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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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우드의 잇단 원대복귀, 왜?

D.H.Jung 2007. 2. 4.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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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편 아닌 원류 선택한 ‘록키 발보아’가 시사하는 것

전 세계적인 배급의 파이프 라인을 갖고 수시로 자국의 영화를 쏟아내는 헐리우드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 하지만 헐리 갖고 있던 컨텐츠의 색채는 점점 옅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세계화된 시장 속에서 자국만의 색채를 갖는 컨텐츠의 의미가 그만큼 퇴색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헐리우드는 전 세계의 영화에 늘 촉수를 열어두고 다양한 컨텐츠와 소재들을 자국의 살로 만드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그것은 상업적으로는 맞는 선택이다. 하지만 영화가 어디 상업적인 요소만 있을까. 영화는 동시에 문화를 담고 있고 그러기에 미국을 대표하는 헐리우드만이 가진 색채가 옅어지는 건 또한 저들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속편이 난무하는 헐리우드 영화들 속에서 원류로 회귀하는 하나의 흐름이 형성되는 이유가 아닐까. 최근 육순의 노익장을 과시하는 실버스타 스탤론의 ‘록키 발보아’는 그 헐리우드가 처한 상황을 보여주는 영화다.

이른바 헐리우드를 대표하던 일련의 헐리우드표 대작들은 2편, 3편의 속편들을 쏟아내다가 최근에는 모두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 그런 현상은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두드러진다. ‘배트맨’은 ‘배트맨 비긴스’로 돌아갔고, ‘수퍼맨’은 ‘수퍼맨 리턴즈’로 돌아왔다. ‘스타워즈 시리즈’는 다시 처음부터 다시 제작되고 있고, ‘007 시리즈’는 다시 원류인 ‘카지노 로열’로 돌아왔다. ‘록키 발보아’는 물론 나이든 록키의 링에서의 한판 승부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 내용은 ‘록키’ 원류로 돌아간 그대로다.

‘록키’가 실버스타 스탤론의 입지를 마련해준 영화가 된 것은 그것이 단지 헐리우드식 복싱 액션을 담는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록키’는 아메리칸 드림을 다룬 영화다. 누구든 기회를 가질 수 있고 그 기회를 잡아 성공할 수 있다는 이 단순명제가 관객들을 사로잡은 요소다. 영화는 따라서 반 이상이 저자거리를 빈둥빈둥 돌아다니는 록키의 모습에 할애한다. 그런 록키가 링에서의 한판 승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면서 트레이닝에 들어가고, 장중한 음악과 함께 계단을 뛰어오르며 손을 치켜올리는 장면에서 비로소 권투영화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이것은 새로 만들어진 ‘록키 발보아’와 똑같은 구조이다. ‘록키 발보아’ 역시 영화의 반을 이제는 퇴역해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록키의 생활에 할애한다.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고 레스토랑을 찾는 팬들 앞에서 록키는 수없이 무용담을 풀어놓지만 어쩐지 자꾸 퇴물로 취급되는 자신을 참을 수 없게 된다. 아들은 자꾸 ‘과거’에만 집착하는 아버지가 영 안쓰럽다. 즉 영광은 껍데기만 남은 허울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육순을 넘은 실버스타 스탤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은 언제든 저 링 위에서 건재함을 과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록키’에서 젊은 록키가 저자거리에 떠돌던 3류 인생에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링 위에 섰던 것처럼, ‘록키 발보아’의 노익장 록키 역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링 위에 선다. 무엇을 위해서? 반대편에 선 메이슨 딕슨은 록키가 싸우고 있는 대상을 정확히 보여준다. 록키는 과거를 지나간 퇴물로 여기는 젊은이들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는 중이다. 링으로 올라갈 때 흘러나오는 강렬한 랩뮤직과 시나트라의 곡이 부딪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록키’와 ‘록키 발보아’의 미덕은 그것이 헐리우드식 승리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래서 영화는 둘 다 승리가 아닌 ‘끝까지 버티는 모습’으로 만족한다. 그것이 더 리얼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 자체가 애초부터 하려던 이야기는 링 위에 있었던 게 아니라 링 밖에 있었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록키 발보아’라는 영화가 보여주는 모습이, 마치 비대해졌지만 자국의 문화 컨텐츠를 새롭게 보여주기보다는 과거의 영광을 리메이크하는 경향을 보이는 헐리우드를 닮았다는 점이다. 리메이크는 상업적인 선택이지만 거기에 과거로의 향수가 달라붙으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것은 또한 2탄, 3탄 무한히 이어지는 재탕이 본질(원작의 힘)을 흐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반증한다. 오락적인 재미만으로는 ‘그 얘기가 그 얘기’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는 이야기. 본류로 돌아가, “나 아직 건재해”라고 외치는 ‘록키 발보아’ 아니, 헐리우드의 일면에서 재탕 삼탕으로 얻으려는 상업적 선택이 가진 딜레마를 엿보게 된다. 이것은 헐리우드뿐만 아니라 늘 속편으로 유혹 받는 우리네 영화계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