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X’가 꺼낸 웨이브 오리지널의 가능성

위기의 X

잘 나가던 대기업 차장 a저씨(권상우). 권고사직을 당한 후 부정하고 분노하다 타협하고 우울해지다가 수용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 이 웃픈 a저씨는 퇴직금마저 홀라당 주식과 코인에 말아먹고 발기부전에 원형탈모까지 겪는다. <위기의 X>라는 제목이 딱 어울리는 인물이고 그래서 이를 코믹하게 연기해내는 권상우의 면면에 빵빵 웃음이 터지지만 어딘가 보면 볼수록 짠한 마음이 깊어진다. 

 

에세이 <아재니까 아프다>가 원작으로 이를 코미디로 풀어낸 웨이브 오리지널 시리즈 <위기의 X>의 이야기는 어딘가 낯설지가 않다. 그건 어디선가 이런 작품을 봤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런 이야기를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해왔다는 의미다. 중년의 아저씨들이 권고사직을 당하는 일이나, 그래서 주식에 투자했다가 떡락의 지옥을 경험하고 육체적이고 심리적인 충격이 겹쳐 발기부전으로 병원을 찾는 경험들은 아저씨들의 술자리에는 늘상 농반진반의 안주거리로 올라오는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술자리 농담이 그러하듯이, 자신들의 위기를 호기롭게 웃음을 풀어내며 빵빵 터지는 이야기들이 <위기의 X>에는 가득 채워져 있지만, 그렇게 웃고 나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얼큰하게 취한 마음 한 구석에 헛헛한 쓸쓸함이나 슬픔 같은 것들이 남는 것처럼 이 작품에는 짙은 페이소스가 밑바닥에 깔려 있다. 

 

특히 지난 대선을 요동치게 만들었던 부동산 관련 정책들과 그로 인해 분양을 받고도 대출을 받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이 아저씨네 부부의 이야기는 ‘눈물 나게’ 웃기는 면이 있다. 수치적으로는 청약에 ‘당첨(?)’된 것만으로도 시세차익으로 10억대가 넘는 돈을 번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려면 그만한 현금을 넣을 수 있는 여력이 되어야 하는 현실. 그래서 분양 사무실 앞에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까 포기할까를 고민하며 우왕좌왕하는 부부의 모습은 빵빵 터지면서도 슬프다. 

 

그 당첨된 아파트를 손에 쥐려면 남편은 이사급으로 스카웃되어야 하고, 아내는 상위 5프로 웹소설 작가가 되어야 한다. 그건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인생 역전의 욕망 앞에서 이들은 이들은 스스로를 그 지옥의 레이스 위에 밀어 넣는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나 요원하다. 남편은 재취업을 위해 얼마나 자신이 젊은 마인드를 갖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면접자들 앞에서 되도 않는 랩을 선보이고, 아내는 어떻게든 웹소설 작가로 성공하기 위해 19금을 쓰기 시작하다 덜컥 임신을 하게 되면서 흥분만 하면 입덧을 하는 통에 19금 소설을 포기하는 상황을 맞이한다. 

 

어쩌다 남편은 부사장으로 스타트업 회사에 틀어가지만 수평적인 관계를 강조한다며 툭하면 회의 중 욕설에 멱살잡이를 하는 회사 분위기에 절망한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차량 세척 관련 관리 회사라는 점에 마음을 다잡고 몸과 영혼을 갈아 넣는 이 아저씨와 그 회사 젊은 사무직 여직원 김대리(박진주)가 나누는 대화는 일과 미래에 대한 너무나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담배 한 개비도 아껴 피우며 돈을 모아 ‘파이어’를 꿈꾼다는 김대리는 물불 안 가리고 일에 몰두하는 아저씨에게 쉬엄쉬엄 하라며 그러다 번아웃 온다고 말해주지만, 이 아저씨가 “우리 때 번아웃은 과로사”였다는 말은 너무나 웃프다. 과로사를 해야 겨우 번아웃이라고 인정해줬던 노동 착취의 시대를 꼬집는 말이다. 하지만 김대리는 회사가 이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마당에도 자신이 계획한대로 목표금액 8억을 모았다며 곧 퇴사할 거라고 말한다. 

 

애써 퇴사를 막기 위해 설득하려는 이 아저씨에게 김대리가 하는 말은 반박불가의 설득력으로 다가온다. “부사장님. 저 이거 오랫동안 생각하고 준비한 거예요. 그건 노는 걸로 폄훼하시면 곤란해요. 그리고 저는 대리든 과장이든 10년 뒤에 제가 서 있을 위치 같은 거는 중요치 않아요.” 대신 그는 그 “10년”이 중요하다고 한다. “10년이라는 시간 그 자체”가. “인생의 모든 시간을 오로지 나만을 위해 쓸 수 있다면 얼마나 가치 있어요?” 그 말에 아저씨는 할 말을 잃는다. 

 

<위기의 X>는 어찌 보면 가벼운 터치의 코미디처럼 보이지만, 그 무엇보다 깊은 현실 공감과 세태 풍자의 맛이 ‘거침없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OTT 특유의 색깔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거기에는 40대 중년 부부가 마주한 경제적 상황에서부터 부부관계 같은 성담론에 이르기까지 주저하지 않고 풀어내는 시원시원함이 있고, 무엇보다 이 무거운 이야기를 빵빵 터지는 풍자와 코미디로 밝게 끌고 나가는 힘이 있다. 

 

2021년에 웨이브 오리지널의 진수를 보여줬던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라는 작품이 있었던 것처럼 2022년작 <위기의 X>가 그 계보를 잇는 느낌이다. 지극히 한국적이면서 거침없는 풍자와 코미디의 맛. 웨이브라는 토종OTT의 색깔이 뭐냐고 물었을 때 아직까지 선명하게 다가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를 대표하는 콘텐츠로서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를 잇는 <위기의 X>를 떠올리는 건 그래서 자연스러울 것 같다. 

 

권상우는 물론이고 임세미, 성동일 같은 이 코미디의 페이소스를 제대로 만들어낸 배우들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권상우나 성동일이야 웃픈 코미디 연기로 이미 정평이 나 있지만, 아내 역할로 나온 임세미는 기대 이상의 코미디 연기를 보여준다. 여기에 신현수, 박진주. 이이경, 조한철 같은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도 빼놓을 수 없다. 6부작으로 끝났지만 못내 시즌2가 궁금하고 기다려지게 만든 건 이들 배우들의 매력이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사진:웨이브)

'개천용'의 질문, 어떤 판사·검사·형사·변호사·기자여야 할까

 

조기수 대법원장(조성하)에 의해 '재판 거래'가 공공연하게 지시되고, 그 상명에 복종하지 않으면 출세는 포기해야 하는 현실. 그래서 억울하게 옥살이를 지낸 김두식(지태양) 재심 재판을 맡게 된 최동석(류연석) 판사는 갈등한다. 만일 박태용(권상우)의 말대로 "법대로만 심판"한다면 김두식의 무죄를 선고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면 자신의 판사로서의 미래는 끝장나는 현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SBS 금토드라마 <날아라 개천용>에서 그 재심의 변호를 맡은 박태용이 가진 무기는 단 하나 '진정성'이다. 그는 진범인 이재성(윤정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그가 과거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지만 그 후로 사회에 봉사하며 살았던 삶을 끄집어냈다. 그를 믿어주는 이웃들의 시선 앞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려는 거였고, 그래서 이재성은 실제로 눈물을 흘리지만 결국 진범은 자신이 아닌 김두식이라고 증언했다.

 

하지만 박태용의 진정성에 마음을 움직인 건 최동석 판사였다. 그는 결국 김두식의 무죄를 선고하는 소신을 지켰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 사실을 알고 찾아와 법원 안에서 싸우는 것도 좋지 않았겠냐고 묻는 박태용에게 최동석 판사는 '출포판'이란 말을 아느냐고 되묻는다. 출세를 포기한 판사. 그는 현 법원의 문제를 이렇게 꼬집는다. "법원에 있는 고위직들이 출포판들을 제일 무서워해요. 얘네는 말을 안 듣거든. 대부분의 판사들은 말을 엄청 잘 들어. 왜냐하면 출세를 해야 되니까. 그래서 내부에서는 절대로 못 바꿔요."

 

그러고 보면 <날아라 개천용>의 박태용이라는 변호사도 출세는 물론이고 성공을 포기한 변호사가 아닐 수 없다. 재심 변호사라는 것이 승소가 어렵기도 한데다 그 과정도 꽤 오래 걸려 돈이나 성공을 바라고 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성공을 원한다면 김병대(박지일) 같은 검사장 출신으로 최대 로펌 대석의 고문을 맡고 있는 변호사로 사는 일이지만, 박태용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박삼수(배성우) 기자나 이유경(김주현) 기자는 또 어떤가. 오로지 진실 보도를 위해 현장을 뛰어다니지만 문주형(차순배) 같은 언론사 사장에 의해 기사는 편집되기 일쑤다. 그래서 이들은 선택한다. 기성 언론에 편입되어 성공의 길을 가는 기레기가 되기보다는 그 바깥으로 나와 진정한 기자의 길을 가기로. 

 

형사도 다르지 않다. 재심 사건에서 안영권(이철민) 오성시 경찰서장 같은 인물은 과거 김두식을 무고한 살인범을 몰아넣는 일로 승승장구해 서장이 되었지만, 그 사건을 끝까지 파헤치려 했던 한상만(이원종)은 지구대로 좌천된다. 검사는 또 어떤가. 장윤석(정웅인)처럼 정치 검사로 승승장구하는 인물이 있는 반면, 소신을 지키다 검사직을 그만두고 변호사가 된 황민경(안시하) 같은 인물도 있다. 

 

결국 <날아라 개천용>을 보면 양극단으로 나뉘는 판사, 검사, 형사, 변호사, 기자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각각 서로 다른 직종에 있는 인물들이지만, 드라마가 보여주는 것처럼 모두가 하나로 얽혀있다. 암담하게 느껴지는 건 출세해 이른바 잘 나간다는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심과 소신을 지키기보다는 이익을 위해 그것을 저버린 이들이다. 반면 양심과 소신을 지킨 이들은 힘겹게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조직 바깥에서 저들과 싸운다. '출포판'만 있는 게 아니라 '출포검', '출포형', '출포변', '출포기' 등 어떤 직종에서도 '출포O'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저 드라마로만 보기 어려운 현실이 아닌가. 과연 어떤 판사, 검사, 형사, 변호사, 기자여야 바람직할까. <날아라 개천용>은 그 극명한 대결구도를 통해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사진:SBS)

'개천용'이 출연 배우 교체에도 이어가는 진정성의 실체

 

 '이 드라마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으나 일부 상황, 인물, 이름, 사업체, 사건, 지역에는 극적효과를 위해 허구를 가미했습니다.' SBS 금토드라마 <날아라 개천용>은 그런 고지로 시작한다. 보통 '실제와는 상관이 없다'고 고지하는 내용과는 정반대다. 이런 고지를 하게 된 건 이 작품이 재심 전문변호사 박준영 변호사와 이를 기사화해 유명해진 박상규 기자의 실제 사건과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다. 이들이 쓴 '지연된 정의'에 등장하는 삼례 나라슈퍼 강도 치사사건,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은 이미 영화나 시사프로그램에서 다뤄졌던 실제 사건들이고, 이 사건들의 재심과정은 <날아라 개천용>의 주된 스토리다. 

 

실제 현실에서 재심으로 승소하는 일은 쉽게 벌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날아라 개천용>의 특별한 이야기는 판타지와 현실이 공존하는 이 지점에서 폭발력이 생겨난다. "저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하고 속 시원하게 펼쳐지는 드라마 내용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도 그것이 현실과는 다르다고 질문을 던질 때, 이 드라마는 말한다. 그것이 실제 벌어졌던 일이라고. 

 

그런데 이렇게 잘 나가던 <날아라 개천용>에 박상규 기자의 드라마 속 인물인 박삼수 역할을 연기한 배성우의 음주운전 적발사실이 알려지면서 암운이 드리워졌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의 진정성이 가장 강력한 힘이었던 <날아라 개천용>은 더 이상 배성우를 박삼수 역할로 세울 수 없게 됐다. 박삼수는 현실적인 인물이지만 정의를 위해 진실을 추구하는 인물이 아닌가. 그러니 시청자들로서는 음주운전 사실이 밝혀진 배성우가 연기하는 박삼수에 몰입하기가 어렵게 됐다. 

 

결국 배성우는 하차하고 대신 다른 배우가 그 역할을 이어받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뒤늦게 그 역할을 맡아봐야 그 배우가 얻을 건 별로 없는 그런 상황. 배성우의 입장을 챙길 수 있는 건 소속사뿐이 없었다. 애초 같은 소속사 배우였던 이정재가 거론되었지만 대신 소속사 대표인 정우성이 대신 그 역할을 떠안았다. 그리고 몇 주 간의 휴방을 거쳐 드디어 1월 1일 방영을 재개했다. 

 

정우성은 17회부터 등장한다고 한다. 그래서 약 2주간은 배성우가 나오는 <날아라 개천용>을 계속 봐야 한다. 최대한 배성우가 맡은 박삼수 기자의 분량을 줄이겠다고 했지만, 이 드라마에서 박태용 변호사(권상우)와 함께 양대 축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역할을 줄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박태용 변호사가 맡은 재심사건이 가까스로 증거를 찾아내 승소의 실마리를 잡게 되고 그걸 기사화했던 박삼수 기자의 '기사 펀딩'에 5억이 넘는 기부금이 모이면서, 그 돈의 쓰임새를 파고든 장윤석(정웅인) 검사와, 박태용 변호사를 아예 당으로 끌어들이려는 강철우(김응수) 시장으로 새로운 갈등국면이 생겨났다. 

 

결국 펀딩 받은 돈 전액을 기부하겠다는 박태용 변호사의 선언은 그래도 현실적인 생계를 챙기려던 박삼수 기자와 갈등을 일으키고, 여기에 정치권에서 박태용을 끌어들이려는 움직임은 이들이 애초 꿈꾸던 초심을 흔들어 놓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 박삼수 기자의 역할을 줄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배성우가 연기하는 박삼수 기자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이제 17회부터 이를 이어받을 정우성의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지점은 배성우에서 정우성으로 배우가 바뀌게 되는 사태를 겪고 있는 <날아라 개천용>의 힘이 빠지지는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1월 1일 방송된 13회 시청률은 5.7% 휴지기 전인 12월 12일 방송된 12회 시청률 5%보다 상승 곡선을 그렸다. 음주 사건 이후 떨어진 시청률이 배성우가 계속 출연하고 있음에도 오름세로 전환된 것. 어째서 이런 특이한 흐름이 생기고 있는 걸까. 

 

그건 그나마 이 작품이 허구가 아니라 실화에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부적절한 사유로 인해 배성우가 하차하고 정우성이 그 역할을 이어받게 됐지만, 그래도 그 배우들이 연기하는 박삼수라는 인물은 가상이 아닌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그 진정성을 그나마 붙잡아주고 있다. 즉 실화의 실제 인물을 저들이 재연하고 있다는 이 작품의 특이한 관전 포인트는, 배우 교체라는 사태 속에서도 그나마 작품을 계속 몰입하게 만들어주는 힘을 부여하고 있다.(사진:SBS)

'개천용'의 재심사건들, 범인이 나타나도 돌려보내는 사법이라니

 

"잘 나신 변호사님과 기자님은요, 할 말 다 하고 사는지 모르겠는데요, 저 같은 사람은 입이 있어도 말 못해요. 기자님. 말이란 것은요, 입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들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 하는 거예요. 세상 천지에 우리 같은 사람들 말을 누가 들어주기나 합니까?"

 

SBS 금토드라마 <날아라 개천용>에서 오성시 트럭 기사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옥살이를 하고 나온 김두식(지태양)은 재심을 해서 억울한 누명을 벗어야 되지 않겠냐는 박태용(권상우) 변호사와 박삼수(배성우) 기자의 말에 그렇게 일갈했다. 과거 그는 형사에게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고 그토록 항변했었다. 하지만 이미 그를 범인으로 특정해버린 형사들은 강압적인 수사로 그를 결국 범인으로 만들었다.

 

애초 살인사건의 목격자였던 김두식은 강압에 의해 몽타주를 그리게 하자 어쩔 수 없이 당시 그가 일하던 곳의 사장 얼굴을 그렸다. 잠시 경찰에서 풀려난 김두식이 경찰이 두려워 도주를 하면서 문제는 꼬여버렸다. 경찰은 아예 김두식을 범인으로 특정했고 그렇게 아니라는 항변에도 모두 귀를 닫아버렸던 것.

 

놀라운 건 그렇게 김두식이 옥살이를 하던 중 진범이 나타났지만 이를 경찰도 검찰도 묻어버렸다는 사실이다. 당시 사건을 맡았던 한상만(이원종)은 진범의 진술을 서장도 직접 듣게 했지만 서장은 자리 지키기에 더 전전했다. "야 한 반장 나도 괴롭다. 야 3년 전에 우리가 수사해서 잡아넣은 김두식이 아직 감옥에 있잖아. 우리 다 죽어. 검찰은 어쩔 거여? 법원은? 판사들은 무려 열 명이나 오판을 했어. 너 저 꼬맹이들 땜시 온 나라에서 곡소리 나는 거 듣고 싶어?"

 

그 정도의 잘못을 저질렀으면 곡소리가 나는 게 당연한 일이라는 한상만의 일갈에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서장은 당시 사건을 맡았던 검사에게 이 일을 알렸고 검사는 청장에게 보고했지만 돌아오는 소리는 묻으라는 이야기였다. "나도 임관하자마자 미안한데 이거 묻어. 검사는 한 몸. 이제 와서 뒤집으면 그거 3년 전에 수사하고 공판하고 했던 선배 검사들 어떻게 되겠어?" 그 청장은 대석 로펌 고문이 되어 있었다.

 

<날아라 개천용>이 다루는 재심사건들은 놀랍게도 진범이 나타났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오점을 가리기 위해 이를 묻어버리려는 사법권의 모습들을 담아낸다. 물론 이것이 사법권 전체의 보편적인 이야기는 아닐 게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네 사법부가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하는 점은 의문이다. 때론 기계적인 법률 해석만 해야 한다고 '공정함'을 빌미로 무정해지고, 때론 사법기관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일이라거나, 특정 사안을 정치적으로 해석해 권력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게 지금의 대중들에게 비춰지는 사법부의 모습이 아닌가. 억울해하고 힘겨워 하는 약자들의 목소리가 그 귀에 닿을 리가 만무다.

 

<날아라 개천용>은 허구로 만들어진 드라마지만, 현실을 바탕으로 했다. 주인공들이 바로 실제인물들을 모델로 하고 있는데다, 이들이 다루는 재심사건도 실제사건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 실제 모델 중 한 명인 박상규 기자가 대본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그나마 이런 드라마의 소재가 될 수 있었던 재심사건들의 승소가 가능했던 건 약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연 변호사, 형사, 기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난 한상만이니까.. 그냥 감방에 갇혀 있는 열일곱 살 김두식이가 내 아들처럼 느껴졌나봐. 그 어린 것이 누명을 쓰고 그 속에서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니까 그냥 도와주고 싶어서요. 그게 다예요." 왜 김두식 사건에 그토록 집착했냐는 박태용 변호사의 질문에 한상만은 그렇게 답한다. 형사나 검사, 판사라는 직업이 아닌 개인의 양심으로 그나마 정의를 지켜나가려는 몸부림이 있는 사회는 과연 정상적일까. 이런 정의의 문제가 몇몇 영웅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에 의해 그나마 작은 희망을 전해준다는 건 우리네 사법부가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은 아닐까.(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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