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트콤, 멀리서 보면 즐겁지만 가까이서 보면 슬프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오현경과 정보석이 눈밭에서 격투를 벌이는 장면을 멀리서 바라보는 노부부는 ‘러브스토리’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우리도 젊었을 땐 저랬었지”하며 흐뭇해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자막.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찰리 채플린.’ 이 말은 지금 희비극 사이에서 힘겨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 ‘지붕 뚫고 하이킥’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준다. 희극과 비극은 멀리서 보느냐 가까이서 보느냐에 달린 것일 뿐, 서로 다른 삶의 현실을 다루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지붕 뚫고 하이킥’이 시트콤이냐 드라마냐는 정체성 논란이 나오는 것은 아무래도 시트콤은 역시 코미디여야 한다는 대중들의 바람이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붕 뚫고 하이킥’은 초반의 코미디 분위기에서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사각 멜로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서로를 사랑하게 된 정음과 지훈(최다니엘), 지훈을 바라보는 세경, 그리고 그런 세경을 바라보는 준혁(윤시윤)의 엇갈린 마음이 보는 이를 안타깝게 만들고 있다.

통상 두 가지 에피소드를 병치하는 스토리 구조를 가지고 있던 ‘지붕 뚫고 하이킥’은 이제 하나는 전형적인 코미디를,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이들의 멜로를 병치시키곤 한다. 이 희비극의 교차가 가져오는 효과는 분명히 있다. 그것은 적절한 균형만 맞춰진다면 희극과 비극 양쪽을 모두 강화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웃음 속에서 발견하는 눈물, 눈물 속에서 찾아지는 웃음은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균형을 맞췄을 때의 이야기다. 이 시트콤의 멜로가 코미디와 이질적이지 않게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그 전개에 있어서 적당한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다. 초반부 세경에게 마음을 전하는 준혁은 멜로 특유의 가슴앓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가르쳐주기 위해 저 스스로 안하던 공부를 하는 그 모습을 통해서였다. 정음과 지훈의 사랑은 불꽃처럼 타오른 것이 아니라, 늘 툭탁거리며 싸우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유일하게 진짜 멜로의 틀로 사랑을 보여준 이는 세경이었다. 그녀는 이 시트콤에서 정극을 연기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하지만 멜로가 무르익으면서 지훈에 의해 상처를 입는 세경과, 그런 세경을 점점 안타깝게 바라보는 준혁이 전면에 드러나면서 이 시트콤은 때론 웃음보다 눈물을 더 많이 보여주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쿨한 관계가 조금씩 사라지고 인물들이 서로 끈끈해지기 시작하자, 이제 시트콤으로서의 거리두기는 가끔씩 그 선을 넘는다. 채플린이 말한 대로 멀리서 바라봐야 할 시선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들의 마음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한 것.

이것은 시트콤의 새로운 실험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간 시트콤은 드라마가 아닌 예능의 하나로 치부되며 폄하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이 시트콤의 코미디와 드라마를 넘나드는 희비극의 형식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러한 편견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처럼 코미디에 멜로가 깊숙이 자리하게 된 데는 더 단순한 이유가 자리하고 있다. 한마디로 멜로가 코미디보다 쉽다는 것이다.

정음과 지훈, 세경과 준혁의 안타까운 멜로의 에피소드들을 보면 기본적인 구도의 틀이 완성된 위에서 계속 변주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도리라는 오브제는 이 멜로가 생겨나고 깊어져가는 과정에서 꽤 여러 번 사용되었고, 무심한 지훈과 그에게 상처받는 세경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준혁의 에피소드도 계속 반복되었다. 이것은 멜로의 틀이다. 구도의 완성, 상황의 반복을 통한 감정의 몰입.

하지만 매번 새로운 아이디어로 웃음을 만들어내야 하는 코미디는 상황이 다르다. 그것은 전적으로 아이디어에 의해 좌우되는 것들이다. 게다가 매일 방영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이 시트콤이 짊어져야 하는 짐의 무게를 가늠하게 만든다. 매일 같이 새로운 상황의 웃음 코드를 뽑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러니 멜로는 물론 이 시트콤의 별미 같은 맛을 주지만, 또한 어쩌면 이 시트콤 제작자들에게는 겨우 숨 돌릴 수 있는 여지를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많은 드라마 작가들은 말한다. 사실 웃음을 만드는 것이 눈물을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그래서 시트콤에 대한 낮은 시선을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지붕 뚫고 하이킥’이 가진 희비극이 말해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웃음은 멜로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 시트콤은 드라마와 비교해 절대 쉽거나 가치가 떨어지는 작업이 아니다. 드라마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제작비로 매일 편성되어 지옥 같은 제작의 고통을 감내하게 만드는 그 시선에도, 마치 시트콤을 하나의 그저 그런 쉬운 작업으로 바라보는 그 낮은 시선이 들어가 있는 건 아닐까.

황정음의 신종 플루 감염으로 '지붕 뚫고 하이킥'이 한 주를 스페셜로 대체한다고 한다. 물론 이 시트콤의 한 팬으로서 한 주의 안타까움이 있지만 어쩌면 이것은 열악한 제작여건 속에서도 끝없이 달리기만을 종용받아온 이 시트콤에 작은 재충전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나의 시트콤이 드라마 이상의 대중적 지지도와 완성도를 가지고 있는 ‘지붕 뚫고 하이킥’. 그 희비극 속에 담겨진 고충을 이제는 이해해야할 때도 온 것 같다.

오현경과 정보석이 사투를 벌이는 그 장면을 멀리서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음 짓는 노부부처럼 우리는 어쩌면 전쟁 같은 제작현장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은 채,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며 편안하게 웃음 짓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채플린의 말처럼, 시트콤의 제작여건도 마찬가지다. 멀리서 보면 즐겁게만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슬픈 현실이 보인다.

'지붕킥'의 황정음과 신세경

술에 만취해 한 여인은 끊임없이 웃고, 한 여인은 끊임없이 울어댄다. 웃는 여인은 신세경이고 우는 여인은 황정음. '지붕 뚫고 하이킥'의 핵심적인 두 캐릭터들이다. 그런데 왜 똑같은 술을 먹고 신세경은 웃고 황정음은 우는 것일까. 여기에는 이 시트콤이 가진 독특한 재미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알다시피 술이란 놈은 참으로 요상한 물건이다. 평상시에 억눌렸던 감정을 거침없이 밖으로 끄집어내는 이 술을 통해서 웃고 있는 신세경과 울고 있는 황정음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 신세경이라는 캐릭터는 시트콤 속에서 우울한 상황에 놓여진 존재로서 그려진다. 아버지가 부재중인 상황에 동생 뒷바라지를 위해 이순재네 집에서 식모로 살아가는 처지. 그러니 웃을 일이 뭐가 있을까.

한편 황정음은 신세경과 비교해 늘 밝고 당당한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실제 속은 역시 그다지 좋지만은 않다. 서운대 출신이라는 서러움과 돈이 없어 남자친구에게 늘 얻어먹는다는 자괴감 속에서도 늘 고개를 빳빳이 들고는 있지만 말이다. 그러니 그녀의 당당함 속에는 숨겨진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슬픔이 있다. 그러고 보면 황정음이나 신세경은 내면적으로는 비슷한 처지에 서 있다고 보여진다. 다만 그 힘겨움의 강도가 다르고, 그것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런데 이 황정음의 슬픔과 신세경의 슬픔을 다루는 '지붕 뚫고 하이킥'의 시각이 다르다. 황정음은 슬픔을 웃음으로 전화시킨다. 그녀가 떡실신녀가 되고, 서운대라는 사실 때문에 버스의 서운대 광고에 들어간 자신의 얼굴에 낙서를 해대는 상황은 그녀에게는 고통의 순간이지만 그것이 시트콤의 과장된 연출과 연결될 때, 보는 이들은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삐에로가 슬픈 얼굴을 하고 있어 웃음을 터뜨리게 하듯이.

반면 신세경은 슬픔을 슬픔 그대로 그려낸다. 이것은 시트콤의 시각이 아니라 정극의 시각이다. 물론 이 '지붕 뚫고 하이킥'의 본질은 시트콤이기 때문에 신세경을 다루는 시각이 모두 정극의 그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를 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다른 어느 캐릭터들보다도 진지한 편이다. 따라서 신세경의 캐릭터는 시트콤과 정극을 오간다. 동생을 위해 샌드위치 많이 먹기 대회에 나가는 신세경이 우스우면서도 슬픈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붕 뚫고 하이킥'이 여타의 시트콤들과 달리 웃음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감동까지 선사하는 것은 황정음과 신세경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극적으로 보여지듯이, 시트콤의 시각과 정극의 시각을 절묘하게 넘나드는 그 자유자재의 연출력이 대중들에게 어필했기 때문이다. 웃음은 이 시트콤의 재미를 극대화시켜주고, 감동은 거기에 어떤 의미까지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이 두 코드는 상승효과를 가져온다.

마지막으로 황정음과 신세경을 통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지붕 뚫고 하이킥'만의 매력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웃을 때 눈물을 주기도 하고, 그들이 울 때 웃음을 주기도 하는 그 반어법 같은 이 시트콤만의 쿨한 자세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고, 우는 게 우는 게 아닐 때, 보는 이들은 그 웃음의 과장됨과 눈물의 질척거림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한 웃음과 감동의 강도도 세진다. 거꾸로 말해 웃기기 위해 웃기는 것과 울리기 위해 울리는 것은 뻔하게 여겨진다는 말이다. 즉 이런 상반된 자세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세련되게 웃음과 감동을 그려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황정음과 신세경이 보석 같은 캐릭터인 것은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이다. 이 두 캐릭터는 실로 시청자들이 이 시트콤을 보며 웃고 울게 되는 그 핵심적인 재미를 만들어내는 장본인들이다. 이렇게 잘 운용된 시트콤의 캐릭터는 그것을 연기하는 연기자들의 이미지까지 제고시킨다. 황정음과 신세경의 주가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은 이 시트콤의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연기자들에게도 잘 만들어진 시트콤은 기회의 영역이 아닐 수 없다. 그 어떤 정극도 해내지 못한 매력적인 이미지를 부여하니 말이다.

'지붕킥'의 이순재, '그대 웃어요'의 최불암

많은 연기자들이 있지만 지금 우리네 아버지를 대변하는 연기자 둘을 찾으라면 단연 이들을 떠올릴 것이다. 이순재와 최불암. 이 둘은 지금 시대의 아버지들이 겪는 두 가지 양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들의 캐릭터 이미지에 공감하는 대중들의 마음 속의 아버지를 가늠하게 한다.

먼저 '거침없이 하이킥'의 야동순재를 통해 전 세대로 그 공감대를 넓힌 이후, '지붕 뚫고 하이킥'의 멜로순재로 돌아와 여전히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연기자, 이순재. 그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이 시대에 어떻게 아버지들이 적응해 나가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야동순재'에서 중요한 것은 '야동'이 의미하는 '야한 동영상'이 아니라, '야동'이라는 용어가 가지는 젊은이들의 인터넷 문화이다.

이순재는 단지 야한 걸 봤기 때문에 젊은이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게 아니라, 어색하지만 바로 그 인터넷 문화로 파고들어온 아버지와의 공감대가 순식간에 세대의 벽을 넘어섰기 때문에 젊은이들의 마음 속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그는 '지붕 뚫고 하이킥'에 와서는 이제 잠깐 젊은이들의 문화를 어깨 너머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문화를 노년에도 똑같이 누리려 한다. 로맨스 그레이를 연기하는 그가 김자옥을 위해 각종 이벤트를 하고, 줄리엔의 김자옥에 대한 호의에 질투하는 모습은 나이와 상관없이 똑같은 연애 감정을 표현한다.

이순재라는 아버지가 보여주는 핵심적인 것은 이처럼 젊은이들의 문화와 소통하기 위해 과거 고압적이었던 아버지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김자옥 앞에서 방귀를 참다가 결국 장례식장에서 그가 폭발하듯 방귀를 꾸는 순간, 우리는 권위적인 아버지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이순재는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여전히 사위와 딸에게 고압적인 아버지지만 그것은 늘 시트콤이라는 틀 속에서 그 이면을 드러내며 무너져 내린다.

반면 '그대 웃어요'의 최불암은 정반대의 위치에서 우리네 아버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 드라마에서 최불암이 연기하는 강만복이라는 캐릭터는 지나간 아버지 시대의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아침에 일어나 국민체조를 하는 이 아버지는 '돈보다 귀한 것은 인연'이라는 전통적인 가치를 쥐고 달라진 현 세태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 '귀한 인연' 때문에 과거 자신과 가족들을 살 수 있게 해주었던 회장님의 아들, 서정길(강석우)이 흥청망청 사업에 실패하자, 그를 거두어 사람을 만들어보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 달라진 세태 속에서 아버지의 이 안간힘은 쓸모없는 일처럼 여겨진다. 서정길은 '인연보다는 돈'에 휘둘려 자식까지도 거래하는 파렴치한 인물이다. 이 한 세대를 거쳐 강만복이라는 아버지와 작금의 서정길이라는 아버지가 보여주는 달라진 모습은, 이 드라마가 풍자하려는 세태를 잘 보여준다.

강만복이라는 아버지는 그래서 혼자 남은 듯한 쓸쓸함에 노년을 보내지만 그래도 이 부족한 이들을 모두 가족이라 생각하며 가슴으로 끌어안는다. 돈 때문에 평생의 인연이 끊어지는 그 과정을 목도하면서 혼자 책상에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삼키는 강만복의 모습은 우리 시대 아버지의 또 다른 면을 보게 한다. 달라진 세태 속에서 자꾸만 잊혀져가는 아버지의 자리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 강만복이고, 최불암은 어쩌면 허허 웃은 그 웃음 속에 담긴 수만 가지 뉘앙스로 그걸 가장 잘 연기해내고 있는 연기자라고 할 것이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는 이제 이 권위 없는 시대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 시대는 늘 젊은이들의 것이고, 아버지는 그들과의 소통을 위해 그 세계를 기웃거리거나, 달라진 세태를 안타까워하며 과거의 가치를 향수하며 잊혀져 간다. 이순재와 최불암은 바로 그 아버지들의 모습을 대변해내는 연기자로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식모가 판타지가 된 모성 없는 세상

'지붕 뚫고 하이킥'의 신세경은 엄마가 없다. 빚쟁이들을 피해 산골에서 아빠와 동생 신애와 살다가 그마저 쫓겨나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찾아오겠다는 아빠의 말 한 마디를 가슴에 품고 동생 신애와 서울로 무작정 상경한 그녀는 가족 간의 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이순재의 집에서 얹혀살게 된다. 그러니까 그녀는 한창 공부를 해야할 고등학생이지만 학교도 가지 못하고 동생을 돌보기 위해 식모살이를 하며 살아가야 하는 소녀 가장이다.

엄마가 없어 엄마 자리를 대신하는 삶을 살아오던 그녀가, 살기 위해 타인의 집에서 엄마 역할(식모)을 대신하며 살아간다는 설정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이것은 사실 개발시대에 시골에서 가족들을 위해 무작정 상경한 처자들이 식모살이를 하면서 살았던 그 시절의 이야기와 중첩되는 부분이 있다. '지붕 뚫고 하이킥'이라는 시트콤은 바로 이 식모의 이야기를 주변부로 다루곤 하는 여타의 드라마들과는 다르다.

그런데 이 신세경이라는 식모는 수상하다. 물론 이 식모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에 등장하는 한 가정을 파멸로 이끄는 가정부도 아니고, 박진규의 '수상한 식모들'이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호랑아낙(신의 뜻으로 인간이 된 곰과 달리 스스로 동굴을 뛰쳐나가 여자가 된 호랑이의 후손)의 후손도 아니다. 하지만 2010년의 한 평범해 보이는 도시의 가족 속으로 들어온 신세경이라는 식모와 이 가족이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은 수상하기 이를 데 없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이순재의 집안사람들이 함께 모여 밥을 먹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정보석이 뭔가 얘길 하려하면 이순재는 거기에 면박을 주고, 그러면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듯 딸인 해리(진지희)는 "갈비나 먹어"라고 말한다. 이순재의 아들인 이지훈(최다니엘)은 먹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출근하기 바쁘고, 준혁 역시 가족과 함께 밥 먹는 게 그다지 즐거운 표정은 아니다. 이 식탁에는 엄마의 온기가 없다. 직접 밥을 챙겨주어야 할 이현경(오현경)은 엄마라는 위치보다는 열심히 사회생활을 하는 맹렬여성에 가깝다.

그 한쪽 귀퉁이에서 그것이 단지 일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는 듯, 진심을 담아 정성스레 밥을 챙기는 여자가 있다. 바로 신세경이라는 식모다. 그녀는 언감생심 이 집안의 아들인 이지훈을 짝사랑하지만 그렇다고 '하녀'의 가정부처럼 그를 유혹해 이 권력구조의 전복을 꿈꾸지 않는다. 다만 멀리서 바라보고, 늦은 밤 잠을 설쳐가며 목도리를 손수 짜주고, 늦게 식탁으로 돌아온 그에게 따뜻한 밥을 다시 내오는 정도가 그녀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지훈이라는 IQ는 높아도 EQ는 낮은 전형적인 도시의 남자가 그것을 알아챌 리 만무다.

그러면서 '지붕 뚫고 하이킥'은 '하녀'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 주인과 현대판 하녀의 권력적인 관계를 전복시킨다. 웃음의 코드로 역전시키는 것. 즉 신세경은 식모이지만 몇몇 남성들의 판타지가 되기도 한다. 준혁(윤시윤)의 친구인 세호(이기광)는 친구들과 팬클럽을 조직할 정도로 신세경의 추종자가 되기도 한다. 신세경과 황정음의 퀸 자리를 두고 벌이는 묘한 대결구도는 그래서 낮은 자들의 판타지를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신세경에 대한 준혁의 마음은 첫사랑에 대한 설렘이 분명하지만, 또한 이 이순재의 집이 가진 모정 없는 풍경 때문에 그것은 부재한 모정에 대한 갈구로도 보인다. 찬바람이 쌩쌩 도는 집안사람들에게 퉁퉁대면서도 세경의 말 몇 마디에 뭐든 할 것처럼 뛰어다니는 준혁의 모습은 모정 없는 도시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외로움이 담겨져 있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신세경은 아마도 식모라는 직업으로 대중들을 매료시킨 최초의 캐릭터가 아닐까.

사회적으로는 안정되었지만 집안의 어른이 되지 못하는 이순재, 가장이지만 늘 구박만 받고 살아가는 정보석, 한 가족의 엄마이지만 사회생활 때문에 늘 부재한 이현경, 자기 일에만 바빠 가족을 돌아볼 틈이 없는 이지훈, 입시 교육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는 준혁, 그리고 한창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야할 나이에 사랑 없는 세상을 느끼고 '빵꾸똥꾸'를 외치는 해리. 이 푸석푸석한 도시의 캐릭터들 사이에서 따뜻함을 전하는 신세경이란 캐릭터는 그래서 하나의 판타지로 보인다. 이 캐릭터에 대한 열광은 단지 '청순 글래머'라는 배우 신세경의 외모적인 측면 때문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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