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팔이>의 속물 의사 주원, 굿닥터로 돌아가다

 

종영한 <용팔이>에서 최고의 수훈갑을 꼽는다면 역시 주원이 아닐까. 과거 <굿닥터>의 박시온 역할로 어눌하지만 착한 심성이 전하는 울림을 제대로 전해준 주원이었다. 그런 그가 <용팔이>로 와서는 자칭 속물의사를 연기했다. 돈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속물의사. 그래서 병원에 가기 힘든 조폭들을 맨 바닥에 눕혀 놓고 치료하는 장면은 <용팔이>에 대한 시청자들의 기대감을 높이기에 충분했다.

 


'용팔이(사진출처:SBS)'

하지만 자칭 속물의사는 사실은 돈 없고 배경이 없어 수술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아픈 기억을 품고 있었다. 그러니 속물의사는 껍데기고 사실은 저 굿닥터에 가까운 휴머니스트였다는 것. 겉으로는 까칠하고 돈만 밝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뒤로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김태현(주원)이란 의사는 서민들의 판타지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휴머니스트의 심성을 숨긴 채 속물의사의 가면을 쓰고 12VIP병동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설정은 또 다른 기대감을 이어갔다. 거기 오래도록 감금된 채 누워있는 한여진(김태희)과 김태현의 만남에 대한 기대감.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의 멜로 속에서도 주원은 확실한 자기 존재감을 드러냈다. 김태희를 상대로 하는 멜로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선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한여진을 깨워낸 김태현은 그녀를 보호해주려 하면서도 그녀의 복수를 멈추려는 노력을 보여줬다. 한 명의 의사로서 환자를 치료하는 것처럼, 그는 이 사회와 현실이 만들어낸 피의 복수라는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처럼 한여진을 치료하고 있었다. 김태현이라는 의사가 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사람을 죽이라 사주하는 복수의 화신 한여진이 그저 악역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녀는 나쁜 존재가 아니라 아픈 존재가 됐기 때문이다.

 

후반부에 와서 김태현의 분량보다 한여진의 분량이 훨씬 많아졌고, 그 복수극이 오래도록 펼쳐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태현의 존재감은 늘 드라마의 다른 한편을 차지했다. 즉 이 드라마가 말하려는 건 복수는 복수를 부를 뿐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복수로 전염되는 질병일 뿐 피로써 치유될 수는 없다는 것. 그러니 모든 걸 버리고 일층의원으로 돌아간 김태현은 한여진이 돌아가 치유 받아야 하는 곳이자 이 드라마의 주제일 수밖에 없다.

 

결국 진짜 복수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닐까.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며 손에 더 많은 것을 쥘수록 점점 피폐해지는 한여진과 모든 걸 내려놓고 사람들 가까이에 선 의사로 돌아가자 한없이 행복해진 김태현은 이 드라마가 말하는 진정한 복수극의 해법을 드러낸다. 저들은 끊임없이 투쟁하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배신하면서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불행해진다.

 

시스템은 저들을 부유하게 만들었을지 모르지만 결코 행복하게는 해주지 않는다는 게 <용팔이>가 전하려는 메시지일 것이다. 그 메시지를 앞에서부터 끝까지 밀고 나가는 한 캐릭터가 바로 김태현이라는 의사다. 주원은 이 의사의 절망과 분노 그리고 사랑과 치유까지의 변화과정들을 김태현이라는 캐릭터 하나로 제대로 꿰어냈다.

 

드라마의 겉면은 김태희가 연기하는 한여진이라는 캐릭터가 화려하게 이끌었을지 몰라도 드라마의 실제는 주원이 연기하는 김태현이라는 캐릭터의 소박함이 밀어주었다는 것. 이것은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화려한 저들의 세계가 겉에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작아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에 의해 세상은 살만해지는 것이니 말이다



<디데이>, 김영광 같은 의사 어디 없나요

 

서울 한 복판에 지진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드라마 <디데이>가 보여준 서울의 지진 장면은 시청자들의 시선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맨홀 뚜껑이 마치 분수처럼 튕겨져 나가고 아스팔트가 거북이 등짝처럼 갈라지고 건물은 종잇장처럼 우수수 무너져 내린다. 남산 타워가 꺾어져 버린 장면은 이 지진의 상징처럼 보이고, 흔들리는 건물 내부의 아비규환은 원경으로 바라볼 때 그저 스펙터클처럼 보이던 재난의 끔찍한 현실성을 살려낸다.

 


'디데이(사진출처:JTBC)'

드라마로서 이런 CG를 접한다는 것 자체가 흔한 일은 아니다. 막연히 상상하기만 했지 이 같은 서울의 재난 장면을 실제로 구현한다는 건 그만한 투자도 투자지만 굉장한 도전정신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디데이>는 이러한 재난 장면의 CG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그려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성과를 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정작 중요한 건 CG로 구현된 재난 장면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밑그림인 셈이다. 그 밑그림 위에서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그려질까가 사실 더 중요하다. <디데이>는 그 포인트를 이해성(김영광)이나 정똘미(정소민) 같은 의사를 중심에 세우고 그들과 함께 할 최일섭(김상호) 같은 구조대원들의 고군분투에 두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그 누가 의연할 수 있을까. 병원을 찾아 몰려드는 재난의 부상자들과 환자들은 부족한 수용시설과 의료물자 때문에 치료받을 이들이 선별되고 선택받지 못한 이들은 그 울분을 의사에게 쏟아내기도 한다. 치료받지 못하고 죽게 될 엄마 때문에 광분한 아들에게 그 분이 살 수 있다면 자신을 죽도록 때려도 좋다고 말하는 정똘미의 진심이나, 환자들에게 쓸 국소마취제가 별로 없어 제 생살을 꿰매면서도 아픔을 참아내는 이해성의 의연함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잡아끈다.

 

결국 재난이 터지자 문을 닫아걸고 눈앞에서 환자를 저버리는 미래병원의 행태와 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조악한 병원에서 마지막 한 사람까지 포기하지 않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이해성과 정똘미, 간호사 박지나(윤주희), 김현숙(김재화) 같은 인물들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단 몇 분 간의 지진으로 인해 폐허가 되다시피 한 서울 거리를 피난길에 오른 난민들처럼 걸어 나가는 그들의 생명을 이제부터 위협하는 건 저 재난의 결과 때문만은 아니다.

 

제 살길만 우선 찾겠다는 사람들의 이기심이나 기득권을 쥔 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욕망 같은 것이 이제부터 이 이해성과 정똘미 같은 이들이 부딪치게 되는 문제들이다. 압도적인 재난 장면에 결코 적지 않은 투자가 들어갔다면 그것의 목적은 결국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욱 실감나게 만들어내기 위함이다.

 

다만 지나치게 재난 앞에 선 휴머니스트들의 고군분투로만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건 피해야할 일이다. 우리가 이러한 압도적 재난 장면까지를 가져와 들여다보려는 건 천재지변으로서의 재난 그 자체가 아니다. 그 안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이다. 우리가 그토록 많은 재난 영화나 드라마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 건 실제로 우리가 접했던 수많은 재난들이 우리 사회가 가진 병리적 현상을 응축한 사건들로 기억되기 때문이지 않은가.

 

따라서 <디데이>의 이야기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것이다. 지진이 벌어지고 그로 인해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아비규환에 빠지는 그 장면들로 언제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는지 모를 몰입감을 느낀 건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해성과 정똘미 같은 의사들의 노력과 대비되는 박건(이경영)이나 한우진(하석진) 같은 인물들과의 팽팽한 갈등을 통해 재난 그 자체보다 더 중대한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을 고발해내는 일은 그래서 저 압도적 CG가 가져야할 지향점이 아닐까. 드라마적 갈등은 재난 그 자체가 만드는게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주춤하는 <용팔이>, 초반 기세 이어가려면

 

11.6%로 시작해 단 6회만에 20.4%로 거의 두 배의 시청률을 돌파했던 <용팔이>의 그 기세는 왜 주춤해졌을까. 사실 시청률 20%는 최근 주중 드라마의 최대상한선처럼 굳어있다. 그 이상을 넘겨 30%까지 치고나가는 게 드라마 시청패턴 변화와 미디어 환경 변화로 인해 쉽지 않아진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용팔이(사진출처:SBS)'

하지만 <용팔이>20% 시청률에서 주춤하고 있는 건 이런 환경적 요인과 그리 상관이 없어보인다는 점에서 안타깝다. 초반의 기세를 생각해보면 30%는 힘들어도 25%까지의 시청률은 무난하게 돌파할 것이라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용팔이>는 지금 현재 우리네 대중들의 심중에 자리하고 있는 불편부당한 정서의 뇌관을 툭툭 건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VIP 병동에서 호화롭게 병원서비스를 받는 고객님(?)들과 일반병동에서 의사가 제때 돌봐주지 않아 죽어나가는 환자들. 같은 한신병원이라는 공간 속에 자리한 이 확연한 계급구조는 우리네 사회의 축소판처럼 여겨졌고, 그 안에서 속물을 가장한 휴머니스트 의사 김태현(주원)과 재벌 상속녀지만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병원에 감금되어 있는 가련한 여인 한여진(김태희)이라는 인물들은 부조리한 자본 시스템이 양산한 양극단의 희생자들처럼 보였다.

 

그러니 이들을 둘러싸고 자본 쟁탈전을 벌이는 한도준(조현재) 회장과 한신건설 고사장(장광) 같은 인물은 생명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자본이 부리는 하수인으로서 시청자들의 분노를 유발한다. 결국 <용팔이>의 파괴력은 이들과 김태현, 한여진이 벌이는 팽팽한 대결구도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VIP병실에 감금되어 누워 있던 한여진이 깨어나면서 <용팔이>의 이야기는 갑자기 김태현과 그녀의 멜로로 흘러간다. 그것도 자연스러운 멜로라기보다는 너무 급진전되는 양상으로서 흘러가는데다, 한 회 분량을 거의 이 멜로에 쏟아 붓는 바람에 자칫 지금껏 존재해온 팽팽한 대결구도가 흐려지는 결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실 <용팔이>에서 멜로는 독보다는 득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즉 김태현과 한여진 사이에 만들어지는 멜로의 강도는 이들을 다시 떼어놓으려는 한도준 회장 일파로 인해 드라마에 긴박감을 넣어줄 수 있다. 이미 사랑하는 남자를 잃게 됐던 트라우마를 가진 한여진에게 있어서 김태현에게 다가오는 위기는 분명 극의 긴장감을 높여줄 것이다.

 

하지만 그 멜로도 자연스러워야 한다. 너무 눈에 보이게 관계를 진전시키는 모습은 시청자들이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할 수 있다. 한신병원을 벗어나 한적한 시골마을의 성당에서 알콩달콩한 멜로를 키워가는 모습은 잠시간의 휴식처럼 다가오지만 한참 달려야할 드라마가 너무 한가롭게 흘러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현재 주춤하고 있는 <용팔이>는 아직도 더 달릴 수 있는 잠재력이 충분하다. 초반 쉴 틈 없이 돌아가던 사건과 액션을 다시 가동시켜야 한다. <용팔이>처럼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는 드라마에서 멜로는 극의 감미료가 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하기는 쉽지 않다. 빨리 제 궤도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서 김태현이 다시 저들과 팽팽하게 맞붙는 이야기를 통해 서민들의 판타지와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것이 초반의 기세를 계속 이어 용두사미가 되지 않는 길이다



착한 의사에서 속물 의사로, <용팔이>가 그리는 세상

 

역시 주원은 의사가운이 잘 어울린다. <굿닥터>에서 자폐를 가진 서번트 증후군의 시온 역할에서 주원은 마음까지 보듬어주는 착한 의사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 착한 의사라는 존재는 그래서 거꾸로 병원 조직에까지 스며든 권력 시스템을 에둘러 비판하는 인물로 부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 의사가운을 입은 <용팔이>에서 주원이 연기하는 김태현은 이런 착한 의사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돈을 준다면 어디든 달려가는 속물의사다.

 


'용팔이(사진출처:SBS)'

용한 돌팔이’. 이것이 조폭들 사이에서 김태현이 용팔이로 불리는 이유다. 칼부림과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는 조폭 세계. 하지만 병원은 갈 수 없는 그들을 위해 용팔이는 어디든 왕진을 간다. 조폭들도 고귀한 생명이니 하는 의사 윤리의식 따위는 거기에 없다. 용팔이가 그 위험한 왕진을 감행하는 이유는 하나, 바로 돈이다.

 

일반외과 레지던트 3년차지만 대단한 수술 실력을 가진 덕분에 병원 과장들의 구원투수로 불려 다닌다. 그들이 잘못 해놓은 수술 때문에 죽게 생긴 환자들을 수두룩 살려내지만 그렇다고 일반적인 의학드라마에서 보던 그런 존경어린 시선이나 선배 의사들의 칭찬 따위는 없다. 그는 오로지 과장들의 승률을 높여주는 구원투수로서만 취급된다. 김태현 역시 그런 걸 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대신 그는 VIP 환자 가족으로부터 사례를 받는 걸 당연시 한다.

 

의사라고 하면 생명을 살리는 직업으로서 그려지기 마련인 의학드라마에서 용팔이는 그 모든 행위를 거래관계로 바꿔놓는다. 돈이 오고가면 어디든 왕진을 가고, 누군가를 살려내면 거기에 합당한 돈을 받는다. 그걸 갖고 의사의 윤리 운운하는 과장에게 그는 당당하다. 과장 역시 VIP병동에서는 사례비를 받기 때문이다.

 

그토록 반복되어온 의학드라마라고 해도 <용팔이>가 그리는 의사는 다르게 다가온다. <용팔이>는 의사를 성인으로도, 존경받는 인물로도, 그렇다고 오로지 병원 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야심가로도 그러지 않는다. 용팔이는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건 그래서 거래다. 제대로 된 물적 대가를 받는 것으로 꿈이나 이상 혹은 포부를 접으며 살아가는 인물이 바로 용팔이다.

 

물론 의사라는 특정한 직업인으로서 그려지고 있지만 용팔이의 이러한 삶의 태도는 여러모로 현재의 청춘들을 그대로 닮아있다. 이미 태생부터 결정되는 삶의 양태는 결코 노력한다고 해서 넘어설 수 없는 벽이 된 지 오래다. 제 아무리 용쓰고 노력해도 가난하게 태어난 이들이 가난을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 우리네 사회의 불행한 구조이지 않은가. 그러니 포기하고 현실적이고 때로는 속물적이라고 부르는 삶을 사는 것이 뭐가 잘못됐단 말인가.

 

물론 용팔이의 그런 속물적인 삶의 선택 이면에는 평생 투석을 받으며 살아가야 할 자신의 여동생이 있다. 그 만만찮은 병원비를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돈을 벌어야 한다. 아니 그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조차 죽을 수도 없는 인물이다. 자신의 죽음은 여동생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속물화된 세상 속에서도 그 순수함을 지켜내던 <굿닥터>가 이제는 대놓고 속물을 선언하고 나선 <용팔이>로 돌아왔다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속물의사 용팔이가 부정적인 인물이 아니라 꽤 공감 가는 인물로서 받아들여지는 건 그 짧은 몇 년 사이 우리네 현실이 얼마나 더 절망적인 청춘들을 낳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용팔이>는 그래서 의사가운처럼 잘 차려입은 옷으로 그럴 듯하게 꾸며지고 있지만 사실은 위선 가득한 세상에 일침을 날리는 존재로 다가온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