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라는 이름의 거추장스런 옷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 고현정은 지금까지 이 토크쇼에 출연했던 여타의 게스트들과는 달랐다. 대부분의 게스트들이 독한 무릎팍 도사의 당혹스런 질문에 잔뜩 긴장하고 답변을 준비하는 자세를 보였다면, 고현정은 거의 무방비상태의 허허실실함을 보였다. ‘무릎팍 도사’라는 대결구도의 토크쇼에서 강호동이 날리는 펀치에 대해 고현정은 맞 받아치는 인파이터가 아니라 받아주는 척 피하며 상대방의 힘을 빼다가 어느 순간에는 벌처럼 날카로운 펀치를 날리는 마치 알리 같은 스타일의 토크를 구사했다.

먼저 친구인 이미연이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 것에 대해 얘기하면서 고현정은 “짜증나게 예쁘게 나온다”는 표현을 썼다. 어딘지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짜증난다”는 말은 홍상수 감독이 연출한 ‘해변의 여인’에서 그녀가 쏟아냈던 일련의 거친 대사들을 떠올리게 한다. “차가 귀엽네요”라는 말에 “똥차예요”라고 말하고, “키가 크다”는 말에 “잘라버리고 싶어요”라는 말했던 그녀는 그 때부터 이미 자신을 코르셋처럼 옥죄이며 숨막히게 만드는 신비주의를 벗어버리려 작정한 바 있다.

“짜증난다”는 말 한 마디로 기대했던 신비의 탈을 벗어버린 고현정은 스스로 예능 프로그램을 찾아서 보며, “저 상황에서는 이렇게 말해야 하는데”하는 생각까지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쐬기를 박듯, “저 웃겨요”하고 스스로를 우스운 사람이라 표현했다. 재미있는 것은 중간에 강호동이 고현정하면 떠오르는 인물로 ‘모래시계’의 최민수를 거론했을 때 그녀가 보여준 모습이다. 그녀는 추운 겨울 촬영에서 눈물과 함께 흐르던 콧물을 최민수가 닦아주었다고 말하면서 그에게 화면을 보면서 “좀 쉽게 가요”라고 말했다.

이 말은 어찌 보면 신비주의를 본의 아니게 갖게 된 두 스타의 다른 두 길을 말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 말은 여전히 카리스마의 지존으로 이미지 메이킹되어 여전히 그 이미지 속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최민수에게, 자신이 주목받은 건 결혼과 이혼이라고 스스로 밝히듯 그냥 대중들의 시선을 인정해버리는 그 허허실실함이 어쩌면 해법이 될 것이라고 전하는 조언이 아닐까.

콧물 얘기는 술자리 습관이라고 밝힌 ‘벽 타기(?)’로 이어졌고, ‘무릎팍 도사’는 고현정의 탈신비주의를 향한 안간힘을 돕기라도 하겠다는 듯, 연실 코를 푸는 고현정이란 이미지를 끄집어내, “더러워서 방송 못하겠어요”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던지는 과감성을 보였다. 대중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기대 이상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고현정에게 그것은 오히려 그토록 무릎팍 도사를 통해 듣기를 원하던 말이었을 지도 모른다.

조인성, 천정명과 난 스캔들 이야기에서도 그녀는 달변이었다. 자신이 “결혼하자”고 했다는 폭탄 발언을 던진 후에, 그 말을 농담조로 순식간에 바꾸었다. 그리고 조인성은 그 말에 “난 쉬운 여자 싫어요”라고 답했고, 천정명은 “아빠한테 물어봐야 되요”라고 말했다는 걸 덧부여 그들에 대한 배려 또한 잊지 않았다.

고현정은 이제 더 능수능란해졌고, 여유가 생긴 모습으로 돌아왔다. 젊은 시절의 우아하고 청순한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해변의 여인’의 깨는 여자를 거쳐 ‘여우야 뭐하니’의 노처녀, ‘히트’의 맹렬 형사로 자신의 고정된 이미지를 깨는 작업을 해왔다. ‘무릎팍 도사’의 출연은 그 작업이 이제 어느 정도는 일단락되었다는 신호탄으로 보인다. 고현정에서 코현정으로 다가온 그녀. 단지 스타라는 버거운 이미지를 벗어 던진 그녀의 연기자로서의 새 길이 자못 기대되는 순간이다.

만화를 보는 눈과 드라마를 보는 눈

부유층에서도 초부유층에 속하는 이른바 F4의 리더인 구준표(이민호)는 자신이 사랑하게된 서민 금잔디(구혜선)의 집을 찾아간다. 보통의 드라마였다면, 구준표가 제아무리 부잣집 자제라 해도 여자친구의 부모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꽃보다 남자’라는 세계 속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밥상을 앞에 두고 구준표는 높다란 의자 위에 앉아 콩자반을 들고는 “이런 걸 먹느냐”고 묻고 심지어 멸치를 보고는 ‘이건 무슨 벌레냐’고 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잔디의 부모는 무릎꿇고 앉아서 구준표가 반찬 중 갈치를 알아 봐준 것에 대해 감탄하고 고마워한다. 물론 이 장면이 어른들의 속물근성을 풍자하기 위한 것이라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런 목적 자체가 없다. 매일 매일의 힘겨운 세탁 일 같은 것으로 점철된 어른들의 세계는 찌질한 그 무엇으로 치부되는 곳이 ‘꽃보다 남자’의 세계다. 이 곳은 돈이 있으면 자신의 그룹의 백화점에서 여자친구와 단둘이 쇼핑을 즐기기 위해 비상벨을 깨 손님들을 내쫓을 수 있고, 부모에게 간단히 통보하고 해외로 그 딸을 데려갈 수 있는 세계다.

구준표는 입만 열면 구질구질한 서민들의 생활을 하찮은 눈빛으로 내려다보지만, 이 드라마 속의 그는 늘 추앙 받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잘생긴데다가 돈이 있는 그가 서민인 금잔디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신데렐라 이야기지만, ‘꽃보다 남자’는 이 상황을 좀더 양극단으로 표현한다. 즉 금잔디에게 쏟아지는 극단적 이지메 상황을 먼저 보여준 후, F4라는 판타지적 인물들이 그녀를 구하는 식이다. 지나치게 자극적이어서 논란까지 일기도 하지만 극에서 극으로 갈 때, 판타지는 더 커진다.

‘꽃보다 남자’가 요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막장드라마의 하나라고 비판받는데는 바로 이 극에서 극으로 오가는 판타지와, 판타지라고 해도 어떤 일정 부분 현실과 맞닿는 지점에서 발생하기 마련인 비현실성의 노출 때문이다. 극단적인 부자의 행동은 판타지 속에서는 오히려 매력적인 욕망의 하나로 받아들여지지만, 현실과 만날 때는 언뜻 그 금전만능주의의 속살을 드러내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막장드라마라고 비판받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 상황을 너무나 쉽게 이해해버린다는 점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것은 드라마가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의 눈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는 ‘꽃보다 남자’를 우리가 익숙히 보아왔던 드라마로 보는 시선과, 전혀 다른 만화의 드라마 버전으로 보는 시선이 나뉘어져 있다.

물론 드라마 자체가 판타지를 가진 것이지만, 그래도 현실적인 상황을 어느 정도는 반영하는 드라마의 하나로 ‘꽃보다 남자’를 본다면 이 드라마는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작품이 된다. 이 세계 속에서는 오로지 판타지만 존재할 뿐, 현실적인 배려는 전혀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화를 보는 시선, 즉 잠시 현실을 잊고 판타지 속으로 끝없이 빠져 들어가는 그런 시선으로 본다면 이 드라마는 충분히 고개가 끄덕여질 수도 있다.

‘꽃보다 남자’를 바라보는 극단적인 두 시선이 이처럼 공존하는 이유는 이 드라마가 만화적 요소와 드라마적 요소의 결합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만화의 판타지가 주는 재미에 깊이 빠져 TV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시청자가 그 드라마 속에서 현실적인 모습들 예를 들어 이지메 상황이나 사생활 노출 같은 범죄에 가까운 장면을 보았을 때 잠깐 현실로 돌아오는 그 지점이 두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설문 토크로 돌아온 ‘야심만만2’의 가능성

“만 명에게 물었습니다.” 2003년 이 한 마디는 ‘야심만만’이라는 새로운 토크쇼의 서막을 알렸다. 이 토크쇼가 가진 특징은 특정 주제에 대한 설문조사를 통해 대중들의 공감 가는 답변들을 토크의 주제로 올린 데 있다. 설문조사라는 공적 방식으로 끌어 모은 주제 위에서 연예인들의 사담은 공감을 바탕으로 은근히 끌어내졌다. 당시 ‘연예인들끼리 나와 저들끼리 웃고 즐기는’ 토크쇼들이 가진 부정적 인식은 이 설문형식을 통해 공감으로 바뀌었다.

‘야심만만2 - 예능선수촌’으로 몸을 푼 ‘야심만만2’가 다시 돌아간 곳은 바로 그 초창기의 ‘야심만만’이다. 일단 토크를 끌어내는 형식으로서 한계를 지닌 올킬 시스템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 ‘달려라 낭만버스’와 ‘너는 내 노래’라는 코너가 들어섰다. 이 두 코너는 ‘전국민 마음촉촉 프로젝트’라는 문구처럼 시와 노래라는 감성 코드를 부가했지만, ‘야심만만’ 초창기 코너였던 ‘만 명에게 물었습니다’의 또 다른 버전으로 볼 수 있다.

‘달려라 낭만버스’는 출연진이 특정 주제에 맞게 시를 짓는 코너. 첫 회에 보여준 ‘내 여자에게 이런 모습만은 보여주기 싫다’라는 주제는 ‘만 명에게 물었습니다’에서 활용되던 그 주제를 끌어왔다. 이 형식의 토크 코너에서 중요한 것은 이른바 ‘창작의 땔감’이라 불리는 출연진의 경험 토로 시간이다. 즉 주제에 맞는 자신의 경험을 토로하고 그 경험을 소재로 시를 짓는다는 이 형식은, 설문 주제를 통해 출연진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끌어내던 ‘만 명에게 물었습니다’의 변주라고 볼 수 있다.

‘너는 내 노래’는 만 명의 국민에게 특정 주제에 어울리는 노래를 추천 받아 그중 1∼5위를 맞히는 코너로 좀더 ‘야심만만’ 본연의 형식에 다가간 코너다. ‘호감 가는 남자로도 이런 노래 부르면 확 깬다’는 주제에 ‘She's gone’이 1위로 선정되는 식이다. 노래를 소재로 끌어들이면서 이 새로운 버전의 설문 토크쇼는 좀더 다양한 재미에 접근하려 했다. 게스트는 자신이 선택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그 노래에 얽힌 자신의 사연을 토로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 코너에는 캐릭터쇼가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캐릭터는 바로 호동양락 형제로 캐릭터화된 진행자(최양락은 역시 개그의 제왕답게 소심한 DJ라는 캐릭터를 짧은 시간에 구축해냈다)들과, 선정된 노래에 대해 약간의 주석을 달아주는 뮤직 Dr윤(윤종신)이다. 아직까지 제대로 된 형식이 구현되고 있지는 않은 것처럼 보이고, 또 어찌 보면 ‘야심만만’과 ‘라디오스타’가 결합한 듯한 구조로 보이는 코너지만 그 조합은 꽤 잘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새로워진 ‘야심만만2’가 본래 코너의 형식에 가깝게 변화한 것은 일단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야심만만2 - 예능선수촌’의 한계는 ‘올킬 시스템’이 단지 선수들의 토크 경합의 장으로 기능함으로써 공감 없는 ‘저들만의 이야기’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또 게스트의 존재증명을 위해 토크쇼의 올킬 제안이 주로 그들에게 맞춰지면서 상대적으로 고정 MC들의 역할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토크 시스템의 한계도 있었다. 하지만 시와 노래의 버전으로 진화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야심만만2’는 ‘야심만만’이 가졌던 시청자와 공감할 수 있는 주제 안에서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장점을 잘 살렸다고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이 버전업된 ‘야심만만2’는 ‘야심만만’의 재탕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야심만만’이 가졌던 장점들은 ‘야심만만-예능선수촌’의 그것들보다 월등하다 할 수 있다. 이제 첫 발을 디딘 상태라 아직 코너가 안정된 느낌을 주지 못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기왕지사 표방한 노래와 시라는 감성적 부분을 어떻게 살려내 ‘야심만만’과의 차별화를 시도하느냐는 점일 것이다. 초심에 가졌었던 대중들과의 소통을 위한 실질적인 토크 주제의 선정이 회를 거듭하면서 점차 게스트 홍보를 위한 주제로 변질되고, 바로 그것 때문에 이 장점 많은 토크쇼가 망가졌던 과거의 그 경험 또한 잊지 말아야 할 점이다.

‘패떴’에서 ‘절친노트’까지 패밀리가 대세

SBS의 예능을 되살려준 ‘패밀리가 떴다’의 키워드는 ‘패밀리’다. 굳이 패밀리라 이름 붙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본래는 연령대별로 출연자를 선정해 진짜 패밀리를 만들 생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유사가족의 캐릭터를 선택한 것이 지금의 패밀리다. 거기에는 어르신 윤종신이 있고, 맏형 같은 김수로, 막내 같은 대성, 연인 같고 여동생 같은 박예진, 엉성한 동생 같은 이천희가 있다. 이효리와 유재석은 둘 사이에는 남매관계를 유지하면서 각자 윤종신과는 이 여사로, 또 대성과는 형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가족의 멀티플레이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유사가족 관계가 주는 힘은 실로 대단하다 할 수 있다. 시청자들에게 가장 익숙한 가족관계 내에서의 권력구조 같은 것을 통한 상황극이 그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질 수 있다. 또 아무리 대결구도와 긴장감 넘치는 게임을 한다고 해도 결국 한 식구로서 밥을 지어먹고 함께 자는 모습을 통해 시청자들의 가족 판타지를 충족시켜주기도 한다. 유난히 추운 불황의 시기에 이런 따뜻한 가족 판타지는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려울 정도의 매력을 선사한다.

‘패밀리가 떴다’의 패밀리 코드가 대중들의 기호에 맞아떨어져서일까. 지금 SBS의 예능들은 대부분 그 눈높이를 가족에 맞추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인 ‘좋아서’와 ‘절친노트’다.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한 스타들의 리얼 육아보고서’라는 긴 제목을 줄여놓은 ‘좋아서’에서 김건모, 김형범, 유세윤, 김희철, 이홍기의 다섯 아빠들은 한 아이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갖가지 이벤트를 벌인다. 거기에는 이들이 가족처럼 함께 지내는 공간이 있고, 그 공간 속 캐릭터들의 아이와 맺는 관계들이 있으며 여기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웃음의 소재로 잡는다는 점에서 ‘패밀리가 떴다’와 궤를 같이 한다.

한편 ‘절친노트’는 김구라와 문희준이 표상하는 대로 본래 사이가 좋지 않은 관계를 가진 연예인들의 화해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 소재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현재 ‘절친노트’가 선택한 것은 ‘관계가 어색한 연예인들의 친해지기’ 콘셉트다. ‘절친하우스’에서 오광록과 김종국, 하유미와 김국진이 “우리는 절친입니다”를 노래하며 가까워지는 이야기는 역시 ‘패밀리가 떴다’의 어색한 관계들이 친해지는 과정과 같다. ‘패밀리가 떴다’의 어색남녀 김종국과 이효리의 어색한 시간이 흐를 때, 자막으로 ‘절친노트’가 언급되는 것은 이 두 프로그램의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SBS의 예능 프로그램들이 일제히 가족 콘셉트를 그 중심에 놓은 것은 작금의 불황의 시기와 잘 맞아 떨어지는 선택이다. 힘겨울수록 우리에게 더욱 간절해지는 두 가지는 웃음과 가족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현실에 부재한 것을 그 속에서 충족하고픈 가족 판타지의 힘이기도 하다. 하지만 웃음 없는 세상에 한바탕 가족 판타지를 가진 웃음 속에 빠져보는 것이 흉이 될까. 이것이 패밀리라는 코드가 웃음과 만났을 때 발휘되는 힘의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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