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소녀’, 넷플릭스가 꺼내놓은 K멜로 세계도 반응할까

20세기 소녀

첫 사랑이다. 간만에 다시 느껴보는 첫 사랑의 설렘과 두근거림 그리고 가슴 아픔까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20세기 소녀>는 간만에 보는 본격 멜로의 감성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심장수술을 위해 외국으로 떠나는 연두(노윤서)를 위해 그의 둘도 없는 친구 보라(김유정)는 친구가 짝사랑하는 백현진(박정우)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해 알려주기로 한다. 그런데 백현진을 관찰하다 보니 그의 친구 풍운호(변우석)가 자꾸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보라는 풍운호와 가까워지지만 수술을 마치고 돌아온 연두가 짝사랑했던 인물이 백현진이 아니라 풍운호였다는 사실이 충격을 받는다. 

 

어찌 보면 전형적인 하이틴 로맨스 풍의 첫 사랑 서사다. 친구와의 우정과 이성과의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고 삼각, 사각으로 얽히는 관계 속에서 처음에는 설레다가 깊어지고 그래서 아파하게 되며 힘들어하는 그 저릿하지만 익숙한 이야기. 세기말의 레트로한 감성이 있는데다 풋풋한 청춘남녀들의 사랑과 우정이야기가 펼쳐져 있어 어딘가 종영한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익숙한 첫 사랑의 서사에 저도 모르게 빠져들게 되고, 과몰입하게 되더니 어느 순간 눈물을 훔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건 옛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20세기 소녀>의 풋풋한 사랑과 우정 이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가 이 익숙한 스토리에 관객을 빠져들게 만드는 K멜로 특유의 섬세한 밀당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중전화, 삐삐 같은 지금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는 20세기 연애의 매개체들은, 애타는 청춘남녀들의 마음이 곧바로 연결되지 않고 엇갈리기도 하는 중요한 장치들이 된다. 전화 한 통이나 혹은 문자 메시지 하나로 쉽게 연결되고 쉽게 끊어지는 21세기와는 전혀 다른 감성이 바로 이 20세기식 연애에는 자연스러운 밑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영화가 어른이 된 나보라에게 배달된 낡은 비디오테이프로부터 시작되는 것도 이런 감성을 말해준다. 

 

첫사랑 서사는 어딘가 현재의 나가 바라보는 그 때 그 시절의 서툴렀지만 순수하고 풋풋했던 우리 모두의 감성을 건드리는 힘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 <20세기 소녀>는 20세기와 21세기로 구분되는 달라진 시대적 감성을 또 다른 관점으로 붙여 놓는다. 그래서 21세기에 바라보는 20세기의 사랑이야기는 더 애틋하게 느껴진다. 

 

사실 우리네 영화에서 멜로 장르는 어느 순간부터 잘 보이지 않는 영역이 되어버린 게 현실이다. 비교적 최근 작품으로 떠오르는 건 2019년 방영됐던 <유열의 음악앨범> 정도다. <8월의 크리마스마스(1998)>, <봄날은 간다(2001)>, <행복(2007)>, <호우시절(2009)> 같은 레전드 멜로를 연출했던 허진호 감독이 본격 멜로에서 벗어나 <덕혜옹주(2016)>나 <천문:하늘에 묻는다(2019)> 같은 다른 장르의 영화를 만든 건 아무래도 극장이라는 공간에서의 멜로가 더 이상 관객들을 끌기 어렵다는 현실 인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대신 허진호 감독은 2021년 <인간실격>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안방극장에 멜로를 그려 넣었다. 

 

<건축학개론(2012)> 같은 첫사랑 서사를 담은 멜로가 극장에서 열풍을 일으키던 시대는 서서히 저물고 있다. 여기에 OTT 같은 안방극장이 본격화되면서 멀티플렉스 극장은 그만큼 블록버스터화한 영화들을 전면에 내세워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래서일까. 넷플릭스에서 만나는 첫사랑 서사를 담은 본격 멜로 영화 <20세기 소녀>는 더더욱 반갑게 느껴진다. 극장의 변화로 인해 설 자리를 잃어가던 멜로 영화가 다시금 설 자리를 마련한 듯한 반가움이다. 

 

이 작품은 특히 최근 들어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플랫폼에 의해 <연모>, <스물다섯 스물하나>, <갯마을 차차차>, <사내맞선> 등등 전 세계에 저변이 만들어지고 있는 K멜로의 저력을 드러내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향후 글로벌 반응이 궁금해진다. 서구의 멜로에서는 보기 어려운, 피부가 아니라 가슴을 간지럽게 하고 뛰게 만들어 사람을 미치게 하는 K멜로의 힘이 이 작품 안에 녹아 있다. 빨갛게 익어가는 가을 저마다 가슴 한 편의 첫 사랑을 끄집어내게 만드는 시간 속에 빠져보기를.(사진:넷플릭스)

‘환혼’이 훌쩍 뛰어넘은 무협, 멜로 그 이상의 성취

환혼

“넘치는 힘이란 건 네가 기쁜 만큼만 쓰고 말 수는 없어. 비를 바라면 홍수를 피할 수 없고 바람을 원하면 태풍을 맞아야 하듯이 감당해봐.” tvN 토일드라마 <환혼>에서 무덕이(정소민)는 얼음돌 한 가운데서 환각처럼 어린 시절의 자신과 대화를 나눈다. 그 말은 지금까지 술력을 쌓아 더 강한 자가 되고픈 이 드라마가 그려내던 그 욕망들을 무화시키는 말이기도 하다. 

 

무덕이는 “이 힘을 두고도 내 맘대로 쓸 수 없다는 것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어린 시절의 무덕이가 말한다. “당신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있긴 합니다. 쓰지 않는 겁니다. 그 힘을 쓰지 않는 선택은 당신 뜻대로 할 수 있어요.” 아이러니한 이야기다. 얼음돌이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인간이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건 그 힘을 쓰지 않는 선택뿐이라니. 이건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여기서 <환혼>의 이야기는 ‘자연의 힘’과 ‘인간의 힘’에 대한 다소 철학적인 이야기를 그려낸다. 인간이 수련을 통해 수기를 모으고 그것으로 술력을 키워 자기 것이라 착각하지만, 그건 사실은 수기라는 자연의 힘(하늘의 기운)을 활용하는 것일 뿐,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자연의 힘을 있는 그대로 놔두고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소유해 그 힘으로 권력을 잡으려는 욕망이 만들어내는 파국. <환혼>이 그리려한 세계가 그저 술력 키우는 무협에 적당히 달달한 멜로를 섞어 낸 그런 세계가 아니라는 걸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얼음돌은 그래서 이러한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 어리석은 인간들이 드러내는 욕망을 끄집어내는 일종의 리트머스지 같은 장치다. 얼음돌을 통해 환혼술을 소환해 제 몸을 장강(주상욱)과 바꿔 그의 아내를 탐한 선왕의 욕망이 그렇고, 뱃속에서 13개월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은 아이를 구해내려 금기를 어겨가며 얼음돌을 꺼내와 장강을 통해 아이를 살려낸 진요원의 원장 진호경(박은혜)이 그렇다. 얼음돌의 힘을 통해 권력을 쥐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천부관 부관주 진무(조재윤)도, 그 얼음돌로 환혼해 왕비 행세를 하는 당골네도 모두 그 비뚤어진 욕망 앞에 무너진 어리석은 선택을 한 자들이다. 

 

만장회에 모인 모든 이들이 얼음돌의 힘을 궁금해하고 그래서 그 욕망에 눈 멀어 무덕이를 죽이고 되살리는 시연을 하는 걸 막지 않는 것도 그런 어리석은 선택의 결과다. 결국 그 선택은 이들 앞에 거대한 자연의 환란으로 돌아온다. 정진각 주변을 거대해진 얼음돌의 힘이 결계를 만드는 것. 그래서 그 안에 갇힌 장욱, 무덕이는 물론이고 서율(황민현), 고원(신승호) 같은 청춘들이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과, 그 바깥에서 아이들의 운명은 깜빡 잊은 채 얼음돌의 힘에만 눈이 멀었던 만장회 어른들의 모습은 극명히 대비된다. 

 

이건 마치 자연의 힘(하늘의 기운)을 제 것으로 가지려는 어른들의 욕망이 후대를 살아가야 할 아이들(청춘들)에게 어떤 비극으로 돌아오는가를 그려내는 은유 같다. 과학의 힘을 과신해 환경을 훼손해가며 마구 에너지를 끌어온 그 대가가 현재 후대들 앞에 어떤 암울한 미래를 펼쳐놓고 있는가를 떠올려 보라. <환혼>이 무협의 세계를 통해 그려놓은 얼음돌이라는 하늘의 기운을 가진 힘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상징과 은유로 다가오는가 새삼 느껴질 게다. 

 

“인간의 기운인 수기도 내 몸 속에서 돌리지 못하면 내 것이 되지 못하는데 하늘의 기운을 돌려서 가질 수 있는 인간이 있겠어?” 하지만 장욱의 이 말처럼 <환혼>은 저 어른들과는 다른 선택을 하는 청춘들을 통해 희망을 담는다. 장욱은 그 하늘의 기운을 가질 수 없다면 다 내어주면 어떻겠냐고 되묻는다. “내 기운을 다 하늘의 기운에 내어준다면 내 기운이 다 하늘의 기운이 되는 거잖아.” 

 

술력을 쓰면 기력을 모두 빨아들이는 얼음돌의 결계 속에서 장욱은 탄수법을 써서 그 결계를 깨기 위해 자신의 기력을 다 내어주고 대신 물 한 방울을 만들려 한다. 그 물 한 방울이 결계를 깨고 수 천 수 만 개의 빗방울이 될 거라 믿는다. 그간 벼랑 끝에 제자를 세워 술력을 키우게 해온 사부 무덕은 장욱의 그런 선택을 반대한다. 하지만 결계를 깨지 않으면 다친 서율이 죽을 수도 있다며 던진 장욱의 한 마디는 무덕을 수긍하게 만든다. “무덕아 네가 포기한 건 지키기 위해서지? 나도 지키려는 거야. 그리고 유리도 그동안 널 지켜왔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갖기 보다는 다 내어주는 것. 이 청춘들은 술력을 갖기 보다는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한 선택을 한다. 이 부분에서 <환혼>의 멜로는 달달한 청춘들의 사랑 그 이상의 함의로 확장된다. 스승 무덕은 장욱 앞에서 힘을 되찾을 기회를 버리고, 제자 장욱은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그간 어렵게 쌓아온 기력을 버린다. 그렇게 대호국에 나타난 거대한 환란은 이들의 희생에 의해 사라진다. 

 

“스승님, 제자 오늘로 파문하겠습니다. 그간 못난 제자를 벼랑 끝에 세워두고 떠밀며 여기까지 이끌어주셔 감사했습니다. 비록 스승께선 힘을 찾을 기회를 버리시고 제자 또한 그동안 쌓아온 기력을 버렸지만 그로인해 평생 곁에 둘 소중한 이를 얻었습니다. 쓰이고 버려지지 않고 지키고 간직하고자 하니 파문을 허락해주십시오.” 장욱이 무덕에게 파문을 요구하고 그러자 무덕은 이를 허락한다. 사제지간은 그것으로 끝이 난다. 

 

대신 장욱과 무덕의 연인 관계가 남는다. “아 그럼 이제 도련님한테 시집와라. 무덕아.” 술력 대신 사랑의 선택. 그건 사적 욕망 대신 공존을 선택한 것이란 점에서 그 의미가 깊어진다. 이 쿨내 진동하는 장욱과 무덕이 그려낸 <환혼>의 서사가 그저 가벼운 무협과 멜로 그 이상의 성취를 갖게 된 이유다. (사진:tvN)

‘환혼’의 멜로가 특별한 건 사제, 주종 케미를 가장해서다

환혼

“제가 무덕이를 많이 좋아합니다.” “지가 도련님을 진짜로 좋아해유.” tvN 토일드라마 <환혼>에서 장욱(이재욱)과 무덕이(정소민)는 그렇게 각각 송림의 총수 박진(유준상)에게 말한다. 둘 사이의 비밀이 무엇이냐고 각각 물어보며 만일 답변이 틀릴 시 무덕이를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박진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각자 갖고 있던 음양옥을 꺼내 보이며 그렇게 말하자 박진은 실소를 터트리며 그들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 장면은 <환혼>이 장욱과 무덕이의 멜로를 그리는 특별한 방식이 들어있다. <환혼>은 두 사람의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을 절묘한 위기 상황과 엮어 드러낸다. 환혼인을 추적하며 장욱과 무덕이의 비밀을 캐묻는 박진 앞에서 두 사람은 피해나갈 묘수로서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털어 놓는다. 그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처럼 보이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아닌 척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죽도록 좋아한다는 말을 죽지 못해 자백”한 것처럼 꾸미지만, 실제로 무덕이 역시 장욱을 좋아하는 마음을 여러 차례 들킨 바 있어서다. 

 

무덕이 얼버무리며 자신의 속내를 숨기려 하자 장욱은 진지하게 속내를 꺼내놓는다. “스승님 죽어도 좋으면 버리지 않고 하던 거 계속 해도 됩니까? 제자가 죽을 결심을 할 땐 스승님도 함께 해야 된다고 했지? 난 죽어도 계속 할 거야. 그러니 우리 무덕이도 어렵게 자백한대로 계속해서 도련님을 죽도록 좋아해봐.” 그런데 그 말투가 존대와 하대를 넘나든다. 스승에게 하던 말투에서 하인에게 하는 말투로 넘어가는 것. 그건 사제 관계이기도 하고 주종 관계이기도 한 두 사람의 애매모호한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면서, 그것이 그저 가장하는 것일 뿐이라는 걸 말해준다. 실상은 연인 관계라는 것. 

 

<환혼>에는 이처럼 장욱과 무덕이가 어떤 위기상황에 놓였을 때 그간 사제이자 주종을 가장했던 관계를 뚫고 드러나는 실제 연인 관계의 스토리가 자주 등장한다. 천부관에 갇혀 죽을 위기에 처한 무덕이가 어찌된 일인지 수기를 빼내려는 환관으로부터 거꾸로 수기를 흡수하는 모습을 보이고, 그러자 자신이 폭주한 줄 알고 다가오는 장욱을 무덕이가 막으려했을 때도 이런 멜로의 한 장면이 연출된다. “안돼. 만지지마 내가 폭주한 거면, 네가 나를 만지면 너는 수기를 빼앗겨 죽을 거야.” 하지만 그 말에도 불구하고 장욱은 무덕이를 꼭 껴안아준다. 그건 장욱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면서 무덕이가 폭주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주는 대목이다. 

 

장욱이 송림의 정진각 술사로 들어가고, 자격이 없는 무덕이는 송림에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이른바 ‘송림하인선발대회’에 나가겠다며 장욱에게 던졌던 고지문에 대한 에피소드도 이들의 애틋한 관계를 에둘러 드러낸다. 결국 무덕이가 대회에 나가 하인으로 선발되고 송림에 들어오게 됐을 때 장욱은 무덕이가 던졌던 그 고지문을 꺼내 보이며 거기 담긴 의미를 자신이 읽었다고 말한다. “내가 이 짓을 해서라도 너를 꼭 보러 가겠다. 너만 볼 수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라는 것. 

 

그러자 무덕이는 애써 이를 부인하며 그 종이를 태워버린다. 하지만 장욱은 “이미 주고받은 게 태운다고 없어지겠냐”며 이렇게 말한다. “근데 스승님. 제자가 최근에 안 보이느 걸 읽는 걸 읽는 술법을 익혔습니다. 심서를 읽었다고 했잖아. 한번 보실래요? 보이지 않는 걸 읽을 땐 이렇게 집중해서 들여다 봐야 돼. 그리고 받을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거야. 무덕아.” 결국 장욱의 그 말에 무덕이는 속내를 들켜버린다. 그러자 장욱이 말한다. “읽혔다. 안 보인다고 없는 게 아냐. 그저 숨기고 있는 거지.”

 

안 보인다고 없는 게 아니다. 그저 숨기고 있는 것일 뿐. 아마도 <환혼>에서 장욱과 무덕이의 사랑이 이토록 애틋하게 느껴지는 건 바로 이 점 때문일 게다. 사제와 주종을 가장해 숨기고 있지만 특정한 상황 속에서 저도 모르게 불쑥 불쑥 나오는 마음들과, 거부하려 해도 어쩔 수 없는 마음들이 서로를 향해 가는 것. 마치 음양옥이 서로 반응하듯 불이 켜지고 부인하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서로를 향해 다가가게 되는 그 마음을 읽게 되는 것. <환혼>의 멜로는 그렇게 무심한 척 시청자들의 가슴을 툭툭 건드리고 있다. (사진:tvN)

살벌 누아르에 들어온 멜로 배우들, 그 반전의 시너지(‘빅마우스’)

빅마우스

빚에 쪼들리면서도 입만 열면 뻥뻥 허세를 터트리는 빅마우스(Big mouth) 변호사. 어쩌다 재벌가와 언론사 권력자들의 사건에 휘말리고, 하루아침에 희대의 사기꾼이자 마약왕으로 불리는 빅마우스(Big mouse)가 되어버린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 변호사, 감옥에서 벌어지는 사투와 성장, 진실과 정의를 위한 복수극. MBC 금토드라마 <빅마우스>는 누아르 장르의 복수극이 갖고 있는 전형적인 서사를 풀어 놓는다. 

 

뻔해 보이지만 이 복수극이 시청자들의 시선을 빼앗는 건 여러 가지 흡인 요소들이 겹쳐져 있어서다. 일단 거대한 사건에 휘말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그렇고, 그 인물이 다름 아닌 권력자들에 의해 핍박받는 서민들이라는 점이 그렇다. 복수극이고 진실을 파헤치는 이야기지만 <빅마우스>는 여기에 소시민들의 정서를 얹어 놓았다. 무엇보다 진짜 빅마우스가 누군가 하는 궁금증은 이 누아르에 강력한 추동력을 만든다. 벌써부터 누명을 쓴 변호사 박창호(이종석)의 아내 고미호(임윤아)와 장인인 고기광(이기영)이 진짜 빅마우스가 아니냐는 추측들이 나오고 있다. 

 

전형적인 서사 구조를 갖고 있지만 드라마를 쫄깃하게 만드는 건 역시 능숙한 스토리텔링의 흥미진진함에서 나온다. 피와 살이 튀는 살벌한 누아르의 세계 속으로 뛰어 들어가지만 <빅마우스>는 리얼하게 그 세계를 그리기보다는 다소 이야기성이 가미된 허구라는 걸 슬쩍 슬쩍 꺼내놓으며 드라마를 풀어간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비현실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이야기의 흥미로움에 빠져든다. 게다가 이런 현실과의 거리감은 박창호라는 인물이 겪는 잔혹한 상황들을 보는 것이 힘들 수 있는 시청자들에게도 적당한 숨 쉴 여지를 만들어낸다. 

 

이를 테면 감옥에서 모든 걸 포기한 박창호가 아내에게 보험금을 남기기 위해 죽을 결심을 하고 조폭 두목과 희대의 사이코패스에게 시비를 거는 대목이 그렇다. 자신을 죽여 달라고 거는 시비지만 드라마는 그런 목숨을 거는 박창호의 ‘다이 하드’ 반전을 그려낸다. 즉 두목을 제끼고 사이코패스가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것. 그건 과장되고 어찌 보면 코미디가 섞인 스토리지만 이런 허구가 힘겨운 상황에 놓인 박창호를 보고 있어야 하는 시청자들에게는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요소다. 

 

이런 스토리텔링의 여유는 아무래도 김하람 작가와 함께 이 작품의 크리에이터로 참여한 장영철, 정경순 작가의 공력이 더해져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대조영>부터 <자이언트>, <기황후>, <배가본드> 같은 대작들을 주로 써오며 끝없이 상황을 뒤집는 스토리 운용에 탁월한 작가들이다. <빅마우스>가 가진 적당한 긴장감과 이완의 균형은 이 스토리를 너무 힘들지 않게 보게 만드는 운용의 묘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을 더욱 몰입하게 만들고 흥미진진하게 만든 건 캐스팅이다. 누아르 장르와 이종석, 임윤아의 조합. 어찌 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드라마는 첫 회에 이종석과 임윤아를 부부로 내세워 알콩달콩한 서민 멜로의 그림들을 채워 넣은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서민적인 멜로의 풍경들이 전제되면서, 하루아침에 파괴되어 버리는 그 서민의 일상이 더 리얼해졌다. 

 

이종석의 얼굴이 점점 피로 물들어가고, 멍과 상처로 가득 채워질수록 시청자들은 이 인물에게 연민을 느끼며 빠져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멜로가 어울릴 법한 이미지를 가진 임윤아의 얼굴에 점점 단호한 의지가 엿보일 때 시청자들 역시 그 마음에 동참하게 된다. 거대한 권력자들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지는 서민의 얼굴, 그것도 달달한 멜로가 어울릴 것 같은 선남선녀가 피가 튀는 진창에 빠져 몸부림을 칠 때 이 드라마는 오히려 강력한 동력이 만들어진다. 

 

이것은 이종석과 임윤아가 자신들의 보다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주는데도 효과적인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토리라인을 좋아하는 작가들의 성향 상 향후 이들의 정체 또한 어떤 반전 모습을 드러낼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배우로서도 충분히 도전할만한 가치가 있는 스토리 속 인물들인 셈이다. 

 

그래서 이종석과 임윤아의 캐스팅은 마치 살벌한 누아르 속에 들어온 평범한 서민 멜로의 주인공들 같은 반전의 시너지를 만든다. 다소 익숙한 스토리라인이 뻔하게 흘러가지 않고 시청자들의 마음을 잡아 끌게 만든 건 이 캐스팅에 묘수가 있었다고 보인다. 앞으로 이들은 어떤 변화된 얼굴로 시청자들에게 카타르시스와 소름을 안길까. 이미 깔려진 판만으로도 기대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사진:MBC)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