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른다’, 김서형이 나쁜 꿈을 외면하지 않는 건

 

“넌 아직도 거기 사니? 아직 집에 그래놓고 있니?” 차영진(김서형)을 찾아온 살해당한 친구의 엄마는 그렇게 묻는다. 그 질문은 차영진이 과거 성흔연쇄살인사건으로 친구가 희생된 후 여전히 그 시간대에 머물며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암시한다. 17년 전부터 그 사건에 뛰어들어 지금껏 놓지 않고 있는 차영진의 집에는 그 살인사건의 피해자들의 사진이 벽 가득 붙여진 방이 있다.

 

차영진은 아래층에 사는 고등학생 고은호(안지호)에게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건 허락했지만 그 방만은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어린 시절 상습적인 가정폭력 속에서 살았던 고은호는 우연히 그 사실을 알고 그를 도와준 차영진을 계속 따르고 의지했다. 친구가 살해당한 사건을 겪은 후 메말라버린 차영진처럼 텅 빈 그 집 화초에 물을 줘 베란다 가득 꽃들을 피워낸 것처럼 고은호는 차영진의 작은 희망이자 친구가 된다.

 

차영진은 그 방에 왜 들어가면 안되냐는 고은호의 물음에 “그러면 나쁜 꿈을 꿀 테니까”라고 말한다. 고은호는 그러나 그 차영진이 열지 말라는 방문을 열고 들어간 후 상상했던 것보다 더 끔찍한 나쁜 꿈속에서 그가 오래도록 살아왔다는 걸 알고는 놀라게 된다. 이제 공소시효도 거의 끝나버린 연쇄살인사건.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일처럼 지워져가는 그 사건을 ‘나쁜 꿈’이지만 놓지 않고 그는 살아가고 있었다.

 

SBS 새 월화드라마 <아무도 모른다>는 차영진이라는 특별한 어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어려서 친구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끝까지 그 사건을 파고들고 범인을 찾는 일을 멈추지 않는 어른. 그런 그에게 고은호라는 학생이 또 다른 작은 희망으로 등장하고 있는 건 이 드라마가 향후 벌어질 일들을 예감케 만든다. 학교 내에서 왕따와 폭력을 당하고 있는 고은호에게 벌어질 사건은 차영진으로 하여금 또 다른 나쁜 꿈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차영진에게 과거 친구를 앗아간 성흔연쇄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일과 고은호라는 학생이 겪을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일은 다른 일이 아니다. 고은호가 부모로부터 보호받기는커녕 심지어 학대받고 있었고, 오히려 윗층에 사는 차영진이 그를 보호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드라마가 그려나갈 ‘좋은 어른’이라는 것이 핏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걸 말해준다. 텅 빈 집 화초에 물을 주고 햇볕을 받게 하고 바람을 들여 꽃을 피워내는 보살핌과 관심이야말로 진정한 어른임을 증명해주는 일이니.

 

“만에 하나 나한테 나쁜 일이 생기면요. 아줌마는 몰랐으면 좋겠어요.” 그 방에 들어가 그 끔찍한 사진들을 본 고은호는 차영진에게 그렇게 말한다. 누군가의 나쁜 일을 잊지 않고 가슴에 담은 채 끝까지 진실을 파헤치는 삶은 고은호가 말했듯 끝없는 괴로움을 버텨야 하는 삶이다.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는 그 괴로움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려는 차영진이라는 인물을 그려내고 있다.

 

우리에게는 꽤 많은 사건사고들이 터졌고, 그 중 많은 것들은 그 진실이 무엇인지 낱낱이 밝혀지지 않은 채 묻히고 지나가 버렸다. 그 진실을 포기하고 파헤친다는 건 아픈 상처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인지라 그렇게 지나치는 걸 우리는 때론 내버려 두었다. 그래서 그 진실을 지금도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게 아파서 지나쳐버린 진실은 어쩌면 또 다른 사건사고로 이어지게 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좋은 어른이란 힘겨워도 진실을 직면함으로서 아이들에게만은 그 상처가 되풀이되지 않게 해주는 사람이 아닐까.(사진:SBS)

‘초콜릿’, 하지원과 윤계상의 음식을 통한 마음 특히 먹먹한 이유

 

바다식당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어린 시절 배가 고팠던 문차영이 찾아왔던 그 곳에서 이강은 맛있는 음식을 대접했고,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너무 행복해서” 눈물을 쏟았다. 늘 열쇠가 놓여있던 곳에서 열쇠를 찾아 식당 문을 열고 불을 켜자 이강(윤계상)의 기억에도 불이 켜졌다. 어머니가 해주던 음식을 맛나게도 먹었던 기억.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문차영(하지원)에게도 추억이 돋아난다. 요리를 직접 한다는 이강의 말에 그 어린 시절 행복했던 맛이 떠올랐을 수도. JTBC 금토드라마 <초콜릿>은 그렇게 먼 길을 돌아 다시 바다식당에서 두 사람을 마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문차영은 사고로 머리를 다쳐 미각을 잃은 상태였다. 맛이 있을 턱이 없었다. 문차영은 그러나 마치 미각을 다시 찾기나 했다는 듯이 맛있게 음식을 먹었다. 하지만 이강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동생한테서 MRI사진이랑 진료기록 받았어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고 아무 맛도 느낄 수 없는 거 알아요. 그래서 아무 식당이나 그냥 데려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 말에는 이강의 마음이 담겨있었다.

 

문차영은 다시 맛있게 음식을 먹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런 문차영에게 이강은 어렸을 때 그랬듯이 휴지를 건넸고, 문차영은 “너무 행복해서 그래요.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너무 행복해서 자꾸 눈물이 나요.”라고 그 어린 시절 했던 그 말은 다시 했다. 그 말은 이강에게 오래도록 지워져 있던 기억 하나를 끌어올렸다. 문차영에게 바다식당에 온 적이 있냐고 물었고 자신을 아냐고 물었다. 문차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쩌면 <초콜릿>의 이 장면은 이 드라마가 그리려는 궁극적인 지점일 것이었다. 어린 시절 첫 만남과 이별 그리고 한참이 지나 다시 재회했지만 그를 알아차리는 문차영과 달리 기억을 못하는 이강. 그렇게 서로 엇나간 운명 속에서 지내다 결국 다시 그 첫 만남의 장소에서 다시 떠올린 기억.

 

이것은 <초콜릿>이 다루고 있는 음식이라는 소재와도 딱 맞는 만남과 이별 그리고 재회가 아닐 수 없다. 그걸 매개해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음식이니 말이다. 하지만 음식을 통해 만난 두 사람은 과거와 현재가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과거에는 비록 배고팠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고 느낄 수 있었고, 그런 모습을 보며 내 일처럼 행복할 수 있었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바다식당을 떠나 저 현실을 떠돌며 살아온 그들은 너무나 많은 상처들을 겪었다.

 

백화점 붕괴사고로 이강은 어머니를 잃었고 그 어머니가 건네준 초콜릿으로 문차영은 살아남았지만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이 들어 다시 이강을 만났지만 그의 친구 권민성(유태오)의 구애로 운명이 엇나갔고 권민성은 사망했다. 문차영은 그 상처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호스피스 병동 식당에서 일하며 사람들에게 음식으로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을 위로하는 일이라는 듯.

 

이강은 거성재단의 가족이 되어 살아가지만 후계를 두고 벌어지는 이준(장승조)과의 대결과 그를 밀어내려는 이준의 부모들 속에서 힘겨운 현실을 버텨내고 있었다. 어린 시절 바다식당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냈던 그 행복했던 시절을 까마득히 잊은 채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던 이강은 손까지 떨리게 되자 결국 호스피스 병원으로 좌천되어 내려오게 된다.

 

이렇게 현실에서 깊은 상처를 입은 두 사람이 다시 바다식당에서 음식을 마주한 채 서로를 기억해낸다는 설정은 그래서 꽤 상징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미각조차 잃어버린 요리사 문차영이 이강이 해주는 음식을 먹으며 “너무 맛있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음식이 그저 맛과 같은 감각 그 이상이라는 걸 말해준다. 음식을 통해 그는 이강의 마음을 느낀 것이고 그 마음이 너무 행복했던 것.

 

이건 그간 <초콜릿>이 담아낸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음식을 매개로 하고 있는 이유를 드러낸다. 너무나 지쳐 쓰러질 것만 같은 힘겨운 상황 속에서 누군가 건넨 음식 하나가 어떤 위로와 위안을 넘어 힘을 줄 수 있는 건 단지 음식의 맛 때문이 아니라 거기 담긴 음식 만드는 이의 마음 때문이라는 걸 <초콜릿>은 음식을 마주한 두 사람의 마음으로 전하고 있다.(사진:JTBC)

‘유퀴즈’, 이토록 짧게 삶의 위대함을 보게 해주다니

 

이건 마치 한 편의 감동적인 동화 같다. tvN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럭>은 어떻게 매번 이런 놀라운 분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걸까. 서울 후암동 어느 골목길을 걷다 발견한 초등학교 바로 앞에 있는 작은 문방구 이야기다. 40년이나 된 문방구이니 어찌 이야기가 없을까마는, 남편을 2년 전 갑자기 여의고 홀로 그 곳을 지키고 계신 함범녀 할머니와 그 곳을 제 집처럼 드나들던 학교 아이들의 이야기는 마치 기적 같았다.

 

2년 전 갑자기 할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나서 가게 문을 닫을까 생각했던 할머니의 마음을 돌린 건 아이들이었다. 청소를 하다 발견하게 된 아이들이 남긴 쪽지. 거기에는 빼곡하게 아이들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할머니 너무 힘들어하시지 마시고 언제나 힘내세요(수민)’, ‘할머니 제가 문방구 많이 올게요. 힘내세요(예지).’, ‘할머니, 힘드시겠지만 열심히 지내세요!(별아)’, ‘할머니, 힘들어하시지 마세요 항상 밝게 웃고 힘내세요(서영)’, ‘슬퍼하지 마시고 힘내세요(하령)’, ‘할머니! 혼자 사셔도 힘내세요. 제가 많이 찾아갈게요(장연)’

 

할머니는 학생들을 부를 때 “우리 애들이”라고 표현하셨다. 아들 하나를 뒀지만 손주가 아직 없다는 할머니는 이 어린 학생들이 다 당신의 손주라고 하셨다. 애들이 너무나 따뜻하고 자신에게 잘한다고 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만든 빵을 갖다 주기도 하면서 자신을 좋아하고 따라주는 것 때문에 40년 동안 그 곳에서 일할 수 있었다고 한다.

 

40년을 일해 쉰두 살까지 된 졸업생이 가게를 찾아오기도 한다며 할머니는 최근 일이 다시 떠올라 울컥 하셨다. 찾아온 졸업생은 울면서 할아버지가 옛날에 잘 해줬던 이야기를 했단다. 김치찌개 끓여서 점심을 먹을 때면 막 찾아와 자기도 달라며 퍼먹던 애들이란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들어보니 할아버지가 생전 얼마나 주변 사람들을 챙기며 살아왔는가가 느껴졌다. 할머니는 늘 자기 건강만 걱정해주고 매일 아침 녹즙을 갈아주던 할아버지가 본인 건강 생각은 안했다며 마음 아파 하셨다.

 

할아버지가 쓰던 연장을 볼 때 가장 할아버지가 떠오른다는 할머니는 일하다 펜치를 보고는 눈물이 나서 혼자 막 울었다고 하셨다. 할아버지의 손때가 잔뜩 묻은 연장은 거기 그대로 남아있는데 할아버지가 없다는 사실 때문이란다. 하지만 연장에 담겨진 할아버지의 남다른 노력과 마음은 여전히 그 곳을 찾던 아이들의 가슴 속에 남았다. 아주 작은 일일지도 모르지만 친할아버지처럼 아이들을 들여다보고 있던 걸, 삼광초교 아이들도 알고 있었다.

 

은혁이는 어느 날 ‘오늘은 문방구를 쉽니다’라는 표지판을 보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았다고 했고, 조이는 처음엔 어디 가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없으시니까 깜짝 놀랐다고 했으며, 태희는 원래부터 알고 지냈던 할아버지인데 돌아가시니까 좀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한 건 평소 할아버지와의 자잘하지만 따뜻한 기억 때문이었다. 가은이는 뭘 떨어뜨렸을 때 할아버지가 주워 주였다고 했고, 서현이는 감기에 걸렸다며 마음으로 걱정해주셨다고 했다. 은석이와 우준이는 넘어졌을 때 일으켜주시고 밴드도 붙여주셨던 할아버지를 기억했다.

 

<유 퀴즈 온 더 블럭>은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의외로 무거운 질문을 툭 던졌다. “죽음이라는 건 어떤 느낌이에요?” 그런데 아이가 한 답변은 놀라울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이 세상일을 다 한 거요! 자기가 땅에서 할 일을 다 한 거요” 재차 “할아버지는 그 할 몫을 다하고 떠나셨을까요?”라고 묻자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네! 충분히 하셨어요.”라고 답했다.

 

과연 우리네 삶이 누군가에게 저렇게 평가받을 수 있을까 싶었다. 나의 작은 배려가 깃든 말과 행동들이 누군가에게는 저토록 크게 자리할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유 퀴즈 온 더 블럭>은 그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아이들의 마음을 담아 전해줬다. “이번 생에서는 할아버지가 저를 챙겨주셨고 만약에 또 만나게 되면 다음 생에서는 제가 할아버지 챙겨드릴게요(이가은).” “할아버지 저한테 잘해주신거 감사하고 다음에 또 뵙게 된다면 제가 더 잘 해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이동욱).”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뭔가 마음에 뭔가 빈 생각이 들었어요 할아버지가 전 지금까지 몰랐는데요 우리에게 많이 자상하게 해주셨던 걸 그 때까지 잘 몰랐던 거 같아요. 할아버지 하늘에서도 잘 계시길 바랍니다(박조이).”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유재석과 조세호는 주변 사람들의 작은 위로 하나가 힘겨운 삶에 크나큰 힘이 된다고 했다. 그것은 어쩌면 <유 퀴즈 온 더 블럭>이라는 프로그램이 길거리에서 만나는 분들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전하는 위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작고 소소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어떤 것보다 위대한 기적 같은 이야기들이 거기에는 넘쳐난다. 너무나 힘들어 살기 힘들어지는 세상 속에서 그나마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건 이런 실제 기적 같은 이야기들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건 <유 퀴즈 온 더 블럭>이라는 프로그램의 가장 중요한 가치이기도 할 것이다.(사진:tvN)

‘동백꽃’ 공효진·이정은, 버려진 이나 버린 이나 찢어졌을 가슴

 

“엄마가 나보고 진짜 그걸 떼 달라고 왔을까요? 그런 게 어딨어. 엄마 진짜 짜증나. 엄마가 계속 쳐다보는 거예요. 사람 가는데 왜 자꾸 봐. 엄마가 나를 계속 봤어요. 나는 27년을 거기서 기다렸는데 우리 엄마도 그럼 어떡해요?”

 

KBS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동백(공효진)은 용식(강하늘)을 안고 그렇게 말하며 오열했다. 거기에는 동백이 머물러 있었던 27년의 세월이 겹쳐졌다. 자신을 버리고 떠나버린 엄마 정숙(이정은). 마지막으로 삼겹살을 사주며 “많이 먹어. 밥을 잘 먹어야 예쁨 받지”라고 말하고 떠나던 던 엄마를 어린 동백은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동백은 그렇게 27년 간을 그 지점에 서 있었다. 오지 않을 엄마를 기다리며.

 

엄마가 신장이식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걸 알게 된 동백의 마음은 복잡해졌을 게다. 미워해야 맞지만 미워할 수도 없는 아픈 상황이고, 그렇지만 혹여나 딸에게 신장을 얻기 위해 온 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서운함이 더해졌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동백은 엄마를 데리고 삼겹살집에 갔다. 아픈 엄마에게 먹을 걸 사주고픈 마음도 있지만, 그 어린 시절 동백이 삼겹살을 먹으며 떠나가던 엄마를 바라보던 그 아팠던 마음을 고스란히 전해주고픈 마음도 있었으리라.

 

정숙은 동백이 그 때의 일을 지금껏 모두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마음이 찢어졌다. 어떻게 그걸 기억하냐는 물음에 동백은 ‘필구보다 어린 기지배’가 백밤, 천밤도 넘게 버려지던 날을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동백은 비수 같은 말들을 엄마에게 던졌다. 그건 엄마가 27년 전에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누가 엄마 이름 물으면 꼭 모른다고 해. 부탁이야”라고 했던 엄마의 말을 동백은 똑같이 돌려줬다. “누가 딸 이름 물으면 꼭 모른다고 해. 부탁이야.”

 

27년 전 엄마가 그랬듯 이제 동백이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갈 때 택시 창에 하염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이 비췄다. 그건 과거 엄마가 떠날 때 뒤에서 하염없이 그를 바라봤던 동백의 모습 그대로였다. 떠나오는 택시 안에서 동백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건 자식을 버리고 떠나는 엄마의 마음도 찢어졌을 거라는 것이었다. 용식의 품에 안겨 엄마가 혹여나 자신처럼 그렇게 계속 떠나간 이가 돌아오길 기다리면 어떡하냐며 울었던 건 그래서였다.

 

사실 <동백꽃 필 무렵>의 동백과 정숙의 이야기는 소재만으로 보면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설정이다. 딸 버린 엄마가 신장 이식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딸에게 돌아온 것. 그건 아마도 신장을 떼 달라고 왔다기보다는 자신의 마지막을 딸과 함께 하고픈 마음 때문에 왔을 게다. 하지만 이 뻔할 수 있는 이야기를 <동백꽃 필 무렵>은 엄마와 딸이 27년의 세월을 넘어 서로의 입장이 되는 상황을 통해 절절하게 풀어낸다. 엄마는 딸의 입장이 되어 그 버려진 마음을 헤아리고, 딸 역시 엄마의 입장이 되어 자식을 버린 그 마음을 헤아리는 것.

 

<동백꽃 필 무렵>이 이토록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된 건 이처럼 뻔할 수 있는 상황도 완전히 새롭게 풀어내는 방식 때문이다. 까불이라는 연쇄살인범의 존재 하나를 갖고도 이렇게 큰 궁금증과 몰입감을 만들어내고, 동백이와 용식의 다소 촌스러운 사랑이야기도 이토록 반짝반짝 빛나게 만든다. 임상춘 작가의 남다른 공력이 느껴진다. 물론 <쌈마이웨이>부터 이미 준비된 작가라는 걸 알았지만, 이 정도로 깊이와 재미를 능수능란하게 풀어낼 줄이야. 또 한 명의 믿고 보는 작가의 탄생을 예감하게 하는 대목이다.(사진:KBS)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