연기자들
이 경쟁에 가세하는 것이 바로 ‘하얀거탑’의 노련한 연기자들이다. 상황으로 보면 ‘대조영’을 진퇴양난의 입장에 빠뜨린 것은 바로 이들이다. 이름만 들어도 존재감이 팍팍 느껴지는 외과과장 이주완 역할의 이정길. 그는 특유의 카리스마는 물론이고, 상황에 따라 굴욕적인 면모 역시 거침없이 보여주는 호연에 힘입어 네티즌들에게 ‘인쇄정길’, ‘굴욕정길’로 불릴 정도다. 의국실로 프린트되는 외과과장후보 이력서를 가로채기 위해 달리는 모습과 노민국의 호텔방 앞에서 무릎을 꿇는 장면으로 이런 호칭이 붙여졌다.

이정길과 손을 잡았다가 또 뒤통수를 때리는 부원장 우용길 역할의 김창완은 특유의 능구렁이 연기로 호평을 받고 있다. 그의 연기는 뒤통수를 치면서도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것. 그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그 놀라운 연기변신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있다. 물론 주인공 장준혁 역할의 김명민은 특유의 야누스적인 면모를 과시하며 악마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정이 느껴지는 쉽지 않은 인물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에 저 영화 ‘괴물’에서 주목받은 변희봉(오경환 역), ‘영웅시대’에서 천태산의 차남 역할로 나왔던 정한용(민충식 역), ‘제5공화국’에서 허문도 역할로 열연했으며 각종 사극에서 감초 역할을 확실히 해준 이희도(유필상 역) 역시 이 드라마의 힘을 만들어주는 연기자들이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이들 얼굴
요즘 주말드라마는 유독 클로즈샷이 많다. 그것도 극단적인 클로즈샷이다. 미세하게 떨리는 근육까지 보일 정도로 화면의 거의 2/3를 채우는 이들 연기자들의 얼굴. 이러한 장면들은 드라마의 성패에 얼마나 연기자들의 존재감이 중요한 것인가를 말해준다. 드라마 속에 확실한 존재감을 주는 연기자가 있다면 그 드라마는 그 힘을 기반으로 어떻게든 흘러간다. 중요한 것은 이들 존재감을 주는 연기자가 주연이 아닐 경우, 이들 연기자들 사이에서 그 힘에 눌린다면 드라마의 중심 축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유동근이라는 확실한 중심축이 선 ‘연개소문’은 일단 기선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하얀거탑’ 역시 차츰 주인공을 중심으로 힘을 모으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미 고정층을 확보한 ‘연개소문’의 아성을 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대조영’. 사실 지금의 주말드라마 판도를 가장 도와준 격이 되었지만, 가장 곤란한 시간대에 자리잡아 양측에 공격을 받는데다 아직까지 대조영으로서의 최수종이 확실히 자리매김을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이 힘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분명한 것은 그 힘을 만들어 드라마를 성공으로 웃게도 하고 실패로 울게도 만드는 이들이 연기자들이라는 것이다.

선악 대결을 버리자 살아난 인물들

‘하얀거탑’이 여타의 드라마와 다른 점. 전형적 캐릭터가 거의 없고, 대신 입체적인 캐릭터들이 서로 이합집산을 거듭한. 어쩌면 ‘정치드라마’가 갖는 대결구도로서 당연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단 2주), 이렇게 변화무쌍한 캐릭터를 본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 중심에는 장준혁 역의 김명민, 외과과장 이주완 역의 이정길, 그리고 부원장 우용길 역의 김창완이 있다.

선악 대결이 아닌 권력 다툼
먼저 전제해야할 것. 이 드라마는 캐릭터의 선악 대결이 그다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 만일 선악으로 나누어지는 캐릭터들이 등장했다면 그 앞을 내다볼 수 있는 뻔한 진행에 지금 같은 긴장감은 떨어졌을 터. 대신 드라마는 권력을 두고 치열하게 벌어지는 정치적인 대결, 갈등을 핵심에 두고 선악의 차원을 뛰어넘는다. 이들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두고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지만 이건 전쟁이기에 무조건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한다.

그리고 결국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이전투구의 권력다툼 속으로 뛰어든다. 이렇게 되자 도대체 누가 이 게임에서 승리할 것인지 종을 잡을 수 없게 된다. 주인공인 장준혁조차 살아남기 위해 음모를 꾸밀 정도의 캐릭터이기에 우리는 이 권력다툼 속에서 장준혁이 질 수도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대결구도, 그것이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긴장감을 주는 이 드라마의 핵심요소이다.

장준혁 vs 이주완-우용길 → 장준혁-우용길 vs 이주완
드라마가 막 시작했을 때, 우리는 외과과장 이주완과 그가 키운 장준혁의 관계에서 어떤 미세한 틈을 발견한다. 그것은 청출어람 잘 나가는 장준혁에 대해, 이제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버린 이주완의 질시와 굴욕감에서부터 비롯된다. 이 미세한 틈은 조금씩 벌어지면서 갈등을 만들고 여기에 부원장 우용길이 등장하면서 드라마는 복잡한 구도변화를 겪게된다. 핵심적인 인물, 부원장 우용길이 어느 쪽에 붙느냐가 이 첫 번째 대결구도의 관건이 된 것이다.

장준혁에 대한 감정으로 이주완과 손을 잡았던 우용길은 장인인 민충식(정한용 분)이 끌어들인 의사회 회장 유필상(이희도 분)에 의해 마음을 돌린다. 그만큼 우용길-이주완 콤비의 연결고리가 아주 약했다는 것. 단지 감정의 공감 정도 차원에서 이루어졌던 공조체계는 실질적인 이득이 끼어 들자 쉽게 무너진다. 장준혁-우용길 라인이 형성되면서 이주완은 두 번째 싸움에서 지게된다. 그러나 이런 구도가 얼마나 진행될 지는 미지수. 이주완이 데려온 노민국(차인표 분)과 투표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오경환(변희봉 분) 같은 인물들이 차차 이 대결구도에 어떻게 라인을 형성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입체적인 캐릭터가 주는 매력
이처럼 짧은 시간 동안 욕망을 향해 숨가쁘게 변해 가는 캐릭터들의 모습은 시청자들을 즐겁게 한다. 그것은 그동안 보았던 착한 캐릭터는 계속 착하고, 악한 캐릭터는 계속 악한 전형적 구도의 틀을 깨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입체적인 캐릭터가 주는 힘은 바로 그 리얼함에 있다. 실제의 인물들은 우리가 흔히 드라마에서 접하듯 한 가지 단면만을 갖고 있지 않다. 어떤 면에서는 실로 사악하다고 할 정도로 악한 면모를 보이다가도 또 어떤 면에서는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천사 같은 면모를 동시에 보여준다. 때론 비굴해지고 때론 한없이 용감해진다. 기존 트렌디 드라마들이 갖고 있는 말 그대로 트렌디한 캐릭터는 이제 전혀 리얼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하얀거탑’은 말해주는 것 같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이 입체적인 캐릭터를 세 배우, 김명민, 이정길, 김창완의 발군의 연기력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 먼저 김명민과 이정길은 캐스팅 자체부터 적절하게 느껴지는데 그것은 이 두 배우가 갖고 있는 연기의 선이 이 야누스적인 캐릭터에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나라를 위하는 충심의 이순신에 개인적인 야망 등을 잘 버무린 김명민은 이미지로도 연기력으로도 이미 검증된 바가 있다. 물론 따뜻한 아버지 역할(프라하의 연인에서 대통령 역할 같은)에서부터 카리스마 넘치는 을지문덕(연개소문에서) 역할까지 무엇이든 자기 것으로 소화해내는 이정길이라는 배우는 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 김창완이라는 조커는 드라마의 맛을 몇 배 높여놓았다. 김창완이 지금껏 맡아왔던 푸근한 인상의 아저씨 역할에서 180도 변신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이 가진 느물느물한 연기가 역할과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드라마는 선악 대결구도 같은 단순한 구조로는 시청자들에게 리얼함을 선사하기가 어려워졌다. 작년 내내 트렌디한 멜로드라마가 각광받지 못한 이유는 멜로드라마 자체의 매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그 인물과 구도의 리얼함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별한 악역 없이도 드라마적 긴장감을 결코 놓치지 않았던 ‘연애시대’가 리얼함을 주었던 이유 역시 그 입체적인 인물들 때문이었다. ‘하얀거탑’의 매력적인 야누스 캐릭터들을 기화로 앞으로는 드라마 속 캐릭터의 변화가 예상된다.

이찬에 이은 황수정 논란이 말해주는 것

SBS 금요드라마, ‘소금인형’의 첫 회가 끝난 시각. 게시판의 풍경은 여타의 드라마 게시판과는 판이한 양상을 보였다. 내용이나 연기력과 같은 드라마 내적인 이야기는 온데간데없고 황수정의 드라마 복귀에 대한 반대 여론만 가득 찬 것이다.

마약복용 혐의로 구속되었던 연예인들은 황수정 이외에도 많다. 그럼에도 황수정의 복귀에 논란이 가중되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 청소년들에게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공인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아무런 공식적인 반성 없이 드라마에 복귀했다는 것. 이로써 범죄를 가벼이 보게 하는 시각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또한 그 과거의 잘못된 이미지가 시청자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남아있어 지금 복귀는 시기상조라는 점이다.

네티즌들의 도마 위에 오른 도덕성
그런데 정작 더 궁금한 것은 왜 이렇게 반대하는 캐스팅을 방송사가 굳이 강행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 확실한 내부사정은 알 수 없겠지만 그것은 아마도 논란보다는 시청률이 우선인 요즘, 그만큼 둔감해진 도덕성 때문이 아닐까. ‘SBS 열린TV 시청자 세상’의 시청자 게시판은 이러한 둔감한 도덕성에 대한 어떤 단초를 제공해준다. 게시판을 들여다보면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난 비판의 글들이 눈에 띈다. 그 비판은 드라마의 비판을 넘어서서 점차 방송사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비약하고 있다.

그것은 최근 들어 SBS 드라마에 생긴 잇따른 악재에서 비롯된다. 지난 9일 종영된 월화 드라마, ‘눈꽃’은 갑작스런 이찬-이민영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단지 그들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SBS측이 여기에 대해 아무런 논평을 하지 않은데다 이찬의 문제는 SBS PD인 그의 아버지까지 거론되면서 이들 부자에 대해서도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은 점을 들어 방송사의 도덕성이 네티즌들의 도마 위에 올랐던 것이다.

실체를 드러내는 폭력성
여기서 조금씩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은 ‘폭력’에 대한 네티즌들의 혐오이다. sdi1004g의 아이디를 쓰는 한 네티즌은 ‘긴급출동 SOS24’에 빗댄 비판에서 “정작 사회의 폭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솔루션을 제공한다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방송사에서 이 폭력문제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것을 보며 많은 실망을 느꼈다”고 밝혔다. 이 밖에도 시청자 게시판에는 유난히 드라마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soonie0301라는 아이디를 쓰는 네티즌은 종영한 ‘연인’에 대해서 “칼로 찌르고 폭력을 쓰는” 장면들이 “15세 이상이 보기엔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또한 keh2258님은 이 드라마의 일부 낯뜨거운 장면들이 “방학중 아이들에게 부적절하다” 는 의견을 남겼다.

이러한 자극적인 내용은 ‘소금인형’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1회의 그럭저럭 가족적인 분위기는 2회에 이르자 빚쟁이들이 회사를 난입해 기물을 파손하고 고함을 지르는 장면으로 돌변하더니 급기야 집까지 들어와 난동을 피우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놀라운 것은 그 폭력의 현장에 아이가 있었다는 점. 긴박감과 절실함을 보여줘 차소영(황수정 분)이 동침을 선택하는 근거를 제공하겠다는 의도가 보이지만 너무 자극적으로 흐른 건 아닌가 하는 혐의가 짙다.

황수정의 불리한 선택
황수정의 입장에서 보면 이 드라마를 통해 변화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만이 앞으로 연기자의 길을 계속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첫째는 드라마 상의 캐릭터가 과거의 이미지와는 달라야 한다는 것. 하지만 이 첫 번째 요건은 안타깝게도 1,2회 방송을 통해서는 만족되지 못한 것 같다. 시청자 게시판에는 사업에 망하고 몸까지 다쳐 누운 남편의 수술비를 위해 자신을 짝사랑했던 남자와의 동침을 한다는 이 불륜의 코드에서 과거 황수정의 어두운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 같다.

두 번째 조건은 바로 연기력. 혹자들은 황수정이 과거 드라마 상의 청순 이미지를 벗을 것이라 예견했지만 그다지 과거의 이미지와 달라진 점을 찾기는 어려웠다. 도대체 황수정은 왜 이렇게 어려운 길을 걷기로 작정한 것일까. 드라마 전개상 초반부라 그럴 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이 선택은 황수정에게는 불리하게만 보인다.

선의의 피해를 보는 연기자들
그런데 이렇게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연기자들보다 더 피해를 보는 이들이 있다. 바로 함께 드라마에 출연하는 연기자들이다. 이찬-이민영 사건이 불거져 나왔을 때, 시청자들은 이찬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화면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또한 ‘눈꽃’ 자체의 이미지가 하락하면서 그 피해는 함께 출연하는 김희애와 고아라 같은 연기자들에게도 고스란히 돌아갔다.

이것은 단 2회만 끝난 상황인 ‘소금인형’에서 벌써부터 불거져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함께 출연하는 연기자인 김영호(박영우 역), 김유석(강지석 역)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의견들이 게시판에 오르고 있다. 채널을 돌리자니 그 연기자들이 눈에 밟힌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드라마는 최근 시청률 확보를 위해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는 ‘논란드라마’의 길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여타의 논란드라마와 강도 자체가 다른 것은 내용뿐만 아니라, 출연자에 대한 논란까지 가중되고 있다는 것. ‘안티팬도 팬’이라는 말이 있지만 또한 ‘안보기 운동’을 하자는 네티즌도 결국은 봤기 때문에 그런 얘기가 나온다는 게 사실이지만, 이들 논란드라마가 가져올 수 있는 것은(그것이 가능하다면) 앙상한 시청률뿐이다. 그러나 드라마가 방송사의 이미지에 가장 큰 역할을 한다는 점을 두고보면 이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분명 마이너스로 작용하게 될 것이 뻔하다. 황수정 캐스팅에 대한 네티즌들의 비판은 최근 들어 시청률지상주의 하에 수위를 넘고 있는 방송사의 도덕불감증을 꼬집는 측면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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