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스>가 겨눈 회사의 경쟁 시스템에 대한 칼날

 

회사의 경쟁 시스템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승진과 과락, 인턴과 정식사원. 밥줄을 쥐고 있는 회사는 트레이닝과 선발 과정이라는 명분으로 몇 개월씩 싸게 부려먹고는 입맛에 맞지 않고 내치기도 한다. 또 성실하게 일해 온 사원을 실적이 조금 안 나온다고 무능하다며 하루아침에 해고통보를 하기도 한다. 그렇게 밀려난 인물들이 심지어 죽음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고 해도 회사는 눈 하나 까닥 하지 않는다. <오피스>가 웬만한 공포물보다 더 무섭게 다가오는 건 그래서일 게다.

 


사진출처:영화<오피스>

영화 <오피스>는 회사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다룬다. 워낙 진중한 사회적 의미를 갖는 질문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사회극에 가깝지만 영화는 웬만한 공포물을 뛰어넘는다. <미생> 같은 작품이 회사생활이 가진 비애를 휴먼드라마에 가깝게 그려낸다면 <오피스>는 그 비애의 차원을 넘어선 분노와 그 분노가 만들어내는 공포를 담는다.

 

인턴으로 들어와 4개월 차에 접어든 이미례(고아성)는 늘 불안하다. 정식사원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동료들과 어우러질 수도 없다. 그런 그녀에게 따뜻하게 대해준 유일한 인물이 김병국(배성우) 과장이다. 그 김병국 과장이 일가족을 살해하고 회사로 숨어들어왔다. 착하디 착한 심성의 그를 왕따 했던 동료와 상사는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오피스>가 포착하는 공포는 그러나 김병국 과장이 뿜어내는 그 살벌한 살인자의 느낌 때문이 아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그저 일하는 공간으로서 공유하고 있던 회사라는 곳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공간인가를 드러낸다. 한밤 중 모두가 퇴근한 후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을 때 느껴지는 그 서늘함이라니.

 

회사에서 잠시 스트레스를 벗어나 숨을 돌리는 공간들은 그래서 <오피스>에서는 소름 돋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잠시 숨을 돌리듯 담배를 피우며 회사 뒷담화를 하곤 하는 계단 흡연 장소나, 그래도 혼자만의 공간이 될 수 있는 화장실 같은 공간이 그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놓는 공간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어가는 장면을 바라본다는 건 실로 무시무시한 일이다.

 

그 공간이 그토록 무섭게 다가오는 이유는 사람들 때문이다. 경쟁적인 현실. 누군가는 승진하고 누군가는 뒤로 밀려나며, 누군가는 정식사원이 되지만 누군가는 인턴의 끄트머리에 쫓겨날 운명에 처하기도 한다. 이 경쟁적인 시스템 안에서 인간적인 관계 따위는 존재하기 어렵다. 혹여나 인간적인 관계를 드러내려 할 때면 그것은 자칫 무능함으로 낙인 찍히는 게 시스템의 법칙이다. 그래서 <오피스>에서는 뒤에서 수근 대는 사람들의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소름 돋는 일이 된다.

 

그래서 <오피스>는 사회극처럼 그려졌지만 결과물은 공포물이 되었다. 시스템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스트레스 상황은 <오피스>가 그려내는 우리네 경쟁적인 사회의 단면이지만, 영화는 그 안에 서슬 퍼런 칼 한 자루를 던져 넣음으로써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가를 들여다본다.

 

그 결과는 참혹하다. 하지만 그 참혹한 결과가 보여주는 건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듯 멀쩡하게 시스템으로 위장한 채 보여지는 회사의 실체이기도 할 것이다. 과연 거기에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있는가. <오피스>의 서슬 퍼런 질문은 우리네 일터의 현실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식을 담아낸다.

 

어쨌든 조금 무거울 수밖에 없는 영화이고 또 공포물의 특징을 갖고 왔기 때문에 대중적이라고 말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회사라는 공간에서 누구나 한번쯤 비애감이나 분노를 느꼈던 분들이라면 이 무시무시한 공포물이 한 편으로는 무의식 깊숙이 밀어 넣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표정을 가장하며 숨겨두었던 금기를 터트리는 쾌감 또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공포물보다 더 무시무시한 회사의 풍경이라니. 이런 이야기에 공감하는 현실은 실로 통탄할 일이 아닌가.



<용팔이>, 깨어난 김태희 멜로의 시작은 독?

 

<용팔이>가 방영되기 전부터 김태희 연기력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 제작발표회 현장에서도 대놓고 기자들은 연기력 논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김태희 역시 이제는 그런 논란에 대해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너무 많이 제기되다 보니 그 대처에 있어서도 당황하는 모습보다는 능수능란하다는 느낌마저 있었다. 그녀는 그런 지적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노력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용팔이(사진출처:SBS)'

드라마가 방영되었지만 막상 김태희의 분량은 적었다. 간간히 회상 신에서 그녀의 분량이 나왔지만 대부분은 병실에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사실상 4회까지 김태희가 한 연기는 반듯이 누워 있는 모습이라는 지적들이 나왔다. 심하게는 누워서 돈 번다는 얘기도 나왔고, 누워만 있는데도 불구하고 연기력이 여전하다는 지적까지 나왔다.

 

사실 이건 김태희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평가일 수 있다. 즉 본격적으로 연기를 보여준 것도 없는 상황에서 제기되는 연기력 논란이라면 사실 어떤 연기를 보여줘도 논란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걸 말해준다. 게다가 누워 있는 연기도 연기이고 그것 역시 결코 쉬운 연기는 아닐 것이다. 본래 대사라는 것이 움직이면서 나올 때 가장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니 움직임이 제한된 누운 상태에서 던지는 대사는 자칫 잘못하면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게 된다.

 

객관적으로 보면 김태희의 연기는 대단히 뛰어나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논란이 나올 정도는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 건 한 번 엇나간 흐름을 되돌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보여준다. 젊은 시절부터 꼬리표가 달려버린 연기력 논란은 그렇게 떼어버리기 어려운 주홍글씨처럼 김태희라는 이름 석 자에 달라붙어 있다.

 

거기에 지금의 연기야 그렇다 쳐도 그 연기까지 오는 기간이 10여 년의 세월을 훌쩍 넘겼다는 사실을 덧붙이면 연기력 논란의 문제는 더욱 떨치기 어려운 사실이 되어버린다. 누군가는 연기력 논란을 한 번 겪고는 그대로 영원히 드라마에서 보기 힘든 상황을 겪기도 하는데, 김태희는 그런 논란 속에서도 현재까지 끊임없이 작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공평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4회가 지난 후 <용팔이>에서 김태희는 눈을 뜨고 본격적인 연기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녀가 눈 뜨고 보여주는 연기의 선이 멜로. <용팔이>는 진화된 의학드라마 형태로 그 안에 누아르적인 요소부터 액션, 사회극까지 다양한 장르들을 포괄한 작품이다. 그런데 김태희가 보여줄 연기가 이 많은 틀 중에서 우선 멜로에 집중되어 있다는 건 그녀로서는 불리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물론 이 선택은 드라마의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즉 많은 이들이 멜로가 끼어든 장르물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사실상 아직까지 지상파 드라마에서 멜로 없이 성공한 장르는 없다는 점이다. 드라마의 대중성을 높여주는 건 결국은 멜로다. 그러니 김태희가 눈을 뜨는 시점은 정확히 새로운 장르를 보여주던 드라마가 이제 멜로라는 틀로 그 몰입도를 높여놓는 단계와 일치한다.

 

멜로 연기는 지금껏 김태희가 계속 보여줬던 연기다. 그러니 아무리 잘해도 잘한다는 평가가 나오기 어렵다. 오히려 악역을 하거나, 액션을 선보이거나 한다면 다른 반응이 나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주원처럼 젊은 배우의 사랑을 받는 여성의 역할을 연기하게 되었다. 이 멜로 구도는 분명 드라마에 새로운 힘을 부여한다. 하지만 김태희의 연기력 논란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물론 김태희 스스로 밝혔듯이 이 모든 건 그녀로부터 생겨난 일들이다. 그래서 그녀 스스로 그 난관을 극복해내야 한다. <용팔이>는 훌륭한 작품이지만 그것이 김태희에게도 좋은 선택인지는 한번쯤 생각해봐야 한다. 만일 연기력 논란을 제대로 털어내고 싶다면 지금껏 하지 않았던 역할로 기존 이미지를 깨버리는 과감한 선택이 필요하지 않을까.



<상류사회>, 그건 사랑일까 욕망일까

 

상류사회를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각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뉜다. 그 하나는 선망이자 판타지다. 서민들이라면 도무지 가질 수 없는 화려하고 부유한 삶에 대한 막연한 동경. 이걸 드라마로 다루면 주로 신데렐라가 나오는 멜로가 나온다. 다른 하나는 계급적인 시각이다. 죽어라 열심히 살고 있는데 누구는 점점 더 잘 살고 누구는 점점 못 살게 되는 사회 시스템의 부조리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걸 드라마로 다루면 사회극이 나온다. 그렇다면 아예 제목부터 <상류사회>인 이 드라마는 어떤 시각을 보여주고 있을까.

 

'상류사회(사진출처:SBS)'

<상류사회>는 이 두 가지 패턴화된 시각을 여지없이 깨버린다. 회장 아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 흔한 신데렐라 이야기는 잘 보이지 않는다. 서민 중의 서민으로 보이는 알바생 이지이(임지연)는 그를 쫓아다니는 재벌가 아들 유창수(박형식)에 대해 무조건적인 호감을 표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진 자들은 다 그러냐며 밀어내고 대신 서민의 아들이라는 최준기(성준)에 대한 호감을 드러낸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봐온 재벌가 아들과 서민 캔디의 조합하고는 조금 다른 풍경이다.

 

한편 재벌가 딸인 장윤하(유이)는 신분을 속인 채 마트에서 알바를 한다. 절친인 이지이에게조차 신분을 속이고 살아가는 그녀는 창수가 지이에게 접근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긴다. 재벌가들의 그저 그런 여성편력이라 생각하는 것. 이지이를 진정한 친구로 여기는 그녀는 서민들의 소박한 삶에 오히려 로망을 느낀다. 정략결혼을 시키려는 엄마와 달리 그녀는 소박한 사랑과 결혼을 꿈꾼다. 이것 역시 흔히 보던 재벌가 이야기와는 사뭇 다르다.

 

그렇다면 상류사회에 대한 계급적 시각을 드러내는 것일까. 윤하네 집안만을 보면 그런 것처럼 보인다. 윤하가 그토록 서민적인 소박한 삶에 대한 로망을 느끼는 건 권위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집안의 분위기 때문이다. 가족이라기보다는 사업체에 가까운 그 곳은 결혼조차 기업 간의 계약처럼 다뤄지는 곳이다.

 

하지만 또 다른 상류사회의 일원인 창수는 이런 시각과는 또 다르다. 창수는 물론 일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친구인 준기에게조차 분명한 상사와 부하의 위치를 드러내지만, 자주 두 사람은 친구관계의 끈끈함을 드러낸다. 창수가 자신과 같은 상류사회의 일원이 아니라 조금씩 지이 같은 서민여성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흥미롭다. 물론 이 두 관계는 애매모호하다. 그것이 과연 진정한 우정인지, 그것이 과연 진정한 사랑의 감정인지 아직까지 모호한 것.

 

<상류사회>가 그리는 건 우리가 상류층에 대해 갖고 있는 밑그림을 그대로 그려놓은 것은 맞지만 청춘남녀의 사랑은 계층과 무관하게 흘러간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 서로 다른 계층이 사랑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이러한 사랑과 욕망의 변주곡을 그저 이분법적으로 단순하게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순간순간 상황에 따라 일어나는 스파크들과 감정들이 우리의 통상적인 편견과 선입견을 뛰어넘어 그려지는 건 <상류사회>가 가진 괜찮은 덕목이다.

 

최근 들어 가면코드가 하나의 트렌드처럼 등장하고 있다. 가면이 이렇게 트렌드가 된 건 일종의 편견을 없애주거나 편견을 벗어버리기 위함이다. 이 드라마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역시 그 가면을 벗기고 드러내는 상류사회의 민낯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면이 있다.

 

편견의 가면을 벗으니 드라마는 상류사회를 소재로 다루었던 그 어떤 드라마들도 잘 보여주지 않던 새로운 관계들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윤하와 지이의 사랑 그 이상의 우정이 주는 감동 같은 것이다. 윤하의 실체를 모르는 지이는 자신이 마음에 두었던 준기가 윤하에게 관심을 보이자 선선히 친구에게 자신이 준기를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친구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것. “유일한 친구면서 가족이야 넌.” 이 대사는 그래서 가족조차 기댈 곳이 되어주지 않는 윤하의 마음을 울린다.

 

사실 재벌가와의 사랑을 얘기하면서 쉽게 재단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이 사랑인지 아니면 욕망인지 도무지 헷갈리는 것이 실제일 것이다. <상류사회>가 어째 지금까지 봐왔던 재벌가 이야기들과 신데렐라 이야기의 변주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건 그 클리셰와 편견의 가면을 훌쩍 벗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민낯에서 발견되는 의외의 감동이나 관계 같은 것. 그것이 <상류사회>가 흥미로워지는 대목이다.

 

'유혹', 권상우는 아내에게 무슨 잘못을 한 걸까

 

SBS 월화드라마 <유혹>의 첫 회 마지막 장면은 도발적이었다. 빚으로 벼랑 끝에 몰린 석훈(권상우)에게 세영(최지우)“3일에 10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10억이라는 액수가 환기시키는 건 다름 아닌 불륜이다. 유혹을 뿌리칠 수 없어 제안을 받아들인 석훈을 놔두고 홀로 귀국한 홍주(박하선)가 상상하는 육체적 관계.

 

'유혹(사진출처:SBS)'

하지만 시청자가 상상하고 홍주가 상상하는 그런 육체적 관계, 즉 불륜은 벌어지지 않았다. 세영이 석훈에게 10억을 주며 한 일이라고는 홍콩에서의 업무를 돕는 것이었다. 사적인 자리라고 해봐야 일을 잘 끝내고 저녁에 와인을 한 잔 같이 한 것 정도. 그것을 갖고 불륜이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세영은 석훈에게 어린 시절 모래성을 쌓는 아이들을 보며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며 자신은 세영과 홍주에게 파도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토록 굳건하다 믿는 사랑을 문득 시험해보고 싶었다는 것. 불륜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세영의 말대로 석훈과 홍주의 관계에는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석훈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문제는 돈이다. 사정이야 어떻든 아내와 돈 10억 사이에서 돈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불륜과 상관없이 이미 엇나가버린 석훈과 홍주의 관계를 보여준다.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행동에 대해 동생에게 과도하게 발끈하는 홍주는 돈 앞에 어쨌든 무너진 관계를 확인하고는 절망하는 중이다.

 

<유혹>‘3일에 10이라는 설정은 마치 전형적인 불륜 드라마의 하나처럼 오인시키는 구석이 있다. 하지만 2회에서 <유혹>이 보여준 진짜 유혹은 육체적 욕망이 만들어내는 불륜이라기보다는 돈의 유혹이다. 인간관계가 돈 앞에서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가 하는 걸 이 드라마는 마치 그 심리를 실험하듯 보여주고 있다.

 

세영이라는 캐릭터는 그래서 마치 돈의 이미지를 닮아있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는 통보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은 모성마저 상실한 워커홀릭의 단면을 보여준다. 파트너십을 정하는데 있어 그녀는 상대방이 우익이든 뭐든 개념치 않는다. 석훈이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과 사업을 할 수 있느냐고 말하는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유혹>이라는 드라마가 가진 이런 돈의 이미지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의 삶이 가진 부박함을 드러낸다. 그 안에서 인간관계란 세영이 말하듯 사실상 돈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모래성같은 한없이 가녀린 것이 된다. 하지만 돈에 아쉬움이 없는 세영이나 민우(이정진)는 아이러니하게도 진정한 인간관계에 대한 갈증을 내포하고 있다. 돈이 지배하는 사회지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그리운.

 

드라마에서 불륜이라는 소재는 그 자체로 비난의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저 김수현 작가의 <내 남자의 여자>처럼 그 욕망을 적나라하게 탐구할 수도 있고 <밀회>처럼 그 관계 속에서 자본이 만들어내는 불편한 물질적인 삶에 대한 비판을 담아낼 수도 있다. 어떻게 소재를 다루느냐에 따라 불륜이라는 소재가 깊이 있는 작품이 되느냐 아니면 천박한 자극에 머무느냐가 결정된다.

 

그렇다면 <유혹>은 어떨까. 과연 이 작품은 불륜이라는 소재를 넘어서는 작품의 밀도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육체적 욕망이 아닌 돈의 욕망을 전면에 내세운 것을 보면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보인다. 하지만 저 네 사람의 전형적인 통속극의 구도가 이러한 가능성을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유혹>은 과연 <밀회>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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