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데이>, 무엇이 이 드라마를 주목하게 하나

 

재난은 어디서부터 생겨날까. 지진, 쓰나미 같은 자연재해는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다. 따라서 이러한 천재지변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건 이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다. 재난이라는 결코 쉽지 않은 소재를 다루는 새 JTBC 드라마 <디데이>가 천착하고 있는 문제 역시 바로 이것이다. 재난의 스펙터클이 아닌 재난에 대해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

 


'디데이(사진출처:JTBC)

첫 회에 보여진 이해성(김영광)이 근무하고 있는 미래병원 응급실 풍경은 그래서 이 드라마가 앞으로 그려나갈 이야기들을 상징적으로 압축하고 있다. 결국 응급실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늘 재난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재난상황을 맞아 단 9%의 가능성이 있어도 환자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걸 걸 수 있는 의사가 있는 반면, 그 상황에서도 절차를 강조하는 한우진(하석진) 같은 외과의도 있다.

 

이해성이 온 몸에 피를 묻혀가며 응급실에서 생사를 오가는 환자를 살리려 안간힘을 쓰는 장면은, 한우진이 우아하게 앉아 환자에게는 손 하나 대지 않고 로봇수술을 하는 모습과 교차되며 보여진다. 한 사람은 사람을 살리는 의사의 본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다른 한 사람은 수술의 절차와 책임소재 나아가 병원 경영 같은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쩌면 지진이나 쓰나미가 아니라도 우리네 서민들이 응급실을 찾게 될 때면 늘 상 맞닥뜨리는 재난상황일 것이다. 그 상황에서 누군가는 살아나고 누군가는 죽는다. 그런데 그 생사의 갈림길이 공평한 결과가 아니라 차별적이거나, 혹은 너무 형식적이고 잘못된 절차 때문에 살 사람이 죽어나간다거나 한다면 그건 누구의 잘못일까.

 

이 문제는 그 상황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의사들의 문제도 문제지만, 그런 강요를 받게 만드는 병원 시스템의 문제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병원은 경영을 얘기한다. 그래서 병원이 살아야 환자들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동안 그 경영 방식 때문에 살 수 있는 어떤 환자들은 죽어나간다. <디데이>의 이 미래병원이라는 공간은 완벽하게 우리네 사회를 그대로 보여주는 축소판 같다.

 

우리네 사회가 자본의 시스템 속에서 공평한 삶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있다는 건 대부분의 대중들이 공감하는 이야기다. 그러니 미래병원 바깥을 나와도 어떤 이들에게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재난상황이다.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가진 기득권으로 별다른 큰 노력 없이도 우아하게 살아가지만, 누군가는 제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빚만 늘고 먹고 살기가 막막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치가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기보다 경제 성장을 얘기한다면 그건 저 박건(이경영) 미래병원장 같은 사람이 추구하는 병원의 미래를 예고하게 될 것이다. 병원은 돈을 벌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와중에 전혀 의료의 혜택 혹은 기회를 받지 못하고 죽어나가는 희생은 어쩔 수 없을 것이란 얘기다.

 

물론 이런 문제들은 평상시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저 세월호 사태나 메르스 사태 같은 재난 상황이 터졌을 때 그 부조리한 시스템의 실체가 드러난다. 안전은 저 뒤로 밀어둔 채 우선 더 많은 선적을 해서 돈을 벌겠다는 논리나 전염병의 실상을 공개해 그것이 더 퍼져나가지 않게 미연에 방지하기보다는 그것이 미칠 병원이미지를 더 먼저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재난 그 이상의 재난이 발생한다.

 

<디데이>는 그런 점에서 보면 유독 많이 재난이 생겨 붙여진 재난공화국이라는 부끄러운 우리네 실상에 메스를 대는 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미래병원을 통해 이미 예고된 재난에 대처하는 각기 다른 사람들의 생각들의 부딪침은 그래서 이 드라마가 보여줄 재난 스펙터클 이상의 재미와 의미를 선사할 것으로 보인다. 재난은 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시스템을 통해 우리 안 깊숙이 주입된 잘못된 생각과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 <디데이>에 대한 남다른 기대감은 바로 여기서 생겨난다.



<징비록>이 현재와 맞닿았던 지점들

 

KBS <징비록>이 종영 한 회를 남기고 있다. <정도전>을 이을 화제작으로 떠올랐지만 <징비록>은 생각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거기에는 <징비록>만의 난점들이 있었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이 벌어지는 그 과정들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기대감을 만들지만, 그것이 이순신이나 곽재우 같은 전장의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기록을 남긴 류성룡(김상중)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징비록(사진출처:KBS)'

즉 시청자들로서는 좀 더 드라마틱하고 스펙터클한 임진왜란의 이야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지만 이 사극은 그것보다는 류성룡이 피를 토하듯 써내려간 기록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당쟁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고 왕과 신하들의 무능함에 대한 질타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장쾌한 전쟁의 장면들을 기대하던 시청자라면 이 답답하고 심지어 분노를 일으키는 무능한 조정의 이야기에 가슴을 치게 됐을 것이다.

 

결국 <징비록>은 바로 그 답답함과 무능함에 대한 기록을 통해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바를 되새기는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스펙터클을 보며 통쾌해하는 것보다 훨씬 의미 있는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의 해전들을 저 뒤편으로 보내고 대신 전면에 무능한 왕 선조(김태우)의 이야기를 아프게도 바라보게 만든 건 시청률에는 불리할지 몰라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 되었다.

 

그래서 <징비록>의 힘은 류성룡이나 이순신(김석훈)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조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선조는 한 마디로 드라마의 핵심적인 힘을 만들어내는 암 유발자로서의 면면을 보여주었다. 물론 실제 역사는 선조가 백성을 버리고 도주에 도주를 계속한 이유가 왕이 붙잡히면 끝나게 되어버리는 전쟁의 결과를 피하기 위함이었다고 기록하지만,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비춰지는 선조는 무능한 권력자가 만들어내는 국가의 비극으로 다가온다.

 

세월호 참사에서부터 메르스 공포로까지 이어지며 드러난 콘트롤 타워의 부재는 신 징비록을 백서로 남겨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만들었다. 그러니 선조가 하는 일련의 선택들은 백성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안위만을 위한 것이라고 읽힐 수밖에 없었다. 류성룡은 그런 선조 앞에서 그 답답함에 무릎을 꿇고 통탄하기도 하고, 때로는 목숨을 걸고 고언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코 바뀌지 않는 선조 앞에서 류성룡의 마음은 시청자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징비록>9할은 결국 선조가 이끈 셈이 되었다. 그의 무능과 답답함은 시청자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그 감정을 고스란히 재현해냈다. 드라마는 임진왜란이라는 전쟁 상황을 빚어낸 선조의 실정을 통해 지금의 현실을 환기시켰다. 그리고 백성들이 그토록 힘겨운 현실을 살게 된 것이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보여줬다.

 

선조를 연기한 김태우는 그 역할을 200% 소화해냄으로써 드라마가 끝까지 힘을 잃지 않고 흘러갈 수 있게 만들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측은하고 한편으로는 복장 터지게 만드는 소심함을 보여주면서 왕이 되어서는 안 되는 자가 왕의 자리에 있게 됨으로써 벌어지는 국가적 비극을 제대로 그려냈다



백종원도 하는 일을 왜 정부는 못하나

 

때로는 각각 떨어진 사안들이 하나의 문화적 결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요즘 들어 연일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에 계속 회자되는 두 단어가 있다. 하나는 백종원, 다른 하나는 메르스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사진출처:MBC)'

이 둘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싶지만 그 사이에 소통이라는 단어 하나를 집어넣으면 그 연결고리를 쉬 알아차릴 수 있다. 메르스 사태는 갈수록 바이러스의 문제가 아니라 소통의 문제라는 게 드러나고 있다. 초동대처가 좀 더 빨랐다면, 또 감염 병원에 대한 정보가 빨리 공개됐더라면 지금처럼 문제가 확산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점이다.

 

사극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 이도(한석규)의 한글 유포를 막으려는 이유로 정기준(윤제문)은 미개한 백성들에게 한글은 혼동을 주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든다. <뿌리 깊은 나무>의 김영현, 박상연 작가는 이 논리를 저 나치의 괴벨스에게서 가져왔다고 말한 바 있다. 정기준은 한글 같은 파괴력 있는 정보체계를 마치 전염병처럼 본다. 메르스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은밀히 저들끼리 해결하려다 오히려 세계 제1의 감염자를 낸 병원을 보면 여전히 정보의 소통에 대한 시대착오적 판단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가를 잘 보여준다.

 

조금 엉뚱해 보이지만 이 시기에 백종원이라는 인물이 소통의 아이콘으로 등장했다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저 쿡방 열풍에 기댄 셰프의 한 사람으로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는 소통의 달인이었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그가 하고 있는 쿡방은 그래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소통의 한 상징처럼 보일 때가 있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라는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이 개인방송들의 대결은 콘텐츠 대결이 되지 않을까 하는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문을 열고 보니 그건 콘텐츠가 아니라 소통의 대결이었다. 제 아무리 좋은 콘텐츠도 혼자 독불장군식으로 보여주거나 밀고 나가면 시청자들을 우수수 빠져나간다. 결국 소통에 실패한 프로그램들은 폐쇄되고 만다.

 

백종원이 주목받게 된 것은 그가 애플보이라고 불리게 된 그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그 이유를 가늠할 수 있다. 시청자들은 그의 쿡방을 보며 별의 별 시시콜콜한 것까지 트집을 잡아 사과하라고 한다. 이를테면 그냥 초장에 찍어먹는 건 정말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고 초장에 사과하세요라는 댓글이 붙고, “믹서기가 영 시원찮다는 말에 믹서기 비하 발언이라고 사과하란다. 또 카메라를 고정시키기 위해 고추를 꽂았다는 표현을 해 ‘19금 발언이라고 지적받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얼토당토않은 사과 요구에도 그는 선선히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애플보이는 그렇게 만들어진 닉네임이다.

 

이건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일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사과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무거운 무게를 갖고 있는가를 가늠해보면 백종원에 대한 그 무수한 사과 요구, 그럼에도 소통을 끊지 않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 주고받음이 대중들에게 주었을 훈훈한 미소를 그려보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 참사에 이어 메르스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그 사태에 대해 책임지고 사과하는 모습을 우리는 본 적이 있었나. 남 탓하기 바빴던 것은 아닌가.

 

백종원은 방송에서 종종 카메라를 향해 은근한 미소를 날리며 구수한 멘트로 직접 시청자들과 소통하려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괜찮쥬?”하고 묻기도 하고, 때로는 살짝 투정을 부리기도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 아닌 진짜 소통을 위한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모습은 지금 백종원이 셰프 그 이상의 신드롬을 만들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소통에 실패하면 모든 걸 실패하게 된다는 사실은 저 일개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일이다. 하물며 국가와 국민의 소통이랴. 국민들은 많은 걸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들어주고 반응해주며 함께 공유하고 공감하는 모습이면 충분할 것이다. 그건 백종원도 하는 일이다.

 

<앵그리맘>의 무너진 학교가 더 가슴 아픈 건

 

MBC <앵그리맘>은 학교의 붕괴를 예고했던 드라마다. 썩어버린 재단과 제왕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이사장, 가진 자들은 대를 이어 잘못을 저지르고도 죗값을 받지 않는 행태, 상대적으로 처벌이 가벼운 아이들을 이용하기 위해 학교 폭력에까지 손이 닿아 있는 조폭들, 심지어 학생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교사까지. 이것이 학교가 맞나 싶을 정도의 참담함을 그려내는 드라마다.

 

'앵그리맘(사진출처:MBC)'

그러니 이 학교의 붕괴가 실제로 건물이 무너지는 이야기로 전개되는 것이 하나도 급작스럽게 다가오지 않는다. 거기에는 명성재단의 비리가 연루되어 있다. 정부 지원을 받아 별관을 신축하면서 지원금을 빼돌린 것. 결국 부실공사가 이뤄지고 건물은 무너지고 말았다.

 

무너진 건물이 상기시키는 건 그러나 무너진 학교의 현실만이 아니다. 그 학교는 다름 아닌 우리 사회의 축소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위에서부터 썩어버린 빗나간 교권은 고스란히 건물에 깔려버린 학생들을 희생자로 내몰았다. 이것이 작년에 벌어진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하는 건 당연하다. 그 세월호 참사의 침몰한 배를 보며 우리는 심지어 국가의 침몰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후 제대로 된 조사와 사후관리가 전혀 되지 않는 과정을 보며 지금은 사회 정의의 침몰을 떠올리고 있다.

 

사실 우리네 대중문화 콘텐츠들은 지금껏 그토록 많은 재난들을 다뤄왔다. 그리고 그 재난의 이야기들은 여지없이 그 원인으로 국가의 무능을 지목했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을 떠올려보라. 이 영화가 말하는 진짜 괴물은 저 한강에서 출몰하는 그 괴물이 아니라 무능함만을 드러내며 통제력을 잃어버린 국가라는 괴물이었다.

 

김성수 감독의 영화 <감기>에서도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재난은 결국 정부였다. 바이러스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통제와 싸우는 시위대가 등장하는 건 그래서다. 이 영화 속에서 종합운동장에 수천 구의 시체가 쌓여(심지어는 아직까지 죽지 않은 생존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처분 되는 장면이 그토록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건 국민을 호명할 뿐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는 정부의 냉혹함 때문이었다.

 

<앵그리맘>의 이야기가 뼈아픈 것은 최소한 이런 재난의 이야기가 최소한 벌어지지 않아야 할 공간으로서 학교마저 이제는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이미 세월호 참사를 통해 무수히 사라져간 꽃다운 학생들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통해 현실이 되어버렸지만.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붕괴되고 배가 침몰하면서도 여전히 이 재난의 위험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때마다 제대로 된 조사와 처벌이 이뤄지지 않고 그저 덮여지며 지나가버렸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앵그리맘>이 보여주는 것처럼 결코 무관하지 않은 기득권들과의 결탁이 존재한다. 언제까지 이 재난의 위험을 방치하며 살아갈 것인가.

 

<앵그리맘>이 붕괴된 학교를 통해 상기시킨 세월호 참사의 아픈 이야기는 그래서 우리가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것은 또 어느 순간에 <앵그리맘>이 보여줬던 그 드라마의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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