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 보기 싫어서’, 결혼도 사랑도 이익 따지는 시대의 멜로

손해보기 싫어서

이 인물은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손해영(신민아). 어려서부터 축구하는 남자들이 운동장의 대부분을 쓰고 피구하는 여자들이 그 일부만 쓰는 게 손해라고 선생님께 따지는 그런 인물이었다. 손해 보고는 못사는 문제적 인물. tvN 월화드라마 ‘손해 보기 싫어서’는 예사롭지 않은 제목처럼 범상치 않은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세웠다. 

 

그런데 이 멜로의 남자 주인공인 김지욱(김영대)은 손해영과는 정반대의 캐릭터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걸 못견뎌 하고, 나아가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도 참지 못한다. 그래서 동네에서는 의인이지만, 때론 융통성 있게 넘어가야 잘 살 수 있는 사회생활에서는 어딘가 손해보는 인물이다. 면접장에서 성차별적 발언을 하는 면접관에게 대놓고 그걸 문제삼는 인물이니. 

 

‘손해 보기 싫어서’는 이처럼 상반된 두 캐릭터를 남녀 주인공으로 세워 도저히 연결될 수 없을 것 같은 로맨스를 그리겠다 선언한다. 그 발단은 손해영이다. 누군가의 결혼식에 쓴 축의금이 너무 아까운 참에 초고속 승진이 걸린 사내공모에 미혼 여성을 뽑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결혼을 하기로 작정한다. 물론 식만 올리는 가짜 결혼식을. 

 

대뜸 손해영은 자신의 단골 편의점에서 만년 알바를 하고 있는 김지욱에게 이 결혼 알바(?)를 제안한다. 말도 안되는 제안에 단칼에 거부하지만, 손해영이 중고마켓에 올린 신랑 구인(?)에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바람둥이가 관심을 보이자 김지욱은 이를 그냥 무시하고 넘기지 못한다. 자신이 그 결혼 알바를 하겠다고 나선다. 이로써 두 사람은 가짜 결혼식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의외의 로맨스를 겪기 시작한다. 

 

‘손해 보기 싫어서’가 도발적인 건, 이제 결혼이 필수냐 선택이냐는 차원을 넘어서 이득이냐 아니면 손해냐를 따지는 시대의 이야기를 꺼내놨다는 점이다. 그건 거꾸로 이야기하면 결혼만이 아니라 매사에 모든 걸 이익의 관점으로 결정하는 세태에 대한 이야기다. 손해 보는 일은 절대 하기 싫고 오로지 이익을 위해서 무언가를 선택하는 시대. 그런데 그건 과연 괜찮고 행복한 일일까. 

 

그런 점에서 김지욱이라는 캐릭터는 이 이익의 시대와는 걸맞지 않는 캐릭터로 사회에서도 도태된 인물이다. 잘 모르는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의인’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만큼 타인을 돕는 일보다는 내 이익만을 보는 삶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 김지욱은 그런 시대 바깥에서 들어온 외계인 같은 존재다. 보통의 멜로 드라마가 돈이면 돈 권력이면 권력 나아가 외모면 외모까지 모든 걸 다 가진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우고 있다면 김지욱은 그 정반대에 서 있다. 

 

늘 백마 탄 왕자님만 로맨스에서 봐왔던 시청자들이라면 이 덥수룩한 머리로 일부러 외모를 감춘 채, 편의점 만년 알바를 하며, 남 돕는 일에나 신경쓰는 이 인물이 어딘가 이질적으로 느껴졌을 게다. 하지만 이건 이 인물의 진가가 저 외형적인 조건들과는 다른데 있다는 걸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위장술이다. 기꺼이 타인을 위해 손해보는 삶을 사는 남자 주인공이 주는 판타지라니. 

 

알고 보면 손해영이 그토록 손해 보는 삶을 싫어하게 된 건 어려서 천사처럼 베풀던 엄마로부터 겪게 된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다. 보육원 봉사를 하던 엄마가 가정위탁을 하며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을 데려와 키웠다. 손해영은 자신이 엄마에게 받을 사랑을 저들에게 빼앗겼다 생각했고 그래서 손해 보는 일에 극도로 예민해졌고 그런 엄마와도 소원해졌다. 

 

따라서 손해영이 김지욱과의 가짜 결혼식을 통해 그의 진가를 알아가는 이 로맨스는 동시에 손해영이 천사 같은 엄마의 마음을 이해해가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그 이타적인 마음이 그저 이익만 생각하는 삶보다 얼마나 가치있는가를 알아가는 과정이랄까. 결혼도 그렇지만 사랑 역시 손익의 관점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이 손익계산으로 시작하지만 차츰 진짜 사랑이 그런 차원을 넘어선다는 걸 알아가는 로맨스가 흥미로워진다. 결혼도 사랑도 이익 따지는 시대와 도전하는 멜로를 보는 재미랄까.(사진:tvN)

이제 연예인급 영향력, 인기 유튜버에게 요구되는 책임감

유퀴즈 온 더 블럭

“이번 일로 저의 부족함에 대해 많이 느끼고 반성했습니다. 앞으로는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도록 더 큰 책임감을 가지고 매사에 신중함을 가지겠습니다.” 인기 여행 유튜버 곽튜브는 자신의 채널에 장문의 사과문을 내놨다. 두 번째 사과문이었다. 최근 학교폭력과 같은 팀 멤버 왕따 가해 의혹으로 논란을 빚은 에이프릴 이나은과 함께한 이탈리아 로마 여행기에서 그가 했던 두둔 발언이 문제가 됐다. 

 

“학폭 이야기만 나오면 예민했다. 가해자라고 해서 널 차단했는데 아니라는 기사를 보고 풀었다. 오해받는 사람한테 피해주는 것 같았다.” 곽튜브는 해당 영상에서 그렇게 말했고, 여기에 이나은은 “진짜 나를 오해하고 차단했다는 게 그런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게 속상했고 슬펐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물론 이나은의 학교폭력 논란은 최초 유포자의 명예훼손 혐의가 임전돼 누명을 벗었지만, 같은 팀 멤버에 대한 왕따 가해 의혹은 아직 풀리지 않은 상태다. 

 

이 상황에서 올린 곽튜브의 영상은 일파만파의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마치 가해자를 두둔하는 내용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유무를 떠나서 이런 과감하고 어찌 보면 무모한(?) 영상을 올린 것 자체가 곽튜브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가해자를 두둔하는 듯한 내용은 2차 피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사안이다. 또 비슷한 상황에 처한 피해자들에게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서둘러 사과하고 영상을 내렸지만 비난이 쏟아졌고 2차 사과까지 하게 된 것이다. 

 

특히 곽튜브는 자신이 겪은 학교폭력 피해 사실을 이야기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높였던 인물이기도 하다. ‘유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그 사실을 고백한 후 곽튜브에 대한 대중적 인기도 급상승했다. 교육부가 내놓은 학교폭력 캠페인 공익광고에 곽튜브가 출연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이번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교육부도 이 공익광고를 비공개 처리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번 사태에서 주목해서 봐야 하는 건, 이제 유튜버라고 하더라도 그만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면 책임 또한 커지게 됐다는 사실이다. 유튜브는 상대적으로 소재나 표현에 있어서 자유로운 채널이라고 여겨져온 바 있다. 지상파와 케이블, 종편 같은 리니어 미디어들은 ‘공영성’이라는 개념의 영향력으로 인해 제재와 규제의 대상이 되어왔고, 방송 수위나 표현도 제한되어 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유튜브 채널에서 벌어지는 연이은 논란들은 이제 이러한 책임이 유튜브에서도 요구되기 시작했다는 걸 말해준다. 

 

이런 징후가 본격적으로 드러난 건 지난 5월 피식대학이 겪은 지역 비하 논란에서다. 영양군에서 찍은 영상이 지역 비하 논란에 휘말리면서 피식대학은 구독자들이 대거 이탈하는 사태를 겪었다. 작년 백상예술대상에서 상을 받을 정도로 피식대학은 대중적 영향력이 있는 채널로 인정받은 바 있다. 그러니 그만한 책임도 따른다는 걸 이 사태는 보여줬다. 물론 방심위의 제재 바깥에 있지만 구독자 이탈로 나타나는 결과들이 이 영향력과 책임의 상관관계를 말해준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예능 ‘더 인플루언서’도 치열한 인플루언서들의 서바이벌 대결 끝에 오킹이 우승하게 되면서 프로그램도 악영향을 받았다. 오킹이 코인 사기 연루 의혹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은 내놓고 홍보할 수 있는 상황이 될 수 없었고, 프로그램 공개 전 비밀 유지를 어긴 스포일러 논란이 터지면서 오킹은 계약 위반으로 상금을 받지 못하는 일도 벌어졌다. 

 

인기 유튜버들에게서 터져나오는 일련의 논란들은 이제 이들의 위상이나 영향력이 연예인급으로 높아진 현실을 보여준다. 실제로 곽튜브의 경우 유튜브만이 아니라 지상파, 케이블, 종편을 오가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송인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유튜브라고 해서 면죄부를 받거나 혹은 하고 싶은대로 방송을 하는 시대는 조금씩 저물어가고 있다. 그것이 구독자 이탈 같은 실질적인 논란의 제재로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사진:tvN)

‘엄마친구아들’의 호불호는 가족드라마 형태에서 나온다

엄마친구아들

정해인과 정소민이 출연한다는 사실은 tvN 토일드라마 ‘엄마친구아들’이 로맨틱 코미디일 거라는 예상을 하게 만든다. 실제로 이 ‘엄마친구아들’은 엄친아, 엄친딸로 오래도록 친구처럼 지내왔던 승효(정해인)와 석류(정소민)가 드디어 조금씩 사랑을 피워나가는 멜로드라마다. 미국까지 가서 누구나 선망하던 글로벌 기업까지 다니던 석류가 약혼도 파혼하고 회사도 그만두고 귀국하면서 드라마는 시작한다. 석류가 원하는 건 자신의 삶이고 행복이다. 부모의 자랑 같은 게 아니고. 멜로와 더불어 진짜 자신의 행복이 무언가를 말하는 사회극적 요소도 거기에는 담겨 있다. 

 

그런데 ‘엄마친구아들’의 이야기는 승효와 석류의 멜로만이 아니다. 이들의 친구인 모음(김지은)과 홀로 딸을 키우며 살아가는 강단호(윤지온)의 사랑이야기도 더해져 있고, 석류의 엄마 미숙(박지영)과 그 친구들인 쑥자매 혜숙(장영남), 재숙(김금순) 그리고 인숙(한예주)과의 중년의 우정이야기도 들어있고, 미숙과 그의 남편 근식(조한철) 그리고 혜숙과 그의 남편 경종(이승준)의 가족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또 여기에 승효네 건축 사무실 직원들 이야기와 모음의 119구급대 이야기 같은 직장 스토리까지 들어있다. 

 

승효와 석류의 멜로드라마가 주축이긴 하지만, 이것은 차라리 가족드라마에 가깝다. 승효네 가족과 석류네 가족 또 모음네 가족과 단호네 가족(딸 하나지만)의 서사가 다양한 스토리들로 묶여져 있어서다. 세련되고 트렌디한 멜로드라마의 틀에서 시선을 빼내, ‘엄마친구아들’이 가진 서사들을 들여다보면 자꾸만 KBS 가족드라마에 그토록 많이 등장해왔던 소재들이 떠오른다. 특히 후반부에 이르러 석류의 귀국 원인인 암과 우울증 투병 이야기가 본격 진행되면서 이런 느낌은 더 강해졌다. 

 

뒤늦게 석류가 암에 걸렸었고 그 사실을 숨긴 채 홀로 투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가족과 친구들이 보이는 반응들은 가족드라마들이 종종 활용하는 ‘불치병’ 콘셉트의 드라마 투르기를 보여준다. 너무나 가슴 아파하던 가족과 친구들이 석류를 위해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준비하고 엄마인 미숙이 하는 말은 더더욱 전형적인 가족드라마의 향기가 느껴진다. “우리 가족이야. 좋은 것만 함께 하자고 있는 가족 아니야. 힘든 거 슬픈 거 아픈 것도 함께 하자고 있는 가족이야.” 

 

딸이 있는 단호와 모음이 그려나갈 로맨스나, 혜숙이 불륜이라고 오해해 경종이 성급하게도 이혼하자고 말하는 대목이나, 석류가 암 투병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친구들이 미숙에게 차라리 화를 내라며 우린 그래도 되는 친구라고 하는 장면 같은 에피소드들 역시 ‘엄마친구아들’이 멜로드라마의 틀이 아닌 가족드라마의 틀에 가깝다는 걸 느끼게 해준다. 

 

이런 선택은 최근 지상파, 케이블, 종편이 보다 폭넓은 시청층을 가져가 시청률을 확보하려는 의도와 맞닿아 있다. 로맨스는 세련된 느낌을 주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하다. 그래서 가족드라마의 다양한 서사구조들을 다시 불러온다. 알다시피 가족드라마는 최근 몇 년간 거의 사라져버렸고 남은 건 KBS 주말드라마 정도다. 과거에 비해 힘이 많이 빠졌다고 해도 KBS 주말드라마는 아직도 20% 시청률은 무난히 나온다. 충성도 높은 중장년 시청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되돌아 생각해보면 지난 봄 큰 화제성과 최고 시청률 24.8%(닐슨 코리아)를 기록했던 ‘눈물의 여왕’도 그 틀은 가족드라마에 가깝다. 물론 현우(김수현)와 해인(김지원)의 세련된 멜로가 중심이지만 그 인물의 가족이 서로 얽히는 데서 만들어진 눈물과 웃음이 압권이었던 드라마가 아닌가. 그리고 JTBC 드라마 역시 ‘닥터 차정숙’에서부터 ‘나쁜 엄마’ 등을 거쳐 최근 방영된 ‘가족X멜로’에 이르기까지 이런 가족드라마의 형태에 로맨스가 어우러지는 방식으로 괜찮은 성과를 냈던 게 사실이다. 그러고보면 가족드라마는 사라진 게 아니라 달라진 환경에 맞게 변화하고 세련되어졌다고 볼 수 있다. 

 

‘엄마친구아들’은 그런 점에서 보면 tvN식 가족드라마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 선택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 tvN이나 JTBC 같은 채널과 가족드라마의 조합이 어딘가 낯설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호불호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시청률은 잘 나오지만 가족드라마 형태는 다소 산만해질 수 있는 게 사실이다. ‘엄마친구아들’을 승효와 석류의 로맨틱 코미디로만 보면 가족드라마의 다양한 양태를 담은 이 드라마가 너무 곁가지를 많이 펼쳐 놓은 느낌이 들 수 있다는 것이다. 

 

‘엄마친구아들’은 너무 짜여진 극적인 밀도를 기대하기보다는 조금 느슨해도 다양한 관계의 맛이 담긴 종합선물세트 같은 드라마로 보면 더할 나위 없이 다채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드라마다. 하지만 기존의 tvN 드라마들이 그러했듯이 밀도 높은 로맨틱 코미디만을 기대한다면 너무 장황한 변죽이 많은 드라마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결과로 다가오더라도 이런 선택은 OTT가 등장하면서 점점 시청층을 빼앗기고 있는 리니어 미디어들의 안간힘이자 색다른 진화가 아닐 수 없다. (사진:tvN)

나이비스

텅 빈 밤거리를 한 소녀가 걸어간다. 음악이 흐르고 그 소녀의 모습은 실사에서 툰스타일의 2D로 또 캐주얼 3D로 변신한다. 변신할 때마다 전자음이 들리고 픽셀이 흩어지고 뭉쳐지는 이미지를 통해 이 존재의 특이성이 설명된다. 이 ‘Done’이라는 첫 번째 싱글 앨범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이 소녀의 이름은 나이비스(naevis)다. SM엔터테인먼트의 에스파의 세계관에서 탄생한 버추얼 아티스트다. 사람은 아니지만 인공지능과 VFX 기술이 결합되어 만들어낸 버추얼 아티스트. 그가 공식적으로 첫 번째 싱글을 내고 본격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최근 몇 년 간 인공지능을 활용한 보이스 기술과 다양한 모델링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버추얼 휴먼이 점점 늘어났다. 그들은 모델로 활동하기도 하고, 인플루언서, 유튜버로 활동하기도 하며 음원을 내고 가수로 활동하는 아티스트들도 생겨났다. 사실 1998년 국내1호 사이버가수로 아담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약 20여년만에 이런 놀라운 기술발전에 의한 진화가 생겨날 거라고는 예상하기는 어려웠다. 물론 당시 사이버 가수 아담 시연회를 통해 내놓은 아담소프트측의 선언은 이 분야에 대한 창대한 꿈이 담겨 있었던 건 사실이다. 당시 아담소프트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기술적인 디지털 혁명의 시대는 이제 문화혁명으로 진행하고 있다. 갓 탄생한 아담은 외형이 완성된 수준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인공지능, 목소리합성 등의 기능을 부여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문화의 전사로서 발전시킬 것이다.” 

 

당시 아담은 그 차별성 때문에 괜찮은 성과를 냈다. 1집 앨범을 20만장 판매했고, 광고 모델도 했으며 갖가지 캐릭터 상품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창대했던 포부와 달리 지속 가능하기는 어려웠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아직까지 이러한 꿈을 실현하기에는 기술력이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이러한 버추얼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아직까지는 낯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26년이 훌쩍 지난 현재는 어떨까. 나이비스를 보면 저 아담의 탄생과 함께 꾸었던 꿈이 이제 막 열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진화한 VFX 기술과 인공지능 기술이 어우러져 거의 실제와 가까운 3D 캐릭터 애니메이션이 구현되고 있고, 목소리 또한 인공지능 보이스로 만들어져 인간과 기계 사이의 어느 지점을 들려주는 듯한 몽환적인 느낌을 구사하고 있다. 나이비스의 싱글 ‘Done’ 뮤직비디오는 바로 그걸 시연해 보여주는 것으로 드디어 이 세계가 본격적으로 열렸다는 걸 말해준다. 

 

앞서 아담이 처했던 두 가지 장벽으로서 기술력과 가상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완벽하게 해결됐다고 보긴 어렵다. 두 가지 장벽이 야기하는 건 바로 ‘불편한 골짜기(uncanny valley)’다. 아이러니하게도 버추얼 아티스트는 실제와 너무 멀어져도 또 실제와 너무 가까워져도 불편함이 느껴진다. 너무 먼 건 조악해서 너무 가까운 건 마치 완벽한 마네킹이 사람을 흉내내는 것처럼 보여서 오싹한 기분을 준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아닌 버추얼 형상에 대해 우리가 갖게 되는 인식과 감각의 문제인데, 이를 넘어서기 위한 방법들은 꽤 오래 전부터 고민되어 왔다. 그 하나는 차라리 인간과는 다른 존재라는 걸 드러내는 방식이다. 키시로 유키토가 그린 만화 ‘총몽’을 원작으로 한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실사영화 ‘알리타’는 인간의 두뇌를 가진 기계 소녀 알리타의 눈을 비정상적으로 큰 캐릭터로 구현했는데 이건 원작이 그렇기도 하지만 다분히 불편한 골짜기를 넘기 위한 의도가 들어있었다. 인간과 다른 존재라는 걸 아예 캐릭터 이미지로 드러냈기 때문에 보는데 별 불편함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나이비스의 뮤직비디오에서 굳이 툰 스타일 2D와 캐주얼 3D를 혼용하는 건 비즈니스적 포석의 의미도 있지만 바로 이런 불편한 골짜기를 넘어서려는 의도도 깔려 있다. 국내에서 아직까지 가장 성공한 버추얼 아티스트로 꼽히는 플레이브가 가진 강점도 바로 여기서 나온다. 실사 3D가 아닌 툰 스타일의 2D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고 실제 아티스트들이 뒤에서 본체로서 활동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개념 자체는 사이버 가수 아담과 똑같지만 달라진 기술력이 완벽한 차이를 만들었다. 리얼 타임 기술을 통해 실시간 소통과 콘서트도 가능한 플레이브는 오히려 인간적인 면을 내세움으로써 이 가상 개념에 팬들을 과몰입하게 만들었다. 

 

나이비스는 이 불편한 골짜기를 넘기 위해 꽤 공을 들여 탄생했다. 일단 바로 등장한 게 아니라 에스파(aespa)의 등장과 함께 그 세계관을 통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이 그렇다. 에스파는 사실상 태생적으로 바로 이 버추얼 아티스트의 세계를 열겠다는 SM엔터테인먼트의 의지가 담긴 걸그룹으로 세계관 자체가 리얼 월드와 버추얼 월드가 연결되고 결합되는 형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에스파라는 그룹명 자체가 그렇다. 에스파(aespa)는 ‘아바타 X 익스피리언스(Avatar X Experience)’를 표현한 ‘ae’에 영단어 aspect(양면)이 합쳐진 이름이다. 이를 풀어서 해석하면 아바타를 통한 두 세계(리얼 월드와 버추얼 월드)를 경험하라는 뜻일 게다. SM엔터테인먼트는 에스파의 등장과 더불어 그 세계관을 담은 세 개의 에피소드를 내놨는데 거기에는 리얼 월드에 사는 이들과 짝을 이루어 버추얼 세계에 생겨난 ‘아이(ae)’라는 일종의 아바타 같은 존재들이 등장한다. 그래서 애초 에스파의 멤버는 카리나, 윈터, 지젤, 닝닝만이 아니라 이들과 각각 연결된 ae들을 합쳐 8명이다. 아바타 개념의 버추얼 아티스트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비스는 이 세계관 속에서 리얼 월드의 에스파를 버추얼 월드로 인도하고 그 곳을 경험하게 해주는 중간 매개자로 등장한다. 본래 그 곳을 벗어나면 안되는 존재지만, 에스파를 돕기 위해 그 곳을 벗어나는데 이것은 버추얼 캐릭터가 일종의 ‘자유의지’를 갖는 과정처럼 그려진다. 나이비스는 이 에스파의 세계관을 통과해 리얼 월드로 나오는 것이고, 그래서 ‘Done’이라는 싱글은 이 버추얼 아티스트의 출사표가 되는 셈이다.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에스파의 세계관에는 반복되어 나오는 장 폴 사르트르의 이 문구는 이 버추얼 아티스트의 세계에 대해 가상과 실재 사이의 경계가 사라질 거라는 걸 예고하고 있다. 본질이 버추얼이라도 그것이 세상을 움직인다면 실존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세계가 우리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다. (글:이데일리, 사진:SM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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