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애 그리고 희망을 버리지 않게 하는 힘, 가족

(아직도 어제 보았던 최정미씨의 젖은 눈과 앙다문 입,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여전히 아이들을 보며 짓던 미소와, 은서의 그 작은 손과 초롱초롱한 눈, 엄마를 온 몸으로 감싸안는 그 행동들이 눈에 선합니다. 좀더 많은 분들이 그 가녀린 손짓들과 몸짓들이 전하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느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미 칼럼으로 쓴 글을 블로거 뉴스로 다시 발행합니다.)

저 작은 고사리 손이 얼마나 많이 엄마의 발을 주물렀을까. 말기암으로 투병 중인 두 아이의 싱글맘, 최정미씨의 발을 매만지는 맏딸 은서의 손은 제법 야무지다. 이 일곱 살 아이의 손은 엄마가 잠시라도 누워있으라며 대신 설거지를 하고, 동생 홍현이의 목욕을 시켜주고 밥을 차려준다. 주중 동안 엄마와 떨어져 어린이집에서 지내야 하는 동안, 은서의 손은 엄마의 손을 대신해 동생을 살뜰이도 돌본다. 그렇게 엄마의 손을 대신하면서도 아이는 엄마한테 잘 해준 게 없다고 한다. 애들이 잘 때 그래서 아이는 그 고사리 손을 모아 매일 기도를 한다. 엄마를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그래서 함께 지내게 해달라고.

'휴먼다큐 사랑'의 풀빵 엄마 최정미씨는 은서의 그 야무진 손을 볼 때마다 마음이 저리다. 아이가 너무 빨리 커버린 것만 같고, 자기가 해야할 몫을 자꾸 아이한테 하나씩 짐을 지우는 것 같아서다. 하지만 암 투병에 생계를 위해 해야 하는 풀빵 장사만으로도 최정미씨의 몸은 천근만근이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독한 항암제를 맞느니 치료를 포기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가 없다. 자신은 두 아이의 엄마니까. 그녀는 입만 열면 자신이 '아이들의 그늘막'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한다. 자신은 없어져도 되는데, 아이들의 그늘 되어줄 사람이 없어지는 건 상상하는 것만으로 암의 고통보다 더한 고통이라고 한다.

'휴먼다큐 사랑'이 늘 같은 감동적인 얼굴로 우리들에게 다시 돌아왔다. 다큐가 가진 진정성의 힘을 온전히 인간이라는 존재에 조명해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똑같은 깊은 울림을 전해주는 제목 그대로의 휴먼다큐. 풀빵 엄마 최정미씨의 이야기는 인간의 사랑이라면 가장 먼저 지목될 모성애를 그려냈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를 저는데다, 아빠 없이 두 아이를 키워야 하는 싱글맘으로도 충분히 힘겨운 삶에, 위암 말기라는 극한 상황에 내몰리면서도(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최정미씨는 더 절절한 모성애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모성애는 가족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얼마나 큰 희망과 힘이 되는지를 또한 말해준다. 한겨울 풀빵 장사를 위해 손이 꽁꽁 어는 길가에 서 있다가도 저 멀리서 다가오는 아이들을 볼 때면 마스크 쓴 얼굴 너머로 환하게 웃게 만드는 그 힘은 바로 그 가족이 준 힘이다. 위를 잘라내 잘 먹지 못하는 엄마에게 자꾸만 "엄마 밥 먹었어?"하고 묻는 딸 은서 때문에 그녀는 힘겨워도, 억지로라도 조금씩 음식을 넘기려 노력한다. 도저히 넘어가지 않는 설날 떡국을 그 고사리 손이 챙겨 입에 밀어 넣어주었을 때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받아 넘기다가는 울컥하는 감정에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가 더 이상 눈물 흘릴 수 없었던 것은 아마도 그 와중에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도 휴지를 챙겨다주는 은서의 그 작고도 야무진 손 때문이 아니었을까.

"엄마 우리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재롱잔치에서 엄마에게 한 마디 하라는 말에 이렇게 말하고 훌쩍이는 은서 앞에서 엄마는 절대로 희망을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사진 속에서 늘 웃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을 돌볼 때면 말기 암 환자라는 것도 잊는다고 한다. 엄마가 얼마나 살기 위해 노력했고, 또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라고 말하는 최정미씨는 이미 아이들에게 영원히 죽지 않는 그런 존재로 남아있을 것이다. '휴먼다큐 사랑'의 풀빵엄마 최정미씨의 이야기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족을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 가족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이며 기적인가.

- 늘 낮은 곳에 계신 분들의 아름다운 삶이 평범한 우리들의 삶을 보다 값지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제 길가에서 지나다 우연히 마주하게 되는 풀빵 장수 아주머니를 볼 때마다 님을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다큐의 시대, 진짜 다큐의 맛 ‘휴먼다큐 사랑’

재작년부터 TV에 시청자들이 요청한 것은 리얼리티였다. 이미 짜여진 틀 속에서의 프로그램에 식상해진 시청자들은 좀더 의외성이 돋보이는 예측불허의 영상을 요구해왔다. 이것은 그간 본격 다큐멘터리가 가진 리얼리티의 요소를 모든 TV프로그램 속으로 끌어들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써 드라마 분야에서는 정해진 룰 속에서 맴돌던 트렌디를 버리고 좀더 디테일한 리얼리티를 요구하는 전문직 장르 드라마가 등장했고, 예능 역시 무정형의 리얼리티쇼가 대세가 되었다. 케이블은 연일 자극적인 다큐의 틀을 끌어온 자칭 페이크 다큐 프로그램들로 넘쳐났고, 한편으로는 다큐 드라마라는 형식도 시도되었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다큐멘터리의 요소가 스며들었다는 의미에서 지금을 ‘다큐의 시대’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프로그램들 안에서 다큐멘터리는 어떤 식으로 활용되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끌어온 것은 ‘실제상황’이라는 조금은 자극적으로 해석된 요소였다는 걸 알 수 있다. 거기에는 고발이나 폭로, 혹은 폭탄선언, 막말 같은 다큐의 외면적 자극만이 존재했지, 내면이 가진 진정성이 좀체 보이지 않았다. 그 짜고 맵고 단 자극적인 맛의 프로그램들은 시청자들의 입맛마저 무디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은 왜 매년 ‘휴먼다큐 사랑’이 시청자들의 큰 공감을 얻고 있는지를 뒤집어 말해준다. 그것은 이 진짜 다큐멘터리에는 진정성이라는 다큐의 진짜 재료의 맛 이외에는 그 어떤 조미료의 맛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휴먼다큐 사랑’이 포착하는 것은 ‘평범함의 가치’다. 그리고 그 가치는 바로 가족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피어난다. ‘휴먼다큐 사랑’의 주인공들이 거의 몸이 불편하거나 죽음을 앞두고 있거나 한 것은 바로 이 ‘평범함의 가치’를 알려주기 위함이다. 병 없이 살아간다는 것, 장애 없이 살아간다는 것,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누군가를 키운다는 것 같은 일상의 평범함은, 그들에게는 그 자체로 비범함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돌잔치를 함께 하는 것은 평범한 일이지만 이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소봉씨에게는 비범한 일이 되며, 결혼하고 아기를 낳고 가정을 이루는 것은 평범한 일이지만, 눈 먼 아내와 점점 눈이 멀어가는 남편에게는 비범한 일이 된다. 극한의 병 앞에서는 밥 한 끼 먹는 일, 아니 그 고통을 바라보는 일조차 힘겨운 일이 된다.

하지만 평범함조차 비범한 일이 되어버리는 갑작스런 상황 속에서도 놀라운 것은 가족의 사랑이 가진 힘이다. 죽음을 앞둔 상황이지만 소봉씨에게 그 힘겨운 투병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딸 소윤이라는 존재이며, 저 자신 또한 암이지만 그 암을 마치 감기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황정희씨의 힘은 똑같이 투병생활을 하게 된 성윤이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눈 먼 아내와 자신마저 눈이 멀어가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경호씨와 영미씨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힘은 다름 아닌 이제 두 살 된 신비가 있기 때문이다.

‘휴먼다큐 사랑’은 이 가족들이 만들어내는 기적 같은 사랑을 보여주면서 그것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원천적인 힘이라는 걸 담담하게 전한다. 세상은 점점 살풍경이 되어가고 있고 그 속에서 점점 메말라 가는 사람들은 삶의 목표를 자꾸만 욕망으로 덧씌운다. TV가 반영해 보여주는 것들은 그 욕망들이 점점 강한 자극으로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가끔씩 다큐의 리얼리티적 요소를 통한 자극으로만 점철되어오던 리얼 버라이어티쇼에서 어떤 순간적인 진정성을 목도했을 때, 때아닌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휴먼다큐 사랑’은 모두가 더 큰 욕망으로만 달려가는 이 세태에 좀더 간단하고 평범한 진리를 끄집어내는 것만으로 마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다. 그 진리란 사람은 서로 기대고 등을 대줄 때 본질에 가까워지고 아름답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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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까지 나눈 그들, 가족

제 자식의 고통을 보는 부모의 마음이 어떨까. 황정희씨를 통해 전해지는 그 강도는 임파선 암의 고통쯤은 너끈히 이겨낼 정도의 고통이라는 것이다. 자신도 암 판정을 받았지만 막둥이 성윤이의 소아암 앞에서는 더 강해질 수밖에 없었던 황정희씨의 사연을 다룬 ‘휴먼다큐 사랑 - 울보엄마’편은 가족이라는 상투적이 되어버린 단어의 의미를 다시금 새겨주는 시간을 제공해주었다.

가족이라 해도 상대방의 아픔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운 법. 그것이 이제 여덟 살인 어린 성윤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먼저 암을 알아버린 엄마의 아픔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 것은 성윤이 자신마저 그 항암치료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구토가 나는 독한 약 기운 속에서 서로의 대머리를 ‘그들만의 비밀’로 여기게 된 성윤이는 타인이 찾아올 때면 들킬세라 “빨리 모자 써!”하고 엄마를 다그친다.

이로써 대머리는 창피한 그 어떤 것이 아닌 그들만이 통하는 동일한 경험으로서 간직된다. 같은 나이의 친구들이 유치원을 다니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사이에 그들과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성윤이에게 엄마는 같은 존재로서 유일무이한 친구가 된다. 엄마는 그 자체로서 닮음과 통함, 그리고 똑같음으로 연결되는 성윤이에게는 가장 큰 위안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아빠마저 머리를 빡빡 밀고 집에 온 날, 성윤이가 한 기쁜 두 마디 말이 그걸 말해준다. “깎았어. 똑같네.”

엄마가 울보엄마가 된 것은 자신의 고통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윤이의 고통을 혹 자신이 준 것이 아닌가하는 자책감이며, 자신의 암 때문에 그 고통을 뒤늦게 알아버린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항암치료를 받는 어린 성윤이의 모습과 그로 인해 빼앗겨버린 성윤이의 일상 때문이기도 하다. 울보엄마는 유치원 졸업식에서 성윤이의 빈자리를 보며 눈물을 참지 못하고, 초등학교 입학을 유예시키는 자리에서는 말을 잇지 못한다. 성윤이의 일상 곳곳에서 눈물을 흘리는 엄마는 정작 자신의 몸을 위해서는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 그녀가 그 와중에도 돈을 벌기 위해 뛰는 모습은 “나는 어찌 되도 좋습니다”라는 말이 그저 하는 말이 아님을 드러낸다.

그래서 이 다큐에서는 똑같이 암 투병 중인 모자이지만 성윤이의 투병기에 더 초점이 맞춰진다. 그것은 울보엄마의 마음이나 다큐를 제작하는 PD나 그 다큐를 바라보는 모든 시청자들의 마음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윤이가 고통에서 해방되어 챔피언이 되는 그 순간만이 울보엄마의 진짜 고통(암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닌)을 없애줄 것이기 때문이다. 울보엄마가 울음을 그치고 웃음을 터뜨리는 이유는 이제 성윤이가 그 첫 번째 챔피언이 되는 길을 막 밟았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엄마가 성공적으로 방사선 치료까지를 끝낼 수 있었던 진짜 힘은 바로 이 자신의 고통마저 마취시켜버리는(?) 성윤이의 아픔과 그를 극복해나가는 아이의 기특한 모습 때문이 아니었던가.

대머리에서 이제 막 머리가 제법 자란 엄마의 모습과 1차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앞으로도 꽤 많은 시간들이 여전히 필요하지만) 성윤이의 모습이 또 점점 비슷해져가기를 바라는 건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분명 또 그렇게 닮아갈 것이고 통할 것이며 똑같아질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닮아가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살 수 있는 것, 그것이 가족의 힘이 아닌가. 나란히 대머리로 선 가족의 모습은 차츰 머리가 자란 보통 사람들의 모습으로 또 닮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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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알기나 했을까. 감동이 자극보다 더 강하다는 걸. 그 반가운 사실을 알려준 첫 번째 주인공은 이미 종영한 ‘고맙습니다’란 드라마다. 에이즈에 감염된 딸과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미혼모가 세상의 편견을 진심으로서 넘어서고, 그 진심이 에이즈보다 더 강력하게 주변으로 전염된다는 훈훈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어서 감동을 전해준 두 번째 주인공, 바로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5회에 걸쳐 연속으로 꾸며진 ‘휴먼다큐 사랑’이다. 그 중에서도 2회로 방영된 ‘안녕 아빠’편은 전 국민을 감동으로 몰아넣었다. 그것은 값싼 눈물이 아닌, 값진 감동이었다. 가족과 사별하는 이야기 앞에 어찌 눈물이 없겠냐마는 이준호씨의 이야기를 보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된 데는 무언가 다른 이유도 있을 법하다.

‘고맙습니다’가 감동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이 작은 미혼모 가족의 바람이 거창한 것이 아닌, 그저 함께 그 곳에서 살 수 있게 해달라는 소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고맙다고 표현하는 일 역시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호의였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부분에서 ‘이상하다, 뭐가 고맙지?’하고 고개를 갸웃거렸을 정도의 작은 호의들. 그런데 ‘휴먼다큐 사랑’을 본 시청자라면 그것이 왜 고마운 지를 알게됐을 것이다.

‘휴먼다큐 사랑’의 다섯 편 속의 주인공들이 모두 바라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것들이 아니다. 그저 아이를 낳고 싶다는 것이며(엄지공주, 엄마가 되고 싶어요 편), 물질이 아닌 자신들의 진짜 사랑을 아이에게 주고 싶다는 것이고(벌랏마을 선우네 편) 가족들과 좀더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것이며(안녕 아빠), 아이의 돌잔치를 보고 싶다(엄마의 약속 편)는 것이다. 놀랍지만 이것이 그들이 바라는 전부이다.

하지만 그 간단한 것들을 막는 것들이 존재한다. 무한정 지속될 것만 같던 삶에 장애와 병 같은 것이 들어오자 삶은 더 진지해진다. 그리고 거기서 깨닫게 되는 사실 하나. 우리가 행복을 위해 원했던 것은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고 일상적이고 작은 사랑이었다는 것이다. 단지 그것이 작게 보였고, 그래서 무시하거나 실천하지 않았던 것뿐이라는 사실이다.

‘안녕 아빠’ 편에서 아빠가 무한히 반복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미안하다, 사랑해, 고마워” 같은 대단할 것 없지만 평상시 잘 쓰지 않았던 말들이다. 그것이 이제 한 달도 채 생이 남지 않은 아빠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 그 진정한 의미들은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아빠의 옆을 수호천사처럼 지키고 결국 가슴으로 아빠를 떠나보낸 은희씨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지금처럼 아빠를 희생하는 마음으로 사랑했더라면 10년 동안 살아 온 결혼생활이 참 행복했을 거란 생각을 해요. 왜 내가 진작 이런 맘으로 남편을 대하지 못했을까. 지금은 저의 모든 것을 다해서 아빠를 사랑하고 있어요.”

이 감동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질문으로 다가온다. 드라마 ‘고맙습니다’를 통해서, ‘휴먼다큐 사랑’을 통해서 받은 감동의 실체는 이렇게 우리 삶의 주변까지 둘러보게 만든다. 자신을 그 상황 속에 감정이입시키며 눈물을 흘린 사람이라면 먼저 일상이 되어버린 자신의 사랑 표현과 점점 서먹해져 가는 관계 같은 것들을 돌아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TV 속 자극적인 것들에 익숙해진 자신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사실 자신 역시 감동에 목말라하고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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