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 소소하지만 이 방학이 남기는 깊은 여운은

 

저런 방학을 지냈던 때가 언제였던가. 방학이 되면 시골 할머니댁에 놀러가 한 달 간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유년시절을 보냈던 시절이 있었다. 아마도 일찍부터 학원 다니며 방학이 되도 그 반복되는 일과를 보내는 지금의 초등학생들에게는 낯선 풍경일 게다. 간간이 나는 시간에 모바일 게임을 하는 것이 더 익숙한 방학의 풍경일 테니.

 

tvN 예능 <여름방학>은 그 잊고 있던 추억의 한 자락을 꺼내 올리는 프로그램이다. 강원도 바닷가 마을의 집에서 한 달 살기를 하는 콘셉트지만, 그 집이 그려내는 풍경이나 일상들이 이제는 나이 들어 더 이상 방학이 없는 도시의 어른들에게는 그 어렸을 때 겪었던 할머니댁을 떠올리게 한다.

 

자전거를 타고 괜스레 동네를 휘 돌아 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처음에는 낯설어 데면데면했던 뽀삐가 이제는 익숙해져 반갑게 꼬리를 흔든다. 친한 지인들이 찾아와 함께 맛있는 음식을 해먹기도 하고 다락방에 올라 공기놀이를 하며 아이처럼 까르르 대다가는 어느새 창밖으로 지는 해를 넋 놓고 바라본다.

 

<여름방학>은 그렇게 자극적인 재미에 익숙해진 시청자들에게 너무나 소소하고 차분한 프로그램인 게 사실이다. 그래서 시청률도 화제성도 그다지 높지 않지만 일단 계속해서 이 세계를 들여다본 시청자라면 점점 그 곳에 익숙해져 이제는 정유미나 최우식처럼 그 집의 마당들과 거기 피어나는 허브들, 마당에서 그들을 반겨주던 뽀삐가 마치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인 양 반가워지는 느낌을 갖게 됐을 게다. 첫 방송이 나가고 나왔던 왜색이나 표절 논란이 싹 잊힐 정도로.

 

그 집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도 그렇다. 조금만 나오면 보이는 바닷가와 거기 세워진 빨간 등재와 하얀 등대 하나가 반갑고, 최우식이 찾아가 빵 굽는 걸 배웠던 카페나 이들이 가리비를 사가곤 했던 가게, 장을 봤던 슈퍼가 반갑다. 처음에는 낯선 이방인처럼 그 공간에 어울리지 않았지만 이제는 동네 사람이 다된 듯 만나는 이들마저 이웃처럼 인사하는 모습이 정겹다.

 

처음엔 손님으로 왔지만 이제 지인들을 초대하면 이들은 이 집이 노을 맛집이라는 걸 자랑하고 바닷가 풍광이 너무나 좋다고 알려준다. 산책길 끝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와 저 멀리 설악산의 위용을 보여주고 싶어 하고, 건강한 식재료들을 갖고 직접 만든 음식들을 맛보여주고 싶어 한다. 손님은 어느새 그렇게 그 곳의 주인이 된다. 그들은 어느새 그 집을 '우리 집'이라 말하고 그 동네를 '우리 동네'라고 말한다.

 

이것은 <여름방학>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담아내고 있는 색다른 느낌이다. 과거 이진주 PD가 <윤식당>에서 이국의 낯선 땅에서조차 점점 지내다보면 '우리 마을'처럼 느껴지곤 했던 그 경험을 이 프로그램은 전하고 있다. 그건 마치 방학 때 시골 할머니댁에 가면 처음엔 모든 게 낯설다가 이제 돌아올 때쯤이 되면 그 곳이 '우리 집'이라고 말하게 되는 그 경험 그대로다.

 

이제 돌아갈 날이 다가오자 최우식은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며 벌써 한 달이 훅 지나갔다고 아쉬움을 토로한다. 처음에 정유미가 한 달 살기를 같이 하자고 했을 때만 해도 자신은 그걸 부담으로 느끼던 최우식이었다. 그러던 그가 그 곳에서 보내는 일상에 점점 깊이 빠져들고 그래서 한 달 더 살자며 '가을방학'은 없냐고 말하는 대목에서 이 프로그램이 준 소소하지만 깊은 여운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최우식은 이번 한 달 살기를 통해 결과만 보고 달려왔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됐다며 이제는 '과정' 하나하나를 행복하게 느끼겠다고 말한다. 어쩌면 매일 같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느새 과정의 즐거움을 잊고 살아온 건 아니었을까. 그걸 보게 해주는 건 '방학'의 진짜 의미, 말 그대로 어떤 결과를 향해 달려오던 걸 잠시 멈추고 하루하루의 과정들을 느껴보라는 그 시간의 경험이 아닐까.

 

단 번에 되는 일은 없고 많은 것들이 그 하나하나의 과정들을 거쳐 되는 것이다. 그러니 최우식이 말하듯 그 과정을 행복하게 보내는 일이 소중해진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제는 익숙해져 잘도 따르는 뽀삐 같은 존재가 생기는 것처럼. 결과가 급해도 과정은 천천히. 이 어려운 시국도 그렇게 하루하루를 잘 보내는 것으로 지나갈 테니.(사진:tvN)

'악의 꽃', 게임 체인저 김지훈이 끄집어낸 이준기의 흑화

 

놀라운 반전의 연속이다. tvN 수목드라마 <악의 꽃>은 게임체인저 백희성(김지훈)이 깨어나면서 이야기의 흐름이 또 바뀌었다. 남편이 도현수(이준기)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다는 걸 차지원(문채원)도 또 그의 동료형사 최재섭(최영준)도 알게 됐지만 그들은 모두 그 사실을 덮어주려 했다. 그것은 차지원도 최재섭도 도현수와 그 누나 도해수(장희진)가 겪은 비극을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도민석(최병모)이 연쇄살인범이라는 사실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 의해 마녀사냥을 당한 도현수는 그 충격으로 아버지의 환영을 보게 됐고 그래서 스스로가 귀신이 씌웠다 믿기 시작했다. 도해수가 마을 이장을 살해한 건 그를 범하려한 탓도 있었지만 그가 동생을 괴롭히는데 앞장선 인물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그 살인사건으로 죄를 스스로 뒤집어쓴 도현수는 신분을 위장한 채 백희성으로 살아가게 됐다.

 

문제는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던 진짜 백희성이 눈을 떴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두 명의 백희성이 존재하게 됐다는 뜻이고, 그들 가족과 도현수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덮기 위해서는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백희성이 깨어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도현수는 그의 아버지 백만우(손종학)를 도민석의 공범으로 의심하고 그를 궁지에 몰아 체포하려 하지만 백희성은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 사실을 모두 알고는 거꾸로 역이용하기 시작한 것.

 

그 집에서 일하던 가사도우미를 살해한 백희성은 도현수의 지문까지 사체에 남겨 그에게 누명을 씌우고 결국 차지원마저 남편을 의심하게 만든다. 형사로서 증거까지 나오게 되자 차지원은 남편 도현수에게 수갑을 채우려 하지만 그 때 도현수에게 아버지의 환영이 나타난다. 아버지는 말한다.

 

"네 엄마도 나를 사랑한다고 믿었어. 근데 네 엄마가 사랑했던 건 내 허상일 뿐이었지 내 본 모습을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결국 니들까지 버리고 내 곁을 떠나 버렸지. 사랑은 굉장히 간사한 감정이야. 아주 교활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고는 더할 나위 없는 배신감을 주지. 현수야 잘 새겨들어. 살면서 누군가를 믿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면 그건 네가 나약해지고 있다는 증거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이 장면은 이 드라마가 그려내고 있는 '악'이 어떻게 피어나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도현수가 아버지의 환영을 보게 된 건 마을 사람들이 그를 믿지 못하고 귀신 들린 사람이라 의심하며 심지어 아버지의 공범으로 몰아세웠기 때문이었다. 악은 이처럼 누군가의 '의심'에 의해 피어난다. 도민석이 그러했던 것처럼.

 

도현수는 아내 차지원과의 단란한 가정을 통해 그 악을 지워내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믿음과 신뢰가 만들어내는 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것은 도현수가 자신을 숨긴 채 백희성으로 살아왔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의 정체가 드러난 후에도 차지원은 변함없는 사랑과 신뢰를 보내지만, 깨어난 진짜 백희성은 이제 거꾸로 도현수인 척 위장해 살인을 저지르고 누명을 씌운다. 그 누명은 차지원이 눌러 놓았던 의심을 깨워내고 그 의심은 도현수가 애써 지우려 했던 아버지의 환영을 다시 끄집어낸다.

 

<악의 꽃>이 놀라운 건 바로 이런 지점 때문이다. 사건이 끊임없이 전개되고 새로운 게임체인저의 등장으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지만 그 사건들을 통해 사랑과 신뢰 그리고 악의 탄생 같은 인간의 근원적인 면들을 탐구해낸다는 것. 그건 결코 이 작품이 그저 흔한 스릴러도 멜로도 아닌 그 이상을 추구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물론 멜로와 스릴러라는 이질적인 장르를 완벽한 균형으로 시너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악의 꽃>은 충분히 칭찬받을만한 작품이다. 하지만 그 장르의 결합이 사랑과 악이 어떻게 탄생하고 어떻게 변화해가는가를 담아냈다는 건 이 작품에 그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게 만든다. 도현수가 갑자기 흑화되어 아내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장면마저 공감되게 만드는 힘. 이런 게 가능한 건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사진:tvN)

'노는 언니'가 그저 놀기만 해도 다른 건 박세리가 있어서다

 

E채널 예능 <노는 언니>에서 생애 처음 캠핑을 간 언니들이 캠프파이어를 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조심스럽게 스포츠 선수들의 연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 자리라면 보통 연애 이야기가 나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스포츠 선수이기 때문에 그 얘기를 꺼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박세리가 한 마디를 툭 던진다.

 

"근데 선수생활들 오래 했잖아. 솔직히 남자친구 안 사귀어봤다 그러면 거짓말이겠지. 솔직히 (대중들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많지 (그런데) 선수들은 아니거든. 그런데 보는 시선들은 그렇게 생각 안하는 거지. 운동할 때 이성한테 관심 있으면 그만큼 운동하는데 집중 안되고 훈련하는데 지장 있고 그렇게 얘기하지만 절대 안 그렇잖아."

 

박세리의 이야기는 다른 언니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김은혜는 선수 시절에 이성을 만나고 있었는데 감독님이 알아서 그 친구한테 직접적으로 돌려 헤어지라고 해서 결국 헤어졌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을 들은 친구 한유미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박세리의 한 마디가 더해진다.

 

"스트레스가 많이 받는데 그게 반대로 서로 의지하면서 스트레스가 더 풀리게 되니까 집중하는데 있어서 더 좋지." 박세리는 연애가 선수생활에 더 이롭다는 자신의 소신 있는 이야기를 전한다. 어찌 보면 스포츠인들 그것도 여성들에게 특히 편견의 시선으로 보곤 했던 이성문제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걸 그는 말하고 있었다.

 

<노는 언니>가 그저 언니들이 모여 노는 것만을 보여줬다면 이만한 대중들의 관심을 얻지는 못했을 게다. 하지만 박세리가 가끔씩 툭툭 던지는 말들 속에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스포츠인 특히 여성 스포츠인들이어서 겪어야 했던 일들은 이들이 '노는 행위'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박세리는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슬쩍 농담을 섞어 이 프로그램이 자신을 위해 그런 걸 해줘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건넨다. 만일 이것이 실제로 방송화 된다면 그것 또한 그저 연애를 담는 소재 그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더하게 될 것이다.

 

<노는 언니>는 못 놀아본 여성 스포츠 스타들이 이제 좀 놀아보자는 콘셉트로 '생애 최초의 캠핑' 같은 시도들을 담아내고 있지만, 여성이고 스포츠 선수들이었다는 공통점이 꺼내놓는 특별한 대화가 의외로 묵직한 울림을 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날이 왔을 때 운동 또한 병행해야 하는 그 고충을 에둘러 말하지 않고 당당하고 솔직하게 꺼내놓는 이들의 모습은 여성 스포츠 선수들의 삶에 대해 좀 더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또 늘 체중관리에 신경 쓰며 마음껏 먹지도 못했던 선수 시절의 이야기는, 이들이 캠핑에서 온전히 먹고 또 먹는 시간을 만끽하는 모습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애초 <노는 언니>는 처음 만나 고깃집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부터 스포츠 선수로서 살아오며 보통 사람들처럼 하지 못했던 것들이 의외로 많다는 걸 드러낸 바 있다. 곽민정은 늘 훈련이 일상이었던 자신의 삶이 '노잼'이고 그래서 친구가 없다고 했고, 정유인은 결혼하면 아예 수영선수들은 계약을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임신하게 되면 훈련을 받을 수가 없어서란다. 펜싱 선수였던 남현희 역시 자신이 결혼한 선수로는 처음이라 잘 해서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남현희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자신이 갖지 못했던 "여유"를 가지라고 한다고 했고, 음료나 음주 역시 즐기는 선수들도 있었지만 박세리는 선수 시절 탄산음료조차 먹지 못했다고 했다. 운동선수들은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게 당연한 선수시절의 분위기였다는 것. 하지만 박세리는 솔직히 음주가 괜찮다고 생각한다 말했다. 운동을 할 때는 하고 풀 때는 풀어야 더 오랫동안 자기 관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란다.

 

<노는 언니>는 캠핑을 떠나 하루 종일 먹고 또 먹으며 말 그대로 노는 언니들의 시간들을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그 노는 행위가 남다른 가치와 의미로 다가오는 건 여성 스포츠선수들로서 겪어왔던 일들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박세리의 에둘러 말하지 않는 묵직한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그래서 <노는 언니>의 중요한 공기를 만들어낸다. 시청자들이 기꺼이 이 언니들의 놀이를 응원하게 만드는.(사진:E채널)

'브람스', 의외로 센 김민재식 음악 멜로의 묘미

 

음악은 과연 누군가의 위로가 될 수 있을까. SBS 월화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채송아(박은빈)는 자신이 상처받을까봐 애써 윤동윤(이유진)과 강민성(배다빈)이 술에 취해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숨기려 한 박준영(김민재)에게 그 마음은 알겠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말한다. 상처받는 것보다 바보 되는 것이 더 싫다는 것.

 

그런데 돌아서려는 채송화의 귀에 박준영이 치는 베토벤의 '월광' 피아노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채송아가 좋아한다고 했던 곡이다. 채송아는 그 순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그 곡을 듣고 싶지 않다고 멈춰 달라 하지만 박준영은 계속 연주를 이어간다. 그런데 중간에 갑자기 곡이 슬쩍 생일 축하곡으로 변주한다. 박준영은 그 날이 채송아의 생일이라는 걸 알았고 그래서 그 곡은 그가 건네는 생일선물이었다.

 

박준영은 큰 위로를 받아 멍하니 서 있는 채송아에게 대뜸 "우리 친구해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일어나 다가가 채송아를 안아주며 이렇게 말한다. "아니 해야 돼요 친구. 왜냐면... 이건 친구로서니까." 그 순간 채송아는 생각한다. '나는 음악이 우리를 위로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정작 내가 언제 위로 받았었는지는 떠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만은 알 수 있었다. 말보다 음악을 먼저 건넨 이 사람 때문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이 인상적인 장면은 이 드라마가 그려가는 멜로의 색다른 질감을 잘 보여준다. 제목에 담겨 있듯이 이 드라마는 음악이 인물들 간의 감정과 관계를 표현해내는 매개 역할을 한다. 박준영은 천상 피아니스트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런 그의 성격과는 달리 보다 적극적으로 구애한 그의 친구 한현호(김성철)와 연인이 된 이정경(박지현)은 박준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이미 친구의 연인이 된 이정경을 그는 받아들일 수 없다.

 

박준영에게 슈만의 '트로이 메라이'는 이정경에 대한 애증이 담긴 곡이다. 이 곡이 들어있는 '어린이의 정경'을 좋아해 거기서 따와 이름 지어진 이정경을 위해 한때 박준영은 트로이 메라이를 연주하곤 했지만, 이제 친구의 연인이 되면서 그 곡은 더 이상 치고 싶지 않은 곡이 됐다. 어쩌다 한현호와 이정경이 다 모인 자리에서 채송아가 그 곡을 신청했을 때 박준영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연주를 했다. 그건 박준영이 채송아에 대한 마음을 접고 있다는 걸 에둘러 표현한 것이었다.

 

박준영이 브람스를 싫어한다고 말하는 대목은 자신의 상황이 브람스의 상황 같기 때문이었다. 평생 클라라를 사랑했지만 슈만의 아내인 그를 옆에서 바라보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브람스. 브람스를 연주하지 못하는 건 피아니스트로서 넘어야할 장애물이기도 하지만, 관계에 있어서도 풀어야할 숙제이기도 했다.

 

박준영에 대한 마음을 점점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정경으로 인해 이를 알게 된 한현호는 준영에게 그 아픈 마음을 꺼내놓고, 이들 세 사람의 관계는 점점 불편해진다. 드라마는 이들의 불편해진 관계를 함께 협연하는 과정에서 합을 맞추지 못하는 에피소드로 풀어낸다. 연주를 시작하려다 이건 아니라는 이정경에게 뭐가 문제냐며 문제를 해결하고 가자는 한현호 그리고 뭐든 맞추겠다는 박준영. 그건 협연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들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이처럼 음악을 통해 인물들의 감정변화를 표현해낸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주목되는 인물은 박준영이다. 그의 말로 직접 쉽게 하지 않는 성격은 음악으로 에둘러 표현하는 이 드라마의 멜로 방식을 잘 담아낸다. 박준영은 '서서히, 조금씩(포코 아 포코)' 다가오지만 '진심으로(이니히)'로 음악을 통해 마음을 전하고 '지나치지 않게(논 트로포)' 그 마음을 건넨다. 그 사랑법은 느린 듯 보여도 의외로 세다.

 

채송아에 대한 박준영이 마음을 전하는 방식은 에둘러 표현되어서 오히려 더 강한 여운을 남긴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송아씨를 만나야겠다. 송아씨를 만나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그래서 덕분에 알겠어요. 제 생각이 틀렸었네요. 낮에 학교에 갔던 게 사실은 웃고 싶었던 거였네요. 같이 있으면 즐겁고 자꾸 웃게 되니까... 송아씨가 보고 싶었던 거였네요."(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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