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인', 이강훈이라는 우리 모두의 트라우마

'브레인'(사진출처:KBS)

신하균은 '브레인'에 등장하며 '하균신'이란 별칭을 얻었다. 그가 가진 발군의 연기력이 한 몫을 한 것이지만, 더 큰 것은 그가 연기하는 이강훈이라는 캐릭터의 힘이다. 별로 착해보이지도 않고 성격이 좋아보이지도 않는 이 인물.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간다. 그의 끝없는 추락이 보는 이를 안타깝게 만들고 마음 한 구석을 허물어뜨린다. 도대체 무엇일까. 이 캐릭터의 무엇이 이토록 대중들을 들끓게 만들까.

사실 이강훈에서 떠오르는 캐릭터가 있다. 바로 '하얀거탑'의 장준혁(김명민)이다. 불나방처럼 기꺼이 욕망의 불꽃에 몸을 던지는 인물. 그래서 성공을 위한 동아줄이라면 서슴없이 잡고 '충성'을 맹세하는 그런 지극히 속물적인 인간. 하지만 자꾸만 들여다보면 어딘지 연민이 생기고 오히려 그로 하여금 그토록 성공에 집착하게 만드는 '더러운' 사회의 부조리를 통찰하게 만드는 그런 인물. 이강훈에게선 분명 장준혁의 냄새가 난다.

장준혁처럼 이강훈이 태어난 곳은 개천 중에서도 가장 조악한 개천이다. 가난한 집안, 일찍 집을 나가버린 어머니, 뇌질환으로 수술을 받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 아버지, 다시 돌아왔지만 끊임없이 떠올리기 싫은 과거의 가난을 환기시키는 어머니. 게다가 그 어머니는 자신의 라이벌 서준석(조동혁)네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고, 여동생은 자신의 병원 커피샵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상황. 이 태생적으로 결정된 비운의 가난한 삶은 그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그 트라우마가 성공에 대한 강박을 낳는다. 태생적으로 삶이 결정되는 세상에서 그가 오로지 믿을 수 있는 건 자신의 실력뿐. 그래서 누구보다 더 철저히 실력을 갖추고 그것으로 인정받으려 하지만 세상은 녹록지 않다. 어디 세상이 실력만으로 버텨낼 수 있는 곳인가. 제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조직 내에서의 정치력이 없다면 무용지물인 게 현실이다. 그래서 이강훈도 고재학(이성민)의 밑으로 줄을 서고 충성을 다한다. 하지만 정치로 맺어진 관계란 영원할 수 없다. 고재학은 결국 이강훈을 이용해 먹을 대로 이용해먹고는 팽해버린다.

여기까지는 장준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브레인'이 흥미로운 건, 김상철(정진영)이라는 우리가 흔히 의술이 아니라 인술이라고 부르는 것을 행하는, 마치 히포크라테스가 다시 되살아난 듯한 인물에서 나온다. 그는 끊임없이 이강훈에게 '욕망'이 아니라 '환자'를 위한 의술을 펼치라고 말하고, 바로 그렇게 이강훈을 '인간이 되지 못한' 심지어 '파렴치한' 자로 몰아붙인다. 더 이상 비전이 없는 이강훈은 다른 병원을 알아보려 하지만, 그것마저 김상철 교수가 내린 평판에 의해 좌절된다.

마치 김상철 교수는 천사 같고 이강훈은 욕망에 걸신들린 악마처럼 보이지만, 과연 그렇다고 이 드라마가 진짜 그리는 것이 이런 권선징악일까. 과연 이강훈은 개과천선할 것인가. 그런 결론을 향해 갈 수도 있지만 그것은 너무 단순하고 재미없는 도식이다. 그것보다는 김상철 교수와 이강훈으로 대변되는 선과 악이 뒤집어지는 반전이 훨씬 재미있고, 또 그 반전이 주는 의미도 더 깊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복선은 이강훈 아버지의 죽음이 김상철 교수와 연관되어 있다는 암시를 통해 이미 깔려 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는 이강훈이라는 인물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그것은 이강훈 같은 괴물(?)의 탄생이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이강훈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낸 잘못이다. 이강훈이 그렇게 고통스런 괴물이 된 것은 태생에 의해 비롯된 트라우마(이를테면 아버지의 죽음 같은) 때문이란 점이다. 사실 김상철 교수는 이강훈의 그 괴물 같은 심성을 질책하기만 했지, 왜 그런 욕망에 대한 집착을 갖게 됐는지 이해해보려 한 적이 없다. 수많은 환자들 앞에 자애로운 아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김상철 교수는 정작 자신의 제자인 이강훈이 가진 마음의 병을 치유해주지는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브레인'이 가진 진가가 드러난다. '브레인'은 뇌 질환을 수술하는 외과의사들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이 이야기의 겉면에 불과하다. 실제는 이 의사들이 겪고 있는 정신질환이다. 이강훈이 갖고 있는 '욕망에 대한 집착'은 불우했던 어린 시절이 그의 뇌리에 남긴 트라우마이고, 어쩌면 김상철 교수의 끝없는 환자에 대한 희생과 봉사 역시 젊은 시절 한 때 잘못했던 일이 남긴(이를테면 이강훈의 아버지를 죽게 만든) 깊은 트라우마의 결과일 수 있다. 결국 '브레인'에서 환자는 뇌 질환을 겪고 있는 환자들만이 아니다. 의사들 역시 똑같은 '기억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얘기다.

이강훈이라는 캐릭터가 악인 것 같으면서도 어딘지 우리네 마음 속의 깊은 공감과 연민을 끌어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네 서민들도 이 낮은 세계에서 살아가면서 아마도 이강훈 같은 트라우마를 누구나 하나씩은 갖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바보처럼 선량해지기보다는 어딘지 악착같이 살아보려 하는 것이 아닌가. '브레인'은 바로 이강훈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한 사람에게 트라우마가 만들어지는 이 사회의 부조리를 끄집어내는 드라마다. 신하균이 하균신으로 불리게 된 것은 바로 이토록 우리네 대중정서를 건드리는 이강훈이란 캐릭터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이끼', '자이언트', '제빵왕 김탁구'가 70년대를 택한 이유

드라마와 영화의 시대적 배경으로 70년대가 다시 피어나고 있다. 수목드라마로 40%의 시청률을 넘보고 있는 '제빵왕 김탁구'는 70년대의 질곡을 겪고 자라난 김탁구(윤시윤)가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제빵왕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현재 상승세를 타고 있는 '자이언트'도 70년대 개발시대 강남땅을 놓고 벌이는 치열한 개발전쟁을 다루고 있다. 한편 벌써 25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이끼'도 그 근간을 보면 70년대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70년대 개발시대에 아버지가 겪은 고통의 시간들을 현재의 신세대 주인공이 하나씩 되밟아가는 이야기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70년대 개발시대를 이들 콘텐츠들이 다루고 있을까. 흥미로운 것은 이들 작품들이 이 시대를 다루는 방식이 유사하다는 점이다. '이끼'는 70년대 개발시대가 갖고 있던 그 폭력적인 정서를 바탕에 깔고 있다. 즉 영화가 그리는 것은 지금 현재를 만든 그 과거의 왜곡된 폭력의 역사를, 현재의 신세대를 대변하는 주인공이 파헤쳐가는 이야기다. '자이언트'는 군사정권에서부터 개발시대를 지나오면서 한 가족이 겪게 되는 파멸과 생존 그리고 복수와 성장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으로 '이끼'와 거의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하는 셈이다. 이것은 '제빵왕 김탁구'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온갖 시련을 겪으며 성장해 결국 제빵왕이 되는 과정을 그리는데, 이것이 또 7,80년대의 폭력적인 시대와 연관을 맺는다. 즉 이들 작품들은 모두 개발시대가 남긴 트라우마를 현재의 주인공이 넘어서려 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목할 것은 이들 작품들이 70년대라는 시대를 배경으로 담으면서 각 장르가 가진 한계를 넘어고 있다는 점이다. '자이언트'와 '제빵왕 김탁구'는 70년대를 하나의 극적 장애요소로 다루면서 이제 한 물 간 것이라 여겨진 시대극을 다시 부활시켰다. 과거 '에덴의 동쪽'이나 '태양을 삼켜라' 같은 시대극들이 과거를 재현하고 그 속에 꿈틀대던 욕망들을 끄집어내 보여주는 것에 만족함으로써 어떤 한계를 드러냈다면, '자이언트'와 '제빵왕 김탁구'는 그 과거가 현재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질문하고 있다. 결국 과거를 소재로 하지만 과거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고 현재와 만나는 지점을 찾아냄으로써 그걸 보는 현재의 시청자들을 공감하게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청세대의 확장이다. 70년대를 다룸으로써 현 드라마의 주시청층인 중장년층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고, 그 시대를 넘어 성장하는 주인공을 그려냄으로써 현재의 젊은 시청층까지 소구할 수 있었다. 이들 드라마들의 높은 시청률은 바로 이 시청 세대의 폭넓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영화 '이끼'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웹툰 원작의 영화가 거의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그 소구 세대가 달랐기 때문이다. 웹툰이 좀 더 젊은 세대가 향유하는 매체라면 영화는 좀 더 폭넓은 세대를 겨냥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와 현 세대의 이야기가 중첩되는 '이끼'는 그 한계를 70년대라는 시점을 끌어들여 넘어서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픈 과거도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된다는 말이 있다. 개발시대는 우리에게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주었지만 그 이면에 또한 많은 상처를 남긴 게 사실이다. 최근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개발시대는 막연히 당대를 향수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또 그 아픔을 넘어서려는 안간힘을 보여준다는 데서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순수한 동심 vs 살벌한 어른들 세상

MBC 월화드라마 ‘이산’에서 이산(이서진)은 어린 시절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그것은 할아버지(영조)가 아버지(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것이다. 어린 이산은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게 한 뒤주 앞에 와서 아버지의 손을 잡고는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그것이 끝이 아닌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살아남은 불씨가 된 이산은 끝없는 암살 위협 속에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힘겨운 일은 아버지를 죽게 한 할아버지 영조(이순재)가 자신을 끝없이 시험에 빠져들게 한다는 점이다. 그 시험에서 탈락하는 순간, 이산은 자신도 저 버려진 아버지의 운명이 될 거라는 점에 몸서리친다.

게다가 자신을 죽이려하는 암살자들이 바로 이산의 고모인 화완옹주(성현아)라는 사실은 절망감을 더 깊게 한다. 아직까지 이산에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음모의 몸통에는 영조의 계비이자 이산의 할머니가 되는 정순왕후(김여진)가 있다. 서로 죽고 죽이게 되는 이 잔인한 가족사는 저 고대 그리스의 비극이나 셰익스피어의 비극만큼 비장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살벌한 어른들 세상 속에서 이산은 생존하기 위해 강해지고 노련해진다. 하지만 이것은 이산이 원하던 것이 아니다. 이산은 늘 어린 시절 우연히 만나 운명의 여인이 되어버린 성송연(한지민)과, 평생의 동무가 된 박대수(이종수)를 그리워한다. 이 숨가쁘게 돌아가는 궁 속의 음모들 속에서 이 세 사람 즉 이산과 성송연, 박대수가 만나는 장면은 과거로 과거로 시간을 되돌려 놓는다. 현실이 아닌 어린 시절의 동무로 돌아간 그들은 실로 어린아이들처럼 말하고 웃고 수줍어한다.

이것은 동화의 세계이다. 동화가 가진 세계와의 대결의식은 늘 순수한 동심과 잔인한 어른들의 세계를 병치시킨다. 이산은 그 깊은 트라우마가 생기기 이전의 시간을 희구하지만 현실은 자꾸만 어른들의 세계 속으로 그를 인도한다. 성송연과 박대수는 그 캐릭터 자체가 어린이에 머물러 있고 그것은 잔인한 어른들의 세계를 잘 알고 있는 이산이 늘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이 어른과 어린이의 대결 속에서 홍국영(한상진)이란 인물이 차지하는 위치는 절묘하다. 홍국영은 어른들의 세계를 철저히 이해하고 있는 인물. 그는 때론 어린이 같은 마음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그가 이산의 옆에 자리하면서 드라마는 그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게 만든다. 홍국영은 그 목적이 어떻든 이산과 그 동심을 지켜내는 파수꾼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시청자들이 ‘이산’에 깊이 빠져드는 이유는 바로 이 아이들의 세계를 가진 이산과 성송연, 박대수를 저 잔인한 어른들의 세계에서 지켜주고 싶은 측은지심 때문이다. 현실 세계의 무거움 속에서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그리는 건 누구나의 인지상정 아닌가. 그러니 이 한 가족이 서로를 죽이고 죽는 잔인한 동화의 세계는 동심에서 어른의 세계 속으로 편입되는 일련의 성장과정을 내포한다. 때론 그것이 퇴행적으로 보이지만 그 어린 시절의 순수로 되돌아감이 현실과의 대결구도를 이룬다는 점에서 이산이 그리는 동화는 그 가치를 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산의 정치란 결국 이전투구의 진흙탕 정치세계를 넘어서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으로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그 곳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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