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트콤, 왜 연예대상에서 상을 받아야 할까

시트콤은 과연 예능인가 드라마인가. 코미디라는 용어가 들어가기 때문일까. MBC는 시트콤을 예능으로 분류하고 있다. 따라서 연말 시상식에서는 껄끄러운 장면들이 연출된다.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2007년 무한도전 팀과 공동으로 연예대상을 수상한 이순재. 그는 '남의 잔치에서 상 받는 기분'이라며 어색한 수상소감을 남겼다. 그것은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올 한 해 '무한도전'과 '세바퀴', '우리 결혼했어요', '황금어장', '놀러와'를 빼고는 그다지 선전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일밤'의 침몰과 '개그야'의 폐지의 여파가 컸기 때문일까.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지붕 뚫고 하이킥'과 '태희혜고지현이' 같은 시트콤이었다. 개그맨 김경진과 최다니엘이 남자신인상을 공동수상했고, 최우수상은 아예 '지붕 뚫고 하이킥'의 정보석과 '태희혜교지현이'의 박미선이 수상했다.

그런데 시트콤 출연자들의 수상은 어딘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물론 시트콤의 성격상 많은 웃음을 준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기의 연장선이다. 따라서 연기대상이 아닌 연예대상에서의 수상은 어색할 수밖에 없다. 수상에 있어서 감회나 긴장감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연예대상의 수상은 웃음이나 재미를 많이 선사했다는 측면에서 예능인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지만, 연기로서 수상을 원하는 연기자들에게는 잘 맞지 않는 옷처럼 오히려 껄끄러울 수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 걸까. 애초에 시트콤이 예능으로 분류되게 된 데는 시트콤에 대한 평가절하가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시트콤은 드라마보다 한 단계 떨어지는 어떤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고, 이것은 시트콤이 발전하는데도 족쇄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많은 유능한 시트콤 출신 작가들이 지금도 드라마쪽으로 전향하고 있는 데 그 이유는 바로 이런 시트콤에 대한 낮은 편견 때문이라는 것이다.

잘 만든 시트콤 한 편이 드라마보다 못한 것이 뭐가 있을까. 또 시트콤에서의 연기가 정극에서의 연기와 다를 게 뭐가 있을까. 이순재나 김자옥이 보여주는 로맨스 그레이나 정보석의 망가짐이 웃음을 목적으로 한다고 그 명품연기가 사라질까. 왜 이들의 당당한 연기에 대해 제대로 시상해주고 제대로 축하해주지 못할까.

시상식의 목적은 한 해 동안 얻은 결과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목적이 더 강하다. 시트콤에서 연기한 것을 연기대상이 아닌 연예대상에서 상을 주는 것은 마치 남의 밥상에서 밥을 얻어먹는 것처럼 결과에 대한 보상도 앞으로의 일에 대한 격려도 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시급한 건 시트콤에 대한 정체성의 재고이다. 시트콤은 그 장르적 특성과 인력구성으로 볼 때 드라마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이것은 좋은 배우들과 능력 있는 작가들이 시트콤에 진출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일 것이다.

'빵꾸똥꾸'에 깃든 사회, 그 의미

난데없는 '빵꾸똥꾸(?)'로 사회가 시끌시끌하다. MBC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악동인 해리(진지희)가 입에 달고 다니는 이 '빵꾸똥꾸'는 올해의 유행어가 될 만큼 장안에 화제가 됐다. 그런데 지난 22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이러한 용어가 폭력적이고, 필요이상 반복적으로 사용됐다며 해당 프로그램에 권고 조치를 했다. 도대체 왜 이 같은 용어에 대해 이처럼 상반된 반응이 나온 걸까.

먼저 사전에도 없는 '빵꾸똥꾸'가 무얼 의미하는 지부터 정확히 알아야 할 것 같다. 시트콤의 내용에 따르면 그 유래는 해리가 어렸을 때 말을 좀 늦게 하게 됐는데, 할아버지인 이순재가 방귀를 뀌는 소리를 듣고는 첫 마디를 '빵꾸똥꾸'라고 말했다는 데서 비롯된 것. 그 후로 뭔가 심사가 뒤틀리는 것(행위나 사람 모두 통틀어)을 대하면 해리는 이 말이 습관적으로 터져 나온다. '빵꾸똥꾸'는 적어도 해리에게는 자신만이 가진 욕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빵꾸똥꾸'를 외치는 해리의 모습은 그래서 거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어쨌든 욕의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욕은 그 집에 새로 들어와 식모 생활을 어렵게 하며 살아가는 세경과 신애 자매에게 집중적으로 쏟아진다. '빵꾸똥꾸'는 해리가 처음 신애의 뺨을 올려 부쳤을 때 느껴지던 그 충격처럼 다가왔던 게 사실이다. 어린 아이가 어쩌면 저렇게 독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그런 충격은 조만간 사라져갔다. 그리고 차츰 독하기만 한 아이라고 여겨졌던 해리는 역시 아이다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빵꾸똥꾸'를 외치면서도 하루만 신애가 보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하고, 신애가 쓰는 동화를 읽기 위해 신애가 하는 일을 도와주며 빨리 쓰라고 욕을 해대는 해리는 영락없는 아이의 모습이다. 그러니 이 아이가 이렇게 욕을 입에 달고 사는 모습에서 이제는 불쌍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바로 이 지점부터 해리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비호감에서 호감으로 바뀌었다. 해리를 이해하게 되는 지점에서 해리의 '빵꾸똥꾸'가 의미하는 것이 진짜 무엇인지도 드러났기 때문이다. 물론 어린 아이가 입에 담는 욕이 보기 좋을 수는 없다. 그런데 이 보기 좋지 않은 것, 그것은 사실 우리가 인정하기 싫은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아이가 무슨 죄가 있을까. 아이마저 욕을 하게 만드는 환경이 문제가 아닐까.

아이의 입을 통해 듣게 되는 '빵꾸똥꾸'는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놓은 사회의 비뚤어진 부분을 거울처럼 비춰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해리가 '빵꾸똥꾸'를 외칠 때마다 이제는 심지어 묘한 카타르시스까지 느끼게 되는 것은 욕이 가진 언어적인 기능과 거의 궤를 같이 한다. 욕과 배설의 즐거움이 같다는 것은 어떤 억압을 대리해 풀어주는 그 기능적 유사함 때문이다.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을 때, 그것을 지적하는 촌철살인의 욕은 심지어 문학적으로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빵꾸똥꾸'가 문학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용어는 풍자를 웃음의 재료로 삼는 시트콤으로서는 꽤 우회적인 괜찮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빵꾸똥꾸'를 듣고 빵 터졌던 분들은 그 이유가 이 말이 가진 표피적인 의미 이상의 뉘앙스를 순간 느꼈고 또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아이들이 무비판적으로 해리의 행동을 따라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아이들의 리얼한 모습이라는 것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지붕 뚫고 하이킥'은 정직하게 그런 변화해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변화 혹은 아이들의 성장을 희망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애에서 사랑으로 넘어가는 그 설렘의 순간

‘지붕 뚫고 하이킥’의 멜로 라인은 꽤 복잡한 편이다. 황정음과 이지훈(최다니엘)은 서로 사사건건 다투고 싸우면서 멜로가 이어진다. 똑똑하고 능력 있는 레지던트 3년차 이지훈과, 서운대라는 자격지심에 늘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황정음은 외적으로는 잘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이지만, 바로 이 다르다는 점 때문에 서로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황정음은 이지훈 앞에서 늘 굴욕적인 상황을 연출하는데, 술을 마시고 떡실신녀가 된다거나, 서운대생이라는 게 들통 나 그것을 감추려고 생고생을 하기도 한다. 그녀는 좀 더 완벽해지고 싶어 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지훈은 정반대다. 완벽하다 못해 건조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그는 오히려 빈틈을 많이 보이는 황정음에게서 인간적인 매력을 느낀다. 그들은 서로에게 부재한 부분을 상대방을 통해 찾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관계가 발전해 결국 키스라는 사건(?)으로 가는 과정에 등장하는 술이라는 매개체다. 술은 황정음이 이지훈에게 마구 들이대게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하는데, 그녀는 그것이 술 때문이라며 핑계를 댄다. 이지훈은 또 그럴 때마다 황정음을 챙겨주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 역시 그녀가 술에 취했기 때문이라는 변명을 한다. 저게 멜로일까 아닐까를 생각하게 만드는 이런 상황은 흔한 멜로가 갖는 직접적인 사랑고백 방식의 상투성을 살짝 벗어나게 해준다. 그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따뜻한 마음 정도로 처음에는 인식되다가 차츰 그 인간애가 사랑으로 변해가는 식이다.

이것은 이지훈과 신세경이 보여주는 멜로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 관계에서 이지훈은 신세경의 어려운 삶을 뒤에서 묵묵히 도와주는 키다리 아저씨 같은 인물로 그려지는데, 신세경의 휴대폰을 사주고 요금을 대신 내준다거나, 그녀의 미래를 위해 공부를 계속 하라고 조언해주고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모습은 따뜻한 인간의 순수한 호의로 다가온다. 그런 호의에 신세경의 마음은 흔들리게 되고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손수 짠 목도리 같은 정성으로 보여준다. 즉 이 멜로에서도 그저 말이나 몸으로 전해지는 직접적인 남녀 간의 사랑표현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이 사람을 위하는 인간애의 모습이 휴대폰이나 목도리 같은 매개물로 전해질 뿐이다.

한편 황정음과 신세경, 그리고 정준혁(윤시윤)이 엮어가는 멜로는 실로 그 전파되는 방식이 흥미롭다. 신세경을 좋아하고 그래서 그녀의 학업을 도와주려는 정준혁은 자신이 그럴 만큼 성적이 좋지 않다는 것 때문에, 성적을 올리고 싶어하고 황정음에게 도움을 청한다. 황정음은 자신을 누나라 부르지 않고 실제로 자신의 보디가드 역할까지 해주는 정준혁을 내심 마음에 둔다. 그런 마음을 전하는 방식으로 그녀는 잠까지 설쳐가며 정준혁의 시험을 도와준다. 그렇게 해서 성적이 올라가자 정준혁은 신세경을 찾아가 그걸 자랑하고, 황정음은 그 사실을 알게 되고 어딘지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함을 느낀다.

즉 이 세 사람 사이에 매개로 끼는 것은 바로 공부가 된다. 마치 먹이사슬처럼 연결된 이 관계 속에서 그것이 흔한 멜로가 보여주는 질투와 집착으로 이어지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서로가 서로의 학업을 도와주는 형식으로 이들의 사랑과 정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황정음, 신세경, 이지훈, 정준혁이 보여주는 멜로는 직접적이지 않고 그 사이에 어떤 매개물을 넣음으로써 세련되면서도 훈훈한 인상을 주게 된다. 그 매개물은 때론 술이 되기도 하고, 때론 휴대폰이나 목도리 같은 물질적인 것이 되기도 하며, 때론 학업을 도와주는 식의 무형적인 도움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남녀 간의 사랑이라기보다는 한 인간 대 인간의 정으로 보인다.

이 시트콤이 따뜻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렇게 네 사람이 엮어가는 멜로가 인간의 정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마음. 그래서 그 마음이 오고가는 것을 볼 때, 보는 이의 마음 또한 흡족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이 사람을 처음 사랑하게 되는 과정에서, 어떤 거리두기가 가능할 때 유지되는 것이다. 보편적인 인간애에서 한 사람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연결되어가는 과정, 이것이 우리가 삶 속에서 알아가는 사랑의 과정이 아닐까. ‘지붕 뚫고 하이킥’의 멜로는 바로 그 지점, 거리두기가 가능한 인간애의 차원에서, 이제 막 거리가 좁혀져 한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넘어가는 그 곳의 설렘과 떨림을 담아내고 있다.

 ‘지붕 뚫고...’, 시트콤으로 드라마의 한계를 넘다

도대체 이게 시트콤이 맞아? 우리는 아마도 시트콤을 오해해도 단단히 오해했었나 보다. ‘지붕 뚫고 하이킥’을 보다보면 이것이 웬만한 드라마보다 훨씬 재미있고 또 감동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저 웃기기만 하는 것이 시트콤이라고 생각했다면, 이 시트콤은 웃음 위에 진한 페이소스를 얹어준다는 점에서 우리의 통념을 깨뜨린다. 게다가 이 가볍기만 할 것 같은 시트콤은, 그 경쾌함 위에 실로 진중한 무게가 느껴지는 의미를 전혀 어색하지 않게 척척 붙여낸다. 자극을 걷어내고 진실된 웃음과 의미를 붙여, 보는 이들을 유쾌하게 만드는 이 시트콤이 보여주는 자세가, 때론 막장으로 치닫는 작금의 드라마들에게 전하는 말은 그래서 결코 작지 않다.

이른바 막장 드라마가 가장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인간을 마치 인형처럼 마구 다룬다는 점이다. 이해할 수 없는 자극적인 상황 속에 인물을 몰아넣고 마치 그 불행을 즐기듯 들여다보는 그 태도는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불쾌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인물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여겨지는 순간, 어이없게도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것은 실로 시청자의 마음을 마음껏 갖고 놀겠다는 작가의 만행에 가깝다. 이 캐릭터에 대한 태도는 바로 작가가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와 맥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작가가 시청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에둘러 말해준다.

‘지붕 뚫고 하이킥’이 다른 점은 바로 이 인물들에 대한 작가와 연출자의 시선이 남다르다는 점이다. 이순재는 칠순의 나이에도 낯간지러운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지만(그래서 때론 엄청난 이벤트를 벌이기도 한다) 그것이 주책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 나이에도 여전히 활활 타오르는 연애감정에 시청자들은 응원의 마음을 갖게 된다. 세경과 신애의 상황은 어찌 보면 지나친 신파적인 설정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것이 단지 눈물샘 자극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혐의를 벗어난다. 우리는 꿋꿋이 살아가는 그들을 도와주는 이웃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현대인들의 바쁜 삶 속에 잊고 살아온 인간애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얻는다. 고개 숙인 아버지, 아들 앞에서는 그래도 당당한 모습을 보이려하는 아버지 정보석과, 그렇지만 힘없는 아버지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는 아들 준혁(윤시윤) 사이에는 끈끈한 부자 간의 정이 느껴진다.

이러한 인물에 대한 애정은 “빵꾸똥꾸”를 연발하던 해리(진지희)에게서 극적으로 보여진다. 해리는 자기 물건에 손을 댔다며 신애의 뺨을 올려부치는 그 순간에 이 시트콤에서 가장 자극적인 캐릭터로 주목되었다. ‘아내의 유혹’의 패러디로 해리가 민소희로 변신할 수 있는 것은 이 어린 아이가 가진 캐릭터가 그만큼 독한 악역이라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이 해리가 점차 어쩐지 불쌍한 아이라는 느낌을 주기 시작하고, 때로는 역시 ‘아이는 아이’라는 확신을 주기 시작한다. 신애가 쓰는 동화를 읽기 위해 갖은 일을 대신하면서 빨리 동화를 쓰라고 욕을 해대는 모습이나, 신애가 놀러간 하룻밤 내내 그 허전함을 참지 못하고 다시 만나는 순간 신애에게 달려가는 그 모습은 이 아이가 겉으로는 욕을 해대도 마음은 늘 애정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캐릭터에 대한 애정은 이 시트콤의 멜로 라인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시트콤은 드러내놓고 애정을 과시하는 이순재-김자옥을 빼고는 아직 아무런 멜로 라인이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세경과 지훈(최다니엘), 세경과 준혁(윤시윤), 그리고 지훈과 정음, 준혁과 정음의 멜로 라인을 기대하게 된다. 지훈은 따뜻하게 세경의 어려운 점을 몸소 행동으로 챙겨주고, 준혁 역시 세경을 위해 보이지 않게 그녀를 도와준다. 반면 지훈과 정음, 준혁과 정음은 서로 툭탁 거리며 보기만 하면 으르렁대지만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어떤 애정라인이 생겨날 것 같은 기대를 준다.

그런데 실제로 멜로 라인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기대감만 부풀뿐이다. 이것은 중요한 지점이다. 이들은 멜로의 기대감을 높이는 관계들이 중첩되어 있지만, 사실은 다만 멜로만을 얘기하고 있지 않다. 거기에는 누가 누구를 도와주든 그 바탕에 남녀관계를 넘어선 인간 대 인간 간의 따뜻한 애정이 깔려 있다. 이 휴머니즘 속에서 이들의 멜로 관계는 단순 사랑 타령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다. 실로 막장드라마들이 쉽게 애정에 몰두하고, 그 애정의 반역과 불륜의 파탄을 자극으로 몰아가는 것과는 대조적인 양상이다.

‘지붕 뚫고 하이킥’은 이미 단순한 시트콤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그것은 이 시트콤이 우리에게 주는 웃음의 다양함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시트콤은 정통 시트콤이 주는 폭소를 터뜨리게 하면서도, 크진 않아도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 미소를 짓게 만드는 작품이다. 그러니 폭소에서 미소까지, 풍자가 주는 서늘함에서 인간애를 통해 보여주는 감동까지 주는 이 작품을 어찌 그저 시트콤이라는 수식어로 한정할 수 있을까. 시트콤이라는 장르가 오히려 드라마 바깥에 위치해 있어, 드라마가 가진 한계를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 그 곳이 이 시트콤이 서 있는 자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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