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팔이>, 갑을 시스템 뇌관 제대로 건드렸다

 

SBS 수목드라마 <용팔이>의 상승세가 심상찮다. 첫 회 시청률 11.6%(닐슨 코리아) 자체가 이례적이다. 그런데 2회 만에 14.1%를 기록했다. 다친 조폭들을 치료해주는 왕진 의사라는 독특한 설정이 의학드라마와 액션 장르를 잘 버무려낼 수 있게 해준 게 주효했다. 첫 회는 영화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강렬한 자동차 액션 신이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용팔이(사진출처:SBS)'

하지만 역시 드라마의 힘은 액션 신 같은 볼거리가 아니라 캐릭터와 이야기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용팔이>의 속물의사 김태현(주원)이라는 캐릭터는 제대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가 그렇게 속물의사가 된 까닭은 결국 이다. 수술의사가 VIP병동으로 가버려 눈앞에서 어머니의 임종을 맞이하게 된 김태현에게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건 의사의 소신이나 의지 같은 휴머니즘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힘이고 돈이다.

 

즉 돈이 있으면 살고 돈이 없으면 죽는 것이 김태현이 목도한 병원의 실상이다. 어머니를 그렇게 보낸 김태현에게는 또한 투석을 지속적으로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여동생이 있다. 어머니에 대한 트라우마는 여동생에게도 이어진다. 그가 돈을 벌기 위해, 또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차가운 한강 물로 뛰어들고, 자신을 개처럼 굴리는 병원의 권력자들 앞에 서슴없이 무릎을 꿇는 이유다.

 

물론 <용팔이>는 극화된 이야기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완전히 허무맹랑한 건 아니다. 실제로 지금의 대형병원은 인술을 펼치는 그런 곳이 더 이상 아니다. 그것은 엄연한 사업체이고 그렇기 때문에 수익을 내려한다. 병과 죽음 앞에 다 똑같은 인간일 뿐이지만, 병원이라는 자본의 기계는 무정하게 차등을 매겨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다. 무연고에 가난한 노동자가 수술을 받지 못해 죽어가는 반면, 부자는 죽음의 문턱에서도 살아 돌아온다. 힘없는 환자는 죽고, 힘 있는 고객은 살아남는 곳. 그것이 지금의 병원 현실이다.

 

그리고 이 <용팔이>가 그리고 있는 한신병원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돈과 권력이 있으면 대접받지만 그렇지 못하면 철저히 을로서 무릎 꿇려지는 사회. <용팔이>는 그래서 병원이라는 공간을 통해 말해지는 갑을 시스템 사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갑은 살고 을은 죽는 그 병원 시스템의 이야기가 아프게도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그래서다.

 

병원에서 사람이 죽고 사는 건 병의 중하고 약함의 문제가 아니라 돈으로 굴러가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라는 <용팔이>의 메시지는 우리 사회의 아픈 구석을 찌른다. 세월호 참사가 어디 사고 그 자체 때문에 벌어진 일인가. 콘트롤 타워 부재와 리더십의 실종, 심지어 위험해도 돈만 벌면 다라는 윤리의식의 부재가 만들어낸 참사가 아니던가. 메르스 공포가 확산됐던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병으로 죽는 일보다 오히려 많아진 게 잘못된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해 죽는 일이 된 현실이다.

 

<용팔이>는 이 아픈 현실의 이야기를 공자님 말씀으로 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속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한 젊은 의사의 처절함을 통해 보여준다. 그들은 용한 돌팔이라는 뜻의 용팔이가 의미하는 것처럼 기술은 용하지만 생명 윤리적으로는 돌팔이. 그리고 이 시스템이 만들어낸 용한 돌팔이들은 병원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기업윤리 따위는 내팽개치고 사적 욕심을 위해 타자의 터전을 짓밟는 기업에도 있고, 국민을 호명하며 사실은 제 잇속 챙기기에 바쁜 일부 정치인들 속에도 있다.

 

<용팔이>에 대해 이토록 뜨거운 반응이 생겨난 것은 그 드라마가 잘 만들어진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건드리고 있는 부조리한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그만큼 뜨겁다는 반증이다. 그 중심에 서 있는 문제는 결국 돈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실이 이제는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현장을 병원이라는 공간을 통해 확인하게 된 것. 돈으로 구획되는 갑을 시스템의 뇌관을 <용팔이>는 제대로 건드렸다



<닥터 이방인>, 권력에 미친 남한, 막연한 괴물 북한

 

이 드라마 참 낯설다. <닥터 이방인>이라는 제목이 주는 복합 장르적 뉘앙스 때문만은 아니다. 제목은 의학드라마와 남북 관계를 엮은 스파이 장르물이 혼재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런 정도의 장르의 혼재는 이제 대중들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닥터 이방인(사진출처:SBS)'

문제는 이 드라마가 드러내고 있는 남한과 북한에 대한 낯선 시선이다. <닥터 이방인>은 명우대 병원이라는 공간을 폐쇄적으로 다룬다. 드라마는 이 명우대 병원을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병원이 수상하다. 우리가 현실에서 보던 병원과 사뭇 다르고, 또 의학드라마가 보여주던 병원과도 다르다.

 

어찌된 일인지 이 병원에서 환자들은 총리(사실은 대통령)를 수술할 팀을 뽑기 위한 테스트용으로 수술대 위에 눕혀진다. 박훈(이종석)이 이끄는 팀과 한재준(박해진)이 이끄는 팀은 끝없는 수술대결을 벌인다. 총리 수술 팀을 뽑기 위한 그 수술에서 환자는 일종의 도구가 되어버린다. 환자 가족들의 반발과 고마움이 표현되지만 그것 역시 큰 틀에서 보면 수술대결의 연장처럼 보여진다.

 

물론 이러한 수술대결이 과거 의학드라마에서 없었던 건 아니다. <하얀거탑>에서 장준혁(김명민)이라는 외과의사는 마치 예술작업을 하듯 수술을 한다. 또 외국에서 온 노민국(차인표)과 수술대결을 벌이기도 한다. 이 미학화된 수술은 인간을 예술의 소재로 만들어내는 불편함을 연출한다. 결국 <하얀거탑>의 이야기는 이 욕망덩어리의 문제적 인간 장준혁의 몰락을 다루었다.

 

하지만 <닥터 이방인>에서 수술 대결을 벌이는 박훈과 한재준의 이야기가 이러한 문제적 인간을 다룰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그 비인간적인 수술대결에 대해 북에서 온 의사 박훈이 수술대결에 대한 불편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드라마는 메시지를 담는다. 즉 돈과 권력욕에 눈먼 남한에 대한 문제의식을 박훈이라는 이방인의 시선으로 그려낸다는 점이다. 여기서 명우대 병원은 우리사회를 상징하는 폐쇄적 공간이 된다.

 

총리가 대통령을 혼수상태에 빠뜨리고 국정을 제 손아귀에 쥐기 위해 북한과 손잡고 특별한 수술 팀을 꾸린다는 <닥터 이방인>의 설정은 결코 현실적이지 않다. 또한 그런 수술팀을 꾸리기 위해 한 병원에서 환자를 대상으로 수술 대결을 벌이는 것도 비현실적이다. 즉 이 드라마는 본격 의학드라마가 아니다. 다만 명우대 병원이라는 공간을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를 상징적으로 끄집어내는 사회극에 가깝다.

 

이처럼 <닥터 이방인>이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극단적이다. 사람을 살리는 병원이 마치 실험실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고 권력을 위해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목적을 담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자본과 권력에 경도된 우리 사회의 문제는 모두가 공감하는 이야기지만 그것을 과도하게 극화해 병원 수술대마저 경합의 장으로 만들어버리는 이야기는 낯설음을 넘어서 불편함을 준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가 다루는 북한에 대한 이미지는 어떨까. 김대중 정권 이후에 <쉬리><공동경비구역 JSA>, <웰컴 투 동막골> 같은 남북한의 화해를 다루는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최근 들어 북한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막연한 살상용 무기처럼 그려지고 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용의자> 같은 영화를 보라. 남파 공작원이나 탈북자는 무시무시한 살인기술을 가진 존재들로 다뤄진다.

 

흥미로운 건 이 살인기술자(?)들이 남한에서 마치 슈퍼히어로처럼 활약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남한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막연한 두려움의 존재로서의 북한 이미지를 가져와 해소시키려는 욕망이 만들어낸 것이다. 남한으로 들어온 이 북한의 슈퍼히어로들은 우리 사회의 문제와 비리들을 해결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이것은 <닥터 이방인>도 마찬가지다. 박훈이라는 이방인은 초인적인 외과수술 능력으로 우리사회의 병폐들에 메스를 대는 슈퍼히어로다.

 

<닥터 이방인>이 담아내는 남북한의 이미지는 양측이 모두 낯설다. 남한은 권력에 미쳐 병원의 환자들마저 도구화하고 수단화하는 비정한 공간이고, 북한은 막연한 두려움이 만들어내는 괴물과 슈퍼히어로를 양산하는 공간이다. 물론 이 극화된 이야기가 남북으로 갈라진 불안한 우리 사회가 가진 두려움과 권력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담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이야기가 너무 극화되다 보면 그 자체로 등장인물조차 메시지를 위한 도구가 되는 느낌을 주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닥터 이방인>의 낯설음은 그 이야기가 비현실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과도한 극화가 인물들을 도구화하는 듯한 불편함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마치 박훈이 이건 수술대결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고 강변하면서도 결국은 그 수술대결의 주인공이 되는 것처럼.

<야왕>, 몸 팔아야 생존하는 하류의 지옥도

 

19금은 드라마에 있어서는 큰 약점일 수밖에 없다. 보편적인 시청층을 가져갈 수밖에 없는 TV라는 매체에 어떤 좁은 문을 설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야왕>은 하지만 초반에 굳이 19금을 달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남자 주인공인 하류(권상우)가 다해(수애)를 공부시키고 취직시키기 위해 몸뚱어리 하나로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성들에게 몸을 파는 호스트 일뿐이다. <야왕>은 결국 19금 드라마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호스트라는 하류의 직업을 그대로 다루었다. 그것만큼 이 신자유주의의 지옥도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야왕'(사진출처:SBS)

하류(이름부터가 상류사회와 대비되는 하류인생을 의미한다)는 지중해라는 호스트바에서 ‘등신’이라 불린다. 여성들 앞에서 웃통을 벗고 잘 빠진 몸을 보여줌으로써(신 같은 등 근육) 여성들의 지갑을 열게 만든다. 하지만 하류는 그 별칭 그대로 등신이다. 다해와 딸 은별(박민하)을 위해 결국 웃음을 팔고 몸을 파는 처지. 심지어 그는 다해가 우발적으로 벌인 의붓아버지의 살인을 자신이 뒤집어쓰려고까지 한 인물이다. 게다가 다해가 유학을 보내달라고 하자 어렵게 끊어버린 호스트 일을 다시 시작한다. 등신이 이런 등신이 없다.

 

없는 자들이 신자유주의의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유일한 자산인 몸뚱어리를 팔아야 한다는 것은 하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야왕>이 하류라는 남자 신파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사회적인 맥락을 찾아내는 건 그 교차점으로서 다해의 성공을 위한 안간힘 역시 하류와 다를 바 없는 삶으로 그려지기 때문일 게다. 하류가 유학 보낸 다해에게 부칠 삼백만 원을 벌기 위해 지금껏 피해왔던 진짜 호스트질을 하는 장면은, 잔인하게도 다해가 미국 유학에서 의도적으로 접근한 백학그룹의 장남 백도훈(유노윤호)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과 교차 편집되어 보여진다.

 

하류가 다해를 위해 몸을 팔고 나와 받은 돈 삼백만 원짜리 수표를 일그러뜨리며 눈물을 터트리는 그 순간 다해는 하류를 버리고 백도훈의 품에 안긴다. 이 두 장면은 하류나 다해나 똑같이 몸을 팔아야 살아남는 사회의 단면을 잡아내지만 그 풍경은 사뭇 다르게 그려진다. 즉 하류는 말 그대로 몸 파는 남창의 모습을 담는 반면, 다해는 무수한 멜로드라마에서나 나올 왕자님과 사랑에 빠진 신데렐라의 모습을 담는다(다해가 처음 백도훈을 지하철에서 만나게 된 것이 그 벗겨진 구두 때문이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하류가 보여주는 남창의 모습은 이 사회가 가진 처절한 현실의 맨얼굴을 보여주는 셈이다. 반면 다해는 사랑이나 성공이라는 가치로 포장되어 겉으로는 심지어 로맨틱하게 보여지는 그 행위가 사실은 저 남창 짓을 하는 하류보다도 못하다는 걸 보여준다. 고전적인 이야기지만 하류는 몸을 팔았지만 영혼까지는 팔지 않았다. 반면 다해는 성공과 욕망을 위해 남편과 아이까지 저버리는 영혼을 파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몸을 파는 행위와 영혼을 파는 행위. 이것을 저울로 달 수 있다면 어떤 것이 더 무거운 죄일까.

 

하류라는 캐릭터가 신자유주의 시대 스펙 없이는 취업조차 어려운 청춘의 모습과 저 개발시대에 가족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삶 따위는 팽개쳐버린 우리네 가장들의 모습을 동시에 담고 있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개발시대에 우리 사회가 가장들을 희생시켰던 것처럼 이제 그렇게 성장된 나라는 신자유주의라는 기치 아래 우리네 젊은이들을 희생시키고 있다. 몸뿐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팔아야 겨우겨우 생존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살풍경. <야왕>이 하류와 다해를 통해 보여주는 건 그 살풍경이 만들어내는 지옥도다.

<최후의 제국>이 대선주자들에게 건네는 말

 

도대체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울렸을까. SBS 창사 특집 다큐멘터리 <최후의 제국>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단 몇 분도 필요하지 않았다. 남태평양 솔로몬 제도의 아주 작은 섬 아누타에서 촬영을 마치고 떠나는 제작진들을 향해 원주민들이 통곡을 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우리 주변의 누가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도시인들에게 그저 이별이 아쉬워 통곡하는 원주민들의 모습은 당혹스러움을 넘어 충격에 가까웠다.

 

'최후의 제국'(사진출처:SBS)

아마도 제작진도, 그 장면을 보는 시청자들과 똑같은 마음이었을 게다. 그들은 처음에는 멍해졌다가 차츰 그 통곡이 그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진심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가슴이 뜨거워졌을 것이다. 어느새 그 울림이 닿은 제작진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그 장면을 본 시청자도 마찬가지의 감동을 느끼게 되었다. 어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한 말이 오고갔던 것도 아닌 그저 진심을 담은 마음 하나만으로 그들은 뜨거운 인간애를 보여주었다.

 

<최후의 제국>. 영어 제목은 <The Last Capitalism>으로 ‘최후의 자본주의’를 뜻한다. 즉 자본주의의 위기를 다루는 이 다큐멘터리는 왜 그 멀고도 먼 외딴 섬 아누타까지 찾아갔을까. 그것은 아누타 섬이 자본주의에 의해 돈으로 모든 가치가 평가되는 세상과 정반대되는 가치를 보여주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제작진 앞에서 펑펑 눈물을 흘리는 그들이 보여준 것은 같은 인간으로서의 깊은 공감이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그 공감의 가치는 서로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존의 가치로 이어지고 있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자본주의의 세계는 아누타 섬과는 정반대의 디스토피아를 보여준다. 돈으로 가치 매겨지는 세상은 자신의 몸매 관리를 위해 대리 수유모를 사는 부자 엄마와 당장 벌이를 하기 위해 자신의 자식 대신 남의 대리 수유모가 되는 가난한 엄마를 이어주었다. 급격한 자본의 물결이 몰아닥쳐 신흥 부자계급이 생겨난 데다, 멜라민 분유 파동으로 모유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난 중국의 새로운 풍경이다. <최후의 제국>은 이 풍경에 대해 묻는다. 과연 돈은 모성도 대체할 수 있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미국 오하이오주의 한 고등학교는 수업에 빠지지 않고 숙제를 잘 해온 학생들에게 돈을 준다. 제 아무리 청소년 범죄를 줄이고 고등학교 졸업장을 주려는 학교의 고육지책이라고는 해도 이런 교육은 결국 학생들에게 돈이 최고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될 것이다. 이 가치의 본말이 전도된 교육은 과연 이 학생들이 살아갈 세상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그 결과는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이라는 미국이 34개 OECD 국가 중 빈곤율 4위라는 충격적인 보고에서 드러난다. 다큐멘터리는 플로리다주의 모텔에서 살아가는 굶는 아이들을 조명하며 이 아이들이 왜 이런 불행에 처하게 됐는지를 꼬집는다.

 

아마도 그토록 멀리 떨어진 아누타 같은 외딴 섬까지 찾아가서야 비로소 자본이 아닌 인간을 찾아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세계의 불행을 보여주는 대목일 것이다. 1%의 부와 99%의 가난. 미국에서 월가를 점령했던 그 유명한 “우리가 99%다”라는 구호가 생각나는 지점이다. 이 전 지구적인 위기 상황을 만들어낸 자본주의의 불편한 풍경들은 우리로 하여금 경쟁과 이기심보다 중요한 공존의 가치를 떠올리게 만든다. 돈이라는 번쩍거리는 괴물에 가려 바라보지 않던 그 불편한 진실을 우리 눈앞에 들춰냄으로써 급기야 공감하게 만드는 <최후의 제국>은 그래서 그 어떤 거창한 정상들의 회의나 연설보다 더 우리를 울리는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대한민국이라는 우리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양극화가 극에 달하고 있는 지금, 저 미국의 풍경이 어찌 우리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선에 즈음하여 모든 대선 주자들이 경제민주화를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이것이 단순한 수사에 머무르면 안 될 것이다. <최후의 제국>은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된 가치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만들고 또 실천에 옮기게 만드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돈에 미친 세상에 던지는 다큐의 일침. 이것이 <최후의 제국>이라는 명품다큐가 보여주는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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