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시세끼> 밥 한 끼 먹기도 불편한 가장의 무게

 

가장의 무게감은 얼마나 될까. tvN <삼시세끼>에서 유해진이 보여주고 있는 건 바로 그 가장이라는 존재의 위치다. 차승원이 안 사람처럼 살뜰하게 살림을 챙기고, 갖가지 음식 솜씨를 뽐내면 뽐낼수록 유해진이라는 가장의 어깨는 더 무거워진다. 너무 잘 챙겨먹는 차승원에게 당황한 나영석 PD가 결국은 프로그램에 개입해 어묵탕을 미션으로 제안하자 당혹스러워진 건 유해진이었다. 어묵을 만들려면 그만큼 물고기를 잡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삼시세끼(사진출처:tvN)'

하지만 어디 낚시라는 것이 제 맘대로 되 주는 것인가. 마침 날씨도 너무 안 좋아 입질 한 번 느껴보지 못하고 있는 유해진에게 차승원은 따뜻한 죽을 새참으로 만들어 갖고 온다. 그러니 이 맛 좋은 죽맛이 그에게는 죽을 맛이다. 고스란히 물고기를 잡아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유해진이 통발로 잡은 물고기를 바로 바로 차승원에게 갖다 주지 않고 자기가 만든 피쉬 뱅크(fish bank)에 챙겨둔 것도 그 부담감 때문이었다. 꼭 필요할 때 꺼내 쓰려고 모아둔 적금 통장 같은 그 피쉬 뱅크를 깨 어묵탕을 위한 물고기를 꺼내며 유해진은 허허로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초라한 물고기 벌이를 갖고 돌아온 유해진이 따뜻한 아랫목에 허리 한 번 펴지 못하던 것도 그 미안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생각하는 소크라테스처럼 생각이 많았던 유해진도 차승원이 만들어주는 놀라운 어묵 앞에서는 배부른 돼지(?)로 돌아가 마음껏 음식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미안함과 배부름이 주는 행복감의 교차. 실로 유해진이 스스로를 돼크라테스라고 한 건 적절한 비유였다.

 

<삼시세끼>는 그저 하루 세끼 챙겨먹는 것을 거의 유일한 미션으로 삼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바로 그런 소소함 때문에 이 예능 프로그램이 서민들에게 더더욱 특별하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니고 그저 세끼 챙겨먹는 걸 바라는 모습. 그건 바로 우리네 서민들이 바라는 소박한 삶이자 행복이 아닌가.

 

하루 종일 일터에서 시달려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가장들에게 집에서 누군가 정성을 다해 챙겨주는 따뜻한 된장찌개 하나는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더 큰 위로를 주지 않던가. 그러니 없는 살림에도 차승원처럼 척척 요리를 내놓는 가족의 존재는 그 자체로 힐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소박한 삶의 행복조차 누리기 쉽지 않은 게 지금의 현실이다.

 

벌이는 점점 시원찮고 물가는 끝없이 오르는 현실 앞에서 이 땅의 유해진 같은 가장들은 초라한 벌이 때문에 무언가 미래를 위해 준비해두었던 적금마저 깰 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을 제 맘처럼 챙기는 손호준 같은 자식이나 잘 했다고 등을 두드려주는 차승원 같은 가족이 있어 다음 날이면 또 툭툭 털고 일터로 나가는 것일 게다.

 

그렇게 의기소침해져 돌아온 유해진을 다시 채워주고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건 역시 대단할 것 없는 밥 한 끼의 힘이다. 이것은 아마도 <삼시세끼>라는 프로그램이 가진 폭발력의 원천일 것이다. 이상하게 보고 나면 힐링되는 그 느낌. 벌이가 시원찮아 축 처진 유해진의 어깨를 다독이는 밥 한 끼의 힘. <삼시세끼>는 이 땅의 무수한 유해진 같은 가장들을 위한 헌사다.

 

욕먹어도 보면 그만? 임성한 월드의 참상

 

이제 임성한 월드는 더 이상 욕하는 것도 지겹다는 대중들의 반응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항간에는 아예 임성한 월드에 대한 기사가 나오는 것조차 불편해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비판 기사는 사실상 임성환 월드가 먹고 자라나는 자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압구정백야(사진출처:MBC)'

임성한 월드는 논란을 먹고 자란다. 도무지 나올 수 없는 칭찬은 당연히 논란으로 이어지고, 당연한 비판 역시 그 논란을 부추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이것이 임성한 월드에 일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이 생기는 건 그래서다. 무관심이 답일 수 있지만 그래도 최근 들어 조금 오른 시청률 때문에 자꾸만 임성한 월드에 대한 재조명 기사들까지 나오는 건 이해하기가 어렵다.

 

시청률은 작정하면 나올 수밖에 없다. 가장 쉬운 것은 룰을 깨는 것이다. 드라마라는 창작의 공간에도 정해진 룰이라는 게 있다. 그러니 이걸 깨버리면 당연히 시끄러워진다. 그리고 그 시끄러움은 임성한 월드가 목적하는 것이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 여기서 함정은 방점이 욕하면서에 찍히는 게 아니라 보는에 찍힌다는 점이다.

 

이렇게 찍힌 방점은 본말을 전도시킨다. 보게 하기 위해 욕먹기를 자초하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등장인물(그것도 주인공급)의 어이없는 죽음은 욕먹기가장 좋은 수단이다. 물론 거기에는 작가의 욕망이 들어 있다. 이 세계에는 작가가 신이다. 그는 인물과 인물을 이어붙이는 것에서 장애물이 있다면 거침없이 제거해낸다. 그 세계가 작가만의 것이 아니라 이미 시청자들의 것이기도 하지만, 그런데서 나오는 잡음들은 오히려 을 통한 시청률로 이어진다.

 

죽었던 인물이 다시 유령이나 환시로 재등장하는 건 그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인물에 대한 대중들의 뜨거운 논란의 불씨를 끄기 보다는 오히려 계속 끌고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여 섬뜩해진다. 마치 길거리에서 드잡이 싸움이 벌어지면 그 내용과 상관없이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처럼 임성한 월드는 무관심이나 비판조차도 가만두지 않고 오히려 키워버린다.

 

당연히 작품을 일관적으로 통과하는 메시지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그 지극히 이상한 임성한 월드가 마치 보편적인 세계인 양 매일 같이 대중들에게 노출되는 끔찍한 악영향만이 거기에는 존재한다. 현실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놀라운 장면들이 주는 황당함과 어이없음은 그 강도가 너무 강해서 비판조차 허탈하게 만든다. 그러니 작품성 자체는 일찌감치 포기한 채 황당한 웃음을 지으며 자극만을 쳐다보는 지경에 이를 수밖에 없다. 자조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시청패턴이다.

 

이 황당한 세계가 매일처럼 대중들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여진다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죽어나가는 등장인물을 의심 없이 바라보다보면 마치 사람을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 당연한 듯한 세계관을 내면화하게 될 수도 있다. 룰 자체는 아랑곳없이 제멋대로 방향을 틀어버리는 이야기에 익숙해지다 보면 마치 그런 임기웅변식의 삶이 우리가 지향해도 무방한 삶의 본질이라는 것에 승복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임성한 월드보다 더 큰 문제는 이 세계를 매일 매일 보여주는 방송사의 윤리 부재의 현실이다. 시청률만 되면 뭐든 받아들인다는 이런 식의 태도는 모든 가치들을 경제적인 논리 아래 굴복시킨다. 일부 기자들을 비판하는 기레기라는 말을 끌어와 작레기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을 방송사는 왜 좌시하고만 있는 걸까.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를 디즈니랜드에 비유해 설명하며, “디즈니랜드는 미국 자체가 거대한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함이라고 말한 바 있다. 임성한 월드가 갖는 정치적 위험성은 바로 이 점에 있다. 이 극단의 막장의 세계는 어떤 면에서는 지독한 현실의 막장을 은폐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것은 <펀치> 같은 작품들이 오히려 막장의 현실들을 환기시키는 것과는 정반대의 흐름이다.

 

임성한 월드는 그래서 세상의 모든 막장에 쏟아지는 욕들을 마치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며 성장하는 괴물처럼 보인다. 이 룰도 없고 삶과 죽음의 예의도 없는 세상을 들여다보면서 혀를 차고 있는 순간, 저 바깥세상에서 돌아가는 막장의 현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마비된다. 과연 욕먹어도 그만일까. 이런 세계를 방치하는 것은.

 

차승원, 유해진, 이서진, 나영석의 중년남자들

 

 

'삼시세끼(사진출처:tvN)'

나영석 PD는 이제 올해로 마흔이 되지만 그가 줄곧 프로그램을 함께 해온 남자들은 대부분 40대였다. tvN <삼시세끼> 강원도편의 이서진이 그렇고, 이번 스핀오프로 열풍을 만들고 있는 어촌편의 차승원과 유해진이 그렇다. 나영석 PD는 또 <꽃보다> 시리즈 중에서 가장 마음 편하게 찍었던 것이 <꽃보다 청춘>이라고 했다. 페루에서 찍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윤상, 유희열, 이적이 모두 40대다. 도대체 왜 나영석 PD는 왜 40대 남자들을 이토록 선호하는 것이고 또 그들에게서는 어떤 매력이 나오는 것일까.

 

이서진, 차도남과 그린 라이프 사이

tvN <삼시세끼> 강원도편에서 단연 주목받은 인물은 이서진이다. 나영석 PD와 서로 툭탁대며 갈등을 주로 보여주는 관계지만 그러면서도 해야 할 건 다 하는 인물이다. 나영석 PD<삼시세끼>가 잘된 이유로 서슴없이 이서진을 꼽기도 했다. 투덜대면서도 할 일은 하는 이 이중적인 모습은 <삼시세끼>처럼 어찌 보면 아무런 미션이나 도전이 없어 밋밋할 수 있는 예능 프로그램을 흥미진진하게 만든 요인이기도 하다. 나영석 PD와 각을 세우는 모습은 그 자체로 볼거리다. 긴장감과 갈등요소를 자체적으로 만들어내면서도 어느 순간이 되면 이서진은 또 그 시골생활의 불편함을 즐기는 모습 또한 보여준다.

 

많은 이들이 이서진의 이 양면적인 반응에 공감하는 것은 그것이 도시의 삶과 시골의 삶에 대한 도시인들의 양가적 입장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시골 삶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아니라 난 이런 생활 진짜 싫어라고 말하는 이서진의 이야기가 더 진정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불편한 삶에 대한 투덜댐이다. 하지만 그렇게 불편한 시골 삶이 모두 나쁘기만 한건 아니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나면 보이는 새로운 것들이 있다. 도시에서 보지 못했던 별빛과 듣지 못했던 빗소리, 한 끼 식사가 주는 소중함, 찾아주는 친구에 대한 설렘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도시의 치열한 일상을 살아가지만 거기서 벗어나 조금은 나만의 내밀한 공간을 원하는 건 지금의 중년들이 꿈꾸는 삶이다. 개발시대의 아버지들을 보며 자라난 이들은 일에만 몰두한 삶이 어떤 결과로 돌아오는지를 목도하며 살아왔다. 그러니 이들은 일과 함께 동시에 휴식과 자신만의 놀이를 원한다. 이서진은 그런 마음으로 도시를 떠났으나 막상 겪으면 불편함이 먼저 다가오고 그러면서도 또한 그 시골 삶이 주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중년들의 정서를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다.

 

차승원과 유해진, 이 브로맨스 혹은 가상부부

어촌편이 그려낸 중년들, 차승원과 유해진은 이서진과는 그 결이 약간 다르다. 이서진이 시골 삶이 낯선 투덜이 도시인이었다면, 차승원과 유해진은 이런 삶 자체도 즐길 줄 아는 이른바 선수들이다. 나영석 PD 본인도 놀랐을 정도라는 차승원의 요리 실력은 만재도에 중국집을 차려도 되겠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로 현란했다. 갖가지 김치 담그기는 기본이고 물고기 회를 뜨거나 탕수요리를 해먹거나 해물짬봉에 심지어 어묵탕까지 시도하는 차승원은 만재도의 살풍경한 눈보라까지 녹여내며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차승원의 옆에서 바깥양반으로 유유자적하며 낚시부자를 꿈꾸는 유해진은 인생을 진정으로 즐길 줄 아는 여유를 보여준다. 그가 농담처럼 말한 돼크라테스(배부른 돼지+생각하는 소크라테스)’는 그를 잘 표현해주는 말이다. 그는 삶을 즐길 줄 알면서도 동시에 사색할 줄 아는 사람이다. 차승원이 마치 소크라테스의 안사람처럼 바가지를 긁어대면 유해진은 그걸 받아치기보다는 그냥 흘려보내며 허허함으로써 오히려 이 관계의 훈훈함을 만들어낸다. 차승원의 요리에 모든 게 녹아내리는 그 흐뭇한 웃음은 이 두 사람의 브로맨스 혹은 가상부부의 케미를 한껏 끌어올린다.

 

프로페셔널한 차승원과 유해진이 보여주는 건 중년의 여유다. 그것은 경제적인 걸 얘기하는 게 아니다. 다만 산전수전 겪으며 살아오다보니 중년의 나이에 접해 갖게 된 삶의 능숙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지금의 40대가 과거의 중년들과 달라진 게 있다면 차승원처럼 심지어 요리만드는 걸 즐길 줄 알고 유해진처럼 시골의 삶에서도 어떤 즐거움과 사색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또한 가족의 틀에서 벗어나 우정으로 함께 보내는 시간에 대한 갈증은 지금의 중년들이 추구하는 자신만의 시간에 대한 일종의 판타지를 제공한다.

 

나영석 PD40대 남성 출연자들이 가진 프로그램에서의 이점을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이미 어느 정도 삶에 대해 자기만의 방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굳이 억지로 캐릭터를 부여할 필요가 없죠.” 어찌 보면 이 40대 중년의 여유는 뭐 하나 기댈 곳이 없어 보이는 불안한 현실 속에서 하나의 위안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살다보면 언젠가는 힘겨운 삶도 익숙해지는 단계가 온다는 것을 이들 40대 중년들은 보여주고 있다.

 

'애니멀즈'에는 왜 잭슨이나 산체가 없을까

 

가짜가 아닌 진짜를 보고픈 욕망은 이제 아이를 넘어서 동물로까지 예능의 영역을 넓혀놓았다. MBC <일밤><아빠 어디가>를 잠정적으로 폐지하고 <애니멀즈>를 세운 건 그래서 이러한 예능의 변화를 읽어내게 만드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애니멀즈(사진출처:MBC)'

동물들은 본능적인 리액션만을 보인다. <OK목장> 코너에서 카메라가 있다고 해서 라마가 출연자들에게 침을 퉤 뱉지 않고 고분고분 목에 방울을 달아줄 리 만무다. 은혁이 아예 작정하고 다가갔다가 얼굴에 온통 라마 침 범벅을 당하는 장면은 그래서 의심할 여지없이 100% 진짜다.

 

<곰 세 마리> 코너에서 중국의 팬더 곰에 푹 빠져 계속 안아주던 박준형이 곰의 순간적인 발놀림에 턱에 상처를 입는 것도 100% 리얼이다. 박준형은 훈장처럼 밴드를 붙인 채 팬더 곰이 자신을 따르던 그 벅찬 느낌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유치원에 간 강아지> 코너에서 강아지가 무서워 눈물을 흘리는 윤석에게 치즈를 입에 물려줬다가 떨어지자 강아지가 달려들어 아이의 입에 묻은 치즈를 핥는 장면도 연출로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이 코너는 윤석이 같은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에 강아지들의 반응까지 더해 보다 강력한 리얼 리액션을 보여주는 힘을 발휘한다.

 

그런데 이 <애니멀즈>가 그토록 관찰카메라의 제1 덕목이라고 하는 100% 리얼 리액션에 근접하고 있지만, 어찌된 일인지 시청자 반응은 시원찮다. 시청률도 첫 회 4.7%에 이어 4.3%로 떨어지며 동시간대 최하위를 기록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당연하게도 예능 프로그램의 관건은 리얼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그 예능에 걸맞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 <애니멀즈>의 재미라고 하면 제목이 보여주듯이 동물에게서 나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에 들어 있는 세 코너들을 살펴보면 재미가 동물에서 나온다기보다는 동물과 함께 지내느라 생고생을 하는 출연자들에게서 나온다는 걸 알 수 있다.

 

<OK목장>은 동물과 동거를 한다는 점에서 생고생의 강도가 가장 높을 수밖에 없다. 냄새도 냄새거니와 끊임없이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노동도 만만찮다. 그것도 부족해 간간히 들어오는 미션은 목장생활이 낯설 수밖에 없는 출연자들에게 멘붕을 안긴다. 동물들 또한 일상적으로 접하는 동물(강아지나 고양이)이 아니기 때문에 시청자들에게도 그 경험은 친숙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러니 고생하는 출연자는 보이는데 정작 보여야할 동물들이 잘 보이지 않게 된다.

 

<곰 세 마리>는 물론 이 인형 같은 곰 세 마리의 캐릭터가 분명하게 보이지만 중요한 건 그 이상의 접근이나 교감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점이다. 곰은 야생성이 있기 때문에 잠깐의 방심으로도 큰 사고를 당할 수 있다. 그러니 그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바라보는 정도나 다가간다 해도 한두 번 안아주는 것이 방송의 한계일 수 있다.

 

<유치원에 간 강아지>는 너무 복잡하다. 강아지를 너무 많이 한정된 공간에 넣어두다 보니 그 한 마리 한 마리의 캐릭터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강아지에 의해 반응하는 아이들과 이 둘을 챙기느라 생고생 하는 서장훈이나 돈스파이크, 강남만 보이게 된다.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이것 역시 <애니멀즈>라는 큰 기획의도에서는 조금 벗어난 포인트다.

 

우리는 tvN <삼시세끼>를 통해 잭슨이라는 염소나 밍키라는 강아지, 또 산체라는 강아지의 강렬한 존재감을 경험한 적이 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각각의 동물들과 출연자 사이의 내밀한 교감의 장면들을 하나하나 디테일하게 엮으면서 일관된 스토리를 읽어낼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삼시세끼>는 동물이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그 숫자가 적었고 그래서 더 주목도는 높아졌다고도 말할 수 있다.

 

결국 <애니멀즈>가 동물 버라이어티를 꿈꾼다면 바로 이런 잭슨이나 산체 같은 동물 캐릭터가 강렬한 존재감으로 읽혀질 수 있는 스토리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현재 <애니멀즈>에는 그 어떤 동물 캐릭터도 기억에 잘 남아 있지 않다. 그저 출연자들이 동물과 함께 지내는 어려움과 생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최근 들어 예능의 경향은 생고생 버라이어티에서 점점 워너비 버라이어티로 바뀌고 있다. 낯선 곳에서 생고생을 하는 출연자들을 보며 웃기보다는 저런 곳에 나도 가고 싶다는 그 판타지가 훨씬 더 마음을 잡아끌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애니멀즈>의 생고생이 재미와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그것은 동물과의 공존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또한 그 고생스러움이 주는 재미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의 대중들이 진정으로 보고 싶은 것인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적어도 주말 저녁에 반드시 보고 싶은 동물 한두 마리 정도는 떠오르게 해줘야 <애니멀즈>라는 제목에 걸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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