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참한 삶 속에서 인간다운 삶이란

 

대선이 끝났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당선으로 막을 내렸지만 그 어느 선거보다 뜨거웠던 대중들의 염원을 느낄 수 있었던 선거였다. 보수 진보와 신구세대로 나뉘어져 팽팽한 대결을 벌였지만 그 공약이 전하는 내용들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경제민주화로 양극화 문제 해결, 반값등록금 실현과 청년 실업 해결, 대기업의 횡포로 사라져버린 골목 상권 부활 등등. 그것이 보수 진보와 신구세대를 넘어선 작금의 민심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영화 <레미제라블>

대선이 치러진 날 <레미제라블>이 개봉되었다. 영진위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집계 결과 <레미제라블>은 이 날에만 전국 28만 3887명의 관객을 동원 누적 관객수 34만 3094명을 기록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랐다. 많은 유권자들이 투표를 마치고 이 영화를 봤을 것이다. 이미 고전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이 영화를 통해 대중들은 어떤 희망을 꿈꾸었을까.

 

<레미제라블>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후의 비참했던 민중들의 삶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제목부터가 <레 미제라블 Le Miserable> 즉 ‘비참한 사람들’ 혹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무려 19년의 감옥살이를 지낸 장발장, 병을 앓고 있는 코제트를 위해 몸까지 팔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한 불쌍한 여인 팡틴, 고아나 다름없이 갖은 구박과 착취를 겪으며 살아가는 코제트가 그들을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이 가난과 비참이 전염병처럼 돌고 있는 도시, 그 끝없는 고통의 그늘 속에서 마리우스 같은 혁명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기득권을 가진 아버지를 부정하고 이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진다. 하지만 혁명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거리 시위에서 모두 죽음을 맞이하고 결국 혼자만 장발장에 의해 살아남게 된 마리우스는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그 마리우스를 위로하고 감싸 안는 건 바로 연인 코제트와 그 사랑을 이뤄준 장발장이라는 위대한 인간의 헌신이다.

 

<레미제라블>은 최근 우리 문화계의 화두로 자리하고 있다. 뮤지컬 영화가 개봉되었고, 뮤지컬은 우리말로 초연되었다. 5권으로 완역된 소설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있고 심지어 다시 돌아온 피겨 여왕 김연아의 프리 프로그램의 새 레퍼토리가 바로 이 작품이다. 왜일까. 도대체 150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이 걸작이 지금 우리 시대와 맞닿은 지점은. 그것은 아마도 20세기, 자본이 그려낸 지구의 미래가 양극화라는 위기의식을 가져왔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게다.

 

돈이면 사람도 서슴없이 거래되는 이 비참한 시대에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이 전하는 메시지는 그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인가 하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런 삶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희망이다. 도둑질을 한 장발장을 끌어안아 그 영혼을 구원한 미리엘 주교의 삶은 바로 그대로 장발장에 의해 반복된다. 한 사람에게 준 희망의 촛불이 다른 여러 사람의 희망을 비춰주는 빛이 되었던 것.

 

원작에서 장발장은 죽어가며 이런 말을 남긴다. “죽는 건 아무 것도 아니야. 무서운 건 진정으로 살지 못한 것이지.” 세상이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절망할 건 없다. 스스로 진정 인간다운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중요한 일이니까.

 

대선은 끝났고 당락은 결정됐다. 자신이 지지한 후보가 당선되었든, 아니면 그렇지 못했든 그 과정에서 지금 이 땅의 대중들의 염원은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건 그 염원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게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는 일이다. 저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이 그랬던 것처럼.

 

관련 글 : '레 미제라블', 이 노래 하나로 충분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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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 도대체 무슨 얘길 하려는 걸까

 

<아랑사또전>은 도대체 무슨 얘길 하려는 걸까. 보면 볼수록 기묘한 사극이다. 판타지 멜로인 줄 알았는데 액션에 미스테리에 심지어 공포까지 장르를 넘나든다. <전설의 고향>에서 봤던 억울하게 죽은 처녀귀신과 그 귀신의 한을 풀어주는 사또 이야기처럼 시작했지만, 그것은 이 사극의 1%도 안되는 전제에 불과했다.

 

'아랑사또전'(사진출처:MBC)

귀신을 보는 사또 은오(이준기)는 처녀귀신 아랑(신민아)이 가진 비녀가 자신이 어머니에게 줬던 것임을 알아채고 그녀의 죽음을 밝히는 일이 어머니를 찾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갑자기 홍련(강문영)이라는 미스테리한 존재가 등장하면서 복잡해진다. 인간을 해하는 절대악이자 요괴인 홍련은 등장인물들과 모두 관련을 맺고 있다. 그녀는 은오의 어머니(아마도 죄를 짓고 쫓겨난 선녀 무연이 몸을 빌린)이고, 저승사자 무영(한정수)의 동생이며 아랑의 죽음과 관계된 인물이다.

 

홍련의 존재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는 미스테리하고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야기가 하나씩 단서를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흘러가며 알 듯 모를 듯한 대사 몇 마디로 단서를 제시하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마치 미로를 걷는 듯한 곤혹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시점이 은오나 아랑에 집중되어 있지 않고 전지적 시점에서 모든 인물로 흩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옥황상제(유승호)나 염라대왕(박준규)의 시점이지만 이들은 좀체 사건의 진상을 알려주지 않는다.

 

여기에 이야기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사극이 갖는 인물들 간의 계층적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은오는 자기 스스로 “귀신들린 얼자”라고 표현하며 출신이 만든 한계와 설움을 드러내지만, 정작 이 사극에는 양반과 상놈 사이도 수평적 관계로 그려진다. 은오와 그의 하인 돌쇠(권오중)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나아가 이 사극은 인간과 귀신 혹은 인간과 천상의 인물들(옥황상제나 염라대왕, 저승사자 같은) 사이에도 위계를 그다지 느낄 수 없다.

 

이것은 양 사이에 걸쳐진 인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은오는 인간이면서 귀신을 보는 존재이고 아랑은 귀신이면서 시한부 생을 부여받은 인간이다. 홍련은 혼은 타락한 선녀이면서 동시에 육체는 은오의 어머니인 인물이다. 이 사극의 중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은오와 아랑, 홍련이 이렇게 걸쳐진 인물이기 때문에 천상과 인간세계의 경계가 깨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 인간세계의 반상의 구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랑은 “죽으면 다 똑같다”는 의미심장한 말로 경계 짓기가 무의미하다는 걸 얘기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아랑사또전>은 이 구별 없는 세상을 그리려 한 것일까. 귀신과 인간이 공존하고, 천상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동시에 존재하는 그런 세계를 그림으로써, 인간 세계 속의 구별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부질없는 욕망의 소산이라는 것을 말하려 하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경계가 없는 기묘한 사극, <아랑사또전>은 그래서 불친절한 문제작이다. 액션이면 액션, 멜로면 멜로, 공포면 공포까지 각각의 장르들은 그 자체로 보면 꽤 괜찮은 완성도를 갖고 있지만 이것을 한꺼번에 이어 붙이고, 단계별로 이야기를 전개하기보다는 동시다발적으로 풀어나가면서 이야기는 복잡해졌다. 이렇게 단서들을 꼭꼭 숨김으로 해서 반전을 노린 면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반전효과가 적은 것은 이야기가 너무 복잡해지면서 기대감 또한 사라졌기 때문이다. 반전은 기대감을 배반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먼저 이야기를 이해시키고 몰입시켜야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렇게 끊임없는 이야기의 미로 속으로 빠뜨린 후, 결국에는 간단한 액션으로 문제를 풀어내거나 아랑과 은오의 멜로로 이야기를 끝맺음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허무한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시청자들을 미로 속에 넣고 한껏 혼란에 빠뜨리는 작가의 악취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아랑사또전>은 어떤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걸까. 좀체 알려주지 않는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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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타임>의 병원, 우리 사회의 축소판

 

전쟁터에 가까운 응급실이다. 대형사고라도 터지만 병상이 없어 복도까지 메운 환자들이 저마다 살려 달라 고통을 호소하고, 의사들은 마치 전장을 누비듯 온 몸에 피칠갑을 한 채 응급실을 뛰어다닌다. 1분 1초에 환자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그 혼돈. 그 속을 단 한 명의 환자라도 더 살리겠다고 뛰어다니는 의사들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 <골든타임>은 우리가 숱하게 봐왔던 <병원 24시> 같은 다큐 속의 응급실을 소재로 하지만, 그것이 다루는 것은 이 훈훈한 다큐와는 사뭇 다르다.

 

'골든타임'(사진출처:MBC)

히포크라테스가 되살아난 듯한 이제는 고전적으로까지(?) 보이는 진짜 의사 최인혁(이성민)은 외과의이면서도 응급실에서 외상환자들을 수술한다. 외상환자들을 외면하는 의료현실 속에서 최인혁은 이질분자다. 그래서 일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이 병원의 과장들은 그를 소외시킨다. 응급의학과 과장 나병국(정규수)은 응급실을 사실상 맡고 있는 최인혁을 전혀 도울 생각이 없고, 정형외과 과장 황세헌(이기영)은 제 일신에 좋은 일만 찾아서 하려고 한다. 신경외과 과장 김호영(김형일)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고, 일반외과 과장 김민준(엄효섭)은 같은 외과면서도 절대로 최인혁을 받아주려 하지 않는다.

 

생명을 다루는 곳에서 권력이니 이권이니 하는 말이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이미 우리네 의료현실이 돈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당장 환자가 죽어나갈 마당에도 그들은 병원의 이익을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돈이 없다면 병원도 존재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최인혁이 밉보이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병원이 아닌 환자만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침 트라우마(외상) 센터를 세우려는 마당에 그 센터장으로 최인혁이 될까봐 그들은 조바심을 느낀다. 사실상 아무 것도 없는 맨바닥에서부터 외상 환자들을 수술해온 최인혁이 만든 밥그릇에 저들이 숟가락을 꽂으려는 심사다.

 

과장들의 담합으로 수술금지령이 떨어지지만 바로 앞에 죽어가는 환자를 외면하지 못하는 최인혁은 결국 메스를 들게 되고 그것은 그가 쫓겨나게 되는 빌미가 된다. 사람을 살리겠다고 최선을 다한 의사는 징계를 받고, 뒷전에서 권력놀음을 하는 의사는 기회를 얻는다. 이쯤 되면 슬슬 생각나는 것이 있지 않은가. 이것은 병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매일 겪는 현실이다. <골든타임>이라는 의학드라마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바로 이 응급실이 우리 현실의 축소판처럼 여겨지게 되는 지점에 있다.

 

응급실에 실려온 환자를 서로 자기 과가 아니라며 다른 과로 미루는 모습을 보이던 의사들이 VIP의 전화 한통으로 180도 돌변하는 현실. 의식 불명의 환자를 뒤로 하고 나오면서도 “얼굴 도장 찍었으니” 포커나 한 판 하자는 식의 농담을 던지는 의사들. 그들에게서 환자의 생명 운운하는 것은 순진하게만 여겨진다. 이것이 현재 우리네 의료현실의 단면이다. 본래 사람을 살리겠다는 그 목적을 벗어나 출세와 권력을 위한 도구처럼 선택되는 의사라는 직업. 일반외과의들이 점점 사라지고 돈이 되는 과들로만 몰려드는 건 이런 세태를 잘 보여준다. 하물며 사람 목숨을 다루는 것에도 이럴 진대, 사회는 어떨 것인가.

 

<골든타임>이 그리고 있는 이 응급실이라는 공간은 그래서 갖가지 사회적인 아픔으로 신음하고 있는 우리 사회를 표상하고 있는 듯하다. 그 고통을 치유해줄 의술도 있고 여력도 있지만 권력에만 몰두하는 그들은 환자를 다루는 것조차 처세로 여긴다. 그래서 의사도 있고 응급실도 있지만 이런 시스템적인 문제 때문에 환자들이 죽어나가는 응급실, 이것이 바로 우리네 현실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래서 징계위원회에 불려간 최인혁이 오래도록 갖고 있었던 듯 꼬깃꼬깃해진 사표를 제출하는 장면은 마음 아픈 정도를 넘어 보는 이들을 분노하게 만든다. 도대체 그 더러운 현실에서 얼마나 사표를 던지고 싶었을까. 하지만 병원을 떠나면서도 눈앞에 있는 환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최인혁은 어쩌면 우리 사회가 찾고 있는 유일한 희망인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던진 사표는 그래서 우리를 더 아프게 한다.

 

<골든타임>이 독특한 것은 의학드라마를 통해 우리네 현실을 투영해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마치 <추적자>의 의학드라마판을 보는 것만 같다. <추적자>의 백홍석(손현주)이 판사에게 “제 죄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열심히 살았을 뿐입니다”라고 했던 것처럼, <골든타임>의 최인혁 역시 죄라면 의사로 열심히 환자를 살리려 한 것뿐이다. 도대체 이 순수한 의지들은 왜 번번이 꺾어져 버리는 걸까. <골든타임>의 응급실은 아프게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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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괴물의 대결, <추적자>

 

“내 옆에는 사람들이 있어 물론 네 옆에도 사람들이 있겠지. 총리 자리면 신념도 버리는 대법관도 있고 돈이면 뭐든지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다르다. 법을 지키기 위해서 가족의 손에 수갑을 채우는 검사,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형부와 맞서는 기자, 사고를 당하고 자기 목숨이 위험한데도 나를 걱정해주는 형사. 강동윤. 이게 사람이다. 이게. 내가 아는 사람이다.”

 

'추적자'(사진출처:SBS)

딸이 죽고 아내가 죽고 탈옥을 하고 경찰에 쫓기며 밀항을 하려는 사람, 백홍석(손현주)은 강동윤(김상중)에게 “넌 참 불쌍한 놈”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백홍석이 사는 세상과 강동윤이 사는 세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추적자>가 보여주는 두 개의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사람이 사는 나라와 괴물들이 사는 나라. <추적자>는 결국 이 두 나라의 대결처럼 그려진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가 인간 백홍석에게 주는 시련은 참혹하다. 법정에 선 백홍석의 변론을 맡은 최정우(류승수)가 사건을 하나 하나 플래시백으로 되짚는 과정은 그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참상을 드러낸다. 딸이 사고를 당하고 그 딸이 깨어나길 간절히 바랐지만 결국 30억이라는 돈에 사주당한 친구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되는 현실, 범인을 잡겠다는 딸과의 약속을 지켜내지만 그렇게 잡은 범인을 경찰이 놔주는 현실이 그렇다.

 

위증과 조작된 증언을 서슴지 않는 법정, 탄원서조차 거부하는 학교, 친구들이 모아온 탄원서조차 채택하지 않는 법정, 그리고 조작되는 현실에 죽음을 맞이한 아내, 오로지 진실을 밝히기만을 원했지만 진실은 오히려 덮여지는 현실, 그를 도와주기는커녕 회유하려는 변호사, 피해자를 비아냥대는 검사, 힘 있는 자의 목소리만 듣는 언론, 결국 억울하게 죽은 딸이 원조교제에 마약을 하는 딸로 만들어지는 현실... 이것이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백홍석과 그 주변인물들이 사람이 사는 나라의 표징으로서 하나의 유사가족을 형성한다면, 강동윤과 그 주변인물들은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파편화된 가족을 보여준다. 백홍석이 말한 것처럼 그는 가족을 모두 잃었지만, 대신 마치 아버지나 형님 같은 황반장(강신일)이 있고 여동생 같은 조형사(박효주)와 막내 같은 박용식(조재윤)이 있다. 마치 동료처럼 도와주는 검사 최정우가 있고, 심지어 자신의 가족의 틀을 넘어서 정의를 지키려는 기자 서지원(고준희)이 있다. 그들은 사적인 이익이 아닌 인간애와 정의를 위해 백홍석을 돕고 나선다.

 

반면 강동윤은 버젓한 가족을 갖고 있지만 이것을 가족이라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다. 장인 서회장(박근형)은 자신의 권력과 이득을 위해서는 심지어 딸도 버릴 수 있는 인물이다. 이것은 백홍석과 대비를 이룬다. 서회장의 딸인 서지수(김성령)는 아버지를 버리고 남편 강동윤을 선택한다. 강동윤의 비서인 야심가 신혜라(장신영)는 자신의 야심을 실현시키기 위해 서회장과 강동윤 사이에서 저울질을 한다. 서회장의 아들인 서영욱(전노민)은 강동윤에게 복수하기 위해 동생 서지수와 맞선다. 이건 가족이 아니다. 한 사람의 생명보다 권력욕이 우선인 삶, 괴물들의 삶이다.

 

법정에서 백홍석의 무죄를 주장하는 최정우에게 당사자인 백홍석은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죄가 뭔지도 모르지만 “거기에 맞는 벌을 받겠다”고 한다. 이 모든 일들이 “죄는 지었으되 벌은 안 받으려다가 생긴 일”이라는 그의 진술은 이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추악한 얼굴을 끄집어내 보인다. 가해자는 자신이 도리어 피해자라고 거짓을 말하고, 피해자는 자신이 가해자가 맞다며 진실을 말한다.

 

우리가 <추적자>를 보며 강동윤의 거짓에 분노를 보내고, 백홍석에게 깊은 동정을 하게 되면서도 그것이 보여주는 지독하고도 리얼한 현실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안타깝게도 우리가 그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 발을 딛고 있다는 얘기는 아닐까. 막판 대선에서 투표장으로 달려온 유권자들이 판세를 뒤집을 때 느꼈던 그 카타르시스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 드라마 같지 않은 드라마가 우리에게 전하는 진중한 메시지일 테니.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서 우리는 괴물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을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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