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는 눈, <적도>의 복수극에 담긴 함의

 

이제 그 단순하게 시작되어 점점 고조되는 반복되는 배경음악만 들어도 우리는 <적도의 남자(이하 적도)>를 떠올릴 수 있다. 갑자기 시간이 멈춘 듯한 장면 속에 대면하는 것조차 불편할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이 서 있다. 겉으로는 친구처럼 행동하지만, 그 이면에 공격성과 복수심을 감추고 있기 때문에 그 느릿느릿 움직이는 장면의 긴장감은 고조될 수밖에 없다.

 

 

'적도의 남자'(사진출처:KBS)

이 '불편한 상황'이 끊임없이 반복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드라마 자체가 하나의 연극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심지어 실험적인 심리극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그 안에 놓인 사람들, 즉 선우(엄태웅)와 그와 관계된 사람들(장일(이준혁), 진노식 회장(김영철), 수미(임정은), 이용배(이원종), 최광춘(이재용))과의, 혹은 사건 속에서 불편해진 사람들(예를 들면 진노식 회장과 이용배, 이용배와 최광춘 같은)간의 이면이 발가벗겨진다.

 

김경필이 죽었고 그들은 모두 이 죽음 앞에 죄를 지었다. 진노식 회장은 살인을 미수했고, 이용배는 자식의 앞날을 위한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살인을 저질렀으며, 최광춘은 그것을 목격하고도 덮어버렸다. 또 아버지가 김경필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장일은 사실을 캐내려는 친구 선우의 뒤통수를 치고 바닷물에 던져버렸고, 수미는 그 장면을 목격하고도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게 덮어지는 줄 알았다. 선우가 눈을 뜨고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는.

 

선우의 복수극은 이들이 묻어버린 진실을 하나씩 끄집어내 그들의 눈앞에 던져 놓는 것이다. 죄 위에서 성공한 후, 그 죄 자체가 없는 것처럼 살아온 그들에게 이만한 형벌은 없다. <적도>의 복수극이 질깃질깃하고 여타의 복수극과 확연히 다르게 여겨지는 건, 그 복수과정이 단번에 이뤄지지 않고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이다. 선우는 너무 쉬운 복수를 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과 아버지가 당한 것들을 똑같이 그들에게 되돌려주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복수의 양상이 과거 그들이 저질렀던 죄로 그들에게 되돌아온다는 점이다. 도심의 빌딩 옥상에서 벌어진 과거 바닷가 벼랑에서의 사건을 재현하는 수미와 선우와 장일의 퍼포먼스는 연극적일 정도로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선우는 장일이 벼랑 끝에서 자신에게 저질렀던 행위들을 똑같이 재현한다. 장일은 선우에 의해 빌딩 난간 끝으로 몰린 채 당시 선우가 느꼈을 그 배신감을 경험하지만 거기서도 끝내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선우야 그 때 내가 널 더 세게 쳐서 죽여 버렸어야 됐는데."하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선우의 진짜 복수는 장일의 아버지 이용배의 죽음으로 이루어진다. 자식인 장일에게 피해가 가는 걸 원치 않는 이용배는 유서를 남긴 채 자신이 매달았던 김경필처럼 스스로 목을 매단다. 그것을 본 장일은 선우가 그랬던 것처럼 오열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똑같은 상황으로 복수를 하는 셈이다. 사실을 알고도 덮어버린 최광춘은 바로 그 사실을 안다는 것 때문에 이용배에 의해(그가 자살하기 전에) 뒤통수를 맞는데, 이것은 진실을 파헤치려다 뒤통수를 맞는 선우가 겪은 일의 현재적 재연이다.

 

사실을 목격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리고도 장일을 가지려는 욕망 때문에 사실을 숨겨온 수미는 그 그림이 선우에 의해 만천하에 공개됨으로써 무너져버린다. 장일이 다시는 그녀에게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진노식 회장은 어떻게 될 것인가. <적도>가 그려내고 있는 이 절묘한 복수극의 양상을 생각해보면 그 결말이 예측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가 딴 남자(아마도 문태주의)의 아이를 가졌다고 오해함으로써 그 분노가 어이없게도 김경필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진노식 회장의 경우, 실제로는 그 아이가 자신의 친 아들이라는 사실에 의해 복수를 당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복수의 대상에는 복수를 하고 있는 선우 또한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그는 과거 자신이 겪은 고통을 그들에게 그대로 되돌려주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 또한 복수에 눈이 멀어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진노식 회장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선우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온 가장 큰 보복인지도 모른다. 이 드라마의 첫 회 첫 장면을 다시 떠올려 보라. 절망적인 장일이 진노식 회장에게 총을 겨누고, 이제는 거꾸로 선우가 그 앞을 가로막는 장면을.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상황인가.

 

그렇다면 이 과거가 똑같이 현재에 반복되는 복수의 양상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모든 죄와 벌이 그러하듯이 그것은 상대방이 당한 고통을 똑같이 겪으며 참회한다는 의미가 들어가 있을 것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 보면 복수극이란 가해자와 피해자가 똑같은 공감에 이르는 이야기다. <적도>의 복수극은 이미 지나버린 과거의 묻혀 사라진 듯한 그 고통이 다시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지금 살아남은 자들에게 똑같은 고통으로 되돌려지는 과정이다. 그래서 <적도>를 보다보면 그 안에 담겨진 역사의식 같은 것을 보게 된다. 어쨌든 진실의 역사는 은폐되거나 거스를 수 없다는 것.

시청률 넝쿨째 들어온 '넝쿨'의 비결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하 넝쿨)'은 전체 시청률 1위. 봄철 꽃놀이 인파로 잠재 시청층이 빠져나가기 마련인 요즘, 36.4%의 시청률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과거부터 가족드라마는 기본 시청률을 가져간다는 불문율이 있었지만, 요즘은 이런 사정도 많이 달라졌다. 일일드라마라고 해도 그저 비슷한 공식만 반복하는 드라마는 외면받기 일쑤. 늘 시청률 수위를 차지하던 KBS 일일드라마 '당신뿐이야'가 시청률 20%에 머물러 있는 건 주말극으로 '넝쿨'이 매주 최고시청률을 갈아치우는 것과는 사뭇 대조되는 풍경이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사진출처:KBS)

'넝쿨'이 가진 가족드라마적인 면모는 기존의 것들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시점이 가족주의에 머물던 기존의 가족드라마와 달리, 달라진 세태를 며느리와 아들 입장에서 풀어낸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도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며느리 전성시대' 같은 가족드라마에서 며느리의 관점으로 시댁을 뒤집어보는 시도는 늘 있었던 것이니까. 그렇다면 이 가족드라마만이 가진 진짜 매력은 뭘까.

 

그 답은 드라마보다는 최근 대세를 이루었던 공감개그 혹은 공감에 바탕을 둔 콩트에서 찾아진다. '넝쿨'을 보다보면 그 안에서 우리는 '애정남'이 불쑥 튀어나오고, '롤러코스터'의 '남녀탐구생활'을 떠올릴 수 있다. 이른바 '시월드(시댁)'에서 살아남기 버전처럼 보이는 이 드라마는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공감 가는 상황을 곳곳에 배치했다.

 

혼수를 해오지 않은 탓에 세탁기 얘길 하는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세탁기가 필요하다는 얘기로 듣고 신형세탁기를 선물하는 며느리, 또 그런 며느리를 씀씀이 헤프다며 잔소리하는 시어머니, 그런 잔소리에 아들이 며느리 편을 드는 것 같자 눈물을 흘리는 시어머니 등등. 이런 시집 식구와의 관계들이 대단히 디테일한 상황으로 보여지는 건 이 드라마의 최대 강점이다. 어쩌면 그렇게 밉상 짓만 골라하는지 미운 짓에도 디테일이 살아있는 시누이의 모습이나 시어머니가 현관문 비밀번호를 물어볼 때 가질 며느리의 곤혹스러움 같은 디테일들은 이 드라마에 대한 더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공감 가는 상황 위에 놓여진 반전의 반전은 또 다른 재미다. 며느리 윤희(김남주)의 바쁜 직장생활과 전혀 다른 생활방식 때문에 전형적인 시댁 식구의 공격(?)이 이어지면, 이후에 해결사처럼 남편 귀남(유준상)의 합리적인 해결방식이 제시되며 역공격이 이루어진다. 제사 음식 차리는 걸 돕지 않은 윤희에 대한 시누이의 공격에 귀남이 손수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제사 음식을 하거나, 시누이의 잇따른 아내 구박에 귀남이 "그러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 식이다.

 

기존 공감 가는 상황이 현실적인 디테일이라면, 귀남의 합리적인 해결방식은 일종의 바람직한 판타지에 가깝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애정남'과 '롤러코스터'에서 본 적이 있다. 애매한 상황에 어떤 지침을 내려주는 애정남의 방식은 이 드라마가 가진 현실적인 디테일 상황 속에 일종의 해결책을 던져주는 방식과 똑같다. 또 '롤러코스터'가 보여준 리얼한 상황과 그 상황에 대한 통쾌한 내레이션도 마찬가지다.

 

바로 이런 디테일한 공감 포인트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넝쿨'은 시청자 유입에 있어서 유리한 지점을 갖게 된다. 물론 드라마적으로도 충분히 재미를 주지만, 만일 이 드라마를 보지 않아 그 내용을 전혀 모르더라도 보는 순간 즉각적으로 공감가는 상황이 주는 통쾌함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애정남'이나 '롤러코스터'가 굳이 지금까지의 줄거리(?)를 이야기 하지 않고도 매회 공감을 얻는 것처럼.

 

게다가 이 공감 포인트는 그 자체로 드라마에 대한 호감을 만들어낸다. 딱히 드라마가 새로운 이야기를 전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대중들은 이 공감 가는 상황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정적인 지지를 하게 된다. 마치 '애정남'에 대한 진짜 재미는 '맞아 맞아'하면서 공감하는 그 대목 자체에 있는 것이지 그것이 대단히 웃기기 때문은 아닌 것처럼. '애정남'을 우리가 공감 개그라고 부른다면 '넝쿨'은 공감 드라마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넝쿨'이 승승장구하는 진짜 이유다.

김구라 하차는 이의 없지만, 그 후는?

 

정신대 발언은 확실히 심했다. 10여 년 전 그것도 인터넷 방송에서 아마도 정신없이 내뱉은 말 중의 하나일 테지만, 그래도 지나쳤다는 건 분명하다. 따라서 김구라의 잠정은퇴 선언은 당연하고 또 적절한 행동으로 보인다. 다소 거친 직설어법에도 불구하고 김구라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여 년 전의 그 말 한 마디는 이 모든 공감대를 한 순간에 무너뜨리기에 충분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김구라는 방송을 할 수 있는 근거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방송을 한다 한들 공감을 잃어버린 말들은 대중들에게 다가가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대중들에게 있어 김구라가 과거에 인터넷방송을 통해 얼마나 심한 독설을 날렸던가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김구라는 지상파 방송에 출연하면서 끊임없이 과거에 자신이 상처 주었던 연예인들에게 사과를 했다. '절친노트'는 사실상 이것을 프로그램화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김구라는 이 방송을 통해 문희준과의 관계를 회복했고, 절친이 되어 이제는 같이 방송을 챙기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 공개된 정신대 발언은 김구라가 연예인들에게 날린 독설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다. 그저 사과를 통해 화해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 방송을 당분간 접고 자숙의 시간을 갖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왜 유독 김구라에게만(정확히 말하면 연예인들에게만) 이렇게 엄밀한 잣대가 적용되어야 하는가는 의문이다. 김구라처럼 과거의 발언이 문제라면, 꽤 많은 현업의 정치인들도 여기에 해당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왜 그들은 여전히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을까.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김구라가 4.11 선거의 정치적인 희생양처럼 보이고, 나아가 이를 계기로 문화 전반에 보수적인 재갈을 물리려는 것처럼 보이는 건 그 때문일 게다.

 

김구라가 한 과거 발언의 수위는 도를 넘은 것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지상파에 와서 그가 만들어낸 방송 프로그램의 화법 자체를 폄하하긴 어렵다. 토크쇼에서 호스트와 게스트가 저들끼리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말만 골라 하던 방식에, 시청자(관객)가 듣고 싶은 말과 질문을 끼워 넣은 게 김구라식의 화법이었다. 물론 이 화법은 초반에 너무 거칠었던 게 사실이다. 시청자들이 불편함을 느꼈던 것은 어찌 보면 그간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저들의 이야기만을 듣고 있는 것에 우리가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들끼리 홍보를 위해 주고받는 말들에 점점 식상함을 느끼게 되면서(왜 수동적으로 저들 하고 싶은 대로 굴러가게 놔두는가) 김구라식의 화법에 공감을 갖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김구라가 한 과거의 발언은 이미 주워 담을 수 없는 치명적인 독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왔다. 그는 스스로 말한 것처럼 여기에 대해 명백히 책임을 지고 넘어가야 한다. 따라서 김구라가 하차하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김구라 하차로 인해 그 여파를 몰아 자칫 방송 전체가 위축되는 것은 큰 문제일 수 있다. 이것은 어쩌면 과거 하던 보수적인 방식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물론 막말을 하는 건 문제지만, 그렇다고 모든 말에 자기 검열을 거치는 것도 문제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이제 갓 벗어나서 트여진 말문이 다시 막힐 수 있다. 방송의 화법은 그저 웃고 떠드는 것 같지만,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그걸 바라보는 우리 자신을 통제하기도 한다. 김구라의 하차는 당연하지만, 그 여파가 우려되는 건 이 때문이다.


'개그콘서트'(사진출처:KBS)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일까. 함께 음식을 먹다가 마지막 하나가 남았을 때, 그들도 누가 그것을 먹어야 할지 고민할까. 누군가를 사귈 때 스킨십은 언제부터 해야 할까. 또 지하철에서 할머니와 임산부가 동시에 탔을 때 누구에게 자리를 양보해줘야 할지 그들도 애매해할까. 영화관에서 팔걸이는 어느 쪽으로 해야 할까....

어찌 보면 쓸데없는 고민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실상 현실에서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애매할 때가 많다. 물론 그 남은 음식 하나를 누가 먹든, 팔걸이를 마음대로 한다고 '쇠고랑을 차거나 경찰이 출동하는' 건 아니다. 이건 몰라도 하등 사는데 지장 없는 소소한 일들이다. 그런데 궁금하다. 다른 사람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 이른바 애정남은 바로 그 생각들을 보여준다. 어쩌면 좀스럽다고 여겨져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그 속내를 애정남이 끄집어내놓는 순간, 같은 생각을 했던 우리들의 웃음이 터져나온다. 밖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그 공감의 순간. "맞아 맞아"하는 끄덕거림과 함께 웃음으로 만들어지는 개그. 이른바 '공감 개그'인 셈이다.

사실 애정남이 제시하는 해법이 대단한 것은 아니다. 즉 예를 들어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음식은, 밑반찬일 경우 아무나 먹고(리필이 되기 때문에), 육류는 집게를 가진 사람이 먹으며(일한 사람이 먹는다), 나머지 기타 음식은 돈 내는 사람이 먹는다는 식의 답은 그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다. 그것이 곤란하고 애매한 상황이라는 것을 똑같이 공감한다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하다. 물론 정한 답에 살짝 사심이 섞인 메시지를 넣어주면 일종의 '인기발언'이 성립된다.

지난 추석 다음 아고라에 애정남이 올린 글에 대한 여성들의 엄청난 공감은 바로 그 '인기발언'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명절 때 시댁에 들렀다 친정에 가는 애매한 시점에 대해서, "추석 당일 차례를 지내고 아침 먹고 설거지가 끝나는 순간 출발입니다잉"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아마도 모든 며느리들의 마음일 것이다. 물론 그는 시어머니에 대한 공감 포인트도 잊지 않는다. "잘 생각하세요. 시어머니들. 이게 지켜져야 따님도 빨리 볼 수 있는 겁니다잉." 이처럼 그들의 간지러운 부분을 살짝 긁어주었을 때, 일상 속에 묻어 놓았던 자잘한 삶의 간지러움은 시원해진다. 애정남이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은 남녀를 비교했을 때 아직까지는 남성보다 여성들에게 일상의 가려운 부분이 더 많다는 반증일 것이다.

사실 '개그콘서트'에서 이러한 현실 공감을 바탕으로 하는 이른바 공감개그는 흔한 소재들이다. '두분토론'이나 '동혁이형' 같은 세태적이고 풍자적인 코너들은 '개그콘서트'만의 특징을 잘 보여 온 개그들이다. '애정남' 최효종 역시 과거부터 줄곧 공감개그를 선보인 전력이 있다. '독한 것들'이나 '최효종의 눈' 같은 코너들이 그렇다. 하지만 최근 들어 '개그콘서트'의 공감개그는 훨씬 더 강해졌고 많아졌다. 일상 속에서 만들어진 습관에 의해, 상황과 맞지 않는 부조리한 행동들을 보여줌으로써 웃게 만드는 '생활의 발견'이나, 그 부조리한 상황을 마치 심층 보도하듯 풀어내는 '불편한 진실'도 '애정남'과 마찬가지로 현실 공감을 바탕으로 하는 개그다.

하지만 이 '불편한 진실'이나 '생활의 발견' 같은 개그들과 '애정남'은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이 있다. 그것은 상황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자세다. '생활의 발견'과 '불편한 진실'이 그 우스운 상황을 그저 보여주는 것이라면, '애정남'은 그 상황에서 해야 할 지침(?)을 제시해준다. 물론 애정남의 말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쇠고랑을 차지는' 않는 것이지만 '서로 지킴으로써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행동을 하자고 말한다. 이러한 행동강령을 부여했기 때문에 '애정남'은 좀 더 적극적으로 사회 일상 속에 존재하는 '애매한 상황'들에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추석 시점에 맞춰 애정남이 아고라에 올린 글은 이런 적극적인 개그의 특성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굳이 지침 같은 건 필요 없어 보이는 '애정남'의 소재들이다. 그 소재들은 명절에 받은 문자에 답장을 보내야 할까, 결혼축의금은 도대체 얼마를 내야할까, 심지어 시식코너에서 몇 개까지 먹는 게 시식일까 같은 자잘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바로 이 중요하지 않게 취급된 자잘한 소재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크다. 그것들은 이른바 이 사회가 폼나게 전면에서 드러내는 거대담론에 의해 소외된 이야기들이라는 점이다. 그 거대담론을 이끌고 있는 건 누구인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힘 있는 이들이다. 서민들이 제아무리 바꾸려 해도 바뀌지 않는, 저들끼리 만들고 꾸려가는 거대담론이 주는 소외감은, 거꾸로 서민들로 하여금 일상적이고 자잘한 것들에 대한 애착을 갖게 만든다. 즉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거대한 것보다는 그래도 우리끼리 정하고 바꿀 수 있는 소소한 것들이 훨씬 마음이 간다는 얘기다. '애정남'이 제시하는 일종의 행동강령은 그래서 아무런 구속력이 없는 비정치적인 행위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행위 자체는 굉장히 정치적인 것이다. 이 자잘한 일상의 변화는 어쩌면 뜬구름 잡는 거대담론보다 훨씬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바꿀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애정남'에 열광하는 사회의 이면에는 이 단단하게 바뀌지 않는 세상에 대한 소극적인 복수(?)가 들어있다. 그래서 이렇게 자잘하고 애매한 것들을 목숨 걸고 정해주려는 '애정남'은 우스우면서도 때론 처절하고 비애스럽게 보일 때조차 있다. 왜 그토록 작은 것들에 집착하는 것일까. "이거 안한다고 쇠고랑 안차요. 경찰 출동 안 해요. 그저 우리들만의 아름다운 약속이에요." 이 반복되는 얘기 속에는 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지의식을 느끼게 되는 구석이 있다. '우리들만의'라는 내밀한 표현이 우리의 허전한 마음 한 구석을 채우는 건 그 때문일 게다. '애정남'은 거대담론으로 굴러가는 '그들만의' 세상 속에서 작지만 실제적인 '우리들만의' 작은 약속을 던져준다. 그 약속이 얼마나 적절하고 효과적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이 작은 세계를 함께 공유하고 공감한다는 것. 우리끼리 약속을 정한다는 것. 그것이 주는 위안은 결코 작지 않다.
(이 칼럼은 중앙선데이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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