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의 시선에서 같음의 시선으로

사랑해요. 고마워요. 그리워요. 보고 싶어요. 화면 속 가족들은 이역만리에서 고생하는 그들의 남편, 아빠, 아들에게 그 단순하지만 가슴을 울리는 마음을 전했다. 까르끼의 아내는 "정말 사랑해요. 여보 빨리 오세요."하며 환하게 웃어주었고, 예양의 아버지는 "우리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동생아 많이 보고싶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칸의 누나는 "너 먹는 것 많이 좋아하잖아. 그런데 우리가 해줄 수가 없구나"하며 말을 잇지 못했고, 쏘완의 아내는 "우리는 모두 잘 지내고 있다"며 "당신이 매월 보내주는 돈으로 우리는 잘 살고 있다"고 말했다. 아낄의 부모님은 "우린 너를 정말 많이 사랑하고 네가 보고 고 빨리 만나고 싶다"고 마음을 전했다.

그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시베리안 야생 수컷 호랑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역만리 떨어진 가족들을 담아온, 나영석 PD가 작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한 그 영상을 보며 외국인근로자 친구들은 눈물을 흘렸고, '1박2일' 출연진들은 그들의 눈물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늘 자신이 걷던 길,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눈가가 촉촉해진 부모님들을 보며 파키스탄에서 온 아낄은 서투른 한국말로 "가장 큰 선물 같아요. 작은 선물 아닙니다. 이거."라고 말했다. 그랬다. 그들에게 가족만큼 큰 선물은 세상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전주곡에 지나지 않았다. 화면으로 가족들을 확인한 외국인근로자 친구들이 그 그리움에 헛헛한 발걸음을 숙소로 옮길 때, 거기에는 새로운 기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꿈속에서도 그렸을, 화면 속에 있던 그 가족들이 거기 있었다. 유난히 덩치가 산만해 그 뒷모습이 유독 쓸쓸하게 보이는 까르끼가 그토록 보고 싶던 아내와 아이들을 보고는 온몸으로 흐느끼는 모습을 본 강호동은 결국 속절없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까르끼의 아내는 까르끼를 꼭 껴안고 마치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깍지를 낀 채, "같이 살자"는 말을 반복했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칸의 노모는 볼을 맞댄 채 "우리 아들, 우리 아가"하며 눈물을 흘렸고, 파키스탄에서 온 아낄의 어머니는 '고생하는 아들'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들을 보며 은지원은 "못 알아들어도 무슨 말인지 다 알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장난기어린 눈시울도 붉어졌다. 미얀마에서 온 예양의 아버지는 눈물을 흘릴까봐 차마 아들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며 예양을 안고 있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캄보디아에서 온 쏘완은 수줍게 아내를 안아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왜 우리는 눈물을 흘렸을까. 거기서 우리 자신들의 가족들을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와 하등 다를 바 없는 그 뜨거운 인간애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외국인근로자 친구들과 함께 한 '1박2일'이 보여준 것은 그래서 공감과 공존이다. 피부색이 다르다고, 국적이 다르다고, 조금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고, 심지어 이제는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다르게 바라보던 그 차별적인 시선은 거기엔 없었다. 그들은 우리처럼 누군가의 가장이었고, 누군가의 사랑스런 아들이었으며, 누군가의 자랑스런 아버지였다. '1박2일'은 공감과 공존의 시선으로 이들을 바라봄으로써, 차별에 대한 그 어떤 저항적인 외침보다 더 강한 울림을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그래서 그 짧은 '1박2일'은 그 길디 긴 차별적 시선의 시간들을 단번에 뛰어넘은 기적의 순간이기도 했다.

착한 드라마의 새로운 계보, '괜찮아, 아빠 딸'

'괜찮아, 아빠 딸'은 세련된 드라마는 아니다. 하지만 이 투박한 드라마에는 진심이 있다. 보면 볼수록 마음이 흐뭇해지고, 따뜻해지며 착한 사람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솟구치게 한다. 진심의 힘이다. 착한 드라마에 어떤 계보가 있다면, '괜찮아, 아빠 딸'은 '고맙습니다'나 '찬란한 유산' 같은 드라마를 잇는 드라마가 될 것이다.

그 첫 번째 진심은 먼저 세상의 모든 아빠들의 마음을 담는다. 가족들에게 어떤 일이 닥쳐도 그것을 온전히 혼자 감당하면서 가족들에게는 그저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는 아버지들. '괜찮아, 아빠 딸'이라는 드라마는 그래서 은기환(박인환)이라는 아빠가 자식들에게 "괜찮다"고 안심시키는 말로 시작한다. 심지어 병상에 누워 몸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고 할지라도.

하지만 이 드라마의 진심은 이게 끝이 아니다. 아버지 은기환이 쓰러져 누워버리자, 그 빈 자리를 그제야 느끼게 된 자식들은 이제 거꾸로 아버지에게 "괜찮다"고 말한다. '괜찮아, 아빠 딸'이라는 제목은 이제 자식이 아버지에게 "아빠 딸은 괜찮다"는 의미로 전달된다. 속 깊은 첫째 딸, 애령(이희진)은 마치 심청처럼 가족을 위해 만인 병원장의 망나니 아들 진구(강성)와 결혼한다. 눈칫밥을 먹으면서도 이 속 깊은 딸은 가족에게 자신은 "괜찮다"고 말한다.

철없는 둘째 딸 채령(문채원)은 여전히 철이 없지만, 아버지에 대한 이해는 더 깊어진다. 아버지의 부재를 통해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가족들은 자신들이 가진 진짜 중요한 것들을 찾게 된다. 그것은 돈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다.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영원한 행복이 없듯이 영원한 불행도 없다"는 말을 되뇌이며 희망을 놓지 않는다.

이 드라마가 전하는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은기환 집안의 불행에 발단이 됐다는 죄책감으로 타인이지만 마치 아버지를 모시듯 은기환을 병수발 하는 혁기(최진혁)와 욱기(이동해)로 인해 사회적인 메시지로 확장된다. 즉 가족의 테두리를 뛰어넘어 서로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사회적 공감의 차원으로 나아간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같은 처지의 사람을 이해하듯, 그들은 자신들 역시 힘겹게 살면서도 기환네 가족을 도우려 한다.

반면 실제로 이 사건을 일으킨 종석(전태수)은 모든 걸 다 가진 부유층 자제지만, 어쩌면 그 부족할 것 없는 삶 때문에 타인에 대한 공감이 없다. 마치 싸이코패스처럼 마음이 없는 존재로 그려지는 종석은 그래서 자본으로 둘러싸여 그 속에 감춰진 진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른바 쿨한 현대인의 극화된 캐릭터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아버지 은기환으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착하디 착한 심성을 가진 두 딸, 애령과 채령이 엮어갈 사랑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이다. 속 깊은 애령의 심성은 심지어 망나니 남편인 진구의 마음까지 흔들어놓고, 그 가족에게도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 있으며, 채령은 혁기를 만나 돈보다 더 가치 있는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고 있다. 이 착한 두 딸이 만들어가는 착한 사랑에 대한 기대감은 그저 멜로가 아니라, 착한 사람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사회적 공감으로 시청자들을 인도한다.

이처럼 사회적 메시지로 확장된 '괜찮아, 아빠 딸'은 그래서 이 땅의 가난한 모든 이들에게 이 드라마가 전하는 위로의 말이 된다. 아무리 힘겨워도 우리는 서로를 공감할 수 있고, 그 공감의 힘은 돈이 주지 못하는 진짜 사랑의 가치로 우리를 따뜻하게 할 것이라는 게 그 진심어린 위안의 말이다. 투박하고 가난한 드라마 '괜찮아, 아빠 딸'이 그 어떤 화려한 언변과 외관을 가진 드라마보다 더 가슴을 울리는 건 그 진심이 우리 마음에 닿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극과 캐릭터, 그리고 보편적 가족애

'자이언트'에서 박소태(이문식)라는 캐릭터는 독특하다. 그는 주인공 이강모(이범수)와 어린 시절 함께 구두닦이를 하며 생존해온 인물. 어찌 보면 가까운 절친이지만, 그 하는 짓은 영락없는 강모의 적이다. 그는 정식(김정현)이 살인을 저지르고 그 혐의를 강모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을 알면서도 돈 몇 푼에 친구를 팔아먹는다. 심지어 강모를 살해하라는 사주를 받고는 감옥까지 일부러 들어오기까지 한다. 그 때마다 강모는 위기를 모면하는데, 그렇다고 강모가 박소태를 처벌하지는 않는다. 박소태는 그런 강모 앞에 참회하는 듯 보이다가도 기회만 잡으면 다시 강모의 적으로 돌아서곤 한다. 결국 노역장에서 다리를 절단하게 될 위기에 처한 그를 구한 강모 앞에 드디어 박소태는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적으로도 보이고 절친으로도 보이는 박소태라는 인물의 끝없는 심적 갈등과 변화는 '자이언트'의 캐릭터들이 왜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지를 잘 말해준다. '자이언트'에는 박소태처럼 주인공은 물론이고 적까지 평면적인 인물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인물들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절대악인 것처럼 보이던 인물이 어떤 순간에는 아주 약한 모습을 드러낸다. 보통 드라마의 캐릭터가 한 일면으로 극화되는 경향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조민우(주상욱)는 조필연(정보석)의 아들로서 강모와 대립하는 인물이지만, 미주(황정음)와의 관계 속에서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캐릭터에 대한 다차원적인 조명은 단지 캐릭터를 생생하게 하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어떤 틀에 묶이지 않는 캐릭터들은 이야기의 가능성을 극대화시킨다. 캐릭터들의 변화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이야기도 복수극이라면 늘상 반복되는 선악구도 그 이상을 넘어선다. '자이언트'를 보면서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천변만화의 스토리가 놀라웠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자이언트'만의 캐릭터들 때문에 가능해진 것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스토리가 자칫 대중들에게는 복잡하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자이언트'는 여기에 두 가지 안전장치를 마련해두었다. 그 하나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시대적 사건을 배경으로 채용한다는 점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이나 삼청교육대 같은 시대적 비극 속에서 캐릭터들의 움직임은 그 어떤 가상의 사건들보다 더 잘 이해가 된다. 이것은 거꾸로 얘기하면 시대극이 가진 한계(이미 결과를 다 알 수밖에 없는)를 오히려 가능성으로 바꿨다는 얘기다. 단순해 보일 수 있는 시대극의 사건들 속에 조금은 복잡한 심리변화를 겪는 인물들을 집어넣어 긴박감을 살려낸 것.

이밖에 또 다른 안전장치는 가족이다. 시대극은 자칫 그 거대한 흐름 때문에 사건들이 응집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질 수 있지만, '자이언트'는 그 시대를 온몸으로 겪는 가족을 통해 그려냄으로써 그 위험성을 벗어난다. 게다가 이 가족이란 코드는 자칫 정치적으로 흐를 이야기를 보편적으로 되돌려놓는 장치이기도 하다. 인물들은 권력과 욕망을 향해 달려가지만, 거기에는 끈끈한 가족애가 궁극적인 목적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면죄부를 얻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가족코드가 좀 더 폭넓은 시청층을 끌어들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자이언트'의 강모와 성모(박상민) 그리고 미주가 만나는 그 시점부터 시청률이 상승곡선을 그렸다는 사실은 이를 잘 말해준다.

'자이언트'가 초반 부진을 깨고 대반전에 성공한 것은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지점들이 균형을 맞추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시대극이라는 조금은 느슨할 수 있는 시대적 사건을 배경으로 삼고, 그 위에 천변만화하는 캐릭터들의 치열한 심리전이 긴박감을 높이면서도, 가족애 같은 보편적인 정서를 놓치지 않은 점. 이것이 바로 '자이언트'라는 거인을 다시 일으킨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은 아름다워'의 부성애가 보여주는 것

'인생은 아름다워'의 이른바 '꽈당 엔딩'은 드라마에 어떤 역할을 할까. 제작진이 밝힌 대로 이 특별한 엔딩은 일단 재미있다. 이번엔 누가 넘어질 것인가 은근히 기대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엔딩 장면을 정해놓았기 때문에 이른바 드라마들이 늘 엔딩에 보여주곤 하는 '낚시 장면'이 없다는 것이 신선하다. 즉 뭔가 벌어질 것처럼 해놓고 다음 회를 낚는 방식이 아니라, 드라마의 스토리 자체가 보여주는 매력으로 다음 회를 보게 만들겠다는 의도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하지만 이 엔딩에는 이런 재미나 자신감 그 이상의 의미도 숨겨져 있다. 그것은 이 드라마가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는 점이다. 인생은 이 엔딩처럼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일로 넘어질 수 있지만, 그래도 다시 일어나 걷기 마련이라는 것. 혹은 그렇게 넘어지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부축하며 일으키고 함께 걸어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

'인생은 아름다워'에 등장하는 병태(김영철)네 가족의 상황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평생을 밖으로만 떠돌며 딴집 살림을 하다가 늘그막에 슬그머니 집으로 들어와 앉은 할아버지(최정훈), 어느 날 갑자기 커밍아웃을 해버린 맏아들 태섭(송창의)은 이 평탄하지 않은 가족에서 불거져 나온 몇 가지 사건에 불과하다. 그 밑을 들여다보면 재혼 가족으로서 겪었을 민재(김해숙)의 쉽지 않은 시집살림이 보이고, 중년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는 병준(김상중)과 병걸(윤다훈)이 보인다. 이 밑바닥 상황을 보면 왜 민재의 딸인 지혜(우희진)가 그토록 완벽한 결혼을 꿈꾸는지(엄마의 이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을 것이다), 왜 병준과 병걸이 쉽게 결혼에 골인하지 못하는지(이것도 아마 아버지의 평생 외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집안은 바람 잘 날 없이 늘 시끄럽다. 소소해 보이는 일들이(결코 소소한 것은 아니지만) 매일 터지고 거기에 대해 가족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감정을 드러낸다. 수다 떠는 남자로 밉상 역할을 톡톡히 하는 병걸은 이 가족들에게 벌어지는 사건들에 시시콜콜 참견을 해댄다. 제 아무리 동성애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태섭을 마치 괴물 보듯 대하는 모습은 지나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런 상황을 주도적으로 바꾸고 끌고 가는 인물은 민재다. 태섭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맨 앞에 나서 그를 적극적으로 안아준 인물도 민재다. 병준 역시 자기주장이 뚜렷하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거침이 없다. 자식들도 마찬가지다. 지혜는 그 엄마를 닮아서인지 자신의 의견을 똑 부러지게 말하는 스타일이고, 호섭(이상윤)이나 초롱(남규리)이도 신세대답게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주장이 강한 가족들 속에서 유일하게 침묵하며 늘 빙그레 웃는 인물이 있다. 바로 병태다. 그는 자기주장을 하기보다는 가족들의 상황을 거의 받아들이는 편이다.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억지로 웃는 그의 얼굴은 그래서 이 가족이 실질적으로는 누구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가를 잘 말해준다. 묵묵히 바라봐주고 제 아무리 미운 짓을 해도 고개를 끄덕이며, 무엇보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절절히 느껴지는 이 아버지의 부성애는 바람 잘 날 없는 이 가족의 크고 작은 일들을 소소하게 만들어버리는 힘이 있다. 그래서 이 아버지의 자애로운 눈은 가족들을 바라보며 이런 얘기를 건네는 듯하다. 살다보면 넘어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늘 옆에서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어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그래서 바람 잘 날 없는 인생은 오히려 아름다울 수 있는 거라고. 울고 싶은 인생이라도 웃어야 웃을 수 있다고.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