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에게 의사는 어떤 존재일까. 아주 사소한 병에도 쉽사리 생명을 놓칠 수 있는 연약한 인간에게, 의사란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의사의 말 한 마디에 환자의 상태가 호전되기도 하고 악화되기도 하는 ‘플라시보 효과’는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특히 외과 같은 몸에 칼을 대는 분야에서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외과를 다루는 ‘외과의사 봉달희’에는 이 ‘신적인 존재인 의사’가 없다. 거기에는 ‘인간인 의사들’만이 가득하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신적인 존재로 믿어왔던 의사가, 실은 우리와 똑같이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기뻐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 이것이 ‘인간 의사, 봉달희’가 주는 재미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의사
‘외과의사 봉달희’가 처음 방영되었을 때, 시청자들은 “도대체 봉달희가 의사 맞냐”는 반응을 보였다. 당장 피를 뽑지 않으면 5분 내에 사망할 환자를 두고 어찌해야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는 의사를 보고(물론 울릉도 보건소의 검진의지만) 시청자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사의 모습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 그녀가 한국병원 레지던트로 오면서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심근경색 환자를 소화제 처방해 결국 사망하게 한 그녀는 환자들의 생과 사가 자신의 순간적인 선택에 달려 있다는 중대한 사실에 맞닥뜨리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 살리는 의사보다 먼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의사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 드라마의 갈등상황은 바로 이 중대한 선택 앞에 수시로 놓이게 되는 의사들에게, 일반인으로서의 시청자들이 감정이입되는 순간 발생한다. 이 손에 땀을 쥐고 피 말리는 선택 앞에서 기쁨과 슬픔은 오버랩된다.

죽일 것이냐 살릴 것이냐의 잔인한 문제
이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치병 드라마’를 뒤집어놓은 상태가 된다. 불치병 드라마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를 다루지만, 이 ‘인간 의사’가 주인공인 드라마는 ‘죽일 것이냐 살릴 것이냐’의 문제를 다룬다. 똑같이 삶과 죽음을 다루지만 ‘불치병 드라마’가 수동적인 입장을 취한다면, 이 드라마는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입장을 취한다. 여기서 드라마는 좀더 철학적이 되고 좀더 역동적인 모습을 띄게 된다. 이건욱(김민준 분)의 말을 빌리면 ‘인간에게 칼을 댈 수 있는 유일한 면허를 가진 인간’, 의사라는 직업 특성 상 환자 앞에서의 모습과 인간으로서의 모습은 괴리를 갖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의사 조문경(오윤아 분)은 아들의 병 앞에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어머니가 된다. 그 두 정체성(의사와 어머니) 사이에서 그녀는 갈등을 일으킨다. 재미있는 것은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에 아들을 부정하던 이건욱이 아들의 병을 알고 아버지이기를 자처하는 장면이다. 이것은 죽음 앞의 한 인간(그것도 아주 가까운)에 대한 의사로서의 안타까움일까 아니면 아버지로서의 애절함일까. 혹은 그 둘 다인지도 모른다. 이 복잡 미묘한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의 감정을 살짝 엿보는 맛, ‘외과의사 봉달희’라는 드라마의 묘미가 아닐 수 없다.

‘인간 의사’의 약점이 만들어내는 드라마
‘멜로 라인’이 있는 드라마로서 ‘무늬만 전문직 드라마’가 되지 않을까 우려해왔던 것과는 달리, ‘외과의사 봉달희’는 이 ‘멜로 라인’을 ‘인간 의사’의 갈등 라인 속으로 끌어들인다. “도대체 그 아이의 친아버지가 누구냐”며 조문경에게 핏발을 올리는 이건욱. 늘 자신보다 앞서있는 경쟁자이자 기분 나쁜 존재인 안중근(이범수 분)과 조문경이 함께 가는 장면을 보고 증오 섞인 눈빛을 던지는 그의 모습은 강력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만일 누군가를 살려야할 한 의사가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의 살의를 가지고 있다면 상황은 어떻게 될까. ‘인간 의사’의 따뜻한 면모는 때로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도 한다.

‘외과의사 봉달희’는 ‘인간으로서의 의사’를 다루었다. 그리고 그 ‘인간 의사’는 위험천만이 아닐 수 없다. 환자와 의사 사이에 인간 대 인간의 감정이 섞일수록 그 의사는 더 위험해진다. 아무리 능력 있는 의사라도 자기 자식 같은 사람에게 함부로 칼을 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감정이 조절되지 않는 의사가 칼을 쥔다는 것 역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고민하고 더 신중해지는 봉달희를 보면서 우리는 인간의 어떤 위대한 면모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녀가 그 모진 의사가 되었던 것도 결국은 자신의 아팠던 과거와 심장 때문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 위험천만한 의사에게 비로소 안심하게 된다. 환자의 입장에 섰던 봉달희야말로 진짜 환자의 아픔을 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차갑기만 한 안중근에게서 어떤 알 수 없는 인간미를 발견하기도 하는 것 역시 그가 아직까지 밝히지 않고 있는 과거의 어떤 아픔이 언뜻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인간 의사’를 보여주는 ‘외과의사 봉달희’가 ‘본격적인 병원드라마’의 틀 속에서 멜로 역시 살려낼 수 있을까. 이 기대감 또한 이 드라마를 보는 재미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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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는 괴로워’ vs ‘복면달호’

최근 속속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 외국 블록버스터들 사이에서 혼자 꿋꿋이 우리 영화의 자존심을 세우고 있는 영화, ‘괴로워’. 이 영화는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통쾌한 풍자를 다뤘지만 또한 오랜 불황의 늪에 빠진 우리네 가요계의 이면을 들추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 가요계의 이면을 다룬 또 하나의 영화가 개봉을 준비중이다. 이름하여 ‘복면달호’. 제목부터 심상찮은 이 영화는 복면을 쓰고 트로트를 불러야하는 3류 록커에 대한 이야기다. 이쯤 되면 궁금해지는 점이 있다. 가요계의 이면을 다룬 이 두 영화에서 왜 두 주인공은 모두 정체성을 숨겨야했느냐는 점이다. 한 명은 성형으로, 또 한 명은 복면으로.

‘미녀는 괴로워’가 예상 밖의 선전을 한 것은 첫째, 원작에 대한 리메이크에 있어서 현지화가 성공했기 때문이다. ‘미녀는 괴로워’는 스즈키 유미코가 그린 동명의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미녀는 괴로워’는 원작과는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은 원작에는 미녀로 변신하기 전의 한나(김아중 분)의 뚱뚱한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외모지상주의로 흐르고 있는 우리 사회를 더 강도 높게 비판할 수 있는 장치가 된다. 게다가 오래 전부터 우리 가요계의 문제가 되어왔던 ‘얼굴 없는 가수’ 혹은 ‘립씽크’ 같은 이야기들이 배치되면서 영화는 원작을 넘어 좀더 우리 현실을 비추게 되었다.

‘복면달호’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는 이유는 그 상황이 ‘미녀는 괴로워’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 역시 일본의 소설가 사이토 히로시의 ‘엔카의 꽃길’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다루려는 그 내용이 우리네 가요계 현실과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록가수가 설  자리가 없는 가요 풍토와 상대적으로 잘 나가는 트로트에 대한 막연한 평가절하가 그것이다. 그러니 가창력 좋은 록가수가 트로트 가수가 되는 이야기에 어찌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실제로 우리나라 초창기 록그룹의 신화였던 ‘백두산’의 보컬 유현상은 후에 트로트 가수로 변신, ‘갈테면 가라지’같은 히트곡을 남기기도 하지 않았던가.

만일 ‘복면달호’가 저 ‘미녀는 괴로워’처럼 원작을 넘어 우리네 정서에 맞춘 리메이크에 성공한다면 그 힘은 바로 저 가요계의 문제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그만큼 문제 많고 그 문제로 침체된 가요계의 추락이, 오히려 불황기 우리 영화계를 비상하게 만든 소재가 되었다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가요계에는 심각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소재가 이 두 영화 속에서는 코미디라는 장르로 다루어진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다행인 것은 이 통쾌한 풍자를 동반한 코미디라는 틀이 문제는 물론이고 해법까지 도출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음반시장상황을 이해하게 해주고 가요소비자로서 비판적인 관점을 갖게 해주고 있다.

한나나 달호(차태현 분)나 그들이 성형 혹은 복면을 하면서 정체성을 숨기게 된 이유는 알맹이보다 중요해진 껍데기 때문이다. 전영혁씨나 신중현씨 말대로 가수는 노래 잘하면 되는 것이지만 우리네 가요계는 껍데기에 더 치중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잘 생기서 나쁠 건 없지만, 잘 생긴 것만으로 가수가 된다는 건 문제가 된다. 젊은이들에게 폼나고 멋져 보이는 음악 장르로서 R&B나 발라드, 댄스가 나쁠 건 없지만, 오로지 그 장르에만 몰려드는 음반기획은 문제가 된다. 이러한 문제들을 건드렸다는 점이 ‘미녀는 괴로워’ 이후, ‘복면달호’에서 다루어질 우리네 가요계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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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웃거나 분노하거나

요즘 시청자들의 욕구는 두 가지인 것 같다. 그것은 ‘웃고싶거나, 분노하고싶다는 것’. 멜로드라마의 퇴조는 바로 그 정조가 지금의 세태와 잘 맞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완성도를 떠나서 그 주인공이 질질 짜는 영상 자체에 시청자들은 그다지 공감하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은 실제 현실에서 ‘눈물의 가치’가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평가절하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쿨(Cool)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눈물은 혼자 숨겨야할 어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TV 속에서 ‘눈물 흘리는 자’보다는 ‘힘겨워도 웃고 있는 자’를 더 리얼하게 생각한다.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각박해져만 가는 현실 속에서 매달 은행이자에 생활비에 아이들 학원비에 시달리고, 회사에서 구조조정의 칼날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오로지 입시를 위해 공부기계처럼 살아가고, 그렇게 들어간 대학에서조차 취업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멜로드라마가 보여주는 ‘사랑의 좌절로 인한 눈물’은 그다지 리얼한 공감을 일으키기가 어렵다. 그래서 그들은 차라리 이런 눈물보다는 ‘잠깐 동안의 도피’를 꿈꾼다. 케쎄라 쎄라. 눈물은 내일로 미루고 당장은 웃고 싶은 것이다.

웃고싶다, 생각하지 않고
공개개그 프로그램의 전성시대는 바로 이런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공개개그가 지향하는 호흡이 그다지 길지 않은 몇 분, 몇 초라는 것은, ‘잠시 생각은 접어두고 웃고싶은’ 시청자들의 입맛에 잘 맞아떨어진다. 게다가 이 촌천살인의 개그 속에는 현실에서 억압된 감정을 순간적으로 터뜨리는 폭발력이 있다. 마빡이의 단순한 동작 속에는 복잡한 현실을 무화시키는 강력한 웃음폭탄이 내재되어 있고, 죄민수의 막가파식 개그 속에는 사회와 권위의 억압을 해체하는 묘한 힘이 있다.

한편 이 마빡이나 죄민수 같은 소외되고 비천한 인물들은, 웃음을 찾는 시청자들 자신의 처지를 동일시시키기에 딱 알맞은 캐릭터들이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무한도전’의 힘은 바로 그런 캐릭터들에서 나온다. ‘리얼 버라이어티 개그’를 지향하고 있지만 ‘무한도전’이 주는 웃음의 원천은 연출되지 않은 리얼한 상황에 있다기보다는, 그 상황 속에 있는 캐릭터들의 힘에 있다. 소심하고 비굴하면서도 정이 가는 유재석, 호통을 치지만 어딘지 연민이 느껴지는 박명수, 쉴 새없이 떠들어대지만 순수함이 느껴지는 노홍철, 덩치만 큰 곰 같은 우직함의 정준하, 장난기 많은 막내 같은 하하, 방송에 적응 못한 듯해 연민을 일으키는 정형돈. 이 소외된 캐릭터들이 엮어 가는 실제상황이라서 공감이 가는 것이다.

분노하고 싶다, 거침없이
하지만 이 웃음은 그냥 웃음이 아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란 말이다. 개그의 두 가지 웃음 촉발인자는 이제 ‘굴욕과 풍자’가 되었다. 굴욕이 자신을 한없이 무너뜨리는 데서 웃음을 만든다면, 풍자는 상대방을 조롱하고 깎아 내리는 데서 웃음을 촉발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나타난 양태가 다를 뿐, 그 근본 유발인자는 한 가지에서 나온다. 바로 ‘분노’이다. 굴욕이 타인이 아닌 내 자신에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자학)이라면, 풍자는 바로 그 타인에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 분노를 마빡이는 자기 자신에게, 죄민수는 타인에게 터트리는 형태로 웃음을 유발시킨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풍자가 개그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요인이다. ‘형님뉴스’는 “∼가 ∼다워야 ∼지’하는 유행어를 흩뿌리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가 ∼답지 않은” 세태를 꼬집는 말이다. 죄민수의 “아무 이유 없어!”, “이 MC계의 쓰레기!”같은 말 역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권위에 대한 조롱이 아닐 수 없다. 우아한 자태의 사모님이 하는 일련의 ‘무뇌형 발언’은 ‘돈은 많으나 생각은 없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제로’의 졸부들을 비꼬는 말들이다. 웃음 속에는 이다지도 많은 분노의 칼날들이 숨어 있다. 그 칼이 정확히 시청자들의 가슴에 꽂히는 순간, 카타르시스와 함께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TV, 웃거나 분노하거나
이것은 단지 개그 프로그램의 얘기만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멜로드라마가 어려운 것은 바로 눈물이 이 사회에서 리얼한 해결방식이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이제 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웃음과 분노’가 하나의 쿨한 해결방식으로 자리잡는다. 그래서 멜로드라마가 손잡은 것은 코미디다. 따라서 작년에 코믹한 설정으로 호평을 얻었던 ‘돌아와요 순애씨’의 연장선 위에 ‘달자의 봄’이 있는 것이고, ‘환상의 커플’에 대한 열렬한 애정이 여전한 것이다. 일일드라마에 도전장을 내민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성공은 바로 이 웃음 코드를 공감 가고 리얼한 캐릭터들을 통해 잘 살린 데 있다. 눈물에 각박해진 시대에 드라마들은 웃어야 성공한다. 늘 웃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질질 짜지는 않아야 된다.

반면, 분노를 부추기는 드라마, 혹은 프로그램들이 TV의 또 한 축을 차지한다. 자극과 선정성을 무기로 들고 나오는 ‘논란드라마들’은 그 가장 강력한 무기로 ‘분노’를 사용한다. 폭력에 가까운 말들과 장면들이 오가는 화면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일종의 전이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 같다. 또한 사회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지나치게 자극적인 장면들을 포착하는 사회고발프로그램들의 영상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해결이 가진 문제점은 중독이다. 자극을 통한 문제의 해결은 더 큰 자극을 필요로 한다.

살기 어려운 시기에 웃음이 그 어려움을 위무해주는 코드로 나타난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자칫 분노로 일관되는 감정의 형태를 웃음이라는 긍정적인 형태로 변환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점점 떨어져만 가는 ‘눈물의 가치’이다. 삶에 있어서 웃음만큼 중요한 것이 ‘건강한 눈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단순한 최루성이나 구태의연한 설정으로 유발되는 눈물이 아닌, 이 시대의 감성코드와 공감할 수 있는 눈물이 어느 때보다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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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식 블록버스터, ‘황후화’의 아쉬움

장예모라는 이름에서 아직까지도 ‘붉은 수수밭’, ‘국두’, ‘홍등’, ‘귀주이야기’ 등을 떠올리는 분들이라면 그의 최신작 ‘황후화’는 좀 당혹스러운 영화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리라는 배우가 똑같이 등장하지만 그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다. 먼저 제작비 450억 원이란 수치가 그렇다. 아무리 ‘영웅’, ‘연인’의 전작을 통해 이 거장의 행보가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고는 해도, 이 정도까지 블록버스터의 면모를 과시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화려한 장식이 깃든 복식들과 궁궐의 모습에서부터 단박에 시선을 잡아끈 영상의 색채와 스케일은, 천 여명에 이르는 대대적인 엑스트라들이 동원되어 마치 사람의 물결이 넘실대는 듯한 전투신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한다.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중국식 인해전술’이란 생각이 퍼뜩 드는 그 지점부터 장예모 같은 거장이 왜 이런 전술을 쓰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고개를 든다.

영화는 무언가를 알리는 다급한 ‘딱딱이(?)’ 소리와 함께 일어나 도열해 옷을 차려입는 수백 명의 궁녀들에서부터 시작한다. 화면의 색채는 붉은 빛이 감도는 노란 황금빛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 틈입하는 인서어트에서 일단의 군대가 말을 타고 달려가는 장면이 끼어든다. 그 화면의 색채는 푸른 빛이 돌면서 저 황금빛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다시 화면이 바뀌면 황금장식을 하는 황후(공리 분)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이 황금빛 장면은 다시 푸른 빛의 군대 장면과 교차된다. 이 집약된 장면들은 장차 황제(주윤발 분)의 군대와 황후의 군대 사이에서 벌어질 색채의 전쟁을 예감케 한다. 그리고 미로처럼 폐쇄된 궁궐을, 굳은 얼굴로 다급하게 걸어가는 황후의 장면이 이어지면서 캐릭터의 내적 갈등과 공간이 묘한 조화를 만들어낸다. 장예모가 아니면 쉽지 않았을 이 작다면 작은 가족의 치정사가 궁궐이라는 거대한 몸체와 합체되는 순간이다.

영화의 내용은 복잡해도 그것은 한 가족의 틀을 넘어서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 거대한 이야기의 메인 스토리를 엮어가는 인물이 황제, 황후, 세 왕자, 황실 주치의와 그 아내 이렇게 총 일곱 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관계가 복잡해 보이는 건 세 왕자 중 첫째가 배가 다른 소생이며 이 왕자가 황후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야기는 황제와 황후 사이의 대립에서 비롯되어 불게되는 궁궐 내의 피 바람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거대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들 몇몇 인물의 권력투쟁이 수천 명의 피를 부르는 구조에 있다. “그저 화려했던 과거 중국 봉건문화가 얼마나 허위적인지를 알리고 싶었다”는 장예모 감독의 말을 빌린다면 이 거대한 치정극이 보여주는 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만큼 강한 설득력을 얻는다. 이 영화는 수천 명의 군대가 궁이라는 밀폐된 공간 속에서(평원이나 성이 아니다) 황제와 황후의 명령 하나로 전쟁을 벌이는 영화다. 그만큼 비현실적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스케일이 풍자와 비판의 선을 넘어선다. 사실 의도가 그 허위 고발에 있었다면 조금은 관객들이 그 거대한 장면 속으로 빠져들지 않고 생각하게 만들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심지어 현실을 꼬집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주었어야 했다. 그렇지만 엄청난 스케일의 화려함 속에서 비판의 칼날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쿠데타군과 진압군이 궁 안에서 벌이는 전투신에 가서는 색채와 색채의 부딪침 같은 영상미학이 느껴질 정도이다. 아름다운 피 바람이 화면 가득 채워지는 순간, 영화는 블록버스터를 향해 달려간다. 중국 내에서 민감하기 이를 데 없는 권위적인 가장이 만들어내는 비극적인 가족 코드를 가지고 관객들을 끌어 모은 영화는 블록버스터의 거대함 속에 비판의식을 매몰시킨다. 그리고 놀랍게도 결국 황제의 권위에 의해 모든 것이 진압되는 상황을 연출하며, 영화를 통해 현실의 모반을 꿈꾸던 관객들에게 오히려 경고의 메시지를 날린다.

영화가 갑자기 과잉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 애초의 목적이 흐려지는 이 마지막 순간에서이다. 그러자 인해전술의 목적은 메시지의 전달을 위한 것이 아닌 좀더 상업적인 목적에 가까워진다. 즉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 모으기 위한(극장에서 봐야 진짜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스케일) ‘헐리우드 블록버스트를 의식한 중국식 블록버스트’라는 마케팅적인 접근이 보이는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의 집단 매스게임을 보는 듯한 스펙터클 속에서 2008 베이징올림픽 총감독직을 맡은 장예모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일까.

그러나 역시 거장은 거장이다. 본인 스스로 “외국영화에 잠식되는 중국시장을 위해서라도 상업적인 목적으로 영화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래서 거기에 딱 걸맞는 거대한 스케일의 영화를 만들어냈지만, 그 속에서 자신만의 색채 미학, 영상 미학을 담아 넣는 건 거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단순한 치정극의 틀을 저 만다라의 무늬를 연상케 하는 테이블에 앉힘으로서 무한한 의미의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면모 역시 대단하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장예모의 스케일 작은 영화들이 보여준 커다란 영화(?)세계가 아쉬운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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