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하나로 충분한 그들, 영화인들에게 박수를

꿈이란 단어 하나면 충분했다. 그 단어 하나로 청룡영화제에 모인 영화인들의 눈시울은 뜨거워졌다. ‘개그콘서트’ 뮤지컬 팀이 청룡영화제 2부의 시작과 함께 무대에 올랐을 때만 해도 그저 축하무대 정도로만 생각됐다. 하지만 힘겨운 영화인들의 일상이 겹쳐지면서 인순이의 ‘거위의 꿈’이 뮤지컬 팀에 의해 번갈아 노래되고 안성기가 올 한해 어려웠던 우리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영화인들의 가슴은 뭉클해졌다. 인순이가 피날레를 장식하고 영화인들을 향해 “파이팅!”을 외칠 때 카메라에 잡힌 영화인들의 얼굴은 모두 숙연해졌다.

수상자들의 수상소감에서도 ‘어려운 한 해’를 실감할 수 있었다. ‘우아한 세계’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송강호는 “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하는 건 아니지만 어려운 시기에 상은 격려가 된다”고 했고, 신인감독상과 각본상을 거머쥔 ‘극락도 살인사건’의 김한민 감독은 7번 무산됐다가 8번째 영화화가 된 이 영화에 얽힌 7전8기의 사연을 소개했다. 남우조연상을 받은 ‘즐거운 인생’의 김상호는 “제가 이 일로 밥벌이를 못하는 줄 알았다”며 ‘고마운 아내’를 얘기할 땐 말을 잇지 못했다.

이처럼 올 한 해 우리 영화계는 위기론으로 시작했다. 외국 블록버스터들이 스크린 쿼터 축소로 인해 낮춰진 우리 문턱을 넘나들면서 상반기 우리 영화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이창동 감독의 ‘밀양’으로 전도연이 칸느의 여인이 되었다는 소식은 어려운 영화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었고, 중반을 넘으면서부터 ‘디워’와 ‘화려한 휴가’의 쌍끌이 흥행이 이뤄지면서 우리 영화계는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이후 작지만 의미 있는 작품들의 작은 흥행이 이어져 상반기의 부진을 어느 정도 씻을 수 있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올해 청룡영화제 수상작들은 대부분 어려운 현실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한 영화들이 많았다. 기러기 아빠가 된 조폭을 통해 조직생활보다 더 어려운 가장의 삶을 조명했던 ‘우아한 세계’가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고, 복잡한 욕망의 세상 속에서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물은 ‘행복’이 감독상을 수상했다. 역시 삶의 아픔을 다룬 ‘밀양’의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어려운 가장들의 유쾌한 반란을 다룬 ‘즐거운 인생’의 김상호가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영화를 촬영할 때는 행복한지 몰랐었는데 지금 쉬고 있으니까 그래도 촬영할 때가 감독한테 제일 행복하구나 생각했습니다.” ‘행복’으로 감독상을 받은 허진호 감독의 이 말은 어려운 시기의 영화인들의 진정한 행복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현실이 힘겨워도 그 어려움을 자양분 삼아 작품에 쏟아 부으며 그것으로 행복을 찾는 우리네 영화인들. 꿈 하나로도 충분한 그들에게 이 한 해 참 고생했다는 격려의 박수를 쳐주고 싶다.

생존과 생활을 아우르는 고부갈등을 포착하다

‘며느리 전성시대’의 스토리 라인은 양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하나는 족발집과 청담동집 양가 사이에 벌어지는 유쾌하고 발랄한 며느리, 조미진(이수경)과 시어머니의 부딪침이다. 물론 그 갈등 속에서 며느리의 고충은 당연하지만, 겹사돈을 향해 달려가는 스토리로 볼 때, 역지사지의 위치에서 양가는 며느리의 손을 들어줄 것이 명백하다. 제목 그대로 ‘며느리 전성시대’인 셈이다.

이 이야기는 코믹터치로 그려지면서 갈등 자체가 웃음을 터뜨리게 만든다. 가볍고 경쾌한 진행은 고부갈등이라는 해묵은 드라마 소재를 새롭게 만든다. 며느리는 눈물 짜고 시어머니는 구박하는 공식에 익숙했던 분들이라면 이 상큼 발랄한 며느리의 좌충우돌 이야기에서 신선함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고부갈등이라는 소재는 그 자체가 가볍게만 다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자칫 무거운 소재를 희화화시킨다는 비난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또 하나의 스토리 라인을 병렬적으로 다룬다. 그것은 차수현(송선미)이 며느리로 있는 성북동집 이야기다. 족발집 고부간의 이야기와는 상반되게 이 이야기는 무겁고 심각하다. 시어머니인 이명희(김혜옥)는 이미 며느리를 쫓아낸 전적(?)까지 있는 인물. 며느리를 못 잡아먹어 안달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게다가 남편이라는 사람은 전처를 잊지 못해 방황하니, 며느리인 차수현은 마음 둘 곳이 없다. 제목과 정반대의 ‘며느리 수난시대’를 보여준다.

극단적인 시집살이 속에서 차수현은 자꾸만 눈을 바깥으로 돌린다. 김기하(이종원)는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다. 그것은 불륜이다. 불륜을 다루는 대부분의 드라마들이 욕을 먹는 이유는 그 원인으로 욕망이라는 천편일률적인 공식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 욕망은 성공이 될 수도 있고, 육체적 욕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제시하는 불륜의 이유는 시집살이다. 욕망이라기보다는 도피에 가깝다. 따라서 끝없는 핍박과 무관심 속에서 누군가의 관심을 간절히 바라는데서 비롯되는 그녀의 불륜은 비난보다는 동정을 끌어낸다.

반면 시어머니인 이명희가 보이는 일련의 행동들은 거의 폭력에 가깝다. 며느리에게는 늘 명령을 하고, 잘 했다는 칭찬보다는 못한 부분을 끄집어내기 바쁘다. 며느리는 그 안에서 시어머니의 말 잘 듣는 기계처럼 무표정해진다. 점점 기대감이 없어지자 차수현은 시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하는 대신 자신의 불륜에도 그만큼 당당해진다. 차수현은 이 관계의 끝을 이미 목도했기 때문이다. 남편의 전처가 갔던 그 길을 말이다. 차수현의 도피로서의 불륜은 이쯤 되면 거의 생존에 가깝다. 생존을 위한 선택은 그것이 어떤 것이라도 비난하기가 어렵다.

이 성북동집 이야기는 ‘구박하는 시어머니 - 당하는 며느리’의 전통적인 고부갈등 드라마의 전통을 따르고 있지만 여기에도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며느리가 과거처럼 그저 당하기만 하고 누군가에 의한 구원을 기다리기만 하는 존재로 그려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답답하기만 했던 차수현이란 캐릭터가 적극적으로 불륜을 선택하는 지점에서 드라마는 전통적인 고부갈등의 틀을 넘어선다. 시집살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불륜을 보여주는 이 드라마는 고부갈등에 있어서 도발적인 선택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 두 스토리가 가진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대결구도는 그 무게감이 다르다. 조미진이 며느리로서 겪는 어려움은 불편함의 차원을 넘지 않는다. 그것은 퇴근 후 족발집에서 일을 해야 하거나, 주말에 회사에 나가려고 눈치를 봐야 하는 정도에서 멈춘다. 그러니 그 대결은 새로운 사람이 다른 환경의 생활 속으로 들어와서 서로 적응해 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갈등으로 파국을 만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차수현의 어려움은 불편함을 넘어서 불쾌함에 다다르고 급기야는 인간적인 모멸감에 이른다. 이것은 파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 족발집의 대결구도가 생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성북동집의 대결구도는 생존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생활과 생존이라는 서로 다른 무게감의 고부갈등을 병렬적으로 보여주는 지점에서 ‘며느리 전성시대’는 재미와 공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된다. 생활을 다루는 족발집의 이야기가 시집살이의 디테일들을 통한 웃음을 유발한다면, 생존을 다루는 성북동집 이야기는 시집살이가 주는 감정의 편린들을 모아 공감과 눈물을 유발한다. 불륜이라는 소재가 가진 논란의 소지는 시집살이라는 새로운 틀 속에서 공감으로 바뀌고, 또 한 편의 발랄한 이야기를 세움으로 해서 그 무게에 함몰되지 않는다. 또한 고부갈등을 희화화시키는 가벼움은 다른 한 편의 심각한 이야기를 통해 현실에 발을 디디게 만든다. ‘며느리 전성시대’의 재미와 공감은 바로 이 긴장과 이완을 반복시키는 두 스토리의 변주에서 생겨난다.

수사물에서 메디컬 에로까지 장르사극의 세계

과거 사극이라면 역사적 사료를 먼저 떠올렸다. 하지만 이제 사극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과거로서의 역사적 시점이다. 어느 순간부터 역사라는 무거운 갑옷을 벗어 던진 사극은 점점 상상력을 키워왔고 이제 장르와 몸을 섞기 시작했다. 그 대상은 이제 환타지(태왕사신기)에서부터 수사물(별순검), 미스터리(정조암살미스터리 8일), 메디컬 에로(메디컬 기방 영화관)까지 다양해졌다.

환타지 사극을 주창한 ‘태왕사신기’는 저 광개토대왕이라는 역사적 실존인물을 환타지라는 장르 속으로 끌어들이는 모험을 감행했다. 쥬신의 운명을 타고난 태왕 담덕(배용준)이 사신(네 신물, 네 부족)을 취하는 과정을 그린 이 사극은 환타지라는 장르를 활용하고 있기에 그 자체를 리얼리티로 볼 수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이라는 실제 역사적 인물은 환타지라는 장르 속에서 하나의 상징이나 메타포로서 그려진다. 이것은 마치 한 실제 인물을 하나의 신화로서 그려내는 것과 같다. 이 모험이 광개토대왕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어떤 영향을 줄 지는 알 수 없으나 드라마라는 허구의 장르가 이런 과감한 시도를 했다는 그 자체는 긍정적으로 바라볼 만 하다.

케이블 시청률의 마의 벽을 연일 깨고 있는 조선시대 버전 CSI인 ‘별순검’은 국내에서는 현대물에서조차도 시도되지 않은 ‘과학수사’를 기치로 내세운 수사물이다. 국내의 수사물들이 ‘현장수사’라는 발로 뛰는 액션에 주로 머물러 있었다면 ‘별순검’은 조선시대의 ‘중수무원록’이라는 과학적인 법의학의 잣대를 내세워 본격적인 수사물의 장르를 세우고 있다. CSI가 버젓이 버티고 있는 현대물에서 경쟁력을 가지기 어려운 법의학이란 장르가 조선시대의 특수한 상황 속으로 들어가자 우리 드라마만의 독특한 소재가 된 것이다. 이처럼 역사의 무게를 벗어 던진 사극은 그 시점만 옮겨놓아도 장르물 자체를 새롭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정조암살미스터리 8일’은 영화 ‘영원한 제국’으로 일찍이 조선시대판 ‘장미의 이름’을 축조해냈던 박종원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스텝들조차 영화인들로 구성된 이 작품은 명실상부한 무비드라마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미스터리 사극이 될 것이다. 구중궁궐에서 벌어지는 암살시도라든가, 원행에서 벌어지는 갖은 음모들은 정약용이라는 인물의 추리와 맞물려 보는 이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실제 정조의 죽음에 대한 분분한 설들이 미스터리를 증폭시키는 기폭제가 되는 이 사극은 역시 조선시대라는 배경이 주는 독특함이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이 된다.

‘메디컬 기방 영화관’에 이르면 이제 사극의 장르와의 만남은 무한히 증폭될 수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성과 의학을 접목시킨 이 사극은 그 안에 모든 장르들이 가진 코드들을 내포하고 있다. 에로물의 성격에다가 액션이 가미되고 거기에 메디컬 장르가 섞이면서 만들어지는 이 드라마는 그 각각으로 봤을 때 진부해질 수 있는 소재들이 그 그릇이 되는 사극이란 틀 속으로 오자 참신해진다.

사극의 장르화는 이미 영화에서 시도되었다. ‘음란서생’, ‘혈의 누’, ‘황산벌’ 같은 사극영화들은 이미 장르화된 현대물의 사극 버전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진정한 사극의 전성시대는 드라마 사극과 장르가 맞닿는 부분에서 생겨나고 있다. 공중파에서 정통사극의 틀을 벗어 퓨전 사극이 새로운 사극 중흥의 불씨를 마련했다면, 케이블TV의 공격적인 자체방송 제작은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공중파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운 과감한 표현들이 가능해지면서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를 허물자, 영화인들의 드라마 제작이 무비 드라마라는 형태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 기류 속에서 드라마로서는 가장 블록버스터가 될 수 있는 사극이 체계화되면서 장르화도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장르 사극의 가능성은 무한히 열려 있는 게 사실이다. 현대물로서 성공했던 장르 드라마들은 고스란히 사극으로의 변용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로써 사극은 이제 명실상부하게 현대물의 대척점에 설 수 있는 다양성을 확보하게 됐다. 장르란 그 자체가 하나의 성공의 시스템으로서 제공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한동안 사극전성시대는 지속될 것이 분명해졌다. 장르와 기왕에 몸을 섞은 사극이 다양한 얼굴과 개성을 가진 자손들을 퍼뜨리길 기대한다.

순수한 동심 vs 살벌한 어른들 세상

MBC 월화드라마 ‘이산’에서 이산(이서진)은 어린 시절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그것은 할아버지(영조)가 아버지(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것이다. 어린 이산은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게 한 뒤주 앞에 와서 아버지의 손을 잡고는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그것이 끝이 아닌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살아남은 불씨가 된 이산은 끝없는 암살 위협 속에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힘겨운 일은 아버지를 죽게 한 할아버지 영조(이순재)가 자신을 끝없이 시험에 빠져들게 한다는 점이다. 그 시험에서 탈락하는 순간, 이산은 자신도 저 버려진 아버지의 운명이 될 거라는 점에 몸서리친다.

게다가 자신을 죽이려하는 암살자들이 바로 이산의 고모인 화완옹주(성현아)라는 사실은 절망감을 더 깊게 한다. 아직까지 이산에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음모의 몸통에는 영조의 계비이자 이산의 할머니가 되는 정순왕후(김여진)가 있다. 서로 죽고 죽이게 되는 이 잔인한 가족사는 저 고대 그리스의 비극이나 셰익스피어의 비극만큼 비장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살벌한 어른들 세상 속에서 이산은 생존하기 위해 강해지고 노련해진다. 하지만 이것은 이산이 원하던 것이 아니다. 이산은 늘 어린 시절 우연히 만나 운명의 여인이 되어버린 성송연(한지민)과, 평생의 동무가 된 박대수(이종수)를 그리워한다. 이 숨가쁘게 돌아가는 궁 속의 음모들 속에서 이 세 사람 즉 이산과 성송연, 박대수가 만나는 장면은 과거로 과거로 시간을 되돌려 놓는다. 현실이 아닌 어린 시절의 동무로 돌아간 그들은 실로 어린아이들처럼 말하고 웃고 수줍어한다.

이것은 동화의 세계이다. 동화가 가진 세계와의 대결의식은 늘 순수한 동심과 잔인한 어른들의 세계를 병치시킨다. 이산은 그 깊은 트라우마가 생기기 이전의 시간을 희구하지만 현실은 자꾸만 어른들의 세계 속으로 그를 인도한다. 성송연과 박대수는 그 캐릭터 자체가 어린이에 머물러 있고 그것은 잔인한 어른들의 세계를 잘 알고 있는 이산이 늘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이 어른과 어린이의 대결 속에서 홍국영(한상진)이란 인물이 차지하는 위치는 절묘하다. 홍국영은 어른들의 세계를 철저히 이해하고 있는 인물. 그는 때론 어린이 같은 마음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그가 이산의 옆에 자리하면서 드라마는 그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게 만든다. 홍국영은 그 목적이 어떻든 이산과 그 동심을 지켜내는 파수꾼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시청자들이 ‘이산’에 깊이 빠져드는 이유는 바로 이 아이들의 세계를 가진 이산과 성송연, 박대수를 저 잔인한 어른들의 세계에서 지켜주고 싶은 측은지심 때문이다. 현실 세계의 무거움 속에서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그리는 건 누구나의 인지상정 아닌가. 그러니 이 한 가족이 서로를 죽이고 죽는 잔인한 동화의 세계는 동심에서 어른의 세계 속으로 편입되는 일련의 성장과정을 내포한다. 때론 그것이 퇴행적으로 보이지만 그 어린 시절의 순수로 되돌아감이 현실과의 대결구도를 이룬다는 점에서 이산이 그리는 동화는 그 가치를 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산의 정치란 결국 이전투구의 진흙탕 정치세계를 넘어서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으로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그 곳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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