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위치타 공항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마치 가이드를 따라가듯 톰 크루즈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영화 속으로 들어간다. 공항 내 안내방송은 이 롤러코스터에 이제 막 톰 크루즈의 안내를 받아 탑승한 관객들에게 "즐거운 여행이 되시길 빌겠습니다"하고 말한다. 그리고 안전한 일상 속에 살아왔던 우리들을 때론 아찔하고 때론 로맨틱한 두 시간 짜리 여행 속으로 데려간다.

우리를 대신할 영화 속 인물은 캐머런 디아즈. 그녀는 '나잇 앤 데이'라는 영화적 판타지의 세계와 현실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해주는 인물이다. 그녀에게 감정이입된 관객들은 그녀가 느끼는 대로 위험해보이면서도 어딘지 매력으로 넘치는 톰 크루즈에게 기꺼이 몸을 맡긴다.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된다. 이 즐거운 여행을 깨뜨릴 수 있는 지독한 상황 속에 들어가면 친절하게도 톰 크루즈는 그녀에게 잠이 오는 약을 먹인다. 그러니 위험한 상황은 지워지고 대신 눈을 뜨면 꿈꾸던 곳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톰 크루즈는 이 여행의 가이드이자, 친절한 기사(Knight)다. 관객을 공주처럼 대하는.

'나잇 앤 데이'는 액션물과 로맨틱 코미디를 절묘하게 엮어놓았다. 그것은 '미션 임파서블'의 톰 크루즈와 각종 로맨틱 코미디에서 발군의 푼수끼를 보여주었던 캐머런 디아즈의 조합 그대로다. 영화는 스파이 남편의 모험 속으로 갑자기 뛰어 들어간 아내의 이야기를 담았던 '트루 라이즈'를 떠올리게 한다. 과도한 액션이 로맨틱한 분위기를 깨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이 영화는 톰 크루즈라는 농담 잘 하고 여성에 대한 배려가 출중한 데다 잘 생기기까지 한 인물을 투여해 상황을 늘 말랑말랑하게 바꿔놓는다. 여성들이 진짜 좋아할만한 '로맨틱 액션'. 위험해보여도 안전함을 보장하는 짜릿한 일상탈출 롤러코스터가 '나잇 앤 데이'다.

놀이공원에 즐비한 롤러코스터들이 우리에게 말하듯, 이 영화는 '안전한 삶'이 가진 무료함을 '죽음'이라고까지 말한다. 톰 크루즈가 캐머런 디아즈에게 정보조직이 당신을 찾아갈 것이고 '안전' 같은 말을 반복하면 그건 "당신을 죽이겠다"는 말이니 도망치라고 하는 건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의 안전함을 벗어나 위험하지만 짜릿한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이 어디 쉬운 일인가. 캐머런 디아즈는 모험과 안전 사이에서 갈등한다. 대부분의 우리가 그렇듯이 '지금'이 아닌 '언젠가'로 꿈을 미루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 그런 의미에서 '언젠가'라는 말은 톰 크루즈의 말대로 '위험한 말'이다.

영화는 이 '언젠가'의 삶을 살아가는 그녀를(어쩌면 우리를) '지금'의 삶으로 되돌려 놓는다. 그녀는 톰 크루즈라는 대단히 매력적인 가이드와 함께 알프스로 외딴 섬으로 오스트리아로 스페인으로 날아간다. 마치 비행기에서 푹 자고 나면 새로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자고 나면 그 꿈꾸던 세계 속으로 들어와 있다. 이처럼 '나잇 앤 데이'는 우리들이 원하고 꿈꾸는 세계를 두 시간 짜리 롤러코스터로 압축해 놓는다. 부담 없고, 신나고, 로맨틱한, 일상에 지쳐 잊고 있던 그 짜릿함에 열광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롤러코스터도 이 정도면 꽤 타볼만한 가치가 있다 느끼게 하는 영화, 바로 '나잇 앤 데이'다.

20분으로 압축된 다큐, 그 일상의 미학

그릇에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 상차림이 달라지게 마련이지만, 때론 그릇이 어떤 형태이냐에 따라 담겨지는 음식도 달라진다. 감성다큐 '미지수'는 20분으로 압축된 3편의 다큐멘터리를 옴니버스식으로 구성한다. 짧아진 분량은 단지 짧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통상적으로 1시간 정도의 다큐멘터리를 구상하고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만만찮은 분량이 부담으로 작용해 다큐멘터리 자체를 무겁게 만들기 마련이다. 여기에 다큐가 삶을 성찰하는 형식이라는 고정된 인식은 다큐 자체를 일상적인 삶과 멀어지게 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20분이라는 분량은 다르다. 누구나 카메라를 들고 찍어내기만 하면 채워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이 분량은 그 다큐 속에 담겨질 소재 역시 제한한다. 지나치게 진지한 부분은 소화해내기 어렵기 때문. 따라서 20분 분량 속에 들어오는 소재들은 우리 손에 들려져 삶을 바꿔나가는 휴대폰이 되기도 하고, 우리가 매일 타고 다니는 버스가 되기도 하며, 일상 속에서 스쳐 지나가던 골목길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 입고 지나쳤던 호피무늬 옷이 되기도 한다. 다큐라는 마운드에 올라서기 전, 20분이라는 분량은 그 VJ의 어깨에서 힘을 빼준다.

'미지수'가 특별해지는 것은 어깨에 힘을 뺀 투수가 오히려 더 잘 던지게 되는 것과 같다. 1시간 분량의 다큐멘터리라면 재료가 될 수 없었던 것들이 재료로 올려지자, 그 요리법 또한 달라졌다. 다큐멘터리는 거대담론을 담기 위해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하기보다는 이 미시적 세계를 살짝 드러내주는 것으로 감성으로 무장한다. 주장하던 목소리는 권유하는 목소리로 바뀌었다. '2010 골목길 감성지도 만들기'는 말 그대로 골목길 속으로 들어가 차츰 사라져가는 향수의 한 자락을 잡아내면서 우리에게 일상 속에 담겨진 특별한 그 무언가를 바라보라고 말한다. '어떤 고향 이태원'에서는 한국을 찾아온 외국인들의 고향으로서의 이태원을 재조명한다. '실험여행, 서울로의 출국'은 서울을 찾아오는 외국인들의 시선을 따라가기 위해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서울을 다시 바라본다.

논리적 접근이 영상을 통한 설명이라면, 감성적 접근은 그 포착된(혹은 연출된) 영상 자체가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는 직관적인 보여줌이다. 따라서 '미지수'는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을 위해 연출에 적극적이다. 다큐를 흔히들 연출 없는 영상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다큐만큼 연출에 고민하는 장르도 드물다. 다큐는 기본적으로 촬영자의 시선이 하고자하는 이야기를 규정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장르이기 때문이다. '비빔밥, 그 섞임에 대하여'에는 지휘자가 등장해 젓가락을 들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장면이 나온다. 카메라가 지휘자의 앞을 휘돌아 비출 때, 그 젓가락 지휘가 비빔밥을 비비고 있는 구성은 분명한 연출이지만, 이 짧은 다큐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가장 짧고도 명확하게 보여준다.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려는 의도. 이것 역시 20분짜리 다큐의 압축 속에서 좀더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을 고민하면서 나온 산물일 것이다.

'미지수'는 일일 다큐시대를 예고했던 '30분 다큐'의 후속작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30분 다큐'보다 더욱더 미적으로 영상을 구성하고 있고, 그 단순한 일상에서 시작한 영상은 의외의 지적인 결과물로 도출되곤 한다. '30분 다큐'가 그 시간적 단축으로 다큐의 일상화를 실험했다면, '미지수'는 거기서 한 차원 더 나아가 이 짧은 다큐를 미학적인 차원으로까지 끌고가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미지수'에 이르면 짧아서 쉽기 보다는 오히려 짧다는 그 형식 때문에 더 어려워지는 구석이 생긴다. 20분짜리 분량을 느슨하게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1시간짜리 분량을 20분으로 압축한다는 것. 따라서 이 미(美)적이고 지(知)적인 수(秀)작 다큐는 처음 그 낯설음을 따라 걷다보면 의외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거대한 외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내게 가까운 일상 속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한 자락을 끄집어내 보여준다는 것은, 어쩌면 이 시대가 요구하는 다큐의 새로운 지점인지도 모른다.

화영이 가장 원하지만 얻기 힘든 것

어찌 보면 화영(김희애)은 ‘내 남자의 여자’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하는 캐릭터가 아닐까. 사랑해. 보고싶어. 나 사랑해? 화영은 친구 지수(배종옥)의 남편, 준표(김상중)에게 늘 그렇게 말한다. 준표의 표현대로라면 “늘 도도도도도도...” 이렇게 같은 톤의 표현만 하는 지수하고는 전혀 다르다.

어리석게도 준표는 그 화려하고 다채로운 표현법에다, 식물 같이 보이는 지수와 전혀 다른 동물적 육탄공세의 화영에게 정신이 홱 돌아버린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화영과 딴 살림을 차린 준표는 완전히 갈라서기까지 자꾸 고개가 지수에게 돌아간다. 함께 있을 땐 실감하지 못했던 지수의 모습을 떠올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가 그렇게 지겨워했던 일상의 반란이다.

일상과 관계는 힘이 세다
화영과 함께 사는 준표에게 지수는 새벽 3시에 전화를 한다. 편도선염으로 고열에 시달리는 아들 경민을 데리고 병원에 가달라는 것. 준표는 두말 않고 새벽길을 달려간다. 그런데 그 새벽 준표는 깨닫는다. 자신은 공짜로 살았다는 것. 이런 새벽길을 지수는 10년 넘게 해왔다는 것을 알게된다.

준표는 차에서 조수석에 앉아 “목말라”하고 말하는 화영에게서, “그냥 물 줘? 녹차?”하고 지수가 하던 말을 떠올리고, “졸려”하고 말하는 화영에게서, “잠이 얼마나 전염성이 강한 건데 잠을 자”하는 지수를 떠올린다. 카라얀은 큰 소리로 들어야 제 맛이라는 화영에게서 논문 쓰는데 방해된다며 숨죽이며 살던 지수를 생각한다.

밥의 기억은 더 지독하다. 화영이 아침으로 주는 빵이나 인스턴트 음식, 심지어는 설익은 감자에 준표는 불평을 하면서 지수가 해주던 밥이 그립다. 심지어 아들 핑계를 대면서 밥 좀 먹여달라며 찾아간 지수네 집에서 두 그릇이나 비우고 생전 안 하던 말, “저녁 잘 먹었어. 고마워.”하는 진심 어린 말을 건네기까지 한다. 준표에게 지겨움으로 인식되던 일상은 그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 부메랑처럼 자신을 공격한다.

사는 것과 사랑하는 것, 어느 게 어려울까
아이러니하게도 준표가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던 일상을 깨뜨려 친구의 남자를 얻은 화영이 바란 것 역시 거창할 것 없는 일상이다. 화영은 준표가 주는 생활비에 감동해 울먹일 정도로 뭇 여성들이 갖는 일상을 원하는 여자다. 그러나 화영이 원하는 준표와 ‘슈퍼마켓 가기’나 ‘저녁 산보 가기’는 번번이 일상과 관계의 그물망에 걸린다.

슈퍼마켓에서는 은수에게 걸려 공개적으로 창피를 당하고, 저녁 산보 중 들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는 아들 친구에게 딱 걸린다. 그것도 모자라 불륜사실을 알게된 집주인에게 거의 쫓겨나다시피 이사를 하게 된다. 게다가 그녀는 아이를 원하지만 준표는 거기에 진저리를 친다. 모든 여성들이 갖는 일상을 원하는 것이지만 그녀는 거기에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자격도 없다.

일상은 힘이 세다. 사랑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 그리고 어려운 것은 사는 것이다. 그러니 화영은 사랑을 쟁취한 연후에 일상마저 얻으려 애쓴다. 요리학원도 다니고 운전면허 시험도 보고 어울리지 않게 “절약!”을 외치기도 한다. 그런다고 그녀가 평온한 부부의 일상을 얻을 수 있을까. 누군가의 상처를 주고 빼앗은 관계에서 그건 흉내낼 수는 있어도 얻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도 가장 친한 친구에게서 빼앗은 거라면 더더욱. 그래서 그녀는 늘 도망중이다.

지수의 일상에 담은 사랑, 살림의 사랑법
‘내 남자의 여자’에서 가장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건 지수다. 그녀는 남편과 친구를 동시에 잃었다. 그 둘에게 배신을 당했다. 그런데 그 상황을 더 힘들게 하는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지수의 사랑법 때문이다. 그녀의 사랑은 남녀로서의 사랑만이 아니다. 말로 백 번 사랑한다 말하는 것보다 그녀는 평범한 일상 속에 사랑을 담아 전한다. 밥 차리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그 모든 행동이 사랑이다. 흔히 일상이란 이름으로 잘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그래서 그녀가 준표에게 했던 사랑은 그녀의 일상 거의 대부분에 남겨져 있다. 그런 준표가 배신을 한 상황이니 그녀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밥을 하다가, 청소를 하다가, 빨래를 하다가 눈물이 나는 건 살뜰했던 일상이 주는 반격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차츰 회복된다. 아무리 상처를 주었다지만 그것마저 끌어안아 긍정으로 고통을 넘어서려 한다. 살림하는 사람들의 본능이다.

장사를 시작하려는 지수에게 준표는 “살림만 했던 사람이 무슨 장사냐”고 말한다. 지수가 차려준 밥상에서 밥을 허겁지겁 먹는 그가 살림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비극의 시작이다. 사람. 삶. 살림. 이 세 단어는 모두 ‘살다’라는 말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니 가만 놔두면 죽게되는 것을 살리는 것, 그것이 살림이다.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살림’이라는 말은 그저 불평이 아니라, 그 속에 행동으로 담겨지는 사랑을 남자들이 잘 보지 못할 때 하는 주부들의 말이다.

지수의 아버지(송재호)가 하듯, 말없이 정원의 풀을 뽑아주고, “넌 된장국을 정말 잘 끓여!”하며 말해주는 것이 ‘사랑한다’는 백 마디보다 더 값진 것이란 걸 알게 해주는 것이 지수의 사랑법이다. 그녀는 석준(이종원)의 화실을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 “난 밥순이였나봐. 누가 내가 해준 밥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더라.” 그것이 바로 살림하는 사람의 사랑법이다. 바로 이 시대 대부분의 가정을 지키고 있는 주부들이 하고 있는. 그리고 화영이 가장 원하지만 얻기 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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