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미로 속에서 찾은 소중한 기억

누구나 무언가 소중한 기억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삶은 채워지는 만큼 비워내야 하고 그 비워낸 것은 기억 저편으로 잊혀지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그 잊혀진 기억들은 정말 영원히 사라진 걸까. 아니다. 그것은 저 무의식의 어두운 창고 속에 숨겨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의식이 잠을 자는 순간 작은 틈새를 타고 창고를 빠져나온다. ‘M’은 바로 그 무의식의 창고 속에 숨겨져 있던 첫사랑을 안타깝게 대면하는 영화다.

빛과 어둠으로 포착한 몽환의 세계
영화는 최연소 베스트셀러 소설가 민우(강동원)의 1인칭 시점으로 그의 무의식을 따라간다. 그러니 영화 속에는 세 가지 차원이 겹치게 된다.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무의식과 의식이 혼재된 소설이다. 이 세 차원이 겹치는 영화 초반부의 비연속적이며 비논리적인 이미지들의 폭풍은 보는 이를 당황케 만들 정도로 파격적이다. 영화의 내러티브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충격으로 다가올 정도. 하지만 기성영화문법이나 이미지에 저항하지 않고 보다보면 그 새로움에 전율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선명하게 무의식의 이미지를 잡아낼 수 있었던 것은 이명세 감독이 이미 ‘형사, Duelist’에서 실험한 바 있는 어둠으로 포착되는 빛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둠은 투명한 액체처럼 경계를 나누고 그 밖으로 튀어나온 빛에 어떤 표정을 만든다. 민우가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 때, 중요한 것은 드러난 얼굴이 아니라 어둠 저편에 숨어있는 수많은 표정들이다. 빛으로 드러난 얼굴이 의식이라면 드러나지 않는 어둠은 무의식이 되는 식이다.

이 빛과 어둠으로 포착되는 비연속적이고 비논리적인 꿈의 이미지들은 그러나 놀라운 경험을 안겨준다. 내러티브 없이 던져지는 이미지와 알 수 없는 효과음만으로도 영화는 멜로의 잔잔함과, 미스테리의 긴박감, 코미디의 경쾌함 같은 것을 모두 느끼게 해주니까. 이야기 없이도 이미지가 전달하는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이명세 식의 새로운 영화에 빠져들었다는 얘기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들어가는 멜로
그런데 도대체 왜 영화는 민우의 무의식을 이다지도 거창한 긴박감과 경쾌함을 넘나들며 전달하려 하는 것일까. ‘M’이 가진 나름의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얘기해보면 허탈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잘 나가는 소설가 민우가 은혜(공효진)와 결혼하기 전, 첫사랑이었던 미미(이연희)를 떠올린다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다. 하지만 이 단순한 이야기 구조는 무의식을 그대로 이미지화 하는 영상과 만나면서 산 자인 은혜와 죽은 자인 미미 사이에 갈등하는 민우라는 기이한 멜로를 형성한다.

즉 (민우의 기억 속에 있는) 미미는 민우가 은혜와 결혼하면서 자신이 잊혀질까봐 전전긍긍한다. 물론 이것은 논리적으로 말하면 미미라는 첫사랑의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은혜라는 사랑을 맞아들이는 민우의 죄책감 같은 것이다. 민우는 소설을 통해 미미에 집착하고, 은혜는 살아있는 자신보다 죽은 미미에 빠져드는 민우를 못마땅해 한다. 그리고 민우는 수많은 거울 앞에서 갈등한다. 거울 저편으로 넘어갈 것인가, 아니면 이쪽에 남을 것인가. 물론 결론은 나와 있다. 미미가 무의식, 꿈의 인물이라면, 은혜는 현실의 인물. 따라서 민우가 현실을 포기하고 꿈을 선택할 리가 만무하다.

‘M’, 잃어버린 기억을 부르는 암구호
그리고 이것은 마지막 민우의 내레이션처럼 우리네 삶의 한 부분을 말해준다. 누구나 지워버린 기억이 있고 그 지워진 자리는 새로운 기억이 차지한다. 그것은 어느 날 카페에서 받았다가 잃어버린 성냥갑처럼 아주 작은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작은 것은 우리 마음 속에 한 때는 폭풍처럼 휘몰아쳤던 소중한 것이었다. 영화는 지워져 가는 기억을 대변하는 미미가 첫 장면에서 하는 말을 되새기게 만든다. “난 나중에 당신이 아주 많이 슬퍼했으면 좋겠어. 재미있는 영화를 보다가도 내 생각이 나서 펑펑 울었으면 좋겠어.” 소중하지만 지워져가는 기억에 대한 안타까움이 압축된 이 대사는 이명세 감독이 관객들에게 ‘M’을 선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M’은 그러니까 잃어버린 기억을 부르는 암구호이다. 그것은 미미에게 민우일 수도 있고, 민우에게 미미일 수도 있다. 그것은 또한 민우에게 미미가 그렇듯이 예술을 하는 이들에게는 영감(Muse)일 수 있고,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저마다의 기억(Memory)일 수 있다. “해봐요. 머리 속에서 빙빙 돈다는 얘기. 담배연기를 뿜어내듯 머리 속에 있는 얘기를 시원하게 뿜어내 봐요.” 미미의 이 말은 관객에게 실로 의미심장하게 다가갈 것이다. 깊은 어둠 속에 금방이라도 꺼질 듯 가녀린 성냥불에 의지해 길을 찾아나가듯, 영화를 보며 각자 자신만의 소중한 ‘M’을 찾아낸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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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처선인가, 조치겸인가

‘왕과 나’의 오프닝을 보면 등장인물들이 차례차례 나온다. 그 순서를 보면 김처선(오만석), 윤소화(구혜선), 성종(고주원)이 나온 연후에 조치겸(전광렬)이 등장한다. 이것은 이 드라마의 중심스토리라인이 김처선과 윤소화의 운명적 사랑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성종이 세 번째로 등장하는 것은 국내 사극으로서는 대단한 파격이다. 지금까지의 사극들은 대부분 왕을 첫 번째 자리에 놓고 드라마가 진행됐기 때문이다. 즉 성종은 이 사극에서는 조연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후에 등장하는 인물이 조치겸이다. 멜로 라인을 빼놓고 보면 조치겸은 사실상 이 사극의 뼈대를 형성한다. 김처선이 어머니를 잃어버리고 월화(윤유선) 밑에서 자라면서 내시양성소를 운영하는 소귀노파(김수미) 밑에서 일하게 되는 데는 조치겸이 그의 아버지를 죽게 한 사건에서부터 비롯된 일이다. 드라마적으로 봐도 조치겸은 내시라는 사극 속에서 좀체 눈길을 주기 힘들었던 직종(?)을 빛나게 하는 중대한 역할을 맡고 있다. 드라마가 대중들의 어떤 욕망을 대리해주는 역할을 해준다고 할 때, 조치겸이라는 내시는 여타의 사극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동정이 가는 인물이 아닌 대중들이 욕망할 만한 캐릭터이다.

흔히 ‘내시포스’로 대변되는 조치겸의 카리스마는 내시라는 지위가 가진 선입견(무언가 여성스럽고 비굴한 그런 인물)을 깨기에 족한 것이었다. 게다가 조치겸은 양물을 자르고 내시가 되는 이들에게 그저 거세된 고자가 아닌 그 이상의 대의명분을 만들어주었다. 사실상 ‘왕과 나’란 사극의 초반부 힘은 바로 이 조치겸에 의한 것이라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까지도 조치겸의 부채신공을 흉내낼 정도였으니 말이다. 조치겸의 실제모델이 전균이라는 내시라고는 하지만 드라마 상에서 그는 가상의 인물이다. 바로 가상이라는 이 설정이 조치겸이란 캐릭터의 질주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반면 오프닝 타이틀의 앞부분을 차지하는 김처선과 윤소화, 성종은 역사의 실제인물이다. 본래 초기 시놉시스 상에서 이들의 사랑은 좀더 파격적이었다. 궁에 들어가기 전, 이미 김처선과 윤소화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까지 발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극이 초반부 역사왜곡이라는 논란을 빚게 되면서 이러한 애초의 시놉시스 설정은 변경되었다. 그러자 김처선은 윤소화를 바라보는 해바라기 역할로 굳어졌고, 성종은 윤소화를 잊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인수대비(전인화)의 치마폭에서만 살아가는 마마보이(?)가 되었다. 윤소화 역시 비련의 주인공으로 굳어져 시종일관 눈물로 밤을 지새는 인물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김처선과 윤소화, 성종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그다지 매력적인 캐릭터로 성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능동적으로 삶을 개척해나가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어려워도 밝고 씩씩한 모습 대신, 참고 눈물을 삼키는 모습이 부각됐다. 이것은 역사왜곡 논란이라는 칼날 아래 자유롭게 캐릭터를 운용하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왕과 나’는 과거의 사극들과는 전혀 결을 달리하는 사극으로 현대적인 관점이 그 중요한 모티브가 되는 사극이다. 왕의 시각이 아닌 나의 시각으로 그린다는 점만 해도 그렇다. 바로 이런 초기 설정은 어떤 식으로든 역사적 사실을 변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든다. 그러니 왜곡 논란은 접어두고 드라마적인 극적 구도에 더 집중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왕과 나’는 그 시도 자체가 사극이 더 이상 역사교육의 도구가 아닌 재미 자체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극이 아닐까.

체제순응적이고 수동적인 김처선이 ‘왕과 나’에서 나로 보여지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오히려 조치겸이 그 빈 자리를 채워주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가 부정적이든 권력에 눈이 멀었든 그는 어쨌든 자신의 생각을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좀더 현대적인 시각이 투영된 인물이다. 김처선이 조치겸이 만들어놓은 밥상에서 숟가락을 들기 위해서는 좀더 현대적인 시각을 투영시켜야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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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당한 스토리 없는 클로즈업, 자칫 자극으로만 흐를 수 있어

‘왕과 나’는 김재형 PD 특유의 클로즈업의 미학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똑같은 대본이라도 김재형 PD가 연출하면 좀더 집중력이 높아지고 극중 인물의 감정 선이 폭발하는 것은 바로 이 클로즈업에 힘입은 바가 크다. 특히 줌 인으로 들어가면서 잡아주는 극단적인 클로즈업은 얼굴 표정의 미세한 떨림 같은 것까지 놓치지 않으면서 사극이 흘러가는 기본적인 힘, 즉 갈등을 증폭시킨다. 여기에 심장을 쿵쾅대게 만드는 배경음악이 깔리면 극은 무언가 대단한 사건이 벌어진 것 같은 진풍경을 연출하고 다음 장면을 기대하게 만든다.

클로즈업은 어찌 보면 TV라는 매체가 가진 속성이기도 하다. 영화와 같은 대형스크린에서는 원경의 그림 구도를 잡아놓고 그 안에 들어있는 인물묘사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다채로운 볼거리를 잡아넣을 수 있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주변 배경의 표정들 역시 인물 감정선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활용될 수 있다. 미학적인 감정처리가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TV는 화면이 작다. 따라서 롱샷으로 처리할 경우, 인물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진다. 따라서 TV는 기본적으로 클로즈업으로 인물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TV가 영화와 매체의 성격이 다른 데서도 기인한다. 돈을 지불하고 집중해서 보게 되는 영화와 달리, TV는 집안 일을 하거나, 잡담을 하거나, 식사를 하면서 그저 틀어놓고 보는 매체이다. 그만큼 집중도도 떨어지고 중간중간 끊어지면서 보게되는 경우도 많아진다. 그러니 지나치게 미학적인 화면은 오히려 집중도를 떨어뜨린다. 이는 드라마뿐만 아니라 쇼 프로그램, 그리고 심지어는 뉴스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클로즈업은 TV라는 매체가 가진 특징을 가장 정확하게 말해주는 한 방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지금도 이러한 TV의 클로즈업 공식은 유효할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그것은 장담할 수 없다. TV 화면이 점점 대형화되고 고화질화되면서 TV 영상에 대한 기대치가 과거보다 점점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태왕사신기’나 ‘로비스트’ 같은 블록버스터는 영상 자체만으로 볼 때, 거의 영화에 가깝다. 과거 드라마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와이드한 장면을 잡아내기 위해서 ‘로비스트’나 ‘태왕사신기’의 제작진이 키르키즈스탄까지 날아가는 것은 이제 드라마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 되었다.

여기에 HD급 화질과 거기에 부응하는 CG 활용이 본격화되면서 TV는 말 그대로의 안방극장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변화되는 상황에서 클로즈업의 공식은 깨지고 있다.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잡아매는 방식보다는, 뛰어난 미학적 화면을 통해 시청자가 스스로 눈과 귀를 뗄 수 없게 만드는 영화적인 방식이 TV 화면 속으로 들어오고 있는 상황. 우리네 사극역사에 한 획을 그은 김재형 PD의 연출방식은 한 시대를 풍미하고, 이제는 새로운 사극들에게 자리를 내줘야하는 상황이다.

물론 시청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클로즈업의 연출방식은 지금도 유효하다. 하지만 달라진 점은 시청자들의 눈높이가 과거와 달리 높아졌다는 점이다. 클로즈업의 연출방식이 유효하려면 그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즉 극적인 스토리 구조가 기본이 되어야 납득이 된다는 점이다. 평이한 스토리에 과도한 클로즈업은 자칫 연출에 대한 신뢰성을 깨뜨릴 수도 있다.

‘왕과 나’는 왕과 나를 동등한 위치에서 보는, 시대를 앞서가는 기획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앞선 기획과 달리, 신파적인 스토리 구성과 인물구도 등의 드라마 진행은 김재형 PD만의 강점인 클로즈업의 연출방식조차 자칫 구태의연한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초기 기획처럼 과감하고 혁신적인 스토리 진행만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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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모계사회’, 며느리는 전성시대인가

TV 드라마 속 남성들은 힘을 잃은 지 오래다. ‘이산’속에서의 이순재와, ‘사랑이 뭐길래’의 이순재, 그리고 ‘거침없이 하이킥’에서의 이순재를 비교하면 쉬울 것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사극 속의 아버지는 현대로 와서 권위적인 아버지로 존속했으나 이제는 굴욕이 일상화된 아버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러한 아버지의 위상은 가족드라마 속에서 잘 드러난다. ‘며느리 전성시대’에서 족발집의 이수길(박인환)은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효자이자, 아내인 서미순(윤여정)에게 호통치는 남편이지만 드라마 속에서의 위상은 거의 없다. 즉 드라마가 어떤 갈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그 갈등에 끼어들 여지는 별로 없다는 말이다.

이 집의 갈등은 주로 이수길의 어머니인 오향심 여사(김을동)와 아내인 서미순, 그리고 며느리로 들어온 조미진(이수경) 사이에서 벌어진다. 조미진의 남편인 이복수(김지훈) 역시 가족 갈등의 주변인물일 뿐이다. 결혼을 앞두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여자들 눈치를 봐야 살기가 편해질 지를 논의하는 정도가 이 집 남자들이 맡은 역할이다.

한편 이 드라마의 청담동집 가장인 조민식(이영하)은 아내인 윤인경(김보연)에게 꽉 붙들려 사는 남자다. 아내 생일날 사위가 찾아온다는 데도 앞치마를 두르고 집안 일을 할 정도다. 이 청담동집의 아들, 조인우(이필모) 역시 집안에서는 어머니인 윤인경에게 꽉 잡혀 살고, 집밖에서는 족발집 막내딸 이복남(서영희)에게 꼭 쥐여사는 인물이다. 심지어 족발집에 가서 손님시중도 들어주고, 이복남에게 라면을 끓여주고 설거지까지 하는 등, 헌신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 코믹한 드라마 속에서 제법 현실적인 무게감을 갖는 성북동집 가족들 또한 마찬가지다. 고준명(장현성)은 어머니인 이명희(김혜옥)에게 꽉 잡혀 이혼까지 하게된 인물이다. 아버지인 고연중(윤주상) 역시 이 집에서 어느 정도 권위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아내인 이명희의 고집을 꺾지는 못하는 인물이다.

이처럼 이 드라마는 가족의 꼭지점 위에 여성들이 놓여진, 신 모계사회의 한 단면을 그려내고 있다. 집안의 권위를 잡고 있는 것은 오향심 여사와 윤인경 그리고 이명희로 대변되는 여성들인 것.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드라마가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오향심 여사의 며느리인 서미순과 서미순의 며느리인 조미진, 그리고 이명희의 며느리인 차수현(송선미)은 모두 그 집안의 어머니들과 갈등을 겪는다.

신 모계사회라고 하면 여성들이 살기 편한 세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드라마는 절대로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가족의 꼭지점만 남자에서 여자로 바뀌어졌을 뿐, 그 사고방식은 과거 가부장제 사회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물론 딸을 며느리로 준 엄마 입장에 선 윤인경은 조미진의 시댁식구들이 보이는 가부장적 모습에 분을 참지 못하지만, 그녀 역시 아들 결혼에 대해서는 같은 모습을 보인다. “우리 딸도 시집살이하는데 나라고 왜 며느리들이지 말란 법 있냐”고 말하는 것.

경제적인 힘과 활발한 사회진출로 인해 가족의 헤게모니를 잡게 된 어머니들 아래서 이래저래 힘든 건 며느리와 자식이다. 사회활동은 용인하지만 퇴근 후의 집안 일은 전적으로 며느리 몫이라는 과거 가부장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머니들 밑에서 며느리들은 이중고를 겪게된다. 힘든 건 아들들도 마찬가지다. 신 모계사회 속에 살고 있는 아들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권위를 포기하고 아내와의 알콩달콩한 삶을 더 원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가부장적 사고방식을 강요했을 때 그걸 감싸주는 이가 아들이 되는 아이러니가 연출되기도 한다.

‘며느리 전성시대’의 서미순이 자신의 고된 시집살이와 비교해 신세대 며느리, 조미진에게 그 박탈감을 호소하듯 시어머니들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여성이 가족의 중심이 되는 신 모계사회 속에서 가족 내의 갈등은 그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어머니들의 손에 달려 있다.

‘며느리 전성시대’는 과거 가부장적 전통 속에서 힘겹게 살아온 며느리들이 이제 전성시대를 맞았다는 의미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그 전성시대를 맞은 며느리들은 그동안 자신을 힘겹게 했던 가부장적 사고방식 그대로 새로 들어온 며느리에게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드라마 속 조미진과 차수현처럼 직장생활과 가정생활 사이에서 슈퍼맘이 되어야 하는 며느리들에게 지금 시대가 절대로 ‘전성시대’가 아닌 ‘수난시대’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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