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어디가> 배낭여행, 뉴질랜드와는 다른 까닭

 

상하이의 한 시장에서 중국소녀 쩡쯔린은 왜 빈이를 따라왔을까. 그리고 쩡쯔린과 빈이가 같이 손을 잡고 친해진 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물론 아이들 특유의 친화력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어른들이라면 그렇게 다가오는 누군가를 의심부터하고 봤을 테니 말이다.

 

'아빠 어디가(사진출처:MBC)'

하지만 여기에는 또한 <아빠 어디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장면들이 있다. 성동일과 빈이는 중국에서도 낯선 얼굴이 아닐 것이다. 이미 중국판 <아빠 어디가>가 중국내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고 우리의 <아빠 어디가> 역시 인터넷 등을 통해 중국에 충분히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성동일은 시즌1에서부터 계속 출연했기 때문에 더더욱 중국인들에게 익숙하다. 아이의 손을 잡고 여행하는 아빠의 모습이 흔하지 않은데다 그것을 카메라로 찍고 있으니 중국인들의 시선에도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실제로 방송은 그 부분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카메라에 포착된 중국인들은 이들 부녀를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는 모습이 보여지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성동일과 빈이가 함께 공항에서 시내까지 지하철을 타고 오는 장면이 우리에게는 그저 재미로 다가왔을지 모르지만 중국인들이 봤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 졸린 빈이가 옆자리에 앉은 할아버지에게 기대서 조는 장면은 우습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사랑스럽게 다가갈 것이다. 거기에는 국가 간의 언어적 문화적 장벽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아이의 순수함이 묻어난다.

 

홍콩에 간 김성주와 민율이가 규정을 잘 몰라 지하철에서 빵을 사서 먹으려다가 경찰에 의해 제지당한 장면도 홍콩인들에게는 흥미로운 이야기다. 거기에는 문화적 차이가 가져오는 웃음이 자연스럽게 묻어있고 또한 아빠와 아이가 낯선 해외에 뚝 떨어졌을 때 느낄 수 있는 국가를 초월한 공감대가 들어 있다.

 

한편 자신이 예약한 호텔 직원들에게 환대를 받는 모습도 <아빠 어디가>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장면이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던 직원들에게 영어로 더듬더듬 <아빠 어디가>를 찍고 있다고 알려주자 팬이라며 반색하는 모습이 그렇다. 규정상 어린 아이가 여러 명이 함께 자는 도미토리에서 잘 수 없다며 같은 가격으로 2인실을 제공해주는 호텔 직원들의 모습에서는 팬심이 느껴졌다.

 

뒤늦게 홍콩행에 합류한 윤민수와 윤후가 공항으로 가며 서로 중국어를 뽐내는 모습은 아마도 중국에 이 프로그램이 방영된다면 꽤 흥미로운 반응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발음하기가 쉽지 않은 중국어를 곧잘 발음하는 윤후가 비행기에서 스튜어디스에게 중국말을 해보는 장면은 중국인들에게 윤후의 매력을 십분 보여줄 것이다.

 

홍콩에서도 김성주와 달리 척척 일사천리로 유쾌한 여행을 하는 윤민수의 모습 역시 주목받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윤민수 부자와 김성주 부자의 홍콩에서의 만남과 그렇게 이어질 함께하는 홍콩 여행은 그 서로 다른 두 부자의 모습 때문에 더욱 흥미진진하게 다가온다.

 

여러모로 <아빠 어디가>의 이번 배낭여행은 지난 뉴질랜드 여행과는 사뭇 다른 목적과 느낌을 갖고 있다. 뉴질랜드 여행이 그간 수고한 출연자들에 대한 방송사 차원에서의 포상에 가까운 것이었다면, 배낭여행은 이미 <아빠 어디가>의 인기로 실감하고 있는 아시아권 예능 한류에 대한 교감의 차원이 더 크다는 점이다.

 

사실 아이들만큼 국가를 초월해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존재들도 없을 게다. 상하이에서 빈이가 우연히 만난 중국소녀 쩡쯔린의 그 짧은 출연에도 우리네 시청자들의 반응은 의외로 컸다. 물론 <아빠 어디가>가 갖는 특유의 소박함을 잃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그 무한한 확장 가능성을 닫아버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건 아이들의 행복이고, 그것이 방송에 담겨졌을 때 가져올 긍정적인 효과다. <아빠 어디가> 배낭여행은 그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 원전비리가 말해주는 끔찍함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원전 비리 뒤에 숨겨진 잔혹한 진실을 끄집어냈다. 흔히들 원자력 발전소라고 하면 홍보 영상을 통해 노출되고 있는 것처럼 마치 안전의 대명사처럼 여기는 면이 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일까. 어쩌면 실제 현실은 다르고 다만 그렇게 안전해야만 된다고 믿고 싶은 건 아닐까.

 

'그것이 알고 싶다(사진출처:SBS)'

일본 후쿠시마에서 쓰나미에 의해 촉발된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눈앞에서 보면서도 우리는 그것이 다른 나라의 일이라고만 치부했던 건 아닐까. 원자력 발전소의 위험성이 아니라 쓰나미가 불러온 불운의 결과물처럼 여긴 데는 그 사안이 너무나 끔찍하기 때문에 우리의 일이라고는 도무지 믿고 싶지 않은 심리도 있었을 게다.

 

하지만 <그것이 알고 싶다>가 보여준 우리네 원전의 문제는 실로 충격적이었다. 국내 소비전력의 3분의 1을 책임지는 원자력 발전소지만 만일 사고가 난다면 그 후폭풍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걸 우리는 이미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통해 목도한 적이 있다. <그것이 알고 싶다>가 취재한 한 인물의 2의 세월호가 원자력 발전소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는 이것이 남일 아닌 우리의 일이라는 걸 새삼 실감하게 만들었다.

 

오래된 원전 부품을 신품으로 교체하는 건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일 것이다. 하지만 취재에 응한 부품 납품업체 직원의 증언에 의하면 구품을 새 부품처럼 둔갑시켜 재납품하는 비리가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기계팀장이 업체와 짜고 부품 교체를 하지도 않고 한 것처럼 보고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적어도 20억에서 30억의 돈이 오간다고 한다. 71년에 기공되어 30년 연한이 끝나 10년을 다시 연장하는 고리 1호는 그래서 지금 심각한 상태라는 것.

 

전문가들은 원자력 발전소에 적어도 500만 개의 부품이 있는데 이 부품 모두가 정상적으로 돌아야 비상사태가 벌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부품 납품 비리가 자행되고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원진비리 중간 수사결과를 보면 이 사건으로 한수원과 한국전력기술 전 현직 직원들과 납품업체 직원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비리가 깊다는 것이다.

 

원전 부품을 납품하는 거래에 있어서도 아예 사양서를 납품업체가 만드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납품업체 선정 수주 과정에서도 업체들 간의 담합이 공공연히 벌어지기도 한다고 한다. 즉 원전 비리가 고리 1호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원자력 발전소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원자력 발전소는 연료봉을 냉각시키기 위한 냉각수 공급이 필수적이다. 만일 전기가 끊겨 냉각수 공급이 안 된다면 연료봉의 온도가 몇 천도까지 올라가 결국은 폭발하는 최악의 사태를 맞을 수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바로 그 사례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고리 1호 원전에서도 벌어졌다는 것. 작업자 실수로 전원이 전부 끊긴 상황에서 작동했어야 할 비상 디젤발전기가 작동하지 않아 12분 간 정전되는 상황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수소폭발 전 단계까지 간 실로 절체정명의 위기상황이다.

 

하지만 한수원측은 이 중대한 사고를 은폐 축소하려 했다고 한다. <그것이 알고 싶다> 취재팀의 질문에 한수원측은 “12분 만에 전원을 복구했기 때문에 영향은 미미했고 또 직원들의 대처로 잘 수습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그런데 왜 굳이 일지까지 조작하려 했던 것일까. 이미 한수원측의 안전 불감증은 그 수위를 넘고 있다고 전 한수원 직원은 증언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 역시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지만 그것을 무시함으로써 이렇게 큰 사고로 이어졌다고 한다. 일본 전 총리는 이 피해 규모가 전쟁에 준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해일이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사람이 문제인 것이다. 안전에 대한 과신이나, 문제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쉬쉬하는 문화는 그 결과가 너무나 참혹하다는 점에서 결코 그냥 지나칠 문제가 아니다.

간만에 볼만한 <개과천선>, 왜 조기종영?

 

애초에 18부작이었던 MBC 수목드라마 <개과천선>16부로 조기종영 한다는 소식에 드라마 팬들은 의아할 수밖에 없다. 간만에 볼만한 드라마가 아닌가. 지금껏 봐왔던 변호사 소재 드라마들과는 차원이 다른 깊이가 있고, 현실에 대한 냉엄한 비판정신이 살아있는데다, 김명민과 김상중의 명불허전 연기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었다. 그런데 조기종영이라니.

 

'개과천선(사진출처:MBC)'

시청률이 과도하게 떨어진 것도 아니다. 중간에 두 차례 결방을 한 탓에 드라마의 연결고리가 느슨해지면서 시청률이 조금 떨어진 부분은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완성도와 깊이를 가진 드라마가 9%대를 유지한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개과천선>은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드라마는 아니다. 지금껏 다루지 않았던 금융 전문 변호사의 세계는 그 자체로 대단히 복잡하다.

 

복잡한 금융 전문 변호사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리얼하게 다루게 된 건 그것이 실제로 대중들을 눈속임하기 위한 금융의 술책이기 때문이다. 그 복잡한 금융의 세계는 일반 서민들이 모두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다. 심지어 금융전문가들도 컴퓨터를 돌려봐야 그 결과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니까. 그러니 서민들은 전문가들을 말을 그저 신뢰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만일 믿어왔던 은행조차 복잡한 금융상품을 내놓으며 뒤통수를 치려한다면 어떨까.

 

<개과천선>이 다루는 이야기는 그래서 현실적으로 대단히 민감한 문제들이다. 겉으로 보기엔 신뢰의 표상처럼 보이는 금융권이나 대기업의 이면을 슬쩍 드러내기 때문이다. 물론 초반에 다뤄진 몇몇 에피소드들도 우리네 현실에서 벌어졌던 사건사고들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이 드라마의 대본은 날카로웠다. 태안 기름 유출사고를 직접적으로 겨냥한 에피소드도 있었고, 종금사태를 소재로 다룬 것도 있었다.

 

이렇게 완성도도 높고 메시지도 충분히 의미 있는 <개과천선>의 조기종영은 사실 이해하기가 어렵다. MBC측은 이것을 김명민의 스케줄 탓이라고 얘기했지만 한 드라마의 조기종영이 그저 배우의 스케줄 하나 때문이라고 치부하는 건 어딘지 방송사의 책임회피 같은 느낌이 짙다.

 

김명민 측은 이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스케줄로 인해 그렇게 결정된 것 같지만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것. 김명민 측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미 오래 전부터 영화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고는 해도 결방만큼 촬영시간도 충분히 있었다는 걸 감안해보면 조기종영을 단지 스케줄 탓으로 돌리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다. 이미 3회부터 생방송 일정이었다는 드라마 제작현실은 결방에도 벌충을 하지 못한 속사정을 드러낸다.

 

즉 이 모든 책임을 김명민이라는 배우 한 사람의 스케줄 탓으로 돌리는 건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한 김명민 측에서 말하는 생방송 촬영의 힘겨움은 물론 배우의 어려운 입장을 전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직접적으로 조기종영의 이유로 제시되긴 어렵다. 그 많은 생방송 촬영이 드라마판에서 반복되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드라마가 조기 종영된 적이 있던가. 방송사는 김명민의 스케줄 때문이라고 얘기하고 김명민 측은 힘겨운 제작현실 때문이라고 얘기하지만 어딘지 그 두 가지 이유 모두 궁색한 변명처럼 들리는 건 왜일까.

 

배우 한 사람의 힘이 언제부터 방송사의 편성을 쥐락펴락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갖게 됐단 말인가. 만일 <개과천선>이 더 높은 시청률을 내는 드라마였다면 과연 MBC는 역시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까. 현실적으로 말해 방송사의 의지가 있었다면 배우의 스케줄 조정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았을까. 혹여나 의심되는 부분은 이 드라마가 가진 가감 없는 현실비판이 누군가에게는 몹시 불편했을 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과연 이 문제가 단지 스케줄 문제와 생방송 드라마 제작현실 때문 만이었을까. 좋은 드라마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없게 된 현 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

<개과천선>의 질문, 변화는 가능한가

 

시간

MBC <개과천선>은 시간에 대한 드라마다. 거기에는 과거가 있고 과거로부터 단절된 현재가 있으며 그 현재가 만들어갈 미래가 있다. 김석주(김명민)는 기억상실을 겪게 되는 사건을 통해 과거로부터 단절된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과거 속에는 자신만 있는 게 아니다.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이 있다. 차영우펌에서 에이스로 일하며 관계해온 대기업의 인물들은 김석주가 자신들을 대변해 더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기를 바란다.

 

'개과천선(사진출처:MBC)'

하지만 과거와 단절된 김석주는 현재라는 시간대에 새로운 자신을 세우려 한다. 심지어 과거의 자신이 만들어놓은 것들을 현재 뒤집으려 한다. 현재는 과거와 대결한다. 그의 약혼자인 유정선(채정안)과 그녀의 집안인 유림그룹은 과거로부터 튀어나온 이들이지만 현재의 그와 약혼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과거의 김석주와 유정선의 관계는 이익관계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현재의 김석주는 진정으로 유정선을 걱정하는 관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집안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위기에 처한 유정선을 구해주는 과정은 현재와 과거의 대결에서 그의 승리를 보여준다.

 

시간과 기억

기억으로 단절되어 있지만 시간은 단절되지 않는다. 병을 앓고 있는 김석주가 키우는 개는 기억 속에서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인권변호사인 아버지 김신일(최일화)도 마찬가지다. 인권변호사의 삶이 가족을 고통스럽게 한 것에 대한 반발로 김석주는 과거 아버지로부터 등을 돌리나, 그 기억을 지워버린 그는 아들로서 아버지를 찾아간다. 그 기억이 남아 있는 아버지는 아들의 변화에 이상함을 느낀다.

 

흥미로운 건 아버지 또한 치매를 앓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점점 그의 기억은 사라져간다. 만일 아들이 과거의 기억을 잃고 아버지 또한 기억을 잃어버린다면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얼마나 위태로워질까. 관계란 기억의 축적이 만들어낸 산물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 가냘픈 기억의 끈은 이제 과거의 기억을 잃고 현재의 기억으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아들 김석주에 의해 이어져갈 것이다. 아버지를 도와 은행에 피해를 본 중소기업을 도우며 그는 아버지를 닮아간다.

 

시간과 기억 그리고 선택

시간은 무수한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기억으로 축적된다. 김석주는 차영우펌에 사직서를 내지만 그 시간에 강직한 판사였던 전지원(진이한)은 차영우펌에 들어온다. 김석주의 선택과 전지원의 선택은 그래서 이제 그들의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갈 것이고 기억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견고한 시스템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은 선택하려 하지만 시스템은 언제든지 그 사람을 바꿔치기 한다. 시스템에 입장에서 전지원은 김석주의 과거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때로는 사람이 시스템과 대항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결국 사람이 만든 것이다. 차영우펌이 가진 그 시스템의 견고함은 어쩌면 김석주 자신이 과거에 이룩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차영우펌을 나온 김석주는 그래서 또다시 과거 자신이 만들었던 이 괴물 같은 시스템과 맞서게 된다. 과거는 또다시 현재와 대결한다.

 

변화, 개과천선은 가능한가

<개과천선>이 김석주라는 문제적 인물을 통해 보여주려는 건 한 사람의 선택이 얼마나 중대한 미래를 만들어내는가 하는 점이며, 그 선택으로 만들어진 과거를 되돌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점이다. 기억이라는 견고한 틀로 과거와 현재가 단단히 연결되어 있는 인간은 사실 변화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만일 과거를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김석주는 그 기억의 일관성 속에서 현재와 미래를 그냥 살아갔을 가능성이 높다.

 

변화는 어렵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다. 김석주 변호사가 과거 그러했듯이 현실에서는 도대체 인간이 어쩌면 저런 끔찍한 선택을 아무런 가책 없이 할 수 있을까 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시스템이 하는 것이다. 각종 금융시스템은 그 숫자들 뒤에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을 은폐한다. 변호사들이 다루는 법조항들은 그 문구들 뒤에 달린 누군가의 인권을 지워버린다. 인간이 아니라 그저 숫자를 다루고 법조항을 다루고 있다는 착각은 끔찍한 선택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것은 기억의 조작이다. 시스템이 조장하는 일종의 치매다.

 

김석주 변호사는 그래서 그렇게 시스템에 연루된 과거를 지워버리고 시스템을 빠져나오는 것으로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과거의 기억을 잃었지만 어쩌면 그것은 시스템이 잠시 인간성에 대한 기억상실을 조장했던 기억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새로운 선택은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낸다. 시스템과 대결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변화는 불가능하지 않다. 흔히들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나오는 이들이 느끼는 그 순간의 무한한 자유가 새로운 선택들을 가능하게 하듯이. 김석주 변호사가 차영우펌을 빠져나올 때 그를 향해 축복처럼 쏟아지는 햇살처럼. 변화는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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