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2021’이 보여준 연기와 삶의 이중주

전원일기

오랜 세월 한 역할의 연기는 그 사람의 삶을 어떻게 바꿔 놓을까. MBC 창사 60주년 특집 <다큐플렉스-전원일기 2021> 4부작이 막을 내렸다. 4부작의 분량으로 무려 22년간 방영됐던 <전원일기>가 남긴 발자취와 소회를 모두 담아내는 건 불가능한 일일 게다. 하지만 이 짧은(?) 다큐를 통해 연기와 삶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치는가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건, 짧아도 충분한 가치를 증명했다 평가할 만하다.

 

이 가치증명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전원일기>의 김회장, 최불암이다. 최불암은 <전원일기>를 현재로 소환해낸 이 다큐의 시작을 열었고 마무리를 장식했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라는 무거운 초상을 짊어진 채 김회장이라는 인물을 삼십대 후반의 나이부터 맡아 22년을 살아왔고, 그 후로도 그는 그 김회장으로 산 22년의 삶의 영향과 동력으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었다. 

 

이 다큐를 통해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지만, 그가 어느 날 갑자기 KBS <한국인의 밥상>이라는 교양 프로그램을 하기 시작한 것도 그 <전원일기>의 김회장이 여전히 그의 가슴 한 켠에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점점 도시화가 이뤄지고, 모두가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오고 있는 그 와중에 김회장은 마치 마음의 부채라도 있는 듯 여전히 농촌의 삶을 찾아 나섰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찾아간 시골의 아주머니들과 어르신들은 반갑게 그를 김회장으로 맞아주곤 했다. 

 

몇 차례의 고사 끝에 인터뷰를 하게 된 김혜자는 여전히 최불암을 ‘선생’이라고 지칭했다. “저는 최불암씨가 선생님 같았어요.... 나는 연극영화과가 아니라서 공부를 안했다고요. 그니까 그 연기 공부한 거를 말해주는 게 너무 신기하고 재밌고.. 그래서 둘이 있을 때는 참 많이 ‘또 해줘 봐’ 그러면 인제 얘기해줘요.” 

 

지금껏 그저 최불암 하면 당연히 ‘국민 아버지’나 혹은 ‘최불암 시리즈’ 그리고 간간이 개그맨들이 “파-”하는 웃음으로 흉내 내곤 했던 그런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전원일기 2021>은 최불암이 얼마나 노력하고 준비된 연기자였는가를 잘 보여줬다. 예를 들어 “파-”하는 그 웃음도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크게 하하 웃는 것보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웃는 게 김회장이라는 인물에 어울린다는 판단에서 나온 연기였다. 그 연기는 놀랍게도 습관이 되어 최불암의 웃음이 되어갔지만.

 

4회에서 금동이 역할을 했던 임호나 영남이 역할을 했던 남성진은 모두 <전원일기>의 연기가 당시의 분위기와는 달랐다고 증언했다. 즉 당시만 해도 다소 과장된, 신파적인 연기가 많았다는 것. 하지만 <전원일기>는 그런 과장을 뺀 자연스러운 ‘메소드 연기’를 배우들이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 중심에는 바로 최불암이 있었다. 남성진은 처음 녹화를 할 때 최불암이 세트에서 등을 지고 앉아 있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 것에 놀랐다고 했다. 그건 세트 촬영이라도 모두 화면을 향해 있는 게 너무 ‘연극적’이라는 판단에 최불암이 보인 자연스러운 연기였다는 것이었다. 

 

당시를 술회하며 최불암은 <전원일기> 녹화하러 방송국을 찾았을 때 경비실에서 그를 보고는 “오늘 <전원일기> 녹화시네요?”라고 했던 일화를 들려줬다. 멀리서 봐도 김회장이 오는 것 같아서 경비하시는 분이 딱 알아봤다고 했다는 것. 그만큼 그 인물에 대해 몰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일화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그의 노력은 <전원일기>를 함께 했던 배우들에게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쳤다. 

 

김혜자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에서 전혀 다른 엄마의 모습을 연기해낸 바 있다. 그런데 그 엄마의 또 다른 얼굴 또한 <전원일기> 안에 이미 있었던 걸 다시 꺼내 쓰는 것이 아니냐는 제작진의 말에 동의했다. 최불암이 도움을 주기도 했고, 또 그 노력하는 모습 자체가 주변 배우들에게는 귀감이 되었을 터였다. 그 영향이 결코 작지 않았을 게다. 

 

<전원일기>는 거기 출연했던 배우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 인물을 오래도록 연기하면서 그 인물의 모습과 습관과 생각 같은 것들이 삶으로 전이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김혜정이나 이계인 같은 배우는 그래서 지금도 전원으로 내려가 그 삶을 이어가고 있었고, 이 작품에서 티격태격 연인으로 만난 김지영과 남성진은 실제 부부가 되었다. 김수미는 이 작품을 통해 갖게 된 그 일용네 이미지가 지금은 하나의 캐릭터가 되어 예능 프로그램으로 그 맥을 이어가게 됐다. 물론 안타까운 일들도 있었다. 우리에게 ‘응삼’이라는 인물로 더 기억된 박윤배는 실제로도 일찍 이혼해 혼자 사는 삶을 살다가 병으로 먼저 떠났다. 

 

흔히들 연기는 삶과 동떨어진 어떤 ‘역할극’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다른 인물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삶 속에서 끄집어내 보여주는 게 연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연기는 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도 20년이 넘는 세월을 했다면 더더욱 그럴 게다. 최불암은 김회장이 금동이를 입양하는 그 연기를 한 후 시청자들이 상찬하는 바람에 진짜 ‘어린이 재단’ 후원 일을 앞장서게 됐다고 말한 바 있다. 연기란 그런 것이다. “파-”하고 웃던 웃음이 진짜 자신의 웃음이 되기도 하는.

 

되돌려 말하면, 우리 모두는 어쩌면 각자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연기할 것인가를 선택하며 살아가는 지도 모른다. 그 연기는 가짜가 아니라 진짜다. 그래서 그 선택이 그의 삶이 되기도 한다. <전원일기2021>은 놀랍게도 이러한 ‘연기의 실체’를 끄집어내 보여줬다. 20년 넘게 연기해온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조명하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난 의외의 결과다. <전원일기>를 재조명한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배우들의 삶을 통해 연기가 그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에둘러 보여주게 된 것. 이것은 배우가 아닌 우리네 보통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의미 있는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됐다. 나는 어떤 연기를 선택했고 그걸 연기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사진:MBC)

'소울', 우리의 삶은 추락인가 비행인가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디즈니 픽사는 어떻게 삶과 죽음 같은 철학적인 주제마저 이토록 경쾌하고 명징한 상상으로 그려내는 걸까. <소울>은 한 마디로 인생 전체를 다시금 돌아보게 만들 정도로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지만, 그걸 표현해내는데 있어서는 아이들도 즐길 만큼 쉽게 담아낸 놀라운 작품이다. 그건 마치 구상에서 점점 깊어져 선의 단순한 연결로 오히려 실체에 접근한 피카소의 추상을 보는 듯하다. 스토리도 그렇지만, 그림이나 연출에서조차도 우리네 삶이 가진 오르막과 내리막 그리고 추락과 비행의 아름다운 이중주가 묻어나는 작품이라니.

 

뉴욕에서 음악선생님으로 일하지만 평생의 목표가 재즈클럽에서 최고의 밴드와 함께 연주하는 것인 조. 드디어 그 기회를 갖게 된 조는 그러나 맨홀에 빠지는 불의의 사고로 영혼이 되어 저 세상으로 가는 길 위에 서게 된다. 거대한 빛을 향해 저절로 움직이는 계단 위에 서게 된 조는 그러나 그 목표가 눈앞에 있던 순간 이렇게 끝나게 된 걸 용납할 수가 없고, 결국 그 곳을 벗어나 '태어나기 전 세상'으로 떨어진다. 그 곳은 탄생 전 영혼들이 자신의 관심사로 인해 켜지는 마지막 불꽃을 찾아 지구로 돌아가는 곳. 하지만 조는 그곳에서 지구로 가는 걸 원치 않는 영혼 22를 만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조는 다시 살아나 그토록 원하던 재즈클럽에서의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을까. <소울>의 스토리는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조가 얻게 되는 깨달음이다. 영혼 22 대신 지구로 가는 통행증을 갖게 되어 다시 살아난 조는 자신이 삶의 목표로 생각했던 재즈클럽에서 연주를 하게 되지만, 그걸 마치고 나서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목표를 달성하긴 했지만 그것이 삶의 진정한 행복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그는 어느 날 은행나무에서 비행하며 떨어지는 씨앗을 보며 깨닫는다. 삶의 행복은 그런 거창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었던 게 아니고, 매일 먹던 음식,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느꼈던 희열의 순간, 처음 재즈를 접했을 때의 그 기분 같은 일상의 순간순간에 깃들어 있던 행복감에서 찾아진다는 것이 그것이다.

 

<소울>은 이러한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조와 22의 모험을 통해서 우리네 삶이 추락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비행하고 있는 것인가를 묻는다. 드디어 평생을 원하던 목표를 눈앞에 둔 순간 맨홀로 '추락'하는 비운을 겪는 조의 상황은 우리네 삶에 대한 비관적 시각을 담아낸다. 삶이란 그렇게 어떤 최고의 순간에 다다르기 직전 추락하기도 하는 비극일 수 있다는 것. 추락하는 삶은 그래서 무겁디 무거운 존재의 무게를 드러낸다.

 

하지만 영혼이 된 조는 거대한 빛을 향해 저절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서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삶의 무게는 죽음 후의 가벼워진 영혼과 대비된다. 그래서 추락하는 삶은 죽음 이후의 비상하는 영혼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조는 그렇게 저 위로 가벼워진 채 비상하는 영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다시 뛰어내리고 그 무게 그대로 '태어나기 전 세상'으로 떨어진다.

 

<소울>이 깊은 감동을 주는 건 그것이 단지 삶과 죽음이라는 추상적이고 철학적이기까지 한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의 섬세한 표현들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영혼의 세계가 마치 피카소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2차원적 형상으로 제리, 테리는 물론이고 영혼들의 가벼움을 표현해냈다면, 삶의 세계는 이와는 상반되는 중력과 무게감이 느껴지는 캐릭터들을 담아낸 점이 그렇다. 이런 가벼움과 무거움, 경쾌함과 장중함은 조가 그토록 하고 싶어 했던 재즈의 연주 속에도 그대로 묻어난다.

 

그 누가 추락하길 원할까. <소울>은 조가 그랬듯이 어떤 목표를 세워두고 그 곳을 향해 오르는 이들의 마음속에 어른거리는 추락에 대한 회피를 포착해낸다. 하지만 삶은 어쩌면 태어나면서부터 추락의 과정 그 연속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걸 마주하고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을 뿐. 그렇지만 조는 떨어지는 은행 씨앗을 보며 그것이 추락이 아닌 비행이라는 걸 알게 되고, 더 이상 추락하지 않고 저 높은 곳으로 오르는 영혼의 세계보다 그 비행이 더 아름답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래서 <소울>이 전하는 '일상'의 소중함과 그 가치는 지금 같은 일상이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코로나 시국에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코로나 이전에는 몰랐던 길거리를 마스크 없이 활보하고, 마음껏 숨을 쉬며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그 일상의 소중함들. 그것이 진짜 삶의 행복이었다는 걸 우리는 깨닫고 있지 않은가. <소울>이 말하고 있듯이.(사진:영화'소울')

‘의사요한’ 지성과 이세영의 해피엔딩, 만족스럽지 않은 이유

 

때론 해피엔딩이 전혀 만족스럽지 않을 때가 있다. 그건 지금껏 드라마가 달려온 주제의식이 엔딩에 이르러 흔한 ‘사랑타령’으로 끝나버릴 때가 있기 때문이다. SBS 금토드라마 <의사요한>이 딱 그렇다. 통증의학이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가져와 고통과 삶과 죽음에 대한 만만찮은 이야기들을 그려왔던 <의사요한>이 마지막회에 이르러서는 차요한(지성)과 강시영(이세영)의 흔한 멜로드라마로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사실상 <의사요한>의 마지막회는 사족에 가까웠다. 통증에 대한 임상실험 참가자이자 연구자로서 미국에 간 차요한의 바이탈 기록을 매일 같이 체크하며 기다리는 강시영의 헤어질 듯 다시 만나는 뻔한 이야기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고 그렇게 3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 다시 나타난 차요한과 사랑을 확인하는 강시영의 이야기. 거기에 <의사요한>이 지금껏 다뤘던 주제의식은 희석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차요한은 자신이 내리는 고통에 대한 마지막 처방전으로서 의사의 역할이 병을 고치는 것만이 아닌 고통을 알아주고 나누는 것이라는 걸 드러냈다. “고통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고통은 우리 안에 살고, 우리 삶은 고통과 함께 저문다. 그 고통을 나누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고통의 무게는 줄고 고통을 끌어안는 용기는 더해질 것이다. 누군가의 고통을 알아주고 나누는 것, 이것이 삶이 끝나야 사라질 고통에 대한 나의 마지막 처방이다.”

 

즉 고통뿐인 삶 앞에서 의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던진 질문에 이 드라마는 호스피스 완화 치료를 답으로 제시한 것이다. 즉 치료는 완치만이 목적이 아니고 완화도 그 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 그래서 의사는 환자 옆에서 그 고통을 들여다보며 고칠 수 없다면 그것을 완화해주는 치료를 해주는 것이 응당한 역할이라고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의사요한>은 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 삶과 죽음과 고통에 대한 주제를 다루면서 의식적으로 멜로 라인을 통해 그 무거움을 덜어내려는 모습을 보인 바 있다. 강시영과 차요한의 멜로 라인이 그렇고, 이유준(황희)과 강미래(정민아)의 멜로 라인 또한 그렇다. 게다가 통증의학과 레지던트들은 상당부분 희화화된 캐릭터로 그려졌다. 드라마가 지나치게 무거워지는 걸 막으려는 의도적인 구성이고 연출이다.

 

그게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주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의사요한>이 지나치게 멜로로 기운 건 오히려 한계로 지목된다. 차요한이라는 캐릭터가 전반적으로 드라마의 주제의식을 담아내며 잘 살아난 데 비해, 강시영은 의사로서는 너무 감정적이고 또 사랑을 갈구하는 인물로 그려진 것도 이런 드라마의 한계 때문에 생겨난 일이다. 연기를 잘 하는 배우들에 비하면 너무 아쉬운 캐릭터의 면면이 아닐 수 없다.

 

의학드라마는 이제 너무 많아져 특별한 소재나 주제의식 혹은 형식실험을 가져오지 않으면 뻔한 드라마라는 인식을 갖게 될 정도다. 그러니 의학드라마가 뾰족한 주제를 가져와 끝까지 밀고 나가는 건 그만큼 중요해졌다. <의사요한>은 그런 점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 드라마다. 뾰족한 주제의식을 갖고 오고도 뭉툭한 멜로의 결말로 끝내버렸다는 점에서다.(사진:SBS)

‘의사요한’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메시지

 

이 드라마 어딘가 깊이가 다르다. SBS 금토드라마 <의사요한>은 지금껏 우리가 봐왔던 의학드라마의 접근이 상당히 표피적이었다는 걸 깨닫게 한다. 대부분의 의학드라마가 보여줬던 건 아픈 환자와 이를 우여곡절 끝에 고치는 의사의 이야기가 대부분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의사요한>은 그 환자의 고통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또 나아가 고통뿐인 삶이 과연 환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같은 지금껏 의학드라마가 던지지 않았던 질문들을 던진다.

 

중증 근무력증을 앓는 격투기 선수의 사례는 이런 질문들을 다차원적으로 담아낸다. 어떻게 하면 고통을 줄까를 고민한다는 주형우(하도권)는 어떻게 하면 고통을 줄일까를 고민하는 차요한(지성)에게 우리는 닮았다고 말한다. 주형우는 살아있다고 해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면 살아있는 게 아니라 고통일 뿐이라고 하지만, 차요한은 고통이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링에 올라 싸우는 것이 자신의 존재 증명이라 여기는 격투기 선수 주형우는 연명하는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자신이 쓰러졌을 때 심폐소생술 같은 응급치료를 하지 말아 달라 요구한다. 그는 “죽음을 앞당기고 싶을 만큼 괴롭다”는 속내를 털어놨다. 한때 도저히 손 쓸 수 없어 고통만을 연장시키던 환자를 안락사 시킨 경험이 있는 차요한은 그러나 주형우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 차요한은 주형우가 말하는 “죽을 만큼 괴롭다”는 그 이야기가 보내는 시그널을 읽어낸다. 그래서 거기부터 시작해 그가 중증 근무력증이라는 걸 알아내고 결국 환자를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아낸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 우리가 생각하는 고통이란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몸이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자 시그널이라는 것. 그래서 고통을 느낀다는 건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병을 사전에 고칠 수 있는 기회를 몸이 주는 것이라는 의미다. 차요한이 주형우가 말하는 그 고통을 통해 병을 발견해낸 것처럼.

 

그렇다면 과거 차요한은 어째서 환자를 안락사 시킨 걸까. 그것은 고통을 통해 병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고칠 수 있다는 희망자체가 사라졌을 때, 과연 통증의학과 의사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담긴 것이었다. 그는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줄여줄 수 없는 고통을 없애주려 한 것이었다. 설령 그 선택이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할지라도.

 

<의사요한>은 이처럼 고통과 삶과 죽음에 대한 다양하고도 진지한 질문들을 담아내고 있다. 새로운 에피소드로 등장한 극단적인 두 환자의 사례는 그래서 더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선천적으로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환자와 아주 미세한 접촉에도 엄청난 통증을 느끼는 환자의 대비. 이 에피소드에서 통증은 다만 피하고픈 어떤 것이 아니라 어쩌면 삶의 증명일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지 않을까. 겉보기엔 무통환자가 훨씬 좋아 보이지만 그것은 어쩌면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또 다른 아픔을 전제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의사요한>이 통증의학이라는 분야를 통해 전하는 고통과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나아가 병원 밖에서의 우리네 삶에도 주는 메시지가 적지 않다. 삶에서 느끼는 힘겨움이나 아픔은 우리가 늘 피하고픈 어떤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살아있다는 증명이며 나아가 더 큰 문제를 사전에 해결하기 위한 신호일 수 있다는 것. 의사 역할을 하는 사회가 힘겨움의 신호를 보내는 이들을 외면하면 안 된다는 걸 <의사요한>이라는 의학드라마는 마치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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