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사랑할 때>의 승승장구, 이유 있었네

 

‘사과가 썩은 것은 사과 잘못이 아니다.’ 대부업체의 깡패로 살아가던 한태상(송승헌)의 마음을 뒤흔든 것은 혹시 이 문구 때문이었을까. 7년 전 서미도(신세경)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헌책방 서씨글방에 빚 독촉을 하러 간 한태상이 본 그 입구에 적혀져 있던 문구. 혹시 집나간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죽어버린 아버지로 인해 빚더미에 올라앉아 결국은 그 깡패들의 일을 하며 썩은 사과의 삶을 살게 된 그에게 그 문구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던 것은 아닐까.

 

'남자가 사랑할 때'(사진출처:MBC)

한태상은 바로 그 문구로 인해 자신이 이 썩은 사과의 길로 들어서게 됐던 때의 일을 떠올렸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공양미 삼백 석에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마음으로 한태상을 찾아온 서미도의 “그렇게 살면 좋아?”라는 질문에 마음이 흔들렸을 지도. 공부 잘 하는 학생에서 어느 날 가족들로 인해 길바닥으로 내던져진 한태상에게, 빚만큼 자신을 사라는 서미도의 당돌한 제안이 남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을 게다.

 

“가끔 인생은 이런 날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이제 끝장이다 싶을 때 작은 쥐구멍 하나가 나올 수도 있어. 아직 어려서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 같은데 그러지 마라. 함부로 널 놓지 마.” 더 이상 동네의 구경거리가 되기 싫어 인생의 끝장을 선택한 서미도에게 던지는 한태상의 이 말은 그래서 과거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남자가 사랑할 때>의 한태상과 서미도의 사랑은 이렇듯 시작부터가 다르다. 거기에는 운명적인 만남 따위는 없다. 다만 치열한 현실이 있고, 그 현실에 대한 동병상련이 있을 뿐이다. 가난했던 그들은 바로 사랑의 지고지순함을 얘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하게 돈이 줄 수 있는 행복을 부정하지 않는다. 만일 한태상의 금전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서미도의 인생은 그것으로 끝장나지 않겠는가. 이 속물적인 사랑에 그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서미도에게 운명적인 만남이 다가온다. 그 운명적인 연인 이재희(연우진)를 만나는 곳이 해외의 휴양지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완전히 다른 공간에서의 완전히 다른 나를 경험하게 해주기 위해 한태상이 보내준 해외출장에서 서미도는 이재희를 만난다. 현실에서 한 뼘쯤 들어 올려진 공간에서야 비로소 현실을 벗어나 온전히 가슴 설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것. 서미도가 한태상과 이재희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어장관리가 아니라 이 두 개의 사랑이 그만큼 다르기 때문이다.

 

<남자가 사랑할 때>가 보여주는 사랑은 겉으로 보면 너무나 전형적이다. 전형적인 삼각관계에서 갈등하는 신데렐라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결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신세경이 연기하는 서미도라는 캐릭터에서 비롯된다. 이 캐릭터는 <패션왕>에서 신세경이 연기했던 이가영을 닮았다. 끊임없이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고 지극히 속물적이지만 그렇다고 비난할 수도 없는 그런 캐릭터.

 

아마도 태생적으로 부자인 삶을 살게 된 인물들의 사랑이라면 이러한 사랑을 하면서도 돈과 현실에 솔직한 모습에 거부감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사랑할 때>에 등장하는 멜로의 장본인들은 태생적 부유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물들이다. 그들이 설 수 있는 풍족한 삶의 맨 밑바탕은 한태상이 떠받들고 있고 그 위에 서미도와 이재희가 서 있다. 이 현실적인 부분은 서미도 같은 캐릭터가 스스로도 말하는 ‘속물’ 근성을 오히려 공감가게 만드는 요인이다. 사랑 사랑 하지만 길바닥에 내던져져 당장 살 수가 없는 마당에 무슨 놈의 사랑인가.

 

그래서 이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현실 속에서 서미도의 속물적 사랑은 거꾸로 그녀를 그렇게 만든 사회시스템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사과가 썩은 것이 어찌 사과 잘못이겠는가. 다만 그렇다고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약간은 빗나가고 약간은 속물적일 지라도 그렇게 솔직한 사랑의 모습은 그래서 <남자가 사랑할 때>의 멜로를 남다르게 보게 만든다. 때로는 현실을 벗어난 운명 운운하는 것보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속물적인 사랑이 더 마음에 닿을 때도 있다는 것을 이 드라마는 보여준다.

'그 겨울', 이미 해피엔딩인 이유

 

멜로라는 장르는 그저 판타지에 불과할까. 우연적인 만남, 운명적인 사랑, 신분과 죽음마저 초월하는 사랑... 멜로라는 장르에는 분명 판타지적인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 판타지들이 하나 둘 모여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어떤 울림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멜로가 단지 판타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판타지가 환기하는 현실을 지향하기도 한다는 걸 말해준다.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이하 그 겨울)>는 ‘슬픈 동화’ 같은 판타지를 통해 돈에 지배된 살벌한 현실을 에둘러 보여주는 멜로다.

 

'그 겨울 바람이 분다'(사진출처:SBS)

“차라리 사기를 치지. 사랑을 하게 하지 말 걸. 나 같은 놈, 사랑을 하게 하지 말 걸.” 오수(조인성)의 참회는 이 드라마가 가진 대결의식을 명확히 보여준다. 가짜 오빠 행세를 하며 78억을 받아내기 위해 시각장애인 오영(송혜교)에게 접근했지만 그 사기가 사랑에 무릎 꿇어버린 것. “사랑했어. 너랑 함께 있어서 나도 행복하기도 했어. 그러니까 네가 날 속인 건 무죄야." 오영의 이 비수 같은 말은 오수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78억이 없으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오수의 삶이란 기실 우리네 현대인들의 처지를 그대로 재연한다. 자본주의의 삶 속에서 돈이란 어느새 생명이 되어버렸다. 살기 위해 사기 치는 삶. 그 삶에 의미가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오수나 조무철(김태우)은 삶이 살아지니 사는 그런 자본주의에 포획된 삶을 살아가며 힘겨워 한다.

 

반면 어마어마한 자산을 가졌지만 왕비서(배종옥)의 뒤틀어진 모성에 대한 집착으로 눈이 멀게 되는 불행한 삶을 살아온 오영에게 돈은 추악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여타의 자산가와 오영이 다른 점이란 그녀는 늘 죽음을 옆에 끼고 살았다는 점이다. 그런 그녀에게 78억 정도는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한다. 오빠에서 연인으로 다가온 오수는 그녀에게 한 자락 의미를 전해준 인물이다. 비록 사기로 시작된 것이지만.

 

<그 겨울>의 드라마 구조가 자본과의 대결을 그리고 있다는 것은 인물들의 변화를 통해 보여진다. 돈을 목적으로 혹은 자신의 이기주의를 채우기 위해 시작된 관계는 후반으로 오면서 그 돈의 관계를 털어버린다. 오수는 결국 받았던 78억의 돈을 거부하고, 그 돈을 종용했던 조무철은 오수를 통해 사랑이 있다는 걸 확인하곤 죽음을 선택하며, 모성이 아닌 집착으로 오영과의 관계를 유지해온 왕비서는 그 집에서 나옴으로써 진정한 모성을 알아간다. 돈 때문에 친구를 배신했던 손미라(임세미)는 돈을 거부하고 진정한 친구관계를 선택한다.

 

눈 먼 오영을 중심으로 세워진 거대한 돈의 관계들이 오수라는 부족하지만 사람 냄새나는 인간과의 부딪침을 통해 사람의 관계로 복원되는 것. 이것이 <그 겨울>이 그리고 있는 세계다. 오영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설정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돈에 눈먼 인간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오영의 감긴 눈은 오히려 세상과 사람들을 더 명료하게 보게 만드는 장치인 셈이다. 우리는 모두 이 오영의 감긴 눈을 통해 어쩌면 우리 자신을 돌아보았을 지도 모른다. 도대체 진정으로 눈먼 자는 누구인가.

 

<그 겨울>이라는 멜로의 주인공들이 모두 비극적인 최후를 기약하면서도 웃고 있는 것은 그 자본에 의해 맞이하는 파국 속에서 비로소 그들이 인간 혹은 사랑을 회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수는 죽음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오영을 사랑하게 됐고, 조무철은 죽음을 맞이해서야 비소로 오수를 통해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으며, 왕비서는 쫓겨남으로써 오영을 통해 모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자본이 그들의 피부 속에 각인시킨 그 무엇을 털어버리는(그것은 죽음일 수 있지만) 것으로 진정한 관계를 회복한다.

 

이 메시지는 <그 겨울>이라는 멜로가 얼마나 세상과의 대결을 첨예하게 다루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한없이 끌어당겨진 클로즈업 속에서 우리는 이들의 멜로에, 이들의 사랑에, 이들의 체온에 한없이 빠져들었지만, 그들의 파국을 바라보면서 또한 그 프레임 바깥에 놓여진 비극적인 현실을 떠올린다. 조무철과 오수를 옥죄어오는 저 김사장이라는 인물은 그래서 그 숨겨진 차가운 현실의 표상이나 다름없다. 돈이라면 목숨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워버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이라는 이름의 캐릭터.

 

그래서 <그 겨울>은 비극이면서도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의 세상 속에서 벌어지는 비극이지만 그 자본을 벗어나 사랑으로 탈주하려는 이들에게는 비극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달라져 있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에게 돈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래서 <그 겨울>은 눈물 속에서 웃고 있는 캐릭터들처럼 이미 해피엔딩인지도 모른다. 물론 표면적인 결론이 해피엔딩일지 새드엔딩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조인성의 남몰래 흘리는 눈물과 <그 겨울>

 

조인성의 연기에 대한 대중들의 기억은 오래도록 <발리에서 생긴 일>에 멈춰져 있었다. 그것도 예능 프로그램에서 개그맨들이 흉내 내곤 했던 입에 주먹을 넣을 듯 눈물을 삼키며 전화를 거는 장면으로. 이렇게 된 것은 그 역할이 조인성이 가진 이미지와 가장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찌질하다고 표현될 만큼 자기 욕망에 충실한 그가 전화를 통해 말로는 “괜찮다”고 하면서도 상대방 몰래 솟구치는 눈물을 흘리는 연기에는 연약함과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고통스럽게 참아내야 하는 마음이 절절히 묻어났던 것이다.

 

'그 겨울, 바람이 분다'(사진출처:SBS)

바로 그 겉으론 강한 척(심지어 나쁜 척) 하면서도 사실은 그 연약하리만치 섬세한 감정이 터져 나올 때 조인성이라는 연기자는 자신의 매력을 드러낸다. 한 마디로 ‘남 몰래 흘리는 눈물’이랄까. 드라마적으로 이런 장면이 효과적으로 표현되려면 조인성과 상대역 사이에 어떤 차단막이 필요하다.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전화기가 그 소통과 차단막의 역할을 해주었듯이 <그 겨울 바람이 분다>에서는 오영(송혜교)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설정이 그 차단막 역할을 해주고 있다.

 

보이지 않는 상대인 오영과 오수(조인성)가 엮어가는 멜로가 가슴 아픈 것은 그들 간의 소통이 거의 말로 이뤄질 수 있지만 시청자들의 눈에는 그들이 하는 말 이면에 놓여진 숨겨진 얼굴이 보이기 때문이다. 오영 앞에서도 심지어 오수는 짐짓 나쁜 척, 쿨한 척 하지만 자꾸만 솟아나는 먹먹해지는 마음을 애써 숨기려 한다. 그녀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런 장면이 주는 소통의 일시적인 단절은 시청자들을 애타게 만들 수밖에 없다.

 

물론 시각장애인이라는 설정 이외에도 이 드라마는 꽤 많은 차단막들을 설치해두었다. 예를 들어 돈 때문에 접근한 오수라는 겉면과 점점 돈이 아닌 마음으로 다가가는 오수의 속내도 조인성이라는 연기자의 애써 다문 입술과 힘준 눈빛을 통해 드러나고, 잠자는 오영의 입술에 닿을 듯 멈춰서 있는 그의 입술은 연인 감정을 느끼지만 결국 오빠라고 속일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의 차단막에 의해 머뭇거린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과 속내 사이에 놓여진 이러한 차단막은 오수와 오영이 가진 삶에 대한 태도 속에도 들어가 있다. 사랑 따윈 필요 없고 살고 싶지 않다는 오영과 삶의 의미 따윈 필요 없고 그저 살아 있으니 살아봐야겠다는 오수는, 서로 만나 감정을 나누면서 상대방을 통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왜 날 이렇게 자꾸 약하게 만들어 넌. 왜 날 자꾸 살고 싶게 만들어 넌.” 겉으론 화를 내고 있지만 오영은 오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드러낸다.

 

오영에게 “살고 싶다”는 얘기를 들으려는 오수와, 오수에게 자꾸만 오빠 이상의 감정을 갖게 되는 오영. 결국 이 오영과 오수의 사랑을 더 절절하게 만드는 순간은 이들의 단단한 겉껍질이 벗겨져나가고 서로의 진짜 알맹이가 드러날 때이다. 죽음을 앞두고 있으나 그 앞에서 애써 쿨한 가면을 써오던 두 사람이, 바로 그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결국 마음을 열고 더 아프게 서로를 껴안는 것. 이것은 어쩌면 우리네 삶과 사랑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아닐까.

 

조인성이 <그 겨울 바람이 분다>에서 특히 그만의 매력을 폭발시키는 이유는 이 작품이 갖고 있는 차단막(시각장애, 오빠동생 설정, 돈과 사랑 같은)이 워낙 훌륭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조인성이라는 연기자가 가장 자신의 매력을 끌어낼 수 있는 영역이니까. 그가 미간을 찡그리고 시선을 살짝 피하며 입술을 앙다물면서 속에서 솟구치는 감정을 억누르려 할 때 그 아픈 감정은 시청자들의 마음에 바람을 불게 만든다. 마치 차가울수록 자그마한 따뜻함에도 눈물 흘리는 겨울처럼.

<야왕>, 몸 팔아야 생존하는 하류의 지옥도

 

19금은 드라마에 있어서는 큰 약점일 수밖에 없다. 보편적인 시청층을 가져갈 수밖에 없는 TV라는 매체에 어떤 좁은 문을 설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야왕>은 하지만 초반에 굳이 19금을 달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남자 주인공인 하류(권상우)가 다해(수애)를 공부시키고 취직시키기 위해 몸뚱어리 하나로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성들에게 몸을 파는 호스트 일뿐이다. <야왕>은 결국 19금 드라마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호스트라는 하류의 직업을 그대로 다루었다. 그것만큼 이 신자유주의의 지옥도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야왕'(사진출처:SBS)

하류(이름부터가 상류사회와 대비되는 하류인생을 의미한다)는 지중해라는 호스트바에서 ‘등신’이라 불린다. 여성들 앞에서 웃통을 벗고 잘 빠진 몸을 보여줌으로써(신 같은 등 근육) 여성들의 지갑을 열게 만든다. 하지만 하류는 그 별칭 그대로 등신이다. 다해와 딸 은별(박민하)을 위해 결국 웃음을 팔고 몸을 파는 처지. 심지어 그는 다해가 우발적으로 벌인 의붓아버지의 살인을 자신이 뒤집어쓰려고까지 한 인물이다. 게다가 다해가 유학을 보내달라고 하자 어렵게 끊어버린 호스트 일을 다시 시작한다. 등신이 이런 등신이 없다.

 

없는 자들이 신자유주의의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유일한 자산인 몸뚱어리를 팔아야 한다는 것은 하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야왕>이 하류라는 남자 신파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사회적인 맥락을 찾아내는 건 그 교차점으로서 다해의 성공을 위한 안간힘 역시 하류와 다를 바 없는 삶으로 그려지기 때문일 게다. 하류가 유학 보낸 다해에게 부칠 삼백만 원을 벌기 위해 지금껏 피해왔던 진짜 호스트질을 하는 장면은, 잔인하게도 다해가 미국 유학에서 의도적으로 접근한 백학그룹의 장남 백도훈(유노윤호)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과 교차 편집되어 보여진다.

 

하류가 다해를 위해 몸을 팔고 나와 받은 돈 삼백만 원짜리 수표를 일그러뜨리며 눈물을 터트리는 그 순간 다해는 하류를 버리고 백도훈의 품에 안긴다. 이 두 장면은 하류나 다해나 똑같이 몸을 팔아야 살아남는 사회의 단면을 잡아내지만 그 풍경은 사뭇 다르게 그려진다. 즉 하류는 말 그대로 몸 파는 남창의 모습을 담는 반면, 다해는 무수한 멜로드라마에서나 나올 왕자님과 사랑에 빠진 신데렐라의 모습을 담는다(다해가 처음 백도훈을 지하철에서 만나게 된 것이 그 벗겨진 구두 때문이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하류가 보여주는 남창의 모습은 이 사회가 가진 처절한 현실의 맨얼굴을 보여주는 셈이다. 반면 다해는 사랑이나 성공이라는 가치로 포장되어 겉으로는 심지어 로맨틱하게 보여지는 그 행위가 사실은 저 남창 짓을 하는 하류보다도 못하다는 걸 보여준다. 고전적인 이야기지만 하류는 몸을 팔았지만 영혼까지는 팔지 않았다. 반면 다해는 성공과 욕망을 위해 남편과 아이까지 저버리는 영혼을 파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몸을 파는 행위와 영혼을 파는 행위. 이것을 저울로 달 수 있다면 어떤 것이 더 무거운 죄일까.

 

하류라는 캐릭터가 신자유주의 시대 스펙 없이는 취업조차 어려운 청춘의 모습과 저 개발시대에 가족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삶 따위는 팽개쳐버린 우리네 가장들의 모습을 동시에 담고 있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개발시대에 우리 사회가 가장들을 희생시켰던 것처럼 이제 그렇게 성장된 나라는 신자유주의라는 기치 아래 우리네 젊은이들을 희생시키고 있다. 몸뿐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팔아야 겨우겨우 생존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살풍경. <야왕>이 하류와 다해를 통해 보여주는 건 그 살풍경이 만들어내는 지옥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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