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사랑합니다', 원작만큼 좋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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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합니다'

이미 강풀 원작의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본 관객이라면 아마도 첫 장면에서부터 어떤 깊은 울림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 김만석(이순재)이 할머니 송씨(윤소정)를 골목길 언덕빼기에서 작은 사고(?)로 처음 만나고, 거의 습관이 된 듯 죽어 들어가는 소리로 "괜찮다"고 말하는 송씨에게 다짜고짜 만석이 "큰 소리로 말해!"하고 소리칠 때부터 마음은 뭉클해진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그런 영화다. 원작이 있어 이미 스토리를 다 알고 있어도(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 그리고 이게 가능한 건, 거기 원작을 뛰어넘는 관록의 배우, 이순재가 있기 때문이다.

입만 열면 육두문자를 풀풀 쏟아내고,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은 늘 따뜻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는 만석이란 캐릭터를 그만큼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배우도 없을 것이다. 야동 앞에서는 소년처럼 귀엽다가(야동순재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있다), 혈기왕성한 젊은이들 앞에서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그가 늘그막에 만난 사랑 앞에 수줍게 "그대를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연기가 보는 이를 들었다 놨다 한다. 한참을 웃다가 어느 순간에는 먹먹해지게 만드는 마력은 현빈 못지않다. 도대체 그 검버섯에 주름지고 바짝 마른 얼굴에서 순식간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 감정 연기 앞에서는 도무지 눈물을 참아낼 재간이 없어진다.

물론 이 영화는 원작과는 달리 이순재 원 톱을 세웠지만, 그를 둘러싼 나머지 세 배우, 즉 윤소정, 송재호, 김수미의 연기 호흡을 빼놓고 얘기할 순 없다. 젊어서 부모를 떠나 상경해 남편에게 버림받고 아이까지 잃고는 그 죄 때문에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말하는 심지어 이름조차 없어 송씨라 불리는 할머니. 윤소정은 그 할머니의 사정을 만석을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그 늘 "괜찮다"를 달고 산 듯한 얼굴로 표현한다. 반듯한 신사에 푸근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송재호의 그 웃음 뒤의 깊은 침묵은 또 어떻고. 물론 누구나 꺼려할만한 치매연기로 보는 이를 웃기기도 하고 애잔하게도 만드는 김수미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관록의 연기자들이 든든히 버텨주자, 강풀 원작의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그 원작이 갖고 있던 감동 그 이상을 전해준다. 자식도 없고, 남편도 없고, 돈도 없고, 친구도 없고, 글도 모르고, 이름도 없는 데다가 심지어 행복한 것이 무엇이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한 송씨가 송이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고 사랑을 하게 되고 친구를 사귀게 되고 글도 배우게 되고 그래서 결국 행복도 갖게 되어 한참을 잊고 있었던 소녀 같은 웃음을 웃을 때, 관객들도 똑같은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자식들이 다 떠나고 서로 둘만 남아 한 밥을 먹고 한 이불에서 잠을 자면서, "우린 부부다. 한때는 가족이었는데"라고 장군봉(송재호)이 읖조리는 말이 우리의 원죄의식을 건드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모든 걸 자식들에게 주었지만 소외되어 살아가는 어르신들을 바라보며 욕쟁이 할아버지 만석이 젊은이들에게 욕을 해대는 장면이 오히려 든든하게 여겨진 것도 그래서였을 게다. 강풀이 그려낸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그렇게 우리 가슴 한 켠에 남아있는 어르신들에 대한 부채의식을 끌어낸다. "나이 들어 죽었다고 다 호상이냐"는 호통처럼, 나이 들었다고 감정까지 없는 사람 취급하는 세상의 시선에 눈물과 감동으로써 깊은 질책을 해댄다.

지금껏 강풀 원작의 영화들이 흥행에서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던 건, 그 원작 스토리가 갖는 힘이 워낙 강한데다, 그 스토리들이 작가에 의해 웹툰에 최적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대를 사랑합니다'라는 영화는 강풀의 웹툰 원작의 부담감을 이겨내고 있다. 물론 그 힘의 중심에는 이순재를 비롯한 관록의 배우들의 연기가 자리해 있다.

'시크릿 가든'의 희비극, 현빈의 눈빛을 닮았다

현빈이라는 배우는 독특한 매력을 가졌다. '내 이름은 김삼순'에 출연할 때만 해도 그저 미소년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그 눈빛에 우수가 깔리기 시작하더니 '시크릿 가든'에 와서는 이제 아예 장난스런 미소년에서 우수어린 눈빛의 남자를 넘나든다. 그 눈빛은 어딘지 여성적으로도 보이지만 때론 마초적일 정도로 강렬하다. 그저 지그시 바라보는 것만으로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배우, 현빈은 마성의 눈빛을 가졌다.

'시크릿 가든'에는 스킨십보다 더 많이 눈빛을 맞추는 장면이 등장한다. 윗몸일으키기를 하면서 하지원의 눈을 바로 코앞에서 바라보는 장면은 단박에 화제가 되었다. 누워 있는 하지원의 얼굴 바로 앞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현빈의 눈빛은 그 어떤 스킨십 이상으로 보는 이를 녹진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물론 그 눈빛을 제대로 제 눈에 받아주며 어딘지 수줍고 어딘지 설레는 하지원의 연기 역시 빼놓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때론 장난기어린 모습으로, 때론 깊은 슬픔이 담겨진 모습을 연출하는 현빈의 눈빛은 희비극을 넘나드는 '시크릿 가든'이라는 드라마의 기본 힘이다. '시크릿 가든'의 구조는 비극 위에 희극이 얹어져 있는데, 이 희비극을 제대로 표현해내는 게 바로 현빈의 그 양면적인 눈빛이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 사고를 통해 길라임은 아버지를 잃고, 김주원(현빈)은 기억을 잃는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주재로 길라임과 김주원의 영혼은 하나로 묶여진다.

이 영혼 체인지라는 소재는 로맨틱 코미디에서 주로 사용되어졌다. 그만큼 남녀가 뒤바뀌는 상황이 주는 웃음에 주력했던 것. 하지만 '시크릿 가든'은 코미디만큼 비극에도 주목한다. 영혼이 뒤바뀌어 성별과 사회적 위치가 달라지는 포복절도의 웃음을 먼저 살짝 보여준 후, 그렇게 서로 연결된 영혼의 한쪽이 비극적인 상황에 이를 때 발생할 수 있는 다른 한쪽의 비극을 다루었다. 뇌사 판정을 받은 길라임을 살리기 위해 영혼을 바꿔서 자신이 대신 죽고서라도 그녀를 자신의 몸속에서 살게 하려는 김주원의 결단은 희극에서 비극으로의 극적 체인지를 만들었다.

한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다른 한 사람이 죽어야 되는 상황. '시크릿 가든'은 이를 왕자를 위해 물거품이 되고야마는 인어공주의 비극에 비유한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깨어나 비록 엘리베이터 사고 이후의 기억을 잃어버린 채 다시 살게 된 김주원에게, 길라임은 "네가 뭘 어떻게 해도 이젠 용서가 된다"고 말한다. 죽음을 겪고 난 영혼에게 세상이 갈라놓는 빈부의 문제든, 남녀의 문제든 뭐가 중요할까. '시크릿 가든'은 완전히 타인인 두 사람이 완전히 하나의 영혼이 되는 과정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드라마다.

이 복잡한 과정 속에서 때론 희극의 주인공이 되었다가, 때론 비극이 되고 심지어 남성에서 여성으로 역할을 바꿔야 하는 그 연기를 현빈은 마치 맞춘 듯이 해낸다. 그것이 바로 현빈이라는 배우가 가진 매력이기 때문이다. 희비극을 넘나드는 그 눈빛은 그래서 김주원이라는 캐릭터를 만나 시청자들을 울리고 웃긴다. 해피냐, 새드냐, '시크릿 가든'의 엔딩에 온통 관심이 쏠리게 된 것은 김주원을 연기하는 현빈이라는 배우의 그 알 수 없이 깊은 눈빛에 우리가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시크릿 가든'은 시크한 현빈의 눈빛을 그대로 빼닮은 드라마다.

'자이언트'가 소화한 것, 다양한 장르, 시청층, 연기

실로 '거인'다운 소화력이었다. 드라마는 전형적인 시대극이지만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고, 그 장르들의 문법들을 꿀꺽꿀꺽 삼켜버렸다. 중요한 건 '삼켰다'는 것이 아니라 그걸 '소화해냈다'는 것. 시청자들이 원하고 필요한 것이라면, 그리고 흥미와 구미를 당길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삼켜서 기어이 소화해내고 마는 세계, 그것이 바로 '자이언트'의 세계였다.

시대극은 넓게 보면 사극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아주 가까운 역사를 다룬다는 것. 이것은 사소한 것 같지만 작품에는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낸다. 가까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역사의 평가에 민감할 수 있다는 것이고 또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에 있어서도 어떤 한계를 지운다는 의미다. 그래서 '자이언트'는 초반부터 특정 정치인을 옹호하는 드라마로 오인 받았다.

하지만 '대조영'을 겪은 장영철 작가의 뚝심은 여전했다. 시대극이라는 특성에 걸맞게 실제 사건들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면서도 장영철 작가는 그 속에 인물들의 대결에 좀 더 과감한 허구적 상상력을 끼워 넣었다. 인물들에게 끊임없이 제기되는 미션과 그 미션의 해결과정에 부딪치게 되는 대결구도는 사극의 장르적 특성처럼 '자이언트'의 꺼지지 않는 에너지원이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시대극이 부여하는 현실감에 머무르지 않고 끝없이 상상력을 펼쳐나간 점은 초반의 오인을 뒤집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라는 인식을 갖게 만든 것이다. 결국 이 뚝심은 오해마저 삼켜버리고 소화시키는 저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초반의 시청률 부진은 단지 이런 오해 때문만이 아니었다. 사극적인 대결구도와 치밀한 심리전으로 흘러가다 보니 정서적인 공감대가 따라오질 못했다. 물론 남성들은 이 사극적인 특징에 매료되었지만, 여성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자이언트'가 어떤 전환점이 된 것은 뿔뿔이 흩어졌던 강모(이범수)와 성모(박상민) 그리고 미주(황정음)가 다시 만나게 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자이언트'는 빠른 사건 전개와 반전이 주는 특유의 스릴러적인 특징으로 남성 팬들을 사로잡으면서, 동시에 가족드라마적이고 멜로드라마적인 요소들을 덧붙임으로서 여성 팬들까지 끌어들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서로 원수가 되어버린 가족들 속의 인물들이 서로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강모는 다시 만난 정연(박진희)과 사랑에 빠지고, 미주는 민우(주상욱)와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그 아버지들이 원수라는 걸 알게 되고 헤어지게 된다. 다분히 작위적인 느낌이 있지만 말 그대로 이 멜로와 가족드라마적 요소들은 시대극이 궁극적으로 끌고 가려는 하드보일드한 이야기들 위에서 말랑말랑한 매력을 첨부했다. '자이언트'는 자칫 특정 세대로만 집중될 수 있었던 시청층을 삼키고는 대중성을 확보했다.

이런 다양한 장르의 공존이 가능했던 것은 장르를 잘 이해하는 유인식 감독의 공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뭐든 해낼 수 있는 든든한 배우들이 있었다. 이 작품의 배우들은 어느 한 장르의 결을 연기했다기보다는 주어지는 모든 장르를 소화해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에서 쉽지 않았다. 미주 역할을 한 황정음은 신파적이기까지 한 가족드라마의 여동생에서 갑자기 비운의 줄리엣이 되는 멜로드라마의 여자로 변신해야 했고, 그 후에는 가수로 성장해가는 성장드라마의 여성을 연기해야 했다. 민우 역할의 주상욱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역에서 여자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멜로 연기를 소화해야 했다. 박소태를 연기한 이문식은 적과 친구를 넘나드는 연기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누구보다 재발견된 배우는 정보석과 박상민이다. 정보석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악역으로 처음부터 마지막회까지 혼신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아무리 궁지에 몰아도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강한 카리스마는 이 드라마가 마지막까지 힘을 잃지 않은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박상민은 액션연기에서부터 맏형으로서의 애틋한 가족애를 선보이며 주목받았고, 고문을 당하는 장면이나 마지막 부분에 뇌손상을 입은 모습까지 말 그대로 연기자로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장군의 아들' 이후 밋밋하게까지 느껴졌던 그의 이미지는 '자이언트'를 통해 확고하게 연기자로서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자이언트'는 이처럼 연기자들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연기의 극점까지 낱낱이 끄집어내 삼켜버렸다.

그래서 거의 모든 장르를 삼키고, 시청률을 삼키고는, 연기자들의 거의 모든 연기까지 끄집어낸 '자이언트'가 결국 소화해낸 것은 강남과 개발로 축약되는 한 시대의 모습이었다. 누군가는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혔고, 누군가는 복수하듯 처절하게 살아왔던 그 시대의 끝자락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꼭대기에 선 자의 처절함과 쓸쓸함'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토록 뛰어왔던가. '자이언트'가 결국 돌아가는 길은 가족이다. 성모가 저 세상으로 떠난 후에 마치 그 자리를 메워주듯 막내가 찾아오고, 강모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 길은 아마도 살아남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기나긴 개발시대의 터널을 지나와서야 겨우 알게 된 행복의 의미를 찾아가는 길이 아니었을까.

제 몸에 맞는 캐릭터 입은 정겨운

사실 정겨운이라는 배우가 '닥터챔프'의 주인공을 한다는 것에 대중들은 그다지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전작들이 그에게 덧씌운 이미지가 너무나 천편일률적이었기 때문이다. '천만번 사랑해'에서 그가 백강호를 연기할 때, 또 출생의 비밀을 갖고 있는 재벌집 아들 연기인가 했다. 전작인 '미워도 다시 한번 2009'가 떠올랐기 때문이다(여기서 그는 사생아 역할을 했다).

물론 그 이전 작품으로 '태양의 여자'의 차동우라는 캐릭터는 그만의 매력이 충분하리라는 가능성을 안겨준 작품이었고, 그 이전 작품인 '달콤한 인생'의 강성구라는 캐릭터는 그가 연기만으로도 꽤 가능성이 있는 배우라는 것을 알려주었었다. 하지만 그 후로 그는 줄곧 뻔한 스테레오 타입의 재벌집 아들 역할을 해왔다. 그것도 왠지 주인공이 아닌 주변인물처럼 여겨지기까지 하는. 그러니 정겨운의 그 이미지는 그가 주인공으로 서 있는 '닥터챔프'라는 드라마마저 퇴색하게 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이런 선입견이 미안할 정도로 그는 자신의 매력을 100% 이상 뿜어내기 시작했다. 박지헌이라는 캐릭터는 정겨운에게 딱 맞는 옷처럼 편안해 보였다. 재벌집 아들이라는 이미지가 얼마나 불편했을까 생각될 정도로, 그의 서민적인 서글서글함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엉뚱한 농담을 천연덕스럽게 던지고 좌절하지 않고 늘 밝음을 유지하려는 그 박지헌이라는 캐릭터의 긍정적인 모습은 정겨운이라는 배우가 가진 가녀린 이미지에 굵은 선을 그려 넣었다.

이것은 '닥터챔프'라는 드라마가 가진 특징 덕분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신체적으로도 심적으로도 강인한 사람들의 사랑을 그려내고 있다. 아마도 스포츠맨이나 의사라는 직업이 갖는 치열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은 쉽게 나약함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힘겨움을 토로한다거나 하는 장면은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반신불수가 되었다가 불굴의 의지로 다시 걷게 되고 의사가 되어 돌아온 이도욱(엄태웅)이 그렇고, 형의 죽음을 겪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박지헌이 그렇다. 이 캐릭터의 강인함은 정겨운의 최대 약점처럼 보이던 가녀린 이미지를 지워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작품이 정겨운에게 부여한 것은 단지 대사와 얼굴 표정만이 아니라 몸 전체를 통해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연기에 있어 몸만큼 진실된 것이 또 있을까. 잘 단련된 건장한 몸이 서로 부딪치고 땀을 흘리고 달려 나갈 때, 우리는 거기서 거부할 수 없는 진정성을 보게 된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그가 울 때는 그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라, 전작에서 보지 못한 몸 전체가 흐느끼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귀요미 짐승남'이라는 이미지는 어찌 보면 가녀리게 보일 수 있는 이미지가 이 작품을 통해 어떻게 강인하게 다가올 수 있었는지를 잘 말해준다.

한 배우에게 있어서 좋은 캐릭터는 그 배우의 터닝 포인트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정겨운에게 있어 박지헌이라는 캐릭터는 그 역할을 충분히 해줄만하다. 사실 어찌 보면 정겨운은 지금껏 꽤 많이 단련되어 왔다고도 볼 수 있겠다. 알 수 없는 절망감에 끝장을 보여주었던 강성구를 겪었고, 또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차동우를 연기했으며, 기성세대들이 마음을 뺏길 만큼 바르면서도 반항적인 백강호를 거쳤다. 아마도 지금 박지헌이라는 캐릭터가 그다지 버겁지 않고 또 가볍지도 않게 그에게 맞는 것은 그 일련의 과정들 덕일 것이다. '닥터챔프'라는 좋은 작품이 또 한 명의 좋은 배우를 발견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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