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어디가>의 준이, <꽃보다 할배>의 신구

 

<꽃보다 할배>에서 구야형 신구가 홀로 유럽에 배낭여행 온 한 청년에게 “존경합니다”라고 말하는 한 장면은 이 프로그램의 대부분을 설명해준다. 할배들이 주인공이지만 프로그램이 손을 내미는 쪽은 젊은이들이라는 점. 이것이 가능한 것은 신구가 그랬던 것처럼 나이라는 껍질을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그 순간에 젊은이와 소통하는 어르신의 자세가 있기 때문이다.

 

'꽃보다 할배(사진출처:tvN)'

이것이 가능한 것은 ‘청춘’이라는 공유점이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는 그 청춘을 지금 현재 열정적으로 살아내는 중이고, 할배는 한 참 지났지만 여전히 마음 속에 남아있는 청춘을 새삼 느끼며 그 젊은이를 부러워하는 중이다. 그가 던지는 청춘 예찬은 그래서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춘들에게는 커다란 위로가 된다.

 

“제일 부러운 것이 청춘이야. 아름답고 앞으로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우리는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어.” 그는 에펠탑이 지어지던 시기에 흉물스럽다 손가락질 받던 이야기를 끌어와 청춘들의 등을 두드려준다. “나는 요지경에서 끝나지만 지금을 살아가고 앞을 내다보는 젊은이들은 지금 이 시대 인정 못 받더라도 새롭고 가치 있는 걸 시도해보면 훗날에는 더 크고 명예로운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신구의 말이 특히 감흥을 준 것은 그가 살아낸 78년의 세월이 그 말에 묻어났기 때문일 게다. 또한 어떤 말을 했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에 담겨진 청춘에 대한 자애로움과 심지어 겸손까지를 느끼게 해주는 신구의 태도다. 그저 권위적으로만 생각해왔던 어르신이 이런 할아버지의 얼굴로 내미는 소통의 손이 어찌 감동적이지 않을까.

 

78세 구야형이 세대를 뛰어넘는 소통의 가치를 알려주었다면 이제 갓 7살 먹은 준이는 어른들의 세상에 살면서 잊고 있었던 약속과 배려의 가치를 보여주었다. 사실 뭐 특별하다고 할 것도 없는 행동이다. 아침에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아침거리를 아이가 챙겨오는 미션이 주어졌는데 조금 일찍 일어난 준이가 먼저 재료를 구하러 가지 않고 기다리는 장면이 그 하나고, 약속시간에 재료를 구하러 갔을 때 아직 오지 않은 지아의 몫을 챙겨주는 장면이 다른 하나다.

 

그다지 특별하다 여겨지지 않는 행동이지만 그 반향은 컸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과 타인을 배려한다는 것의 가치를 준이가 그 순수한 행동을 통해 보여줬기 때문이다. 어쩌면 너무 흔해서 대단할 것 없다 여겨진 가치들은 그래서 종종 무시되고 지켜지지 않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것이 어찌 대단하지 않은 가치들인가. 실제로 현실의 대부분의 문제들이 이런 원칙이 무시되는 것에서 비롯되지 않는가. 따라서 준이가 보여준 작은 행동이 그 자체로 어른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7살 아이 준이의 행동에 대해 뜨거운 반응이 쏟아졌다는 것은 지금 이 시대의 소통에 대한 욕구가 나이를 훌쩍 뛰어넘는 지점에 도달해있다는 걸 말해준다. 7살 아이의 행동이든 78세의 어르신의 한 마디든 그것이 순수한 가치를 보여줄 때 누구든 귀는 열려지게 마련이다. 이것은 어쩌면 그 누구보다 소통이 중요한 이 시대의 정치인이나 지도층들에게 절실한 자세라 여겨진다. 그 순수함과 열린 마음으로 손을 내밀 때 비로소 진심이 소통될 수 있다는 것.

27년만에 다시 행진하는 들국화

 

들에서 모진 바람을 버텨온 탓일까. 국화 향은 더 진해졌고 더 강렬해졌다. ‘그것만이 내 세상’을 외치고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들국화. ‘인제는 돌아와 대중 앞에 선’ 들국화는 서정주의 절창만큼이나 원숙해졌다. 젊은 시절 거칠었던 야성은 그 긴 시간을 거치며 그 강렬한 힘 속에 부드러움을 갖추게 되었고, 그들이 노래하는 가사는 도발적이면서도 인생의 깊이가 더욱 느껴졌다. 합정동 인터파크 아트홀에서 열린 ‘다시 행진’이라는 콘서트(4일-14일)는 그 제목처럼 들국화를 27년 만에 돌아와 다시 출발점에 서게 했다.

 

'들국화'(사진출처:컴퍼니F)

가사의 진정성이란 가수의 삶이 거기에 그대로 겹쳐질 때 담겨지는 법.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콘서트의 첫 곡 ‘행진’은 그들이 살아낸 삶을 미리 예시한 곡처럼 그 가사가 새록새록 피어났다. 아마도 1985년 발표됐던 젊은 시절 들국화의 이 노래에 발을 동동 굴리며 그 행진의 설렘을 느꼈던 팬들이라면 그 가사가 들국화의 이야기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이야기라고 여겼을 것이다. 30여 년의 세월을 단숨에 꿰뚫는 힘. 그것이 바로 노래의 힘이 아니던가. ‘헤어진 후에’, ‘제발’, ‘사랑일 뿐이야’, ‘그것만이 내 세상’ 같은 명곡들은 그 세월의 벽을 허물어뜨렸다.

 

20대 청춘들에게나 이제는 머리가 희끗해진 중장년들에게나 들국화의 노래는 여전히 청춘의 힘을 느끼게 해주었다. “꿈이 있으면 나이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전인권은 여전히 꿈꾸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다시 꿈을 꾸고 다시 모여 다시 무대로 돌아오고 다시 행진하는 데는 긴긴 시간이 필요했다. 너무 강렬한 힘을 가진 와인은 바로 따면 거칠고 쓰기만 하지만 오랜 시간 묵혀두고 꺼내면 한없이 부드러워지고 깊어지는 것처럼, 들국화는 어쩌면 그 대기만성의 시간을 기다려왔던 것처럼 보였다.

 

전인권의 목소리는 여전히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읊조리는 듯한 저음에서 쇳소리를 느낄 수 있는 고음까지 단번에 치솟아 오르는 쾌감을 선사했고, 최성원의 부드러움은 여전히 속삭이듯 관객의 귀를 간지럽혔으며, 주찬권의 드럼은 여전히 마치 장작을 쪼개듯 강렬하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하지만 그 ‘여전히’ 속에는 원숙미가 더해졌다. 공연 중간 중간 툭툭 던지는 농담 속에마저 인생의 깊이가 묻어나듯.

 

“예전에 다투고 헤어졌던 거 후회하지 않으세요?” 한 관객의 질문에 주찬권이 던진 “헤어진 후에, 이별이란 없는 거야.”라는 답이나, 한 젊은 관객이 “젊었을 때 꼭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게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전인권이 “고생하세요”라고 던진 답변이 관객들을 공감시킨 것은 거기에 자신들의 삶을 통과한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찌 말 뿐이랴. 들국화의 곡들은 마치 부흥회의 연설처럼 강하고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담겨있었다. 27년만의 신곡 ‘노래여 잠에서 깨라’는 그래서 우리네 가요계에 던지는 도발이면서도 그 안에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꿈과 희망이 들어있었다.

 

다시 돌아와 행진하는 들국화의 이 노래를 요즘 시쳇말로 떠도는 ‘힐링’으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너도 나도 ‘힐링’이라 떠드는 탓에 그 단어가 가진 힘이 희석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들국화의 노래 속에는 넘어진 이들을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그것은 위로이고 힘이고 격려이며 도전이고 꿈이다. 들에서 오래도록 시간을 기다려온 국화꽃이 피었다. 그 향기는 더 진해졌다.

김미경, 힐링과 자기계발 열풍의 양면성

 

한 달에 무려 40여회의 강연을 나가고, 가는 곳마다 부흥회에 가까운 반응을 얻고 있는 김미경. 최근에는 자기 이름을 내건 김미경쇼를 선보였고, <무릎팍도사>에 나와서도 거침없는 입담으로 강호동마저 쥐락펴락하는 모습을 보였던 그녀. 이제 국민 강사라고까지 불리던 김미경은 왜 잇따른 논란에 휘말리게 되었을까.

 

'김미경쇼(사진출처:tvN)'

인문학 비하 논란에 이어 생긴 논문 표절 논란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벌어진 일 그 자체보다 논란이 훨씬 더 크게 번졌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것은 사건의 경중 그 자체보다 일종의 대중정서가 작용했다는 얘기다. 김미경쇼에서 했던 발언이 뒤늦게 논란으로 이어진 이른바 인문학 비하 발언은 편집된 장면이 가져온 착시현상에 가깝다.

 

김미경이 해명한 것처럼 그녀는 인문학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다만 자기계발서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을 깨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자주 사용하는 말인 “시건방을 떨고...” 같은 다소 강한 표현이 논란의 촉매제가 되었다. 그녀는 해당 논란이 된 방송에서, 자기계발서가 인문학을 치열하게 읽고 남은 지혜가 한 사람의 책으로 쓰여지면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인문학 서적이 내 머리로 들어오고 몸으로 들어와서 내 몸과 그 지식이 치열하게 소통하는 거야. 치열하게 소통하고 나면 한 방울 지혜로 남아. 인문학은 지혜 만들기 위해서 읽는 거라구. 근데 그 사람의 지혜가 삼백 페이지 책으로 쓰여지면 그가 자기계발을 해온 거고, 그게 자기계발서적이야. 근데 안 읽는다고? 웃기고 있어. 시건방 떨고... 나는요. 책은 아무 문제없어요. 사람도 아무 문제없고. 읽는 사람이 문제예요.”

 

인문학을 비하한 것이 아니라 자기계발서에 대한 비하에 자못 감정적인 논조를 섞어 이야기했던 것이다. 이렇게 감정이 들어가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녀가 그토록 강연을 통해 설파했던 것들이 바로 그 자기계발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기계발서에 대한 비하는 자신에 대한 비하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김미경이 얘기하는 것처럼 자기계발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오히려 문제는 읽는 사람이 문제일까. 이 부분에서는 김미경이 갖고 있는 계몽주의적인 시각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이 생길만 하다. 즉 세상과 사회의 잘못과 부조리가 아니라 문제는 바로 개인에게 있다는 생각. 사회 시스템이 갖고 온 문제를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는 시각은 듣는 이에게는 마치 고해성사 같은 카타르시스를 줄 지는 몰라도 그 사람의 진짜 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없다.

 

사실 자기 계발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권력이 대중들을 스스로 통제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다. 과거에 권력은 총과 칼로 대중들을 통제해 왔지만 근대 이후에서는 이른바 푸코가 얘기하는 파놉티콘처럼 스스로가 자신을 통제하는 기술들을 만들어왔다. 왜 우리는 굳이 ‘아침형 인간’이 되어야 하고, 왜 우리는 굳이 살을 빼기 위해 다이어트를 강박적으로 해야 하며, 왜 우리는 사회생활을 위해 무수한 처세들을 따라야 할까. 또 굳이 왜 그렇게 꿈을 강박적으로 가져야만 할까. 꿈이 있는 건 나쁘지 않지만, 그것에 강박을 갖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아도르노가 이미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명저를 통해 얘기했듯이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자연을 통제해왔지만, 그 자연의 일부가 인간 자신도 포함하고 있다는 데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계몽이라는 이름으로 또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으로 통제되고 조직화되는 비인간화를 꼬집었던 것이다. 과연 김미경은 이러한 자기계발서에 대해서 그렇게 쉽게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까.

 

김미경이 하는 이야기는 속 시원하면서도 달콤하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걸 여전히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 논거의 대부분이 자신이 그랬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살아왔던 개발시대의 사회와 작금의 신자유주의 시대의 사회는 다르다. 지금의 달라진 사회 시스템 속에서 생겨난 문제에 대해서 김미경은 과거의 해법을 들고 나오는 셈이다. 일종의 복고와 보수주의가 거기에는 깔려 있다. 지금 네가 안 되는 것은 네가 죽어라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여전히 얘기하고 있다. 과연 그 말이 이 시대에도 맞을까.

 

갑작스럽게 나온 김미경의 논문 표절 논란은 그 사안 자체만 보면 뜬금없어 보인다. 사실 아는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석사 학위 논문, 그것도 직장인들을 위한 석사 과정에서의 학위가 얼마나 아카데믹할 수 있는지를. 박사 학위도 아니고 석사 학위에서 타인의 논문을 인용하는 것은 늘 있던 일이다. 그만큼 우리네 사회가 가진 학위에 대한 강박과 이제는 심지어 상술이 되어버린 학교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어쨌든 이런 엄밀한 잣대로 논문을 들여다보면 아마도 표절 아닌 것을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즉 김미경의 논문 표절 논란은 그 자체보다는 그 이면에 놓여진 그녀에 대한 대중정서가 폭발시킨 것이나 다름없다. 국민 강사라는 명성을 가졌으니 그만한 실력에 대한 일종의 검증심리가 작용한 것이다. 김미경은 분명 스피치에 있어서 탁월한 재능을 가진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스피치는 말하는 기술이다. 정작 중요한 건 말의 내용이 아닌가.

 

김미경 신드롬과 논란 속에는 그래서 작금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자기계발과 힐링 열풍의 뒤안길을 보게 된다.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아예 들어갈 기회조차 주지 않는 세상 앞에 청춘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김미경의 꿈은 달콤하다. 적어도 몇 십분 동안 ‘나도 할 수 있다’는 설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강연을 듣고 나선 현실은 여전히 달라진 것이 없다. 아마도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달라지면 현실도 달라질 것이라고. 하지만 그 사람들이 왜 이 잘못된 시스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달라져야 할까. 그것은 또 다른 보수적인 순종이 아닐까.

<야왕>, 몸 팔아야 생존하는 하류의 지옥도

 

19금은 드라마에 있어서는 큰 약점일 수밖에 없다. 보편적인 시청층을 가져갈 수밖에 없는 TV라는 매체에 어떤 좁은 문을 설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야왕>은 하지만 초반에 굳이 19금을 달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남자 주인공인 하류(권상우)가 다해(수애)를 공부시키고 취직시키기 위해 몸뚱어리 하나로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성들에게 몸을 파는 호스트 일뿐이다. <야왕>은 결국 19금 드라마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호스트라는 하류의 직업을 그대로 다루었다. 그것만큼 이 신자유주의의 지옥도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야왕'(사진출처:SBS)

하류(이름부터가 상류사회와 대비되는 하류인생을 의미한다)는 지중해라는 호스트바에서 ‘등신’이라 불린다. 여성들 앞에서 웃통을 벗고 잘 빠진 몸을 보여줌으로써(신 같은 등 근육) 여성들의 지갑을 열게 만든다. 하지만 하류는 그 별칭 그대로 등신이다. 다해와 딸 은별(박민하)을 위해 결국 웃음을 팔고 몸을 파는 처지. 심지어 그는 다해가 우발적으로 벌인 의붓아버지의 살인을 자신이 뒤집어쓰려고까지 한 인물이다. 게다가 다해가 유학을 보내달라고 하자 어렵게 끊어버린 호스트 일을 다시 시작한다. 등신이 이런 등신이 없다.

 

없는 자들이 신자유주의의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유일한 자산인 몸뚱어리를 팔아야 한다는 것은 하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야왕>이 하류라는 남자 신파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사회적인 맥락을 찾아내는 건 그 교차점으로서 다해의 성공을 위한 안간힘 역시 하류와 다를 바 없는 삶으로 그려지기 때문일 게다. 하류가 유학 보낸 다해에게 부칠 삼백만 원을 벌기 위해 지금껏 피해왔던 진짜 호스트질을 하는 장면은, 잔인하게도 다해가 미국 유학에서 의도적으로 접근한 백학그룹의 장남 백도훈(유노윤호)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과 교차 편집되어 보여진다.

 

하류가 다해를 위해 몸을 팔고 나와 받은 돈 삼백만 원짜리 수표를 일그러뜨리며 눈물을 터트리는 그 순간 다해는 하류를 버리고 백도훈의 품에 안긴다. 이 두 장면은 하류나 다해나 똑같이 몸을 팔아야 살아남는 사회의 단면을 잡아내지만 그 풍경은 사뭇 다르게 그려진다. 즉 하류는 말 그대로 몸 파는 남창의 모습을 담는 반면, 다해는 무수한 멜로드라마에서나 나올 왕자님과 사랑에 빠진 신데렐라의 모습을 담는다(다해가 처음 백도훈을 지하철에서 만나게 된 것이 그 벗겨진 구두 때문이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하류가 보여주는 남창의 모습은 이 사회가 가진 처절한 현실의 맨얼굴을 보여주는 셈이다. 반면 다해는 사랑이나 성공이라는 가치로 포장되어 겉으로는 심지어 로맨틱하게 보여지는 그 행위가 사실은 저 남창 짓을 하는 하류보다도 못하다는 걸 보여준다. 고전적인 이야기지만 하류는 몸을 팔았지만 영혼까지는 팔지 않았다. 반면 다해는 성공과 욕망을 위해 남편과 아이까지 저버리는 영혼을 파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몸을 파는 행위와 영혼을 파는 행위. 이것을 저울로 달 수 있다면 어떤 것이 더 무거운 죄일까.

 

하류라는 캐릭터가 신자유주의 시대 스펙 없이는 취업조차 어려운 청춘의 모습과 저 개발시대에 가족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삶 따위는 팽개쳐버린 우리네 가장들의 모습을 동시에 담고 있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개발시대에 우리 사회가 가장들을 희생시켰던 것처럼 이제 그렇게 성장된 나라는 신자유주의라는 기치 아래 우리네 젊은이들을 희생시키고 있다. 몸뿐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팔아야 겨우겨우 생존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살풍경. <야왕>이 하류와 다해를 통해 보여주는 건 그 살풍경이 만들어내는 지옥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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